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견문기
어릴적 책에서 보는 사막의 긴 낙타 행렬이 신비했다. 왜 저렇게 어려운 길을 사람들은 두려움을 안고 때로는 목숨을 걸며 낙타를 몰고 다닐까? 라는 생각도 했었다.
동 서양의 특산품을 싣고 사막을 거쳐 서역과 동방으로 가기 위한 긴 행열이었다. 각 지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공급하므로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꿈을 가진 행렬이었다.
그 길을 후세 사람들은 실크로드라 말하고 금은 보화가 지나가는 길이니 길목마다 세금도 내야 하고 때로는 도둑도 만나고 가장 힘든 것은 넓은 사막을 더위와 물과 싸우며 오직 별자리를 보며 이동해야하는 뒷 이야기가 우리들에게 전설로 전해지기도 한 길이었다.
우리 일행이 실크로드를 가게 된 것은 사진 작가인 친구가 그곳을 담아 와 사진전을 여는 것을 보고 매력을 느꼈다, 그런데 늦은 나이에 개인 사업을 하다 자유인이 된 또 다른 친구들이 해외 여행을 하자는 성화에 결정한 일이기도 한데 여행지를 정하는 것이 문제였다. 중학교 친구 4명이 가기로 했는데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어려움이지만 그동안 각자 여행을 많이 다녀서 안 가본 곳을 정한다는 것이 큰 어려움이었다.
내가 우르무치와 키르기스스탄을 추천했다. 산야가 아름다운 곳이다.그러나 키르기스스탄은 아직 여행 상품이 개발 되어 있지 않아 결국 우르무치로 결정을 하게 된 것인데. 국내 항공기 중 유일하게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국제공항이 있었다. 우르무치는 아름다운 목장이란 뜻의 몽골어로 징키스칸이 이곳을 지나가다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의 신장성에 속하는 곳이기도 하다. 여행지를 결정하고 여행사를 찾았다. 목적지를 알리고 여행상품을 고르는데 우리나라보다 더위가 심한 그곳에 가려는 여행객이 없어 모객에 실패를 하였다.
결국 여행일자를 조정하고 최소 인원 10명이 되어야 떠난다는데 한 여행사에서 모집한 인원으로는 떠날 수가 없어 두 여행사에서 모집한 여행객을 합해 18명이 떠나기로 결정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인천공항을 저녁 7시 40분에 이륙하여 5시간 30분만에 우르무치 공항에 도착하니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올 들어 처음으로 내리는 비라고 한다. 우르므치의 년 강우량은 이지역 중에서도 많이 오는 편인데 일 년에 80mm 정도가 내린다고 한다 . 우리나라는 1200mm정도가 내리니 비교해 보면 얼마나 적은 양이 내리는지 알 수가 있다. 이곳에서 비가 내려 아스팔트 도로 위로 물이 흐를 정도면 우리나라에서는 홍수에 가까운 강우라고 한다.
아무튼 첫 비를 몰고 온 이번 여행에 많은 기대를 하게 되었다.
공항에 새벽 1시 반에 도착했는데 우리와는 1시간의 시차이므로 우르므치에서는 12시 30분이다. 북경과 같은 시간대이지만 우르므치는 서쪽 끝이여서 해가 뜨고 지는 것에서 많은 시차를 느껴야 했다. 아침 6시쯤 되니 동녘이 훤해 온다.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길에 이동하는 차량도 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통행도 없다. 이렇게 게으러서 어찌 먹고 사나 중국의 만만디 현상인가 궁금해 하며 식당으로 가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한국인의 조급함이 나타난 것이다.
이곳 사람들의 일상은 10시에 출근하여 업무가 시작되고 밤 8시에 업무가 끝이라고 한다. 해는 밤 11시가 되어야 지고 12시가 되어야 컴컴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도착한 12시 30분은 새벽이 아니고 초 저녁이었던 것이다.
우르무치는 신장성의 성도이다. 우리가 헛갈리는 것은 이곳을 신장성이라고 하기도 하고 신강성이라 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아무튼 신장성과 신강성은 같은 뜻이며 발음에 따라 다르게 부르고 있다 하는데, 우리에게는 위그르족이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기사를 신문 방송을 통해 알았기 때문에 이 곳이 분쟁지역이고 여행하는데 위험지역이라는 것을 알고 왔지만 입국에서 여관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음식점에 들어가는 것 또 기차를 탈 때도 검문 검색이 짜증이 날 정도였다. 강압적인 그들의 태도도 불쾌했지만 순간순간 이루어지는 그런 행위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중국의 한족으로 보면 치안을 확보하기 위한 필요한 조치라고 하겠지만 위그르 족의 입장에서 보면 한족은 침략자였다. 모택동이 혁명을 이르키던 시절 신장성 지하에 기름이 많이 매장 되어 있다는 정보를 알고 군대를 보내 접수하고 이곳에 추가로 여군을 보내 결혼을 시켜 그곳에 정착시켰다. 지금은 신장성 인구의 80%가 한족이며 이들 숫자에 밀려 토착민인 위그르 족은 열악한 환경에서 포도와 대추나무 그리고 목화를 주로 재배하며 연명하고 있으니 독립을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중국의 소수민족 중에서 위그르족과 티벳트인들이 중국 지도자의 머릿 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제일 어려운 것은 마실 물을 구하는 일이다. 그리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사막이다. 간간히 오아시스처럼 물기가 있어 푸른 초원지대를 지나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이 이어지는 것이 사막이었다.
사막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만년설이 덮여 있는 천산산맥뿐이다. 옛날 실크로드를 가는 사람들이 낮에는 천산산맥을 보고 밤에는 별자리를 보면서 다녔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생명의 원천수를 찾아
우루무치 시에서 동북쪽에 있는 천산 산맥에 호수가 있다. 해발 1910m 이다. 길이는 3,3km이고 폭은 1km 정도가 된다. 호수의 최고 깊이는 105m정도가 되며 이 곳에 만년설이 녹아 흘러 들어 호수가 되었다. 우르무치가 해발 900m 정도이니 갑자기 1000m를 롤러스케이트 타듯 버스를 타고 올라 온 것이다. 이 물이 우르무치시 300만 인구의 식수원이며 함께 살고 있는 짐승이 먹는 물이며 시가지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들의 생명수이고 농촌지역 작물들이 커가는 물이기도 하다. 나무 하나 하나에 링겔호스처럼 물을 공급하는 호스가 설치되어 있다. 천산산맥에는 200여개의 물을 끌어가는 호수가 있고 이곳에서 터널을 만들어 물을 끌어 가서 살고 있었다.
지금이야 양수기 펌프가 있어 가다가 조금 높은 지역이 오면 펌핑해서 저장해서 내려 보내면 되는 일이지만 옛날 그런 양수기가 발명되기 전이기 때문에 어찌했을까 궁금해진다. 물을 끌고 갈 수 있는 지역까지만 사람이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은 관계 배수 시설에 의해서 지상으로 끌고 갈 수가 없는 상항이었다. 모래가 바람에 날려 지표가 항상 변했으니 그것이 첫번째 문제이고 둘째가 지상으로 끌고 가려면 태양열이 강해 물이 증발 되기 때문에 현지에서 필요한 물을 공급 받기가 불가능한 일이이었다. 그래서 지하 10m 깊이로 굴을 파서 물을 끌어가고 있었다.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굴 뚫는 기술이 발달하여야 했고 측량 또한 발전이 있어야 했다. 수로를 뚫은 현장을 답사해 보니 원시적인 방법이었지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먼저 10m 깊이로 수직 갱을 뚫었다. 그리고 그곳에 측량의 기준점을 정해 놓고 방향을 잡고 지하 10m에서 작업하는 인부에게 정보를 알려 주었다. 이런 식으로 수직갱을 10m거리로 파서 굴을 이어가는 방법이었다.
당시는 터널 기술이 발전하지 않아 재래식으로 파야 했으니까 어릴적 보아온 토끼굴 뚫는 수준이었다. 굴의 크기는 사람이 걸어다닐 정도였다.
10m의 깊이의 땅이었지만 비가 안 와 지하수가 없으므로 땅이 견고했다. 지금처럼 라이닝으로 터널 내부를 보강하는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노출되어 공기와 접하면 풍화작용이 일어나는데 낙반현상은 안 오는지 염려가 되었다.
터널 내부에 물이 가득 차서 흐르면 세굴현상이 일어날텐데 그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그리고 구배가 역구배가 될 경우는 어떻게 물을 흘러가게 하여 목적지까지 물을 보내는지 터널을 전공한 나에게는 의심 투성이었다.
중국의 유산 중 불가사의 한 것이 만리장성이라 하는데 만리장성은 단순히 돌을 가지고 성을 쌓았을 뿐이며 동원된 인원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이 되지만 이곳 천지에서 사람이 사는 곳까지 물을 가지고 가는 것은 발전된 수리학 기술과 토목기술이 접목시키지 않으면 물가능한 일로 만리장성보다 더 난이도가 높은 유산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천산산맥에서 흘러내려오는 빙하수가 사막지하로 사라지자 고대부터 이 곳 사람들은 사막밑으로 지하수로를 건설한 것이다. 작은 것은 수km에서 긴것은 수백km까지 수백 곳의 지하수로가 있었다. 총 연장만 5천km가 넘는다고 알려진다. 이 지하수로의 역사는 거의 2천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청나라 때 아편전쟁을 촉발시킨 임칙서라는 사람이 이곳에 좌천되어 대규모 카레즈 공사를 진행해 지금까지 주민들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카레즈는 원래 카나트로 불린다. 건조지대에서 지하수를 취수하는 장치의 한가지로 고대 이란에서 처음 발명된 것으로 전해진다.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등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카나트라는 명칭은 이란에서 사용되고, 아프카니스탄에서는 카레즈, 시리아·북아프리카에서는 호가라라고 부른다.
유적지
이곳은 동서양의 문물이 교류하던 곳이었다. 시장이 형성되고 돈이 돌고 있었다. 지배자들은 시장을 만들고 거래를 도우며 상인들의 생명을 지켜 주면서 세금을 걷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것이고 돈을 탐낸 도적때들은 곳곳에 아지트를 만들고 강도 짓을 했을 것이다. 위함힌 길이지만 이익이 많이 남는 장사이니 많은 사람들이 도전을 하게 되고 때로는 돌아가는 길에 병을 얻어 고향을 그리며 죽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무덤이 많고 미라가 박물관에 많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스님들이 도를 닦는다고 토굴을 파고 자신의 도력을 키우며 지나다니는 행상들의 도움으로 살았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방식이다. 불확실한 현실에 불안을 느끼니 절대자를 믿게 되고 그 속에서 마음의 위안을 찾게 되니 지금의 형태로 보면 종교의 프렌차이즈 같은 모습이다. 긴 낙타 행렬이 이정표를 삼는 것은 천산산맥의 만년설과 밤에 나타나는 별자리여서 그곳을 의지하며 걷다가 오하시스를 만나야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위험을 건 장사였는데 낙타를 몰고 다니며 장사하는 사람을 대상이라 하고 낙타 100마리 이상과 참여 인원이 50명 이상인 경우를 거상이라고 했다 한다
햇볕은 따갑고 모래바람은 끝 없이 불어오고 가도가도 지평선만 이어지는사막인데 당시 실크로드로 다녔던 사람과 낙타의 고생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가다가 보면 불가사의한 곳도 있다. 많은 수도승의 기도처인 막고굴은 숫자와 규모가 대단했으며 결고은 모래로 만들어진 1650m의 명사산은 심한 바람이 불면 산이 운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으며 지금은 여행객을 실은 긴 낙타 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다.
월아천은 명사산 앞에 초생달 모양의 작은 오아시스인데 남북 길이가 150m 폭이 50m정도의 작은 연못이다. 깊은 곳이 5m 정도인데 물이 맑고 마르지 않아 향어가 자라고 있었다.
월아천의 발원지는 돈황 남쪽에 솟아 있는 곤륜산맥의 눈 녹은 물이 지하로 흘러 자갈층을 지나며 비교적 저지대인 이곳에서 솟아나는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지하로 내려 오는 물줄기가 끊겨 인공적으로 물을 공급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바람이 많이 불어도 모래가 이 오아시스를 덮지 않으며 주변에는 칠성초와 대추나무가 심어져 자라고 이 곳에 도교사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수천년 이어오면서 계속되고 사막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멋진 풍경이었다. 이런 월아천은 사막의 오아시스가 무엇인지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일몰 때 명사산에서 바라보면 정말 예술이었다.
그 옛날 대상들이 얼마나 많이 이곳을 거쳐 가며 생명을 이어갔을지 상상해 본다.
중국의 저력
신장성 투르판에는 중국의 3대 역사적 사업 중 한 곳이 위치해 있다. 만리장성과 경항운하, 그리고 투르판 지하수로다.
실크로드의 중심지 중국 신장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서안과 돈황, 우루무치를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새롭게 건설되고 나아가 중앙아시아까지 도로가 연결되면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실크로드를 관광자원화 하면서 전세계 관광객이 몰려오고 있다.
과거 모택동이 중국을 통일할 때 신장성에 욕심을 두었다, 중국에서 석유 매장량이 제일 많기 때문이다. 인민군을 파견하여 이곳을 정복하고 여군들을 대량으로 파견하여 남자 군인과 결혼하여 이곳에서 정착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신장성 인구의 80%가 한족이 차지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최근 들어 이곳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도로건설과 함께 주변에 천문학적인 조림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최첨단 광케이블도 매설하며 전기를 생산하는 풍차 단지 규모가 엄청나게 키워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가히 90년대부터 진행된 서부개발이 점차 가시화되고 있는 셈이다. 이로 인해 대부분 사막으로 가득한 이 곳에 사람들이 이주하기 위한 신도시들이 속속 건설되고 있다. 대표적인 도시가 하미다
엣날 거상들이 낙타등에 싣고 가던 물건들이 츄레라에 탑을 씨워 개조한 대형 트럭이 운전기사 2명이 교대로 운전 하며 4차선을 달리고 있는데 현재 도로로는 다 흡수하지 못해 8차선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고속철도도 200km/hr 그리고 300km/hr 두 형태로 다니는 고속철도가 운영되고 있었다.
중국정부가 서부개발사업을 진행하면서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은 인프라 구축이다.
신장 곳곳을 도로와 철도로 거미줄처럼 연결하면서 점차 고대 실크로드가 전세계인에게 열리고 있는 것이다.
고대 실크로드 길인 서안에서 돈황을 거쳐 우루무치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지금까지 건설이 진행중이다. 당초 2차선 낡은 길을 4차선 고속도로로 새롭게 만들었고 곧 이어 8차선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 신장성 곳곳에 매장된 석유와 지상에 바로 채취하는 석탄 등을 이송하기 위한 도로건설도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에 최근 관광산업까지 활성화되면서 곳곳에 숨어있던 절경과 역사유적들이 도로로 연결되고 있다.
이들은 사막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종단하는 고속도로가 3개나 건설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 고속도로가 모래가 묻히지 않게 하기위해 도로변에는 거대한 방사시설이 도로와 함께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중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번 기회에 신장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현대판 실크로드 사업도 본격화하고 있다.그동안 중동지역 정세가 불안하여 해상으로 운반하던 석유 운반이 중단 될 것에 대비한 정책이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과 중앙아시아 주변 7개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현대판 실크로드'를 구축한다. 고 한다.
이 사업의 핵심도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터키에 이르는 장거리 루트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 같은 물류망 정비를 통한 경제적 파급효과를 주변 지역으로 확산시킨다는 생각이다.
중국으로서는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진 중앙아시아 각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해 물류망을 연결시키는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신장성 대부분은 사막으로 가득하다. 우르무치에서 열차를 타고 밤을 세우며 11시간 반을 타고 가다 유점에서 내려 다시 돈황까지 3시간 반을 달려가도 사막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막 중간중간에 위치한 오아시스가 여행객들의 유일한 휴식처인 셈이다.
중국당국은 이 곳에 더 많은 사람을 이주시키고 사람이 살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나무심기 사업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천지에서 끌어 온 물이 호수로 연결되어 나무 하나 하나에 물을 공급하는 시설이 이채로웠다.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나무심기 사업에 열성인 것이다. 신장성 곳곳 어디서나 나무심기 사업을 볼수 있다.
이곳 지질은 지하자원이 넘쳐나는 축복받은 땅이지만 반대로 나무가 자라지 않는 저주받은 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나무를 심을 곳에는 일단 바닥을 1.5m이상 파내고 다른 지역에서 가지고 온 모래와 흙을 대신 채운 후 나무를 심는다. 이렇게 노력을 기울려도 60% 생존률을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여기에 섭씨 40도가 넘는 날씨도 나무생존에 악영향을 미친다. 땅위에 물들은 대부분 순식간에 증발해 버려 물공급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고대로부터 이 같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 왔다.
신장성을 둘어싸고 있는 천산산맥과 곤륜산맥, 파미르고원 등은 연중 얼음이 녹지않는 빙하가 있다. 여름철이면 빙하가 녹아 척박한 사막위에도 물이 흐른다. 하지만 얼마 못가 모두 사라져 버린다. 바로 땅 속으로 물을 끌어가는 방법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기원전부터 땅속으로 수로를 만들어 왔다. 수천년동안 건설된 지하수로는 미로처럼 얽혀있지만 이들의 생명수와도 같은 것이다. 일명 카레즈라고 불리는 이 지하수를 우물을 통해 지상으로 퍼올리고 있다.
나무심기 사업에도 바로 이 카레즈가 동원된다. 곳곳에 우물을 파고 물을 끌어올리고 나무사이사이로 고랑을 파 물을 공급한 것이다. 하지만 살인적인 날씨에 물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은 나무들은 죽어가기 마련, 절반가까이가 고사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생존률 90%이상을 자랑하는 새로운 나무심기 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하밀에서 빠리꿈 초원으로 가는 140km 중 70km의 길에 늘어선 나무들이다. 새롭게 도로를 포장하고 도로 양쪽으로는 막대한 양의 나무를 심어 놓았다. 대부분 고비사막인 곳에 나무가 제대로 자랄리 없겠지만 이들은 집념은 대단하다. 인근에 석유회사가 유전개발을 통해 번 막대한 이익금을 주변 나무심기에 투입한 것이다.
실제 도로 양쪽에는 최소 1m간격으로 10줄 이상의 나무가 수 십 킬로미터에 걸쳐 심어져 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에는 사막에서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해 나무 한그루 한그루 마다 1cm남짓한 고무호수가 연결돼 물을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최소로 따져보아도 이곳에 심은 나무만 수백만그루를 넘을 것이다. 나무를 연결한 고무호스의 길이도 상상을 초월한다.
대부분 사막에서도 생존이 강한 백양나무를 심는다. 전 세계적으로 별로 쓸모 없는 나무로 인식돼 가로수로 더 이상 심지 않는 종류지만 이곳에서는 생명수와 같은 수목이다.
이와 함께 고대 실크로드 도시 중간 중간에는 소규모 오아시스 도시들이 새롭게 건설되고 있다. 이 곳도 마찬가지다. 천산에서 내려오는 지하수를 끌어올려 새로운 개척지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대규모 한족이 새롭게 이주해오면서 토지를 무상으로 공급하기 위한 중국정부의 거대한 프로젝트인 셈이다.
앞으로 과학이 발전하여 인공강우를 내릴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신장성이야말로 또 한번의 기적과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 저주 받은 곳에서 축복받은 날도 머지않아 오리라고 생각이 든다.
살인적인 통제
미국에 9,11일 테러가 있었다면 중국은 위그르 족의 테러와 티벳트 족의 항거가 중국 지도자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사실 신장성은 위그르족이 주인이다. 모택동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석유 매장량에 현혹되어 군인들을 보내 이곳에서 결혼하여 정착시켯던 것이다. 작전명 자갈 박기 작전이었다. 당 연히 위그르 족은 숫자에 밀리고 생활에서도 한족에게 밀리니 항거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래서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검문 검색이 심했다. 심하다 보다는 여행의 맛도 상실할 정도로 혹독했다. 사람들이 많이 출입하는 곳에는 검문 검색대 설치되어 있다. 식당 여관 시장 그리고 기차역 고속도로등에서 검문이 심하며 해외에서 온 여행객이라 해도 철저한 소지품 검색이 이루어지고 가방도 열어야 한다.
우리가 비행기 탈 때보다 더 심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칼과 가위등 사람에게 해를 키칠 수 있는 도구는 압수한다. 젤과 1000 cc정도보다 큰 물병도 압수다 그러니 짜증이 났다. 검문하는 사람들의 고압적인 태도가 눈에 거슬린다. 검문 검색으로 인해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다짐도 하게 된다. 그러나 자연과 접하며 모래바람과 따거운 햇살에 정이 가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실크로드를 답사해 보니 묘한 매력이 있었다.
기온은 높은데 피부로 느끼는 날씨는 견딜만 했다. 구름이 끼면 햇살이 따갑지 않고 그늘로 들어가면 시원했다.
땅이 척박해서 먹고사는 양식을 얻는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지하에 묻혀 있는 자원들이 지표에 있어 채굴 내지 채취하는데 수월함도 보였다. 또한 방대한 면적의 신장성은 우리나라보다 16배나 넓은 면적이라고 한다 .인프라를 구축하여 인간이 자연을 국복하면 축복 받을 땅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으며 이 곳에 터널의 선진 기법인 전단면 굴착기로 터널을 뚫어 물을 공급한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환경을 만들 수 있을 것 같고, 더 나아가 인공강우를 만들어 실용화 된다면 이 지역은 선택 받은 지역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골칫거리인 위그르 족의 생존문제가 중국정부와 협상이 잘 이루어저 분쟁지역에서 벗어 날 수 있으면좋겠다는 바램도 들었다.
중학교 친구들과 함께 한 여행이 속 살 찌우는데 행복한 여행길이었다. 이제 몸을 추스리고 다음 여행지를 물색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