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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누가복음 11:1-13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색동교회가 이전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것이 6월 16일이었는데, 지난 7월 22일에 건물계약을 완료하였다. 일이 척척 잘 이루어진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40일도 채 안되어 모두 마음에 들어 하는 예배공간을 마련하게 되어 참 기쁘다. 여러분이 합심하여 일치된 기도를 한 덕분이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그런데 60년이 지나도록 안 풀리는 기도도 있다. 어제 남과 북 양쪽은 물론 미국과 중국에서 커다란 행사가 동시에 열렸다. 6.25전쟁 휴전을 기억하는 정전 60주년 기념식이었다. 1953년 7월 27일에 널문리(판문점)에서 유엔군과 북한과 중국군 사이에 휴전 조인식이 있었다. 당시 남한정부가 조인식 당사자로 참여하지 못한 것은 현대사의 비극이다.
양 쪽이 서로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비극이다. 한반도 안에서 3년 동안 전쟁을 벌인 결과 우리 민족만 25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또 중국군과 미군은 남의 땅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다. 양민학살, 상이군인, 이산가족, 전쟁고아 등 전쟁의 피해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도 큰 시련을 주었다. 지난 60년 동안 지금까지 얼마나 큰 전쟁후유증과 공포, 아픔, 분열 속에 살아왔는가?
3년 동안 사용한 폭탄이나 참전국 수가 제1차 세계대전 수준이라고 하니, 얼마나 큰 참화가 이 작은 한반도 안에서 벌어졌는지 알 수 있다. 정전협정은 전쟁 발발 후 1년이 지난 1951년 7월부터 시작되었다. 전쟁은 벌어졌는데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전쟁임을 양쪽이 깨닫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제한전이 벌어졌는데 정전협정에 도장을 찍는 순간, 그때까지 차지한 점령지역이 내 땅이 되기 때문에 서로 땅을 빼앗으려는 숱한 고지전이 벌어졌다. 그래서 장기화할수록 군인의 희생이 엄청났다.
어제 뉴스를 보니 두 가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더라. 하나는 유엔군 참전 60주년을 기념하고, 또 하나는 DMZ이 조명을 받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비무장지대는 60년 동안 사람이 드나들지 못한 결과 이젠 생태와 평화를 상징하는 세계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우리는 얼마나 기도했던가? 남과 북의 평화를 위해서, 더 이상 전쟁이 그치고 평화롭게 살기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지난 60년 동안 공염불에 그치고 말았다. 그 많은 기도가 말로 그친 까닭은 진정한 화해의 마음, 용서의 마음, 일치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기도를 그칠 수 없다. 무엇보다 우리가 기도를 잘못 드렸다면 겸손히 진실한 기도를 배워야 한다.
1)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주 홀로, 한적한 곳에서, 또 이른 아침이나 밤늦게 기도하셨다. 이를 지켜본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1).
당시 유대교에는 기도 전통과 기도 양식이 있었다. 이제 예수님의 등장과 함께 제자들은 새로운 시대의 기도를 요청한다. 그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우리에게 익숙한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은 공동체의 기도이다.
기본적인 간구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다스림이다. 우리가 늘 반복하는 주기도문은 개인의 요구 이전에 하나님과 그 영광을 선행하고 있다. 그리고 개인의 생활 전반에 대한 간구를 담았다.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간구와 함께 오늘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날들을 귀하게 여긴다. 주기도문은 현재와 미래를 위한 기도의 모범이다.
주기도문은 기도에 관한 한 절대답안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이니 얼마나 소중한가? 교회의 오랜 전통을 간직해온 동방정교회는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 마다 이렇게 선언한 후, 고백한다.
“오, 주님! 우리를 용납하옵소서. 우리가 기쁘고 담대하게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을 받아 주옵소서”. 그리고 다 함께 주기도문을 암송한다.
마치 예수기도를 드릴 때 짧은 회개를 한 후 암송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오늘 본문은 기도 교훈의 3단계를 보여준다.
먼저 기도의 모범인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2).
두 번째로 친구 간 비유를 들면서 체면불구하고 조르고, 또 졸라대라고 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8).
더 나아가 부모 자식 간의 비유를 들면서 기도에 응답하실 하나님에 대해 확신을 가지라고 하신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3).
2)
누가복음은 압축된 주기도문을 소개한다.
첫째, 먼저 하나님을 부른다. 아람 말의 다정다감한 “아버지(압바)여”(2)는 아주 친밀하다.
둘째, 주기도문에는 세상의 공통된 요청인 ‘하나님 나라’부터 인간 개개인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일용할 양식’부터 까지 모두 담겨있다. 하늘의 기도와 땅의 기도가 균형 잡혔다.
셋째, 일곱 가지 간구 중 ‘일용할 양식’을 모든 요청의 중심에 두셨다.
여러분은 주기도문의 간구 중에서 무엇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가?
나는 청년시절에는 “나라가 임하시오며”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한다.
예수님의 생애를 연구한 존 도미닉 크로산은 주기도문 연구서인 <가장 위대한 기도>를 썼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가장 위대한 기도는 온 세상과 온 지구를 향해 말해야 한다”고 하였다.
헬무트 틸리케 목사 역시 주기도문 설교로 유명하다. 그는 주기도문을 ‘세계를 부둥켜 안은 기도’라고 하였다.
그는 주기도문을 11차례로 나누어 강해 설교하였다. 이것을 책으로 묶은 것이 <세계를 부둥켜 안은 기도>이다. 주기도문 설교는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를 배경으로 한다. 나치의 공포정치가 몰락하고 있으나, 이와 함께 밤낮없이 연합군의 공습이 계속되었다. 주기도문 설교는 나라와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붕괴되고 점령되던 시기에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두 달 반 동안 나눈 말씀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슈투트가르트 병원교회에서 시작했는데, 어떤 때는 방공호에서도 설교했으며, 마지막 설교를 마칠 때는 부서진 마태교회의 좁은 별관에서 했다고 한다. 폭격으로 더 이상 예배당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틸리케 목사는 설교를 할 때에 회중의 얼굴에 쓰인 운명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언제 또 공습사이렌이 울릴까 하는 긴장으로 가득하였다. 6-7년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겪은 시련과 고통이 가득하였다. 영과 육이 함께 겪는 고통 속에서 참 위로에 대한 목마름으로 가득하였다. 이러한 생생한 현실을 설교자가 외면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설교자의 설교에도 반영되었다.
그는 말한다. “주기도문은 진실로 세계를 부둥켜안은 기도입니다. 세상에는 소소한 일상의 일이 있는가 하면 ‘세계사의 시각에서 바라봐야할 문제’도 있습니다. 행운의 시간이 있는가 하면 끝 모를 처절한 고통의 시간도 있습니다. 민간인이 있는가가 하면 군인도 있습니다. ‘늘 동일한 수고의 시간’있는가 하면 재난이라는 섬뜩한 비상사태도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기를 맞아 그는 다시 말한다.
“온 세상이 주님의 손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면서 그 세상을 하나님께 들어 올릴 때, 세상은 우리 손 안에도 들어있습니다. 바로 그 기도로 이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는 것,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이 있을까요?”
3)
주기도문처럼 인류의 위대한 기도 유산이 또 있을까? 기도는 일회용이 아니다. 순간순간 응급처방에 그칠 수도 없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9-10).
기도에 가르침을 요약하면 ‘네 삶이 하나님 안에 달려있으니 주님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리차드 베커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동정을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일이다”.
우리의 인생은 기도의 내용과 기도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다. 기도는 인간의 생 그 자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정신적 바탕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기도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생의 진로와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 기도를 돌아보라. 기도의 주어는 내가 아니다. 기도의 주어는 하나님이시다. 그 기도에는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로 가득하다. 그동안 신앙생활에서 내가 중심이었고, 주어였던 그 자리에 다시 주님을 모시어 들이는 내면의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 그분의 뜻대로 사는 일이다.
또한 죄인의 자리에서 서서 의인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의인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뢰하며 모든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굳게 매달리는 사람이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
좋은 신앙공동체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이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면서 미워하거나, 다툴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기도하는 순간 이미 화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특히 “서로 기도하라”(16)는 중보 기도는 다른 사람의 짐을 서로 나누어지는 일이다.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으로 하여금 합심하고 연대하게 한다.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기도는 생활이며, 권리이자, 의무이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믿는 구석이 아니라, 믿는 중심이 있다. 그러기에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생활이고, 습관이 되어야 한다. 기도생활을 하는 우리들은 주님한테서 오는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세상을 이길 힘을 얻는다. 기쁨과 평화를 체험한다. 그래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영등포의 요양병동에 가서 1년 간 예배를 인도한 일이 있다. 대부분 치매환자여서 아무도 설교를 이해할 리 없다. 무슨 설교를 해야 할 지 늘 곤혹스러웠다. 다만 예배 중에 반응하는 경우가 있었다. 찬송을 부를 때이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을 부를 때에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들도 아는 척을 한다.
유명한 스탠리 하우어워스도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라는 책에서 그 경험담을 소개한다. 그가 어머니를 뵈러 양로원에 갔다. 마침 식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어떤 설교자가 열정적으로 설교를 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죽음을 눈앞에 둘 정도로 나이가 많은 이들이라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설교자가 주기도문을 하자 모든 노인들이 따라서 드렸다고 한다.
그는 놀랐다. 주기도문이 노인들의 몸에 체화된 것이었다. 그는 자기 경험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죽는 순간에 주기도문이 저절로 나올 수 있도록 주기도에 힘쓰라. 다른 기도를 모른다고 해도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리고 잠들기 전에 주기도를 드리시오”.
주기도문을 일상 속에서 살라는 말이다. 우리의 영혼 안에 주님의 기도를 담아내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 안에 내 영혼을 담아내는 일이다. 그리하여 숨을 거두는 순간, 주기도문을 드리기를 바란다.
주기도문이 그렇듯이 하나님에게 세상의 평화와 내 삶의 평안을 위한 기도는 둘이 아니라 하나와 같다. 여러분은 이 땅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라. 동시에 내 삶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 세계를 부둥켜안고 또한 네 삶을 붙잡으라! 순간순간을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또 내 인생을 통틀어서 하나님을 향하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내가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