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의 불볕도/ 푸른 가슴에 새긴 톱날 같은 의지로 견뎌 냈겠지// 그 시련의 거름으로/ 열로 다스려 볶으면 잠 잘 들고/ 날로 달여 먹으면 잠들지 못한다는/ 산조인을 품었겠지// 서정에 상처 입어/ 잠 못 이룬 격정의 밤과/ 시대의 피곤한 나날 어찌 견뎌냈기에/ 촘촘한 그물로 속을 채웠을까// 땅에 있기 서러워 이름 하나 걸고/ 하늘인 듯 사는 것이/ 어디 하늘수박뿐이랴’(산조인: 하늘수박씨의 한의학식 이름)
김일태(57) 시인이 윤판기(59) 서예가를 주인공으로 삼은 ‘하늘수박’ 시이다. 이 시는 2003년 발간한 김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어머니의 땅’에 실려 있다.
하늘수박의 외형적인 탐스러움과 속에 촘촘한 그물로 품고 있는 약성과 독성을 윤판기 서예가의 겉으로 풍기는 예와 멋스러움, 여유, 그리고 어려운 현실을 잘 극복하고 서예인으로 한 경지를 이룬 내적 시련과 갈등을 서로 빗대어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김 시인은 윤 서예가를 수련을 통해 서도(書道)에 정진하는 선비라고, 윤 서예가는 김 시인을 겸손하고 모범적인 문인이라고 표현한다.
윤판기 서예가와 김일태 시인은 고향은 다르지만 중학교 학창시절을 함께한 45년 지기 선후배 사이다.
그들은 창녕 남곡중학교(현 남지중학교) 출신으로 첫 만남을 연결한 고리는 낙동강이다. 윤 서예가는 의령군 낙서면 정곡리에서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 등하교를 했고, 김 시인은 낙동강 근처인 창녕군 남지읍 수개리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 45년 전 중학교 선후배로 첫 인연
“당시 제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형님(윤판기 서예가)은 이미 ‘서예 신동’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초등 2학년 때부터 큰아버지 어깨너머로 서예를 배운 윤 서예가는 전국대회 최고상을 받는 등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김 시인이 학교백일장에서 1등을 해 그해 개천예술제에 학교대표로 각각 참가하면서 그들의 인연은 시작됐다.
“그날 새벽에 형님과 함께 출발했는데, 진주에 도착해 보니 어스름한 저녁이 다 됐더군요.”
박진나루에서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 의령 신반까지 가서 개천예술제가 열리는 진주까지 한나절이나 걸리는 길을 함께 하면서 그들은 선후배의 정을 나눴다.
예술제 결과는 정반대였다. 윤 서예가는 1등을 했고, 김 시인은 입상조차 못했다. 위로하고 축하하며 그들은 친밀해졌다.
윤 서예가는 중학교 진학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가난해 1년간 외가인 창녕 유어면의 한문서당에서 기초 한학과 서예를 배웠다. 그리고 수소문 끝에 남곡중에 서예 특기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1년간 한문서당에서 배운 글이 저의 서예인생에 큰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전화위복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또 30리길을 걸어 등교를 하면서도 3년 개근상을 받을 정도로 착실하고 부지런했다. 고등학교도 서예특기장학생으로 들어가 개근상을 받았다.
가난에 찌들어 제대로 먹지도 못했지만 그는 학창시절이 아주 재미있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공부를 독촉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서예를 열심히 하면서 참여하는 대회마다 상을 받아 ‘글판기’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이름을 떨쳤기 때문이다.
“전국봉황미전, 전국자유교양경시대회, 경남학생미술실기대회 등 많이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구경도 하고 상까지 탔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죠.”
김 시인은 개천예술제에서 입상하지 못했을 때 인솔한 선생님이 시집을 한 권 사주면서 격려를 해주셨는데, 그때의 고마움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즈음 글을 써서 유명해져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때는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전국대회 입상을 많이 했죠. 하지만 외려 그런 상이 자만심이 되어 정진을 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김 시인은 글쓰기와 관계가 없는 이공계열의 대학으로 진학을 했고, 사회인이 되면서 약간의 공백기간을 가지기도 했다. 윤 서예가는 군대에서도 행정과에 근무하면서 글씨를 계속 써왔고, 입사 후에도 끊임없이 서예에 몰두했다.
◆ 사회인으로서의 만남
“서예가로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형님의 소식은 계속 듣고 있었습니다.”
김 시인은 1983년 마산MBC PD로 입사하면서 마산에 정착했다. 그러면서 창원공단 방위산업체인 대한중기공업주식회사(현대위아 전신)에 근무하고 있는 윤 서예가와 다시 만났다.
윤 서예가는 그즈음 경상남도미술대전에서 5년간 특선하고, 서예부문 도내 최연소 초대작가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는 등 젊은 나이에 서예계에서 촉망받는 인물이 돼 있었다.
“20대에 마산미협 회원으로 가입하려고 했지만 나이 제한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죠. 서예분과 회원들을 찾아가 회원 가입 사인을 받으면서 논란 끝에 회원으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김 시인은 직장생활하면서 업무에 바빠 문인의 꿈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취월장한 형님의 모습에 자극을 받았고, 직장 선배인 추창영 시인 등의 조언을 듣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방송일 하면서 가까워진 문인 선배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고, 1991년 등단을 하면서 문인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그리고 김 시인은 1998년 문예지 시와시학을 통해 재등단했다.
윤 서예가와 김 시인은 미협과 문협에 들어가자마자 중책을 맡았다.
◆ 예술단체 중책으로서의 만남
윤 서예가는 1985년 경남도청 문화공보담당관실에 특채돼 공직자로서의 길을 걸으면서 서예에 더욱 정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86년 창원미협 창립멤버로 들어가 30대 초반에 서예분과위원장을 맡고, 이어서 미협 수석부지회장을 맡았다.
김 시인은 1991년 등단 후 창원문협 회원으로 들어가자마자 사무국장 중책을 맡았다. 그리고 2007년 창원예총 회장을 맡기까지 집행부를 떠나본 적이 없을 만큼 지역예술계의 밑거름 역할을 해왔다.
그러면서 그들은 본격적으로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창작활동을 하면서 서로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서예가 가지고 있는 깊이 있는 무게가 시에 반영됐고 그 느낌은 시서화전으로 이어졌다.
90년대 초반부터 꾸준하게 작품의 만남을 이어오다 지난 2010년에는 김일태 시인을 비롯한 도내 57년 닭띠 시인들과 윤판기 서예가와 함께 창원 갤러리 고운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또 2011년에는 필갤러리 개관 기념전을 함께 기획해 시서화전 등 다양한 이벤트도 열었다.
김 시인은 “형님은 시를 잘 이해하는데, 그 시에 정서적으로 맞는 다양한 서체를 활용해 시가 더욱더 살아나는 느낌을 준다”며 “결과물을 내놓는 걸 보면 단순한 예술인보다는 도를 닦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 내년에 함께 퇴직
그들은 공교롭게도 내년에 함께 퇴직을 한다. 하지만 퇴직 후가 더 바쁠 것 같다.
윤 서예가는 서예연구실을 마련해 그동안 소홀했던 후배와 제자들 가르치는 데 치중하겠다는 계획이다. 또 평생교육원 강의도 폭을 넓혀 다양한 계층의 강의를 하겠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으며 중앙무대에서의 활동도 계획하고 있다.
그는 “김 시인과 예술분야 동반자로서 40년 세월을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하다”며 “건강을 계속 유지해 선후배 사이에서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김 시인은 그동안 지역 문화예술인을 방송을 통해 재조명하고 지역문화사업으로 연결시키는 일을 해왔다. 그는 연장선상에서 고향의 봄 기념사업, 윤이상 통영국제음악제, 김종영 선생 재조명 사업 등의 일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
그는 “시를 공부하면서 가치의 기준이 달라졌고 그런 사업을 해오는 내내 행복했다”며 “앞으로 개인 창작활동과 함께 노동민요를 무대에 올리는 기획도 추진하는 등 다양한 영역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글= 이종훈 기자 leejh@knnews.co.kr
사진= 김승권 기자 skkim@knnews.co.kr
☞윤판기 서예가 △1955년 의령 출생 △대한민국서예대전 특선 △제19회 공무원 미술대전 서예부문 최우수상 △경남불교미술인협회 회장 △한국예술문화명인
☞김일태 시인 △1957년 창녕 출생 △1998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어머니의 땅’, ‘그리운 수개리’ 등 △제8회 김달진 창원 문학상 수상 △전 창원예총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