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꽃
“할아버지! 한국의 잔 다르크가 누군지 아세요?”
경준이는 할아버지를 만나자 마자 자랑스럽게 물었다. 새로운 사실을 오늘 비로소 알았다는 듯.
“글쎄, 누굴까?”
“헤헤, 바로 류관순이에요.”
“그렇구나. 그런데 그 보다도 더 닮은 잔 다르크가 있단다.”
“그게 누구예요?”
경준이는 퍽 궁금하였다. 할아버지는 서재로 경준이를 데리고 가서 컴퓨터 앞에 앉으며
“자, 타임머신을 타는 거야.”
하며 옆자리에 경준이를 앉히셨다. 화면이 밝아왔다.
고려-거란 2차 전쟁에서 도순검사 양규의 밑에 있던 이관은 구성전투에서 장렬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굴암산으로 피난 가 있던 홍씨부인은 남편이 전사했다는 슬픈 소식과 유서를 받았다. 이 때 그의 딸 설죽화의 나이는 겨우 열 살이었다.
이 땅에 침략 무리, 수많이 쳐들어와 봐라
고려의 용사들 꿈쩍도 하지 않거든.
후손들도 나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리라
내 긴 칼 높이 들고 내달릴 뿐이네.
홍씨부인은 남편이 남긴 유서에 적힌 시를 읽은 뒤 설죽화를 바라보며
"아, 네가 사내아이였다면 아버지의 유언을 지킬 수 있으련만……."
하고 울부짖었다. 설죽화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단호한 목소리다.
"어머니! 어째서 여자는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 없어요? 저는 아버지의 원수를 반드시 갚겠습니다."
홍씨부인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하지만 설죽화의 소망을 들어주는 건 너무도 힘든 일이다. 귀여운 딸을 남자의 세계, 그것도 목숨이 오가는 전쟁터에 보낼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설죽화의 집념은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날마다 어머니 앞에 끓어 앉아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게 해달라고 졸랐다.
며칠을 고민하던 어머니는 설죽화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장군의 딸로 무술에 능통하였다. 그날부터 궁술, 검술, 창술 등 설죽화는 모든 무예를 열심히 배웠다. 8년이 흐르자 설죽화의 무술 실력은 어머니 기대 수준을 뛰어넘었다.
그해, 거란군이 다시 침입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어머니는 설죽화에게 당장 고려군에 입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유언대로 거란족을 철저히 쳐부수라고 부탁했다.
남자 모습으로 꾸민 설죽화는 강감찬 장군 진영으로 찾아갔다. 설죽화를 두루 살펴본 강감찬이 입을 열었다
"왜 나를 찾아왔느냐?"
"우리나라를 침략한 거란군과 싸우고자 합니다."
흰 얼굴에 오뚝한 콧날,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불그스레한 뺨은 젊음의 기운이 넘쳐흘렀다. 이마에는 단단하게 머리띠를 매고 저고리에 폭이 좁은 바지를 입은 모습이 날씬했다.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는 너의 결심은 훌륭하다. 하지만 너는 아직 어리다. 외적과 싸울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으니 오늘은 그냥 물러가라."
그러자 설죽화는 물러가지 않고, 오히려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당당하게 말했다.
"나라를 지키는데 나이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적을 무찌르겠다는 마음가짐이라 생각됩니다. 받아주십시오."
설죽화의 청이 간절하여 일단 무술시범부터 보기로 하였다. 강감찬은 설죽화의 뛰어난 창검술에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는 하늘을 가르며 번쩍이는 긴 칼과 하나가 되어 능수능란하게 움직였다. 감탄한 강감찬은 설죽화를 믿어 소년 선봉장으로 삼기로 하였다.
소배압이 이끄는 10만의 거란군은 단숨에 고려 수도 개경을 점령하려 했지만, 강감찬의 용맹과 전략으로 그 계획이 실패하였다.
1019년 1월 굶주림과 추위로 지친 거란군은 뜻을 이루기는커녕 도망가기 바빴다. 강감찬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다. 이 때 백마를 타고 질풍처럼 뛰어들어 적군을 대혼란에 빠뜨리는 소년장수가 있었으니!
거란군 대원수 소배압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시체들로 뒤덮인 처참한 모습도 눈에 보이지 않았고, 군사들의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모든 신경은 두 눈을 통하여 한사람에게로 모아졌다.
자신의 친위대 군사들을 벌써 수십 명을 베어버리며 전장을 휘젓고 다니는 저 붉은 갑옷의 고려장수! 분노보다는 놀라움과 신기함이 번갈아 일어나고 있었다.
"내 눈이 잘못된 거 아니겠지?"
특별히 누구에게 물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을 들은 부원수 야율초랑이 대답하였다
"대원수! 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그 말을 듣고 소배압은 그때서야 눈길을 돌려 주변의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부하들은 하나같이 날쌘 용사들이다. 하지만 저 붉은 갑옷 고려장수의 투구가 벗겨졌을 때, 소배압처럼 그의 부하들도 똑같이 깜짝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저 붉은 갑옷의 고려장수에 대해 이를 갈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개경에서 그렇게 급하게 쫓기는 일도 없었을 테고, 저 귀주 땅에서 요나라의 전쟁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큰 패배를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귀주 땅에서 겨우 살아 거란으로 돌아가는 자신들의 앞을 막아 나섰을 때 뒤에서 고려군이 추격해온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반가웠다. 이를 갈던 적의 장수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저 장수의 목만 따가도 요나라의 패전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그냥 증오심과 복수심. 그것이 모두였다. 무조건 죽인다. 무조건.
그런데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났다. 그동안 그는 귀주 땅의 지옥에서도 살아남은 요나라의 내로라하는 장수만도 벌써 셋을 베어버렸고, 친위군사 수십을 쓸어버렸다. 하지만, 요나라 장군들과 군사들이 놀라고 있는 것은 고려장수의 무예보다는 바로 조금 전에 일어난 뜻밖의 사건 때문이다.
장수 둘이 그의 칼날에 잇달아 날아가자 흥분한 장수 설여호가 그에게로 말을 몰아간 후에 벌어졌다. 설여호는 거란군의 뛰어난 용사였지만, 고려장수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가 목이 떨어지기 전에 한 가지 큰일을 해냈다. 그의 할아버지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빼앗은 후 그에게로 물려진 청룡반월도가 고려장수의 머리에서 투구를 벗겨버린 것이다. 그 순간 설여호의 머리는 공중으로 떠올랐고, 거란군도 고려군도 갑자기 싸움을 멈추고 그 장수에게로 눈을 돌렸다. 피로 얼룩진 백마위에 붉은 갑옷을 입고 칼을 들고 있는 이는 뜻밖에 여자였던 것이다. 투구가 벗겨지며 남장하면서 묶어 올렸던 머리가 풀어져 내려 여지없는 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놀라움! 너무나 어린 나이에 거란군도 고려군도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햇볕에 그을리고 피로에 싸인 듯한 얼굴이지만 반짝이는 두 눈을 가진 여신과도 같은 그 아름다움에 모두들 숨을 죽였다.
침묵을 깨고 고려의 군사 중 한명이 말을 몰아 그녀에게로 다가가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말을 걸었다.
"장군. 그동안 저희를 승전으로 이끌어주어 고맙습니다. 장군의 부하인 것이 언제나 자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소장이 간곡히 청하오니……."
그때 붉은 갑옷의 소녀 장군이 한손을 들어올려 군사의 말을 막는다.
"안 중랑장. 뭔 말을 할지 잘 알겠소. 군사들을 전장에 버리고 가는 장수는 장수가 아니오."
그리고 그는 말을 몰아 군사들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여기로 올 때 기마병 결사대 500명을 데리고 왔지만 둘러보니 300명도 채 되지 않은 듯했다. 군사들 앞에 서서 그는 힘주어 말했다
"그렇다. 나는 18살 고려의 처녀다. 하지만 그전에 대 고려의 장수이다. 나라가 저 흉악한 오랑캐들로부터 위기에 처하니 내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이손에 칼을 들고 전장에 나섰다. 나의 아버지도 이 길에서 목숨을 바쳤고 나또한 그리할 것이다. 나라와 백성, 소중한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한 길에 어찌 남녀가 따로 있겠는가! 저 위대했던 고구려를 기억하며 그 후손들임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우리도 우리의 후세들이 본받고 기억하는 그런 위대한 역사를 만들자!"
그 순간 군사들은 환호했다. 눈물 흘리며 팔을 올리는 군사들의 모습은 고려 군사의 자긍심과 저 어린 소녀 장군에 대한 존경심이 넘쳐나 보였다.
한편 거란군 진영에서 누구보다 놀란 소년장수가 있었으니, 바로 소배압의 아들 소적산이었다.
"아니……, 이런! 정말 설죽화로구나. 설죽화가 맞구나."
혼자 낮게 부르짖는 그 말을 바로 옆의 소배압이 듣고 궁금하여 물었다.
"네가 어떻게 저 소녀를 아느냐?"
소배압의 물음에 소적산은 깜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빨리 말하라. 저 소녀는 단순히 한낱 소녀가 아니다. 적장이란 말이다. 이 협곡을 통과하지 못하면 고려 추격 군에게 그나마 살아남은 이 군사들마저 다 잃는다."
그 말에 정신 차린 소적산은 대답했다.
"전에 고려에서 머물다가 돌아온 저에게 아버지께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뭐냐고 물었을 때 제가 말씀드렸던 고려의 소녀가 바로……,"
"음, 그때 너는 고려에서 동무가 된 설죽화라는 소녀라고해서 내가 네 뺨을 때린 일이 있었지. 허허허허……."
소적산은 이전에 소배압의 명령에 따라 송나라에도 가고, 고려에도 가 있었다. 앞으로 요나라 큰 인물이 되려면 그들의 문화와 정치에 대해 배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 그때 너를 혼냈던 것을 사과하마. 너는 훌륭한 인물을 보는 눈을 가졌구나. 이 애비가 이제 한시름 놓아도 되겠다."
그때 부원수 야율초랑이 아뢰었다.
"대원수. 이 좁은 골짜기를 늦어도 해질녘까진 통과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위험해질 것입니다. 이미 고려기병대가 귀주에서 출발한지가 반나절이 넘었다는 전갈입니다."
고려군은 도주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였다. 선봉에 서서 닥치는 대로 거란군을 베어내며 설죽화가 앞길을 가로막자, 거란군이 그녀를 집중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힘껏 몰아붙이며 방어했으나 계속된 공격에 점차 지쳐가기 시작했다. 설죽화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며 버티었다. 머릿속에는 원수를 갚겠다는 굳은 의지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용감히 싸우던 설죽화에게 아뿔싸! 거란군이 쏜 화살 하나가 가슴을 꿰뚫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힌 말 위의 그녀에게 두 번째 화살, 세 번째 화살이 날아왔다. 결국 그녀는 화살이 몸에 촘촘히 박히고 말았다.
치열한 대접전 끝에 고려군은 거란군을 꺾었다. 승리의 함성이 울렸지만 이내 그 함성은 슬픔으로 바뀌었다. 설죽화가 시신으로 누워져 있었다. 설죽화의 말이 주인을 등에 태운 채 본영으로 돌아온 것이다.
전사한 설죽화의 품속에서 유서가 나왔다. 그녀의 유서에는 자신이 지난 전쟁에서 전사한 이관의 딸이라는 것, 남장을 하면서까지 싸워야 했던 까닭, 강감찬에게 사실을 밝히지 못한 점을 용서해달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좋은 꿈을 꾸는 것 마냥 미소 담은 듯한 설죽화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강감찬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젊은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지켰다. 자네 같은 젊은이가 있는 한 우리 고려는 어떤 외적이 쳐들어와도 흔들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장하도다. 그대는 고려의 꽃이요, 고려의 진정한 딸이다."
할아버지는 스위치를 껐다.
“어떠냐?”
“앞장서서 적군을 무찌른 점은 설죽화가 더 가까운 것 같아요.”
할아버지와 경준이는 의미 있는 눈길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경준이는 우리의 역사 속에 설죽화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고려의 꽃! 생각만 해도 뿌듯한 기운이 온 몸에 치솟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