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년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이정록 시집 '정말' 중에서
○ 이정록(1964~) 충남 홍성 태생 시인, 고교 교사
이 시 참 재밌습니다. 어쩌면 시인은 이토록 슬픈 이야기를 역설적으로 풀어낼 수 있었을까요? 우리 인생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1연에서는 일찍 저세상으로 간 신랑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돌아가신 분이 성격이 참 급했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일찍 가시는 분들은 뭔지 모르게 급하게 서두르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2연은 두 분이 인연을 맺게 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마시고 오토바이에 맞선녀를 번쩍 안아서 태웠을까요. 오토바이에 태웠으니 남정네의 등에 여자의 가슴이 스치면서 젊은 혈기에 확 불을 싸 지른 것 같습니다. 얼마나 참기 힘들었을까요. 그것도 바야흐로 봄날인데 말입니다.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정말 한 순간에 모든 운명이 결정되고 마는 순간이 2연에서 펼쳐지는데 1연에서의 슬픔의 정조는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읽는 내내 웃음이 삐죽삐죽 새 나오게 만드는 서사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마지막 3연은 더 절창입니다.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얼마나 빨리 끝났으면 일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었을까요? 그야말로 절묘한 묘사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가 나옵니다. 분명 슬픈 이야기인데 어쩜 이렇게 슬픔을 웃음으로 단박에 바꿔칠 수 있는 걸까요? 거의 마술처럼 슬픔과 웃음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웃음 마술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워낙 첫 행사를 빨리 끝내신 양반이라서 바람 한 번 피울 여력이 없으셨겠지요. 그런데 가정용도 안되었으니 어떻게 상업용이 되었겠냐는 말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집니다. 그리고 마무리는 정말 날랜 양반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빨리 보낼 수 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힘이라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내공으로 가득찬 시인의 넉살 때문에 많이 웃었습니다.행복한 휴일 잘보내십시요~♡~펌
첫댓글 월산... 내 고향에도 있는 산인데
소풍도 갔었고
항상 고향가면 멀리서 보이는 산
하며 읽어내려가니 홍성출신시인이시네요
옴머~ 동향 출신이네~
가상의 지명인가 했더니 진짜 지명이라니^^
월산에 밀밭도 있나요
ㅎㅎㅅ
긍께 그렇게 빠르단 말이지요? ㅎㅎ
얼마나 날랬는지
따그르르 오토바이 뒷바퀴가 자꾸 생각 나네요ㅎㅎ
찬찬히읽어보게되네요...
여러감정도섞이고..ㅎ
시에서~~가마솥누룽지냄새가나는건
나혼자생각일까요~~
저두 여러 감정이 읽혀지네요^^
해설에는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켰다는데
저는 웃긴 표현인데 묘하게 슬프네요^^
잔잔한 로맨스 영화 한편 본듯한 느낌예요
읽으면서~
여인네가 쓴건데,시인은 남자~
또 생각하면서 엄마 얘기일수도 있겠다 ~
지명도 실명이라~
0슬픔도 웃음으로 바꾸는 마술~
재밌게 읽었습니다.
계속 부탁드립니다~~~♡
애잔한 러브스토리를 보는듯 하면서도
격정적인 러브씬을 보는듯 하면서도
참 묘하게 슬프고 웃기고
시인이 참 대단하네요^^
아주 절묘한 표현입니다.
괜히 이름만 시인이 아닌가벼요
한줄한줄 표현이 절묘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