박제가(朴齊家.1750.영조 26∼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 밀양(密陽). 자 차수(次修)ㆍ재선(在先)ㆍ수기(修其). 호 초정(楚亭)ㆍ정유(貞)ㆍ위항도인(葦杭道人). 19세 때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1776년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ㆍ이서구(李書九) 등과 합작한 시집 <건연집(巾衍集)>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조선 시문 사대가(詩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778년(정조 2)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ㆍ반정균(潘庭筠) 등에게 새 학문을 배우고 귀국하여 <북학의(北學議)> '내외편(內外篇)'을 저술, 이듬해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고, 그 뒤 진하사(進賀使)ㆍ동지사(冬至使)를 수행, 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1794년 춘당대(春塘臺) 무과에 장원하여 오위장(五衛將)에 오르고, 이듬해 영평현감(永平縣監)으로 나갔다. 1798년 <북학의> 진소본(進疏本)을 작성하고, 1801년(순조 1) 사은사를 수행, 네 번째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동남성문(東南城門)의 흉서사건(凶書事件)에 사돈 윤가기(尹可基)가 주모자로 지목되어 연좌로 종성(鐘城)에 유배되었다가 4년만에 풀려났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이라는 현실을 인정한 기반 위에서 상업ㆍ수공업ㆍ농업 전반의 생산력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국가경제체제를 재조(再造)할 것을 주장했다. 【출신과 활동】 본관은 밀양. 자는 차수(次修)ㆍ재선(在先)ㆍ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ㆍ정유(貞)ㆍ위항도인(葦杭道人). 승지 평(坪)의 서자이다. 11세에 아버지를 잃은 뒤 거처를 자주 옮겨다니며 어머니가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박지원(朴趾源)ㆍ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 등 북학파들과 사귀면서 학문의 본령을 경제지지(經濟之志)에 두고 활동했다. 이러한 뜻은 1778년 이덕무와 함께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는 것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당시 중국은 건륭제(乾隆帝)가 통치하던 문화의 전성기였을 뿐 아니라 <사고전서(四庫全書)> 등의 편찬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때였다. 여기서 그는 기균(紀畇)ㆍ이조원(李調元)ㆍ반정균(潘庭筠)ㆍ이정원(李鼎元)ㆍ포자경(鮑紫卿) 등 청을 대표하던 석학들과 교류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선진문물에 감명을 받아 여러 가지 선진기술과 도구를 배우고 연구함으로써 앞으로의 학문적 기초를 세웠다. 중국에서 돌아온 뒤 거기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해 <북학의(北學議)> 내편ㆍ외편을 썼다. 내편에서는 생활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ㆍ사회 제도의 모순점과 개혁방안을 다루었다. 이 무렵 정조가 임진ㆍ병자의 양란 이후 중세적 신분질서 내 서얼층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자 1777년 3월 서얼허통절목(庶孼許通節目)을 공포하고, 1779년 3월 규장각에 검서관직(檢書官職)을 설치해 서얼 출신들이 하급관리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때 박제가는 이덕무ㆍ유득공ㆍ서이수(徐理修) 등 서얼 출신 학자들과 더불어 초대 검서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13년간 규장각의 여러 벼슬을 지내면서 왕명을 받아 많은 책을 교정·간행하는 한편 국내외의 서적과 저명한 학자들을 접하면서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1786년 정조가 왕명으로 관리들에게 시폐(時弊)를 시정할 <구폐책(救弊策)>을 올리게 했을 때, 전설서(典設署) 별제(別提)의 직에 있으면서 <병오소회(丙午所懷)>를 제출했다. 여기서 그는 상공업 장려, 신분차별 타파, 해외통상, 서양인 선교사의 초청, 과학기술교육의 진흥 등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당시 지배층의 이해와는 상반된 것이었으므로 묵살되었으며, 오히려 당시의 심한 당쟁에 휘말려 비판을 받고 급기야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사상정화운동에 걸려 규제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외국학자와의 교류를 제한받았으며 서적반입도 금지당했다. 1793년에는 승정원으로부터 내각관문(內閣關文)을 받고 '비옥희음송'(比屋希音頌)이라는 비속한 문체를 쓰는 데 대한 자송문(自訟文)을 제출할 것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정조의 후원 아래 1790년 5월 건륭제의 팔순절에 정사(正使) 황인점(黃仁點), 부사 서호수(徐浩修) 등을 따라 유득공과 함께 2번째 연행길에 올랐다. 돌아오는 도중 원자(元子: 뒤의 순조)의 탄생을 축하해준 청 황제의 호의에 보답하고자 한 정조의 명으로 정3품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임시로 임명되어 다시 연경에 다녀왔다. 1798년 부여현감이 되었으며, 1794년 2월 춘당대무과(春塘臺武科)에 장원해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가 영평현령으로 옮겼다. 1798년 영조가 적전(籍田)에 친경(親耕)한 지 60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정조가 널리 농서를 구하자, <북학의>의 내용을 골자로 한 <응지농정소(應旨農政疏)>를 올렸다. <소진본북학의(疏進本北學議)>는 이때 작성된 것이다. 1801년(순조 1) 사은사 윤행임(尹行恁)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4번째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동남성문 흉서사건의 주모자인 사돈 윤가기(尹可基) 사건에 휘말려 종성에 유배되었다. 1805년에 풀려났으나 곧 죽었다. 그가 죽은 연대에 관해서는 1805년과 1815년 설이 있다. 【실학사상】 그는 당시의 공리공담을 일삼던 주자학적 사상계와 풍수도참설에 비판적이었다. 이에 기초해 존명(尊明) 사대주의자들이 제기한 북벌론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는 한편 청의 문물을 도입할 것을 주장했으며, 자기의 사회적 처지와 관련해 봉건적 신분제를 반대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상 틀에서 국부(國富)를 창출하기 위한 방안으로 상공업진흥론과 농업진흥론을 제기했다. 먼저 북학파 계열의 실학자로서 선진적인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 상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상업진흥론을 적극 주장했다. 이는 당시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천시하고 위험시하던 사대부들과는 반대되는 견해였다. 더욱이 상공업 육성에 장애가 되는 양반들을 도태시키기 위해 봉건적인 문물제도와 과거제도를 타파할 것도 주장했다.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 ① 교통기관을 발달시킬 것(用車論), ② 악화주조(惡貨鑄造)를 금지하고 화폐의 질을 높일 것, ③ 은의 해외유출과 중국상품의 유입을 철저히 금지할 것, ④ 밀무역(密貿易)을 양성화시킬 것, ⑤ 은을 축적할 것, ⑥ 국내시장을 확보할 것 등을 제시했다. 한편 국가의 부력이나 전경제기구 내에서 농업경제의 위치를 규정하고 경제기구 전반의 원활한 운영에 농업경제의 안정이 달려 있다고 보았다. 동시에 농업경영의 합리적인 개선을 통해 생산성을 높인다면 국가재정이나 경제질서 전반의 안정을 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의 농업진흥론은 농업문제 해결을 다른 산업분야와 연결시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즉 농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업이나 수공업도 아울러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업의 유통으로 농산물 판매가 원활해지고 수공업의 발달로 낙후된 농기구를 개량한다면 농업의 합리적 경영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농민경제와 국가재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물자유통과 물가 평준화를 기하기 위해 수레를 보급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의 반영이었다. 이와 함께 유생(儒生)도 노동을 하도록 하고 유통경제 부문인 상업활동에 종사하게 함으로써 일하지 않는 노동력을 없애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방안은 토지소유관계의 측면에서보다는, 당시 사회·경제 실태 위에서 농업을 합리적으로 경영함으로써 농업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었다. 그는 농지의 광점(廣占)을 탓할 것이 아니라 경영의 개선과 합리화·집약화를 통해 수익을 늘리는 것, 즉 소규모의 농지에서 최대의 수익을 올리는 것을 농업경영의 최대목표로 삼았다. 아울러 농업의 상업화도 구상하는 동시에 농업경영과 유통경제의 관련을 매우 강조했다. 또한 경영합리화의 기초작업으로서 농법개량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합리적인 경종(耕種)을 위해 전무(田畝) 제도를 개선하고, 시비(施肥)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취분법(取糞法)을 개량하며, 노동력을 절약하기 위해 농구를 개량하는 등이 그것이었다. 이를 효율적으로 보급시키고자 모범농장이라 할 수 있는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시ㆍ그림ㆍ글씨에도 뛰어난 재질을 보여 1776년 이덕무ㆍ유득공ㆍ이서구 등과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어 문명을 청에까지 떨쳤으며, 청대 <사고전서> 계열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에 처음으로 대련형식(對聯形式)을 도입했다. 글씨는 추사체의 형성에 선구적 구실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림은 간결한 필치와 맑고 옅은 채색에 운치와 문기(文氣)가 짙게 풍기는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풍의 산수화ㆍ인물화와 생동감이 넘치는 꿩ㆍ물고기 등의 그림을 잘 그렸다. 묘는 경기도 광주 암현(庵峴)에 있다. 【시집】<건연집(巾衍集)>(공동작) 【그림】<대련글씨> <시고(詩稿)> <목우도(牧牛圖)> <의암관수도(倚巖觀水圖)> <어락도(魚樂圖)> <야치도(野稚圖)> 【저서】<북학의(北學議)> <명농초고(明農草藁)> <정유시고(貞詩稿)> <유정집(亭集)> <정유집 [출처] 密陽朴門(밀양박문)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