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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경순왕은 재위 9년만에 자신을 세운 견훤을 떠나 고려의 왕건에게 천년 사직을 바치고 만다. 성난 표범과 같이 광포한 견훤과는 달리 "아버지 같이 부드럽고 법도가 있었으며 부하 군병들까지도 정숙하여" 왕실 안팎의 인심을 샀던 왕건에게 마음이 더 끌린 까닭이다. 왕건은 경순왕을 태자의 지위보다도 높은 정승공에 봉하고 유화궁을 하사했으며 자신의 딸 낙랑공주를 주어 혼인케 하는 등 극진히 대우했다. 녹 1천석과 함께 경주를 식읍으로 주기도 했다.
978년 4월 4일 왕이 승하하자 신라의 유민들이 대성통곡하며 구름같이 몰려들어 영가를 선왕들이 있는 고국땅 경주로 모시고자 했다. 그러나 어찌 이 요구가 받아들여질 것인가.
그 뒤 800여 년 동안이나 잊혀져 방치되고 있던 것을 조선 영조 때 김성운 등이 명문이 새겨진 비석을 발견하여 경순왕릉임을 밝혔다. 이에 영조는 왕릉의 예로 조성할 것을 명해 이 때에 능의 석조물 등이 조성되고 정비되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개성과 거의 일직선상에 위치할 만큼 최북단에 자리한 까닭에 찾는 이들의 발길이 뜸할 수밖에 없다. 경순왕은 이래저래 오늘도 쓸쓸히 멀리 임진강을 바라보며 누워 있을 뿐이다. 망국의 아픔도 모자라 분단의 상처를 온 몸으로 겪고 있으니 이보다 더한 비운의 왕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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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작년 봄에 조기 가봤는데 좋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