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남산 유숙향선생님과 만나 힘차게 출발 !
부처골 감실여래좌상 보물198호
그 옛날 시골 할머니와도 너무 닮았다. 달려가면 덥석 안아 고단한 등을 쓸어주며 무슨 고민이든 들어줄 것만 같다. 쳐다보고 있으니 살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그래서 별명도 할매 부처다. 신비롭다. 이 불상은 남산에서 가 장 일찍 조성된 7세기 초의 작품이다. 월성과도 가깝고 주변의 대숲과 깨진 기와 파편 등으로 그 옛날 사람이 오간 절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최근 초기 불상의 대표적인 사례로 많이 소개되면서 경주 남산을 상징하는 대표 불상의 하나가 되었다.
탑골 부처바위 마애불상군 탑곡마애불상군, 보물201호
불교미술에 있어서는 환상적인 부처의 세계가 새겨진 신비로운 바위가 있어 높이 평가받는 곳임에도 불 구하고 정작 덜 알려졌다. 절 뒤에 위치한 높이 10m, 둘레 약 40m의 거대한 바위에는 사방으로 돌아가며 부처님의 세계가 담겨있다.
보리사 석조여래좌상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보물 136호
신라시대 보리사터로 추정되는 이곳에 남아있는 이 석불좌상 은 현재 경주남산에 있는 석불 가운데 가장 완전한 모습을 하 고 있다. 8각의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으며, 별도로 마련된 광배에는 화불과 보상화, 그리고 불꽃무늬로 장식되어 화려하다. 이 광배의 화려함과 정교함은 우리나라 석불 광배 중에서도 손꼽히는 것인데 아쉽게도 윗부분이 깨져 없어졌다가 언젠가 새 로 만들어 넣었다. 불상이 지니는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느낌 을 주는 얼굴과 섬세한 옷 주름 또한 인상적이다. 통일신라시대 인 석굴암 이후 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만도 2.44m에 이르는 대작에 속한다. 정 교함과 화려함에 비해 머리와 몸체의 부조화가 다소 아쉽다. 광배뒷면에는 약사여래상을 가는 선으로 조각하였는데 이러한 형식은 그 예가 드물다. 보리사 절 분 위기와의 조화도 멋지지만 무엇보다 도 이 불상이 앉아있는 곳에서 보이는 서라벌 벌판이 인상적이다. 선덕여왕이 잠들어 있다고 하는 낭산 뿐만 아니라 진평왕릉, 보문 들판까지 한눈 에 들어온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들판 풍경이 운치를 더한다.
서출지 서출지 사적138호
서출지는 통일전 주차장 바로 남쪽에 있는 연못이다. 길이 86m의 타원형의 연못은 뒤쪽 남산의 산세와 어우러져 수려한 경치를 보여준다. 연못위에 걸쳐져 있는 이요당(二樂堂)으로 불리는 오래된 정자도 멋지게 어우러진다. 이 연못에 전해져오는 전설은 매우 유명하다. 신라 21대 소지왕(炤知王)이 즉위한 지 10년 되던 해(488)정월에 왕궁을 명활성에서 월성으로 옮겼다. 그리고 정월 보름 신하들을 거느리고 천천정(天泉亭)으로 행차하였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다. 쥐가 사람의 말 로 이르기를“이 까마귀 가는 곳을 찾아 가 보시오”하 였다. 왕 은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이를 쫓게 하였다. 남산 동쪽 피촌( 양피사촌)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는 것을 구경하 고 있다가, 문득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잊어버리고 길가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 때 한 늙은이가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리니, 겉봉에 쓰기를「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였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두 사람은 서민이요, 한 사람은 왕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렇게 여겨 봉투를 열어보니, 그 글에「거문고갑을 쏘라」고 하였다. 왕이 궁중으로 돌아와 거문고갑을 쏘니, 내전의 분수승(焚修僧)과 궁주가 역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로써 두 사람은 처형되었다. 이로부터 나라 풍 속에 해마다 정월의 상해 (上亥), 상자(上子), 상오일(上午日)에 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꺼려 함부로 움직이지 않으며, 정월 15 일을 오기지일(烏忌之日)이라고 하여 찰밥을 지어 제사 지내니 지금까지도 이를 행하고 있다. 속된 말로 이를 달도라고 하니 슬퍼하고 근심하며 모든 일을 꺼려 금한다는 말이다. 이후 이 못을 서출지(書出池)라고 이름 하였다. 이 사 건은 쥐와 까마귀 등으로 대표되는 재래의 신앙집단과 분수승(焚修僧)으로 상징되는 신흥종교인 불교와의 충돌 로 이해되고 있다. 이요당은 1664년 임적 선생이 지은 건물이다.
남산리 삼층석탑(양피사지) 남산리 삼층석탑 보물 124호
화려했던 옛절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탑의 모양새는 오히려 또렷이 남아있다. 탑은 동서로 나누어 들어서있다. 서탑은 이중기단으로 된 일반적인 탑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기단부의 팔부중상이 잘 남아있다. 남면 왼쪽의 건달바상은 악기를 타고 춤을 추면서 인간들을 즐겁게 해주는 신이고, 그 오른쪽 아수라 상은 얼굴이 셋이고 손마다 무기를 들고 있는 괴 물같은 상으로 지옥의 왕이라 불린다. 위로 올려 든 손에는 해 와 달이 들려있다. 동면 오른쪽의 야차상은 귀신 나라의 왕으로 염주를 입에 물고 손으로 헤아리고 있다. 그 외에도 용왕, 긴 나라, 마후라, 천, 가루라 등이 새겨져 보는 재미를 더한다. 지옥부터 하늘까지 대표하는 신들이 탑 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동탑은 광대 한 이중의 지대석위에 세운 분황사의 모전석탑과 같이 전탑의 양식을 띠고 있다. 동탑은 꿋꿋하고 힘차게 솟아 있어 남성답고 서탑은 부드럽고 화려 하여 여성스럽다. 탑이 있던 절은 양 피사로 추정되고 있다.
남리절터(염불사지)
양피사지에서 다시 남으로 700여m 거리에 있는 절터로 탑 2 기가 남아있다. 원래 밭 가운데 탑의 흔적들만 남아있던 것을 2009년 스리랑카에서 종교부장관이 직접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와서 봉안하여 복원했다. 동남산의 산세와 탑이 푸른 잔디와 시원하게 잘 어우러진다. 탑은 이중 기단위에 장중하게 세워졌으며 층간 체감율과 옥개석, 탑신 사이의 공간이 넓어 시원 한 느낌을 주고 있다. 상하층 기단 모두 탱주(撑柱)가 2개씩 새 겨져 있어 석가탑과 같은 시대인 8세기 중엽의 탑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남산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이 있는데 그곳에는 피리사라는 절이 있었다. 절의 스님은 늘 아미타불을 염하는데 그 소리가 성안에 까지 들려 3백 60방 17만호에서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 소리 가 맑고 부드럽고 한결같이 낭랑하여 그를 공경하여 모두 염불스님이라 불렀다. 그가 죽자 소상(塑像)을 만들어 민 장사에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를 염불사로 이름을 고쳤다.
헌강왕릉(아래사진)과 정강왕릉(위사진) 사적 187호, 사적186호
헌강왕(憲康王,875~886)은 신라 최전성기 때의 왕으로서 이 때에 서라벌에는 모든 집들이 기와집이었고, 밥은 숯으로 짓 고, 거리에는 노랫소리로 가득했던 태평성세였으며 일본왕이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왕릉은 흙으로 쌓아올린 원형봉토분으로써 밑둘레에는 장대석을 4단으로 쌓아 보호석으로 삼았다. 다음 왕이었던 정강왕(定康王,886~887)은 재위 2년(887) 봄
정월에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열고 강설(講說)을 들었으며, 이찬 김요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왕을 이을 후사(後嗣)가 없이 재위 2년 만에 병환으로 돌아가시게 되어 여동생 진성여왕(眞 聖女王)이 왕위에 올랐다. 두 왕릉 모두 찻길 입구에서부터 왕릉까지는 약 100여m 올라가는데 남산의 또다른 상징으로 꼽히는 구불구불한 소나무 숲이 장관을 이룬다. 특히 봄이면 진달래와 개나리가 소나무 와 어우러져 진풍경을 이룬다. 소나무 숲을 거쳐 올라가면서 조금씩 만나게 되는 왕릉의 환한 느낌이 인상적이다.
식사는 여기당!
첫댓글 사진정리를 하다보니,
보리사에서 마애석불 하나를 보지 못하고 왔네요.
오호 통재라 !!
넘 속상하네요.
길게 선덕여왕 신종 얘기 하는 시간에 마애석불을 봤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요 ?
앞으로 우리가 답사 동선을 좀 더 꼼꼼히 챙겨야겠어요.
성덕대왕 신종과 선덕여왕릉에 대한 얘기가 길었지요?
해설사분께서 1시까지 시간을 맞추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우리가 챙겨야 했을 듯. ㅠㅠ
보리사 석조여래좌상만 보고 마애여래좌상은 못 보고 왔네요. 준 책자에서 사진을 보니 보물은 아니지만 상당히 괜찮은 불상인데... 올라가는 길이 약간 험해서 처음부터 안 데려갈 생각이었던 듯합니다.
이번에 단체 사진을 제일 많이 찍은 것 같습니다. 단체 사진 많으니까 좋네요.
앞으로 각 문화재 앞에서 계속 찍으면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