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고구려 백두산 유적답사에서 6일차에는 신빈현을 답사하게 됩니다. 신빈현의 옛 이름은 흥경(興京)으로, 청나라의 발상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곳은 청태조 누루하치의 4대조가 잠든 영릉과 누르하치가 만주족을 통일하고 한(汗)으로 등극한 허투아라성이 있는 만주족 자치현입니다. 만주족 역사의 터전이기는 하지만, 신빈현은 고구려 시대에도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만주족 유적지를 보러가는 이유와, 신빈현의 고구려 유적에 대해서는 다시 글을 쓰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난번에 이어 신빈현의 독립유적지에 대해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빈현은 태자하, 소자하, 부이강 등 여러 강줄기가 지나는 이곳은 농사짓기에도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1870년대부터 조선인이 이곳으로 와서 논을 만들고 정착을 시도했던 곳입니다. 지금도 신빈현에는 조선족이 약 1만 3천명 정도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곳곳에 조선족 촌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이곳은 1910년도 이후 만주로 이주해온 우리 겨레의 주요한 거주지가 되었고, 그 결과 조선혁명당, 국민부, 조선혁명군의 거점이 되었고, 정의부, 국민부의 청사 건물이 1990년대 초까지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1919년 3월 21일 왕청문교회 앞에서는 400명의 사람들이 모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폐교된 왕청문 조선족소학교는 독립군 남만주 사령부 자리로, 조선혁명군이 세운 화흥중학교와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이 학교 운동장에는 “항일명장 양세봉”이란 글이 적힌 양세봉 흉상이 있었습니다. 이 흉상은 1995년 8월 신빈현 왕청문진 인민정부에서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왕청문 소학교(조선족촌)가 2008년 한족에게 넘어가면서, 2009년 조선족 동포들이 돈을 모아 국유림의 땅을 사들여 그분의 흉상을 신빈현 왕청문 협피구 강남촌(新宾县 旺清门 夹皮沟 江南村)으로 이전해 모시게 되었습니다. 양세봉 장군의 흉상은 이번 답사에서 꼭 찾아갈 보려고 합니다.
1896년에 태어난 평양북도 철산군에서 태어난 양세봉 장군은 1917년 흥경(신빈현)으로 이주해왔습니다. 이후 거처를 홍묘자향으로 옮겼다가 1919년 신빈현 홍묘자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는 1922년 무장 항일단체인 천마산대에 가입하여, 평안도 창성군 대유동 습격 작전을 비롯해, 무장 투장에 앞장선 인물입니다. 그는 대한통의부, 참의부, 정의부, 국민부 등에서 소대장, 중대장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참의부 소속 3중대 소대장이던 1924년 평북 초산군, 강계군 등에서 일본경찰과 교전한 후, 5월 19일 앞서 집안시 유적에서 소개했던 1924년 마시탄 전투(일본 총독 사이토 마코토 저격사건)에도 참전한 바 있었습니다. 그는 그해 6월에는 평북 강계, 위원에 진입해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는 등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무대로 일본군과 여러 전투에서 참전해 크고 작은 전과를 올렸습니다.
1931년 8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그는 중국인 왕동헌의 요녕농민자위단과 연합부대를 편성해 일본과 대항하게 됩니다. 1932년 3월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이 된 그는 군 조직을 5개 사령부로 나누고, 통화현 강전자 마을에 속성군관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사관을 양성하고 병력을 훈련시켰습니다. 하지만 속성군관학교는 1933년 일본군 군용기의 폭격으로 사라졌고, 현재 그 터는 대로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이춘윤이 이끄는 요녕민중자위군과 연합해 같은 해 10월까지 2백여 차례 전투를 치렀습니다. 특히 3월에 있었던 신빈 동쪽 영릉가 전투는 가장 큰 승리였습니다. 이때 연합군은 영릉가성을 점령해 많은 전리품을 얻습니다. 그러자 일본군은 폭격기까지 동원해 전격적으로 흥경성을 점령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중국 의용군 이춘윤 부대와 합세해 흥경성을 공격해 마침내 흥경성마저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폭격기를 앞세운 일본군의 반격에 밀려 결국 성을 내주고 후퇴하게 됩니다.
신빈현성 북산체육학교 동쪽에는 만인갱유지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중국인이 1만 명 이상 살해당했다는 곳입니다. 1931년 30만 명이었던 신빈현 인구가 1945년에는 11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일제의 보복이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인갱 주변 산 위에는 중국에서 세운 항일영렬기념비가 있는데, 추모대상 19인 가운데 이홍광, 이동광, 한호, 안창훈, 이명해 등은 우리 동포들입니다. 이처럼 신빈현에는 일제에 반대해 투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양세봉 장군은 1934년에도 홍경성, 노구대, 쾌대무자 전투에 참전하여 연전연승을 거뒀습니다. 당시 조선혁명군은 일본군 1개 연대와도 교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남만주 일대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퇴하는 등,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한 인물로, 군신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일본군은 중국인을 매수하여 그의 동정을 입수하게 됩니다. 1934년 8월 12일 그는 밀반입한 러시아 무기를 싼 값에 제공하겠다고 유인한 아동양이란 자를 만나러 가기 위해 신빈현 왕청문 사령부를 떠나 향수하자향 항구촌으로 넘어가다가, 언덕에서 매복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현장에서 장렬히 순국하게 됩니다. 향수하자향에는 고구려 시대 산성인 전수호산성이 있는 곳입니다.
양세봉 장군이 죽자 김호석이 총사령관에 취임했지만, 조선혁명군은 급격히 와해되어 소규모 유격전을 치루는 정도로 위축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김좌진, 홍범도 등과 항일무장투쟁사에 길이 기억될 인물입니다.
그가 순국하자 조선혁명군 대원들이 그의 시신을 고구려산성 아래 김도선의 집으로 모셔다가 일주일 동안 애도했고, 9월 25일 고구려산성 기슭에 안장했다고 합니다. 양세봉 장군은 북한의 김일성이 매우 존경해, 1961년 그의 딸과 사위 며느리들이 유골을 출관하여 평양의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1974년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그의 가묘가 만들었습니다. 그는 남과 북 양쪽에서 추앙받고, 중국에서 존경하는 유일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