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호는 천총(天聰)·숭덕(崇德)·1636년에 만주에서 만주족·몽골족·한족의 황제가 되었으며 국호를 후금(後金)에서 청(靑)으로 바꾸었다. 홍타이지는 만주족이 세운 후금의 카간이었던 누르하치(1559~1626)의 8번째 아들이었다. 누르하치는 내륙 아시아 스텝 지역의 여러 부족들을 통일하여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부족민을 중국식 관료제 국가로 조직했다. 누르하치가 죽은 뒤에 홍타이지는 형제들을 죽이고 자신의 지위를 강화했다. 권력다툼에서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주로 군사지도자로서의 남다른 재능을 지녔던 데 있었다. 그는 내몽골과 조선으로 진격해들어가 이 두 나라를 금의 속국으로 삼았다. 조선에서는 재정과 식량을 공급받고 내몽골에서는 인력과 말을 공급받아 팔기제(八旗制)로 알려진 군사체제를 완성했다. 4번의 군사 원정을 통해 전에 중국이 장악하고 있던 북만주의 헤이룽 강[黑龍江] 지역을 마침내 장악하고 3차례나 만리장성을 넘어 화북을 침공했다. 포로로 잡혀왔거나 자진해서 금나라를 위해 일하는 한족들의 수효가 많아지자 금도 중국에 더욱 가까운 국가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새로운 유능한 한족들이 금에 협조했다. 홍타이지는 한족 관료의 충고를 받아들여 나라 이름을 금에서 청으로 바꾸고 중국 공략에 나섰다. 그는 자신의 목표가 실현되기 전에 죽었지만 만주족 지배의 기초를 다졌다. 그가 죽은 지 1년 뒤에 만주족은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北京]을 장악하고 얼마 후 나머지 지역 모두를 평정했다.
《명사(明史)》 하투(河套) 편에 상고해 보면, 청태길(靑台吉)ㆍ적태길(赤台吉)ㆍ황태길(黃台吉)ㆍ흡태길(恰台吉)ㆍ낭태길(狼台吉)ㆍ철개태길(鐵皆台吉)ㆍ은정태길(銀定台吉)ㆍ불간태길(不艮台吉)ㆍ실자태길(失刺台吉) 등의 종류가 있다. 요즘 사신으로 연경에 갔다 온 사람에게 들으니, “북쪽 변방에 제멋대로 황제라 일컫는 자가 있어 하나는 황태극(皇太極)이라 하고 또 하나는 청태극(淸太極)이라 하는데, 중국에서 그 이름을 혐의롭게 여겨 황태길ㆍ청태길이라고 부르니, 태길이란 음(音)이 태극과 같기 때문이다. 황태길ㆍ청태길이 다 중국의 서남방 천 리 밖에 있는데, 본래는 중국 백성으로서 난리로 말미암아 그 땅에 들어간 것이다. 그들에게서, ‘천명(天命)이 돌아오면 백성이 옛 임금을 찾는다.’는 말이 있었다.” 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명 영종(明英宗)이 오랑캐[虜]를 함락하자, 그 오랑캐가 두 호녀(胡女)로 하여금 모시게 하여 각각 아들 하나씩을 낳았다. 명종이 중국에 돌아오자 오랑캐가 두 아들을 보내왔으나 중국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곧 두 태길을 봉하여 서남방 밖의 먼 곳에 살게 했으니, 《명사》에는 이 사실을 숨겼다.” 했고, 또 혹은 말하기를, “원 순제(元順帝)가 막북(漠北)에 도망가서 대대로 갈저(羯)가 되었는데, 그 지차 아들 두 사람을 서쪽에 봉했더니 후에 그곳이 차츰 커졌기 때문에 백성들이 옛 임금을 찾는다 하였다. 그 셋째는 액라사(厄羅斯)니 바로 대비달자(大鼻撻子)이고, 그 넷째는 합이합(哈爾哈)이니 바로 마흔 여덟 부족의 하나로서 나라 밖의 동북쪽에 있다.”고 하니, 이 말들을 꼭 믿지는 못하겠으나 또 반드시 뒷세상의 참고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해 둔다.
누루하치가 바야흐로 몽고와 서로 통하여 동시에 같이 군사를 일으킬 것을 약속하였는데, 몽고는 광령(廣寧)을 침범하고, 추장은 요동을 침범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사를 출동시키는 날과 시간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추장의 둘째 아들 망고태(忘古太)와 셋째 아들 홍태시(紅太是)는 그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조선과 같이 허재새(許宰賽)가 모두 명 나라를 구조했는데, 재새는 지금 이미 파멸되었습니다. 조선이 비록 강화하자고 말하지만 아직 정확한 통보를 받지 못했으며, 그 실은 다시 명 나라에 군대를 원조하려고 하니, 조선을 뒤에 두고 먼저 요동을 공격하겠다고 계획을 세우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추장은 여러 자식과 여러 장수들을 모아 날마다 모의하였는데, 으례 극비이기 때문에 단지 우모채(牛毛寨)와 만차령(萬遮領) 두 길가의 근처 부락에서 긴 사다리를 만든다고만 들었습니다.
심하(深河)의 전쟁 기미년[광해군 11년 (1619)]ㆍ붙임 김응하(金應河). 사신을 보내어 변무(辨誣)하다. 오랑캐가 요동에 웅거하다.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들어오다.]
○ 노추(奴酋)에게 여덟 장수가 있는데, 첫째는 늙은 추장으로 성은 최(崔)요 계축년에 났으며, 둘째는 귀영개인데 노추의 맏아들이며, 셋째는 다을함소토리(多乙含所吐里)인데 노추의 아우인 소을가적(小乙可赤)의 맏아들로, 혹 아미라(阿未羅)라 부르기도 하였다. 넷째는 망가토(亡哥吐)인데 노추의 둘째 아들이며, 다섯째는 홍태시(弘太時)인데 노추의 넷째 아들이며, 여섯째는 두두(豆斗)인데 노추의 맏손자이며, 일곱째는 소도리(所道里)인데 노추의 조카이며, 여덟째는 아두(阿斗)인데 노추의 종제(從弟)라 한다. 〈강홍립 별록〉ㆍ《일월록》 ○ 7월에 양간이 돌아오고 오랑캐의 차관이 또 글을 가지고 왔는데, 그 글에, “오늘 일은 다름이 아니라, 중국을 섬기지 말고 자손 대대로 영구히 맹약을 맺는 것이다. 국서(國書)에 도장을 찍어서 고관을 시켜 들여 보내면 그 사람은 머무르게 하고, 다시 우리나라 사람을 직접 귀국에 보내어 귀국 정승과 함께 흰 말을 잡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검은 소를 잡아 땅에 제사 지내어 피를 마시고 맹서한 뒤에, 원수 이하 군졸을 송환할 것이다. 각각 무기를 버리고 말 채찍 하나만 들고 왕래하며 예전과 같이 시장을 열자.” 하였다. 《일월록》 ○ 11월 강홍립의 밀계에, “8월에 오랑캐 추장이 북관(北關)의 두 성을 격파하니, 김태석(金苔石)은 스스로 불에 타 죽었고, 백양고(白羊古)는 나와서 항복하였습니다. 오랑캐는 방금 몽고와 약속하고 함께 요ㆍ광(遼廣)을 침범한다고 공언하였는데, 추장의 아들 망고태(亡古太)와 홍태시(弘太時)가 조선을 그대로 두고 먼저 요동을 칠 수 없다고 말하므로, 추장이 여러 아들과 장수들을 모아놓고 날마다 비밀스럽게 모의하고 있습니다. 다만 들으니 우모채(牛毛寨)ㆍ만차령(萬遮嶺) 두 길의 근처 부락에서 긴 사다리를 만든다고 합니다.오랑캐 장수 일가대(日加大)는 바로 북도의 주변 오랑캐로서 추장이 신임하는 자인데 그가 말하기를, ‘조선의 일은 내가 벌써 알고 있다. 전일에 홀온(忽溫)이 동관(潼關)을 공격한 뒤에 비로소 화친하여 녹봉을 넉넉하게 지급하였으니, 지금 화친하는 일도 우리 군사가 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성립되지 못할 것이다.’ 하니, 혹시 변경에 쳐들어 올 우려가 없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 병인년 5월에 건주(建州)의 오랑캐 추장 누루하치[奴兒哈赤]가 등창이 나서 죽었는데, 죽음에 임하여 세자 귀영개(貴榮介) 다른 본에는 ‘永介’로 되어 있다. 둘째 왕자 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귀영개가 아우 홍타시(弘他時) 다른 본에는 ‘弘太始’로 되어 있다. 에게 양보하며 말하기를, “너는 지용(智勇)이 나보다 나으니 너가 모름지기 위(位)를 계승해야 한다.” 하니, 홍타시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즉위하였다. 《병자록(丙子錄)》 혹은 말하기를, “누루하치가 죽을 때를 당해 귀영개에게 이르기를 ‘아홉 번째 왕자를 마땅히 세워야 할텐데 나이가 어리니 너가 섭정하다가 뒤에 아홉 번째 왕자에게 전위(傳位)하라.’ 하였는데, 귀영개는 핍박을 받을까 혐의하여 드디어 홍타시[洪太氏]를 세웠다.” 한다. 《일월록》 외람되이 연호를 천총(天總)이라 하였다.
요동의 구성(舊城)은 한(漢)의 양평(襄平)ㆍ요양(遼陽) 두 현(縣) 지역에 있었다. 진(秦)이 요동이라 칭하였고, 그 뒤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에 편입되었다가, 한 말년에 공손도(公孫度)가 웅거한 바 되었으며, 수(隋)ㆍ당(唐) 때에는 고구려에 속하였고, 거란(契丹)은 이곳을 남경(南京)이라 하였으며, 금(金)은 동경(東京)이라 하였고, 원(元)은 행성(行省 원대의 지방 행정 구역)을 두었으며, 명(明)은 정료위(定遼衛)를 두었더니, 지금은 요양주(遼陽州)로 승격되었다. 20리 떨어진 곳에 성을 옮겨서 신요양(新遼陽)이라 하였으므로, 이 성은 폐하여 구요동(舊遼東)이라고 부른다. 성의 둘레는 20리인데, 혹은 이르기를,
“이 성은 웅정필(熊廷弼)이 쌓은 것이다. 이 성이 옛날에는 몹시 낮고 비좁았는데, 정필이 적기(敵騎)가 들어온다는 정보를 듣고 성을 헐었다. 청인이 이를 보고 의심하여 감히 가까이 이르지 못하다가, 고쳐 쌓는다는 정보를 정탐해 알고는 군사를 이끌고 성 밑에 이르렀으나, 하룻밤 사이에 새로 쌓은 성이 높다랗게 이룩되었다. 나중에 정필이 이곳을 떠나자 요양이 함락되었다. 청인이 그 성이 견고하여 함락시키느라 어려웠던 점을 분히 여겨서 성을 헐어 버릴 적에 싸움에 이긴 열쌘 군사들을 동원했음에도 열흘이 가도 다 헐지 못하였다.”
한다. 명(明) 천계(天啓) 원년(1621) 3월에, 청인(淸人)이 이미 심양을 빼앗고 또 군사를 옮기어 요양으로 향하였다. 이때 경략(經略) 원응태(袁應泰)가 세 길로 군사를 내어서 무순(撫順)을 회복하려던 차에, 청인이 이미 심양을 점령하고 요양으로 향한다는 것을 듣고, 드디어 태자하(太子河) 물을 끌어다 해자에 채우고 군사를 성 위로 올라가 빙 둘러서서 지키게 하였다. 청인이 심양을 함락시킨 지 닷새 만에 요양성 밑에 이르렀다. 누루하치[奴兒哈赤]란 자는 이른바 청 태조(淸太祖)다. 그가 스스로 좌익(左翼)의 군사를 이끌고 먼저 이르니, 명(明)의 총병(摠兵) 이회신(李懷信) 등이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성에서 5리 되는 곳에 나와서 진을 쳤다. 이때 누루하치가 좌익(左翼) 군대에 속한 사기(四旗 만주군 편성 단위)로 왼편을 공격했다. 청 태종(淸太宗)이란 자는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한(汗)이라고 부르니, 그의 이름은 홍타시[洪台時]우리나라의 병정록(丙丁錄) 중에 너저분하게 실려 있는 ‘紅打時, 또는 紅他詩’는 모두 발음이 비슷한 대로 적은 것이다. 마치 영알대[英阿兒臺]를 용골대(龍骨大)로, 마부타이[馬伏塔]를 마부대(馬夫大)로 쓴 것이 모두 이와 같다. 였다. 그가 날랜 군사를 이끌고 싸우기를 청했으나 누루하치가 허락하지 않다가, 홍타시는 굳이 가서 홍기(紅旗) 두 개를 세워 두고 성 옆에다 매복시켜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누루하치가 정황기(正黃旗)ㆍ양황기(鑲黃旗)를 보내어 홍타시를 도와서 명(明)의 군영(軍營) 왼편을 치게 하였다. 또 사기(四旗) 군사가 뒤이어 이르니 명병(明兵)이 크게 어지러운지라, 홍타시가 승리를 얻어서 60리를 추격하여 안산(鞍山)에 이르렀다. 이 싸움에 명병이 요양의 서문으로 나와, 앞서 청인이 성 곁에 세워 두었던 두 홍기(紅旗)를 뽑으니, 복병이 일어나서 이를 맞아들여 쳤다. 명병이 다시 성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느라고 저희들끼리 짓밟혔다. 총병 하세현(賀世賢)과 부장(副將) 척금(戚金) 등이 모두 전사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누루하치가 패륵(貝勒 만주군의 벼슬 이름)의 왼편 사기 군사를 거느려서 성 서쪽의 수문(水門)을 파 호수의 물을 빼고, 또 오른편 사기 군사로 하여금 성 동쪽의 진수구(進水口)를 막게 하고, 자기는 우익(右翼) 군대를 성 밑에 늘어놓고는 흙을 넣고 돌을 날라서 물길을 막았다. 명병은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동문(東門)을 나와서 청병과 마주 진을 치고 서로 버티었다. 청병이 바야흐로 다리를 빼앗으려 할 즈음, 마침 수구(水口)가 막히어서 물이 거의 마를 지경이므로, 사기의 선봉이 해자를 건너 고함을 치면서 동문 밖으로 엄습하자, 명병도 이에 맞서 역전했으나, 청병 홍갑(紅甲) 2백 명과 백기(白旗) 1천 명이 내닫는 바람에 죽은 명병이 해자에 가득하였다. 청병이 무정문(武靖門) 다리를 빼앗고 양쪽으로 나누어 지키는 명병을 치니, 명병이 성 위에서 끊임없이 화포(火砲)를 터뜨리었다. 청병도 이에 용감히 맞서 서성(西城) 한 쪽을 빼앗고 민중들을 베니, 성 안이 요란하였다. 이날 밤 성 안에 있는 명병이 횃불을 들고 싸울 때, 우유요(牛維曜) 등은 성을 넘어 달아났다. 이튿날 아침에 명병이 다시 방패를 세우고 힘써 싸웠으나, 청 사기의 군사가 역시 성을 타고 올랐다. 경략 원응태는 성 북쪽 진원루(鎭遠樓)에 올라서 싸움을 독촉(督促)하다가 성이 함락되는 것을 보고 누(樓)에 불을 놓아서 타죽고, 분수도(分守道) 하정괴(何廷魁)는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우물에 빠져 죽고, 감군도(監軍道) 최유수(崔儒秀)는 목매어 죽고, 총병(摠兵) 주만량(朱萬良), 부장 양중선(梁仲善)과 참장(叅將) 왕치(王豸)ㆍ방승훈(房承勳)과 유격(遊擊) 이상의(李尙義)ㆍ장승무(張繩武)와 도사(都司) 서국전(徐國全)ㆍ왕종성(王宗盛)과 수비(守備) 이정간(李廷幹) 등은 모두 전사하였다. 어사(御史) 장전(張銓)은 청병에게 사로잡혔으나 굴복하지 않으므로, 누루하치가 죽음을 내려 순국(殉國)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게 하였다. 홍타시가 장전을 아껴서 살리려고 여러 번 타일렀으나 마침내 뜻을 빼앗을 수 없었으므로, 부득이 목매어 죽이고 장사를 치러 주었다. 청나라 황제(皇帝 고종(高宗))가 작년에 전운시(全韻詩 어제전운시(御製全韻詩))를 지어 이 성이 함락한 사실의 시말을 상세히 적고 또 말하기를,
“명의 신하로서 항복하지 않는 자에게 우리 선황제께옵서 오히려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때 연경에 있는 명의 군신(君臣)들은 도무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과 죄를 밝히지 않았으니, 그러고서야 망하지 않으련들 될 수 있으리오.”
“웅정필이 광녕(廣寧)을 구출하지 않았을 때에 삼사(三司) 왕기(王紀)ㆍ추원표(鄒元標)ㆍ주응추(周應秋) 등이 정필을 탄핵하기를, ‘정필의 재식과 기백이 일세를 비웃을 만하므로 지난해에 요양을 지키매 요양이 보존되고 요양을 떠나매 요양이 망했으나, 다만 그 교만하고 괴퍅한 성격은 고칠 길이 없어서 오늘에 한 소(疏)를 올리고 다음날에는 한 방(榜)을 걸었으니, 그는 양호(楊鎬)에게 비하여서는 도망친 한 가지 죄가 더하고 원응태처럼 죽지도 못하였으므로, 만일 왕화정(王化貞)을 죽이고 정필을 살려둔다면 죄는 같음에도 벌이 다른 것입니다.’ 했다.”
하였다. 이제 당시의 토벽(土壁)이 예와 같이 둘러 있고 벽돌 흔적이 오히려 새로우매, 그때 삼사가 탄핵한 글을 다시 외어 본즉, 그의 사람됨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아아, 슬프다. 명의 말운을 당하여 인재를 쓰고 버림이 거꾸로 되고, 공과 죄가 밝지 못했으므로, 웅정필ㆍ원숭환의 죽음을 보건대 가히 스스로 그 장성(長城)을 허물어뜨렸다 하겠으니, 어찌 후세의 기롱을 받지 않으리오. 태자하(太子河)를 끌어서 해자를 만들었다. 해자 위에는 서너 채 고기잡이배가 떠 있고, 성 밑에는 낚시질하는 이가 수십 명이나 되는데, 다들 좋은 옷을 입었고, 그 생김생김이 단아한 귀공자 같다. 모두 성 안의 장사치들이다. 내가 이에 해자를 한 바퀴 돌아서 그 수문의 여닫는 제도를 엿보려 할 때, 낚시꾼들이 왁자하게 웃으면서 낚싯대를 가지고 와서 나를 보고 말을 걸기에, 나는 땅에 글자를 써서 보였으나 모두 슬쩍 들여다보고는 웃고 가버린다. 서문(西門)을 나서 백탑을 구경하다. 그 만듦새가 공교롭고 화려하며, 웅장함이 가히 요동 넓은 벌판에 알맞다. 따로이 백탑기(白塔記)를 썼다.
성언(醒言)성언(醒言)사람을 깨우치는 말이란 뜻으로, 총 3권에 인물평 및 일화, 사론(史論), 필기(筆記), 한문단편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굴러 들어온 복을 차다
누르하치(奴兒哈赤)의 맏아들은 귀영개(貴永介)이다.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이기고 우리나라의 무신 강홍립(姜弘立)을 항복시킨 것이 모두 그의 힘이었다. 둘째 아들 퉁개불(佟介佛)은 정묘호란 때 우리나라를 침략한 자이다. 아홉째 아들 다이곤(多爾袞)은 이른바 섭정왕(攝政王)으로, 병자호란 때 강도(江都)를 함락한 자이다. 다섯째 아들 홍태시(洪太時)는 바로 숭덕제(崇德帝)이다. - 퉁개불은 화석예친왕(和碩禮親王) 대선(代善)이다. 홍태시는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이지 다섯째가 아니다. - 누르하치가 죽자 장자 귀영개가 즉위하여야 했으나 귀영개는 홍태시의 호방함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였고, 홍태시는 사양하지 않고 즉위하였다. 귀영개는 왕위를 잃고 나서 뜻을 얻지 못하여 우울해하다가 마침내 처자를 데리고 우리나라로 망명해 왔다. 우리나라에서 다만 항복한 포로로 그를 대하니 굶주리고 곤궁하여 의지할 데가 없었으며, 자식의 혼인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여 사랑하는 딸을 무인(武人) 박륵(朴玏)에게 첩으로 주어서 아들 둘을 낳았다. 병자호란 때 남양 부사(南陽府使) 윤계(尹棨)를 죽이고 청나라에 항복하였는데, 홍태시가 예전처럼 대우해 주고 박륵의 두 아들까지 함께 심양으로 데려갔다. 가령 우리나라가 귀영개 대하기를 가의(賈誼)가 삼표오이(三表五餌)로 오랑캐를 회유하였던 계책처럼 하여 그의 충심을 받아들이고, 병자호란 초기에 그에게 북쪽 지역의 군사를 주어 곧바로 만주로 쳐들어가게 해서 후당(後唐) 용민(龍敏)의 계책처럼 하였다면 오랑캐들이 반드시 군대를 돌려서 스스로를 구원하기에도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진기한 보배가 제 발로 왔는데도 쓸 줄을 몰랐으니 애석하도다.
영원성(寧遠城) 동쪽에 구혈대라는 곳이 있는데 가운데가 불룩한 작은 언덕이다. 과거 누르하치가 심양(瀋陽)을 점거하고는 호시탐탐 중원을 노려보면서 수만의 정예병을 모아놓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때 원숭환이 와서 영원을 수비하자 오랑캐는 평소 그의 위명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군대를 주둔시킨 채 꼼짝도 않으면서 계속 사람을 보내 명군을 정찰하였다. 원숭환은 짐짓 본모습을 감추고 날마다 막료들과 장기나 두면서 군무를 다스리지 않았다. 오랑캐는 원숭환이 하는 짓을 계속 듣게 되자, “저자는 허명일 뿐이다.” 하고는 기필코 원숭환을 섬멸하고 서쪽으로 진군할 각오로 군대를 총동원하여 출격하였다. 영원성은 심양에서 670여 리 떨어져 있었는데 급보가 끊임없이 날아들었지만 원숭환은 듣지 못한 것처럼 태연하였다. 오랑캐 군대가 10리 밖에 이르자 비로소 호위병을 배치하고 성 위에 버티고 앉으니 위엄이 늠름하여 아무도 감히 우러러 쳐다보지 못하였다. 순식간에 오랑캐가 이미 성곽에 달라붙어 외성이 대번에 격파되고 오랑캐 기병이 모두 성안에 들어오자 군중이 모두 두려워하며 떨어 성이 금방이라도 함락될 듯하였고, 오랑캐 역시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원숭환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쳐다보면서 다만 성가퀴의 사졸들에게 솜을 뭉쳐 불씨를 싸서 밖으로 마구 내던지게 하니, 오랑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다만 대오를 정돈하고 서 있었다. 잠시 후 지뢰가 사방에서 터지고 포환이 여기저기서 날아와 사람과 말이 함께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피를 뿌리며 떨어지더니 철기(鐵騎) 수만이 일시에 모두 섬멸되었다. 연기와 화염이 조금 잦아든 뒤에 원숭환이 동쪽을 바라보고 놀라서 말하기를,
“내 오랑캐를 다 죽였다고 여겼는데 여전히 저 언덕에 모여 있는 자들이 있으니, 필시 그 추장일 것이다.”
하고는 사자(使者) 편에 술 한 동이와 돼지 네 마리를 보내 위로하였는데, 누르하치가 과연 수십 기를 거느리고 탈출한 것이었다. 추장이 원숭환의 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술 한 사발을 들이켜더니 피를 몇 되나 토하고는 통곡하고 떠나자 원숭환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하늘의 뜻이다. 추격하지 말라.”
아마 원숭환이 영원진에 와서는 은밀히 지뢰포(地雷砲)를 외성(外城)에 묻어 놓고 오랑캐가 이르기를 기다렸는데 좌우의 막료 역시 알지 못한 듯하다. 누르하치가 심양으로 돌아가 울분 끝에 병이 났는데, 임종할 무렵 여러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우리의 장수 중에 원숭환만 한 자가 없으니 그를 제거한 뒤에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누르하치가
“네 말이 맞다. 내 뜻을 이룰 자는 바로 너로구나.”
하였다. 홍태시(洪太始 청 태종)가 그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수만금을 가지고 이간계를 써서 원숭환은 끝내 살해되고 천하는 마침내 청나라의 소유가 되었다. 다이곤이 군대를 이끌고 북경(北京)에 입성한 뒤에 그 언덕에 비를 세우고는 ‘구혈대’라고 이름 지어 창업의 자취를 나타냈는데, 이로 인해 명나라의 실책이 더욱 드러나 후세의 경계가 될 뿐이었다. 아,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명사(明史)》에 영원성의 승리를 기록하기는 했으나 사관이 청나라 조정 때문에 꺼려서 전투의 전말을 다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투가 있을 당시 우리나라 사신이 마침 영원에 이르렀다가 그 대첩의 현장을 눈으로 직접 보고 돌아와 우리나라에 전하여 원숭환의 공적이 그 덕분에 사라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구혈대가 남아 있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1369 원조와 고려간의 관계가 단절됨 ......이후 1377까지 북원과 부분적으로 교류함 1439 오이라트(서몽골)의 에센이 사실상 전 몽골의 지도자가 됨 1491 다얀 칸이 오이라트를 격퇴함 1578 내몽골 지도자 알탄 칸과 티베트의 종교 지도자 소남 갸초가 청해호반에서 회동함 1586 아바타이 칸이 할하(외몽골)에 에르데니 주사(사)를 건설 1616 누르하치가 후금(後金) 건국함.
1809 제 4대 보그드가 후레에 간단테그친링사(사)를 건설함 1861 후레에 러시아 영사관이 개설됨 1911 청조가 무너지고 외몽골이 독립을 선포함 제 8대 보그드를 신생 몽골국 수반으로 추대함 1915 몽골. 중국. 러시아의 캬흐타 조약으로 외몽골이 중화민국의 자치국으로 전락. 1921 몽골 소련 외교관계 수립. 몽.소 연합군이 우르가(현 울란바타르)를 완전히 접수함 (두흐바타르의 인민당이 공산혁명에 성공) 1924 몽골 인민공화국 성립(인민당-인민혁명당) 1929 귀족과 사원 재산을 몰수하고 목축에 대한 집단화 시작함 1932 승려들이 반란을 일으킴 1937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숙청함(-1938) 1939 몽. 소 연합군이 동몽골 할힝골에서 일본군 격퇴(노몽한 사건)
청나라 서북부 신장-위구르 지역과 카스피 해, 그리고 외몽골가 티베트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혹자들은 이 제국을 유목민 최후의 제국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만주족인 청의 등장은 북방 유목민족의 흥망을 바꾸게 된다. 계속되는 내분과 청의 정벌로 몽골은 사실상 분열되고 정복되거나 힘을 못 쓰는 상황이였다. 그 반면 중국 서쪽의 오이라트는 준가르를 중심으로 뭉쳐서 단합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지도자로 갈단이 등장하면서 이후 청조에게 군사적으로 위협적인 존재로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한다.
청군과 준가르군의 전투.
결국 서역의 교역로를 안정화하고 몽골과 티베트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강희제는 오랜 준비 끝에 준가르 원정에 나서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기는 하나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 못해 결국 얻은 성과는 미미했다. 갈단이 죽은 후에는 체왕 랍탄이 뒤를 이어 전성기를 구가하여 카자흐스탄에서 티베트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때문에 준가르 제국에 로망을 느끼는 이들도 있으나 애석하게도 준가르 제국의 국력은 인구수나 농업 생산력으로 러시아나 청조에 비하면 여전히 약한 수준이였다.
여하튼 세력이 팽창한 준가르는 과거 비슷한 유목제국을 세운 몽골처럼 후계자 문제로 내분크리가 작렬해 약화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건륭제가 즉위하고 청나라는 본격적인 준비 끝에 다시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압도적인 청의 국력과 내분이 겹친 준가르는 결국 후계자싸움에서 역전을 노린 아무르사나의 투항으로 청에 복속된다. 그러나 청이 한고조의 토사구팽을 거울삼아 준가르 땅을 4명의 대등한 칸을 세워 분할통치하려하자 자기가 혼자 대빵이 될 거라 생각했던 아무르사나가 반발해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한번 배신했는데 두번을 못하겠어? 물론 이미 대세가 기운 판에 상대가 될 리 없었고 아무르사나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갔으나 결구 이역만리에서 죽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가르가 계속 반란과 저항을 할 낌새를 보이자 건륭제는 주도면밀한 준가르 족 학살정책을 벌이기 시작했다. 비록 중국 사서에서는 준가르 족에 대한 절멸 시도를 발뺌하고 있긴 하나 학살하는 장수들에게는 상을 내리고 죽이진 않고 밖으로 내쫓는 장수들에게는 벌을 줬다는 것에서 이미... 결국 다수의 준가르 족은 도망치거나 학살당해 사라진 민족이 되었다. 서하도 그렇고 여기는 아무래도 몰살당하는 마가 끼였나 보다
여하튼 이후 같은 오이라트 민족이였지만 카스피 해까지 이주해온 부족들이 다시 준가르 족이 소멸되어 사라진 땅에 다시 이주할 것을 요청하자 건륭제는 이 지역에 자신의 영향력이 더 강화되는 기회라 여기고 허락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지배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했고 다른 유목민족을 동원해 이들의 귀환을 최대한 저지하려 했다. 결국 이들 오이라트의 마지막 후예는 다시 준가르 분지에 돌아오긴 했으나 계속된 전투와 질병 등으로 6만 9천 정도만이 살아서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준가르는 역사에서 사라졌고 이후 투르키스탄의 부르하 앗딘과 호자 지한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긴 했으나 결국 완전히 평정되고 티베트에서 신장-위구르, 외몽골에 이르는 모든 영토가 완전히 복속되어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후 건륭제는 십전노인이라는 명성을 위해 준가르 지방 원정의 공로를 쪼개 여러 개의 원정으로 둔갑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후 이 지역에 원래 살던 준가르 족이 사라지자 위구르 인들이 번영하게 된다.[1]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며 인근에 톨강이 흐르고 있는 지역에 살짝 위쪽 언덕에위치하고 있다. (N48.01.422 E104.21.091 인근주민들에게 물어 보면 잘 가르쳐 준다)
2011년 9월 25일 일요일 맑음 바람약함
올란바타르에서 130킬로 떨어진 룽솜을 지나 다리를 건너 나오는 삼거리에서 바양헝거르(아르화헤)로 가지 말고 북쪽으로 나온 길을 따라 80킬로정도 더 가면바양노르라는 솜이 나온다. 거기서 30킬로 정도 더 가면 다시칠렌 솜이 나오는데지금 생각에 어는 솜에서 들어가도 상관은 없을 것 같다.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들어가는 비포장도로는 여러갈래로 나온 길이 없어 하나의 길만 잘 찾아 들어가면척트 차강 까지 바로 갈 수 있다. 인내심을 갖고 30킬로 을 달리다 보면 산을 하나 넘게 되고 눈 앞에 (과장을 좀 더 보태서) 인디아나 존스의 영화처럼 갑자기 밀림지대에서 고대 문명의 자취를 발견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비포장 도로는그리 굴곡도 많지 않지만 주변에 잡풀들이 길게 자라 있었고 주변이 원래 호수습지 지역이라 물이 흐르는 골이 군데 군데 있는데 시속 40킬로 이상만 달려도
잘 보이지 않아 급 브레이크를 밟는 경우가 있으니 자가 운전은 주의가 필요하다.
척트는 1600년대 몽골에 만주족 청나라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왕공으로 글도 쓰고 칼도 쓰고 힘도 좀 꾀나 있었던 사람이었다. 지금이야 매우 건조한 지역으로변해가고 있는 이 지역도 호수와 강이 흐르고 있어 가축도 풍부하고 농업하기도 좋은지역이 었다. 또한 위도 47도에 있는 여타 거점 지역(도르노드 아이막 초이발상, 할흐골, 만주)과 같이 초원의 실크로로가 한반도와 중앙아시아를 연결하고 있는역사적인 길목 이었다.
지금의 하라호름 일대는 각종 북방민족들이 탄생하고 흔적을 남길수 있던괜찮은 입지 조건을 같고 있다. 넓은 지역과 강과 습지 구릉 등 등 남쪽의 건조하고 풀이 잘 자라지 못하는 고비와는 다르고 북쪽의 타이가 숲과도 직접 연결 되는 자연적 입지와 '초원길' 중간 이라는 조건도 갖추고 있다.
한마디로 관리와 보존이 없었다. 구릉 지대에 남은 기록 또는 유물로 가치를 지니고 있으나 이마져도 해가 갈 수록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아닐지 걱정아닌 걱정이 들었다. 몽골에서 처음 본 거의 원형이 남아 있는 아치형 문과 하얀 회벽(최근에 페인트 칠한 것 말고) 그리고 진흙으로 구워 만든 벽돌과 심양에서 쓰였을 법한 녹색의 기와까지 그렇게 초원에 널부러져 있는 것이 신기하고 아쉽다.
유비와 서부 아이막(흡스골, 아르항가이+하라호름 등 주요 관광지)을 이어주는 주선 도로가 포장되고 있다. 혹자는 몽골 여행의 매력이 점차 사라진다고도 하나아직도 몽골에는 포장 도로가 아닌 도록가 더 많다. 그리고 아무리 비포장의 자동차 랠리와 같은 맛으로 달리는 여행이라고 하나 정해진 노선에서 벗어나는 일은드물다. 차라리 여정의 중간 중간 이런한 몽골의 현존하는 과거를 찾아 보는 과정을 코스로 넣어 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일 것이다.
몽골 초원에 남아 있는 문명의 흔적 옛 성터를 기대어 별을 보는 여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고 싶다.
아스팔트 포장이 여행이 점점 더 발전하고더 많은 것을 발견하는 좋은 결과가 되길 기원하다.
저 멀리 보이는 성(?) 절(?) 집이 척트 왕공의 하얀 집이다. 오른쪽으로는 가축들이 풀을 뜯고 또 강이 흐르고 있는 습지다. 왼쪽으로는
산이 있다. 배산임수의 환경으로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했다. 지금 남아 있는 흔적을 보고 당시에도 100여년 전에도 똑 같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상력의 빈곤이다. 이러한 건물을 중심으로 물론 게르도 있었을 것이고 부속 시설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스팔트 도로를 벗어나 한참을 달린 뒤에 찾은 쾌감이 남다르다. 포장이 거의 완성단계에 있는 아스팔트 도로로 이동 시간도
단축할 수 있다. 과거 교역로, 때로는 전쟁로로 이용되던 오늘날의 UB-체체를렉간 아스팔트 도로는 과거 초원길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남쪽을 향하고 있는 부분이다. 아치형 문과 오른쪽이 계단이 있는 부분이다. 축대를 높게 쌓은 것은 외부와 차단효과를 높이기 위함일까?
티베트 불교 양식의 건물들은 축대가 높고 그 위에 (라싸의 포탈라 궁 사진처럼 ) 건물을 층층이 깊숙히 만들어 두었다. 깊고 어두운 티베불교
처럼
성벽이 잘 보존된 쪽이다. 중간에 돌들은 복원의 흔적 처럼 보인다.
오늘날 이러한 벽돌식 건축의 흔적은 올란바타르 간등사원의 아랫 단에서 볼 수 있다.
뒷쪽이다. (산을 향한 부분) 벽돌이 흙이 되었는지 시간이 지나다 보니 홍수도 나고 계곡에서 바람이 불어 축대 만큼 땅이 올라 왔다.
내부에서 바라 본 모습
벽돌이 이렇게 가지런히 엎어져 있는 것을 보면 최근에 무너진 것이 아닌가 추측도 되었다.
갑자기 불국사의 모습이 떠올랐던 계단 축대 부분
회벽의 흔적이 가장 온전하다.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몽골어로 세겨진 비석이다. 뜻은 전문가에게 문의하시길
주변을 둘러 보다 무엇인가 글씨나 그림이 세겨져 있지 않을까 했는데 기와에 무늬(?) 또는 글씨가 남아 있는 조각을 볼 수 있었다. 자연적으로 생긴 흔적은 아닌 듯 싶었다. 400년전의 흔적을 오늘날에 발견하는 기분과 수집의 유혹도 있었지만 손대지 않았다.
이 또한 내부에서 발견한 미스테리한 손자국, 최근에 만든 것인지 모르겠으나 어떻게 벽돌에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만드는 과정에서
남긴 흔적인가. 지문까지 선명했다.
내부에는 풀만 무성하게, 옛 부귀영화는 바람에 사라져 버렸다는 말이 딱 들어 맞는다.
바닦에 깔아을 것 같은 판판하고 만질만질한 돌
주변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는 녹색의 기와. 전체적으로 간등에서 볼 수 있는 사원=건축양식이 생각났다.
몽골 사이트에서 검색해본 '척트 차강 배신'(척트에 하얀 집?)
상상력으로 그린 그림이지만 오느날의 폐허를 생각해서 그 옛날의 부귀영화를 그리지 못할
이유는 없다. 역시 관리와 보존이 문제다. 이어진 계단과 축대를 쌓고 그 위에 티벳+청의 양식으로
건물을 올린 모습이다.
** 개인적으로 이 유적들이 신기하여서 계속해서 인터넷에서 관련 기록을 찾아 보고 있다.
특히 한국 쪽으로 기록들을 그증에서도 한 블로그에 나와 있는 소개다. 몽골학 연구자인 박원길 교수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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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전 8시 20분 그 곳을 떠나 “촉트홍타이지”의 성으로 가고 있는데 오전 8시 55분 (고도 1020m)에 거대한 “오보”를 만났다. 보통 “오보”는 직경 5~10m인데 이것은 굉장히 크다. 대략 층정해 보니 직경 70m나 된다. 흙을 쌓아 올린 아래쪽은 500m x 500m 정도로 그 규모는 엄청나다. 부근의 “겔” 주인에게 물어 보니 「칭 돌고이오보」라고 하며 저쪽에 성터가 있다고 가리켜준다. 우리들은 오보와 성터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성 터는 “칭 돌고이오보”로부터 약 1.5㎞ 떨어진 곳에 폭 1㎞, 길이 3㎞의 사각형토성이 정확하게 남북으로 배치돼 있었다. 우리들은 한 눈에 이 거대한 오보는 당시의 권력자의 무덤일 것이라고 생각되어, 주위를 살피니 도자기의 파편이 나타났다. 박원길 박사는 이것들을 파 가지고 귀국 후 문화재연구소에 보고하기로 했다.
오 전 11시 48분 “다쉬칠렝”마을을 지나갔는데 이곳은 전기도 들어오고 있었다. 오전 12시 25분(기온 32℃) 「촉트홍타이지」의 고성에 도착했다. 제5대 “달라이라마”의 구원요청을 받은 황교신자 “바이타르홍타이지”의 공격을 받고 1637년 “촉트홍타이지”의 3만대군은 청해에서 전멸됐다. 성은 폐허로 변했고 4개의 망루 중 한 개만이 남아 있었다.
옛 영화는 어디로 가고 지금은 폐허만 남았는가?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하면서 고성을 떠났다. 오후 3시 48분 술병과 목발이 많은 “오보”(해발1240m)에 도착했다. “오보”의 표면은 반이 술별으로 덮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