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기란 김석년 목사님의 책<쉬지 않는 기도>에서 제시한, 정시 기도로 아침에는 사도신경, 점심에는 십계명, 저녁 취침 전에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함을 뜻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이 세 기도를 드린 자들은 이 기도의 유익과 복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 어떤 제목들로 기도할 수 있을지 살펴봅시다.
I. 세상 한 가운데서 사도신경을 고백하다.
사도신경의 형성 과정과 중요성
사도신경은 오랜 형성 과정을 거쳐서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사도신경은 세례 문답용으로 세례를 받기 위해 기본적으로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질문이 있었고, 이에 대한 답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런 형식의 문답이 2세기부터 등장하였고 그러다가 점점 확장되고 이단에 대한 반박을 위해서 첨가되어 8세기에 들어와 오늘날의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사도신경을 작성한 이는 사도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신앙고백에 사도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는 가장 온전한 신앙고백, 그래서 가장 권위적인 고백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믿어야 할 모든 내용을 다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서 성령님과 교회,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우리가 믿는 내용이 사도신경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 사도신경을 그대로 아멘으로 고백하는 것을 뜻하고, 믿음이 좋다고 하면 바로 사도신경의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신경’ 이란 뜻은 굳게 믿고 지키려는 생각 혹은 신념을 말합니다. 사도신경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 고백이기 때문에 고백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따릅니다.
2. 세상 한 가운데서 혼자서 고백하는 일
그러면 아침에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기도한다는 것은 어떻게 기도하는 것일까요?
1) 세상 한 가운데서 우리의 믿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이 세상을 패역한 세상이라고 하는데, 패역한 세상은 보이는 것만을 전부인 것으로 아는 세상,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 패역한 세상에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교회와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미래에 대한 고백합니다.
2) 아침에 드리는 사도신경은 혼자서 하는 고백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사도신경을 교회에서 다 함께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도신경은 “우리가 믿는다”는 고백이 아닙니다. “나는 믿습니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그동안 나 자신의 고백을 교회에서 예배 중에 함께하였다면, 이제 나 자신의 고백을 세상 한 가운데서 혼자서 고백합니다. 즉 그동안 중창이나 합창이었다면 이제 독창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 이 고백을 하면서 기도할 때 우리는 자기를 점검하게 됩니다. 내가 믿고 있는지, 그리고 그 고백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를 말이죠.
3. 사도신경과 기도
1) 성부 하나님
사도신경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첫 번째 ‘나는 믿습니다’ 사도신경은 믿음의 고백이기 떄문에, 믿는다는 말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라틴어 Credo(끄레도)라는 동사는 Cre(끄레)는 ‘심장’이고 do(도)는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내 심장을 드리고, 내 생명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내 생명보다 귀하기 때문에 내 생명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내 생명이 비로소 참된 생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구조상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창’조주를 믿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지만, 앞으로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믿습니다’는 내 심장을 드립니다‘라는 심정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내가 믿습니다)
이 고백은 미물에 지나지 않는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다는 의미와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달라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믿는다는 것으로 나의 정체성이 재 정립 될 것입니다.
전능하신 (omnipotentem)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에서 유로 창조하신 분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곧 무에서 유를 창조해서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엘 샤다이’입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서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최초로 계시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첫째 언약을 반드시 성취한다는 의미요, 두 번째는 ‘샤다이’는 ‘샤다드’에서 온 말로 ‘산 봉우리, 젖 가슴’이란 뜻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양육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어떤 상황에 처하든 상황이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신앙고백하는 사람은 그분이 주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상황 위에 서 있어야 상황에 침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이 같은 성부 하나님의 고백을 제대로 드리면 우리의 삶은 확연히 달라질 것입니다.
4. 성자 예수 그리스도
사도신경의 두 번째 단락은 성자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원문 ”ET IN JESUM CHRISTUM (에뜨 인 예숨 끄리스뚬) 에서도 사도신경이 첫머리의 동사 Credo (끄레도:믿는다)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입니다.
“그의 유일하신 아들” 이라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분이 나의 죄를 속해 주신 그리스도인 것을 믿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외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곧 독생자입니다. 독생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것은, 유일하신 아들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역사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독생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이 모든 능력과 성품을 백 퍼센트 지니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그는 성령으로, 거룩한 이에 의해서 잉태되셨다는 뜻입니다. 이 의미는 성령님에 의해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때까지 인간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에 의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잉태되어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구절을 외울 때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그분이 우리의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에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진정 믿는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으며 절망거리가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못 넘을 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령으로 잉태된 성자 하나님은 ’동정녀 마리아 몸에서 인간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낮춰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겪는 모든 희노애락을 그분은 친히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한계를 이해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은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나를 알고, 이해하고,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그가 시련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우리의 믿음의 핵심인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의 이야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일상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요, 하나님께 하찮은 인간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먼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입니다.
사도신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인데, 내용 중에 마리아와 본디오 빌라도라는 두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은 대조되는 이름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존귀한 사람이 되었고, 본디오 빌라도는 성자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서 사람 중에 가장 저주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나는 어느 쪽에 속해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마리아처럼 주님께 순종의 길을 걷고 있는지, 아니면 본디오 빌라도처럼 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자기 욕심과 주위의 압력 때문에 타협하여 진리의 어긋나는 길을 가고 있는지 스스로 살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까?
그것은 나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온몸으로 찢기시고 상하시고 징계받음으로 우리의 형벌과 저주와 심판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구원을 완성하신 것 입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요19:30)“
나의 구원을 성취하신 그분을 믿고 영접할 때 그분과 내가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연합된 자만이 비로소 그분 안에서 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고백을 통해 매일 이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실제로 죽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죽으셔야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써 우리의 죄 값을 완전히 치러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으심으로써 죄인인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부활하신 당신 안에서 영원히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의 처절함을 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부와 성령으로부터 단절됨을 아셨고 외면당하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
잔은 마시는 음료수의 잔, 그릇입니다. 그런데 은유적 의미로는 ”고난, 죽음, 순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바뀝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아버지의 뜻을 알기에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예수께서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까지 우리를 위해 주셨으니 우리도 당신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결단과 함께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장사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예수님은 죽으셨고 시신이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무덤의 의미까지도 새롭게 하셨습니다. 무덤은 우리의 종착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예수님은 장사 된지 세 번째 날에 부활하셨습니다. 시간적으로 이틀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흘만이 아닌, 사흘째 되는 날, 죽은신 지 세 번째 되는 날에 부활하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하늘에 오르시어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늘에서부터 인간 세상으로 잉태되어 들어오셨다가 구원 사역을 마치신 뒤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문구는 구원이 철저하게 하늘 위에서 내려온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제나 하늘을 우러러 살아야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여기서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심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천 년 전에도 성자 하나님이셨고, 지금도 성자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거기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때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이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늘로부터 임하실 것입니다. 재림의 주님을 심판 주로 오실 것입니다. 재림의 주님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그 심판은 영생과 영벌입니다.
5. 성령 하나님
세 번째 단락은,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나는 성령을 믿으며’
원문은 ‘CREDO IN SPIRITUM SANCTUM’ (끄레도 인 스삐리뚬 상뚬)입니다. 성령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님께 내 심장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성령님은 누구십니까?
첫째는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은 언제나 진리의 영이요 진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를 깨닫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도록 하는 분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실존을 경험케 하신 분이십니다.
둘째는, 보혜사(파라클레토스)이십니다.
‘보혜사’는 ‘옆에서, 곁에서 돕는 자요, 위로하는 자요, 상담자요, 인도하는 자’ 란 뜻입니다.
내 옆에서 영원히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보혜사 성령님과 사귐과 교제와 대화를 통하여 친밀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셋째,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성령님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힘이나 능력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큰 잘못입니다.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삼위의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지만, 그 인격은 셋으로 존재하십니다.
삼위는 서로 의존적이시고 한 분이시며 선하시고 전능한 삼위일체이시다.
관계적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삼위는 동등한 본질이며, 상존하며, 상호관계하며, 상호 개방적이고 상호 자기수여적이시다. 존재 방식에 있어서 함께 하시며, 서로 격려하시며, 서로 춤추며, 서로 맴돌며, 서로 너풀거리신다.
우리가 성령님께 우리의 심장을 드릴 정도로 믿어야 할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거룩한 공회를 믿어야 합니다.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말은 교회가 카톨릭 교회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이란 말을 보편적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의 교회, 보편적인 교회, 사도적인 교회입니다. 보편적인 교회 (Catholic church)는 보편적이란 뜻을 남녀노소 빈부격차를 막론하고 누구나 한테 어울릴 수 있는 교회입니다. 백인과 흑인 부자와 가난한자 수준있는 사람과 못 미치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입니다.
둘쨰, ‘ 성도의 교제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함께 성도가 사귀는 것입니다. 성도가 교통하고 교제한다는 것은 모두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로만 불가능하고 오직 성령의 능력 속에서만 가능함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 기도, 봉사, 권면을 통해 서로 교제하는 가운데 서로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만 드려서는 안 됩니다. 소그룹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심리학자 폴 투르니에’는 세상에서 혼자 할 수 없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결혼과 신앙생활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에는 반드시 성도의 교제가 있어야 함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소그룹을 통하여 서로의 삶을 맞대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우리는 형제자매가 되며, 사랑의 사귐을 나누게 됩니다.
셋째, 죄를 용서 받는 것과
우리에게 죄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죄 용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이자 성도 간 교제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죄 사함의 공동체입니다.
먼저 내가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믿음으로 용서의 확신을 갖어야 합니다. 사죄의 확신이 있다면 이제 나도 남의 잘못을 용서하고, 남의 죄를 탕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안으로 하나님을 뵌 적이 없지만, 죄를 용서해주신 것은 믿습니다.
나도 나에게 잘못하는 자, 나를 힘들게 하는 자, 나에게 손해 끼친 자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엡4:32)
이것 역시 성령님의 역사 속에서 가능합니다.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자각할 때만 가능합니다. 자신의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 아래에서 나의 죄인 됨을 깨닫고, 나의 죄를 대속해 주신 그리스도께 나를 의탁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사람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 아래에서만 나의 죄인 됨과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인 된 나를 동시에 발견하게 됩니다.
넷째,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첫째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몸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초자연적으로 살리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몸의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자들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몸은 몸인데 영적인 몸,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같은 부활체의 몸을 의미합니다.
본래의 상태로의 회복입니다. 주님께서는 죄로 더렵혀진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회복시켜 주실 것이고, 몸의 회복 곧 죽지 않는 몸으로 회복함으로써 구원은 완성될 것입니다.
이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몸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몸은 우리의 영혼을 담는 소중한 그릇과 같습니다. 이것이 전인적인 구원입니다.
우리 몸은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우리 영의 옷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생을 믿습니다.’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영원에 잇대어 살아야 세상에서 자기 욕망의 노예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순례자로 살아야 합니다.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지 못한다면 평생이 세상에서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과 씨름하다가 일생이 끝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호흡이 끝날 때 후회가 막심할 것입니다.
마지막은 아멘(Amen)입니다.
사도신경의 맺은 말의 아멘입니다.
아멘은 ‘진실입니다,’ 믿습니다. 이루어질 것을 바랍니다. ‘동의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이 고백은 모두 진실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한 고백이 된다면 우리의 삶은 반드시 달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