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정말 이렇게 막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참을 수 있는데까지 참으려고 했다. [두사부일체][색즉시공]으로, 겨울시즌만 되면 할리우드 대작 영화들 틈바구니에서 우리를 즐겁게 했던 윤제균 감독이 아닌가.(그 즐거움도 상대적 즐거움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흥행 성공으로 윤제균표 영화는 과대평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적 힘은 이제 수명을 다한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낭만자객]만을 놓고 보면 그렇다.
[낭만자객]은 대중 상업주의와 야합한 한국 영화자본의 표본적 실패를 보여주고 있다. 재능있는 감독(역시 상대적 재능!)이 어떻게 상업주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몰락하는가를 알고 싶다면, [낭만자객]을 봐라. 페럴리 형제의 지저분한 화장실 유머가 총동원되어 있고, 이미 그가 한 번 써먹은 섹스 코드가 아프카니스탄 국경에 설치된 부비트랩처럼 무차별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슬쩍 건드려도 웃음보가 터지는 것 같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자. 그것은 감독만의 생각이다. [낭만자객]은 관객들의 호응을 끌어내기 위한 필사적 몸부림의 과잉으로 가득차 있다. 관객들과 상호 교류하는 것이 나쁘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야기의 자연스런 흐름으로 삶의 또 다른 이면을 엿보게 하고, 세계에 대한 시각을 확대시켜 주는 내면적 교류가 아니라, 말초적, 즉물적 웃음을 전달하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하다. 편의점에서 훔친 물건으로 외투 속이 불룩하게 다 드러나보이고 바코드 검색대에서는 부저 소리가 계속 울리는 데도, 절대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고 거짓말하는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예랑(최성국 분)을 보스로 하는 얼치기 다섯 명의 낭만자객들은 고객의 의뢰를 받아 사건을 해결하는 조선조판 해결사들이다. 그들은 이승에 더 머물지 않고 저승으로 천도를 꿈꾸는 처녀 귀신들의 의뢰를 받는다. 자신들의 숙적인 청나라 고수를 살해해달라는 것이다. 자, 우리는 여기에서 [낭만자객]은 호러인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런 걱정일랑 하지 말자. 윤제균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 것은 현재 한국 사회의 흥행코드를 무자비하게 총동원해서 관객을 최대한 끌어모으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월하의 공동묘지]류의 호러만으로 그런 승부수를 띄울 리는 없다. 이미 윤제균표 코미디를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은, 조선조를 무대로 했다고 해서 이 영화가 단순한 시대극이 될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과연 그는 뻔뻔하게, 경공술의 대가처럼 조선조라는 시대적 제한을 훌쩍 뛰어넘는다. [주리아나]라는 나이트 클럽씬은 [낭만자객]의 지향점이 어디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영동대교 건너기 전, 지금의 엘루이 호텔 지하 나이트 클럽(물론 원조는 동경에 있었지만), 한때 장안의 선수들이 총집결한, 이 시대 물 좋은 최고의 부킹 전문 나이트 클럽의 대명사 주리아나는, 조선조판 클럽으로 탈바꿈되어 있다. 꽹가리 사물놀이 테크노 리듬이 흘러나오고 한복 비키니를 입은 무희들이 엉덩이를 돌려대며 어우동쇼를 펼친다.(이매리가 우정출연하여 그녀의 뇌새적인 춤을 보여준다. 별로 볼 것은 없지만) 카메라는 쾌락적으로, 탐미적으로, 무희들의 쭉쭉뻗은 몸매를 앙각으로 요염하게 잡는다. 주리아나씬은 오직 순간적 쾌락에만 복무한다. 그것이 작품 자체의 내러티브와 유기적 연관을 맺고 있다는 흔적을 우리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식이다.
코딱지를 후벼 파서, 혹은 재래식 화장실 똥통에 빠진 반지를 건져 올리다가 똥찌꺼기를 막대기에 묻혀서, 꾸벅꾸벅 조는 요이(김민종 분)의 입 속에 집어넣는 지저분한 화장실 유머는, [낭만자객]의 가장 큰 특징이다. 대롱을 물고 물 속에 숨어 있는 자객단들을 향하여 방뇨를 하고, 성병이 걸려 피고름이 섞인 오줌이 그 대롱 속으로 떨어져, 물 속의 자객들이 꿀꺽 삼키는 씬이 작품 전체 구조에 어떤 기여를 하느냐고 생각하지 말자. [낭만자객]의 각씬들이 갖는 웃음은 즉시적이고 즉물적이며 파편적이다. 작품의 전체적 구조와 유기적 관계를 갖고 통일성의 미학을 형성하는가? 이런 골치 아픈 질문은 하지 말자. 그 흔적을 찾으려는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낭만자객]은 거친 줄거리의 이음새 사이에 웃음의 부비트랩을 장치하고 있다. 그것은 웃고 나면 금방 허무해지는, 유효기간이 아주 짧은 웃음들이다.
그래도 감독은 욕심이 많아서, 웃음도 주고, 감동도 주려고 한다. 얼치기 순진한 자객 요이와 어린 여동생 달래의 끈끈한 정을 이용하여 마지막에는 눈물까지 짜내려고 한다. 한국적 정서라는 약효는 이미 [집으로...]나 [선생 김봉두][오 브라더스] 등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끈끈한 정이 약방의 감초처럼 뿌려져 있어야, 지저분한 화장실 유머로 도배된 웃음의 격이 살아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시사회장에서는 너무나 상투적이고 너무나 관습적인 이야기 구조에 혹해서, 마지막 엔딩 씬에서 정말 눈물을 훌쩍거리는 관객도 있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나처럼 영화 보다가 잘 울기로 소문난 사람도 [낭만자객]의 눈물짜는 씬은 헛웃음이 나왔을 뿐인데...이렇게 속아 넘어가는 관객이 있는걸 보니 이 영화도 흥행전선을 탈 것 같기는 하다. [두사부일체][색즉시공]보다는 못하겠지만)
처녀귀신단은 낭만자객단과 함께 작품의 두 축을 이룬다. 전직 7공주 출신 향이(진재영 분)나 터프하게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인간을 죽여 그 생명의 눈물을 모아 천도를 꿈꾸는 불량귀신(신이 분) 등의 처녀 귀신단은 섹스와 코믹 코드로 관객들을 공략한다. 신이는 걸죽하고 상스러운 농담으로 [색즉시공]의 캐릭터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이것저것 온갖 잡탕으로 뒤섞인 이런 작품을 퓨전사극이라고 불러 주기에는 퓨전이라는 단어가 너무 아깝다.
부디 이 영화가 극장에 걸려서 많은 사람들을 자극시키기를 바란다. 다시는 이런 영화가 수백만 관객을 동원해서 한국 영화의 질적 수준을 하향 평준화 시키는 일이 없도록, 수능이라도 보고 감독 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해주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