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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유시(畵中有詩) 시중유화(詩中有畵)
최봉동(崔鳳桐) 청산불묵천추화(靑山不墨千秋畵)
화제(畵題)
靑山不墨千年屛 流水無絃萬古琴
청산불묵천년병 유수무현만고금
청산은 먹으로 그리지 않아도 천년의 병풍이요
흐르는 물은 줄이 없어도 만고의 거문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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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유시(畵中有詩) 시중유화(詩中有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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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양화(東洋畵) 이해하기
#2. 화중유시(畵中有詩) 시중유화(詩中有畵)
#3. 조선인(朝鮮人)의 시정(詩情)과 화의(畵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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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양화(東洋畵) 이해하기
동양화는 그림의 재료에 따라 수묵화, 채색화 등으로 분류하고 주제에 따라 산수, 인물, 화조, 초충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서양화와는 달리 휴식과 위안 등의 목적을 가지고 다양하게 그려져 왔으며 지금의 예술보다는 예도(藝道)의 의미로 수행과 함께했다 그림의 용도와 목적에 따라 다양한 형식이 있고 그에 따른 뜻과 의미를 지니게 되는 동양화를 생각할 때 그림 하나하나의 뜻과 의미를 알아가는 것도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동양화가들은 어떻게 주변을 관찰하고 무엇을 중시하였으며 어떠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동양화 와 그 속에 담겨있는 정신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더욱 중요하다 할 것이다
1. 움직이며 관찰한다.
당(唐)의 현종(玄宗)이 가릉(嘉지방의 경치를 그리워하여 오도자(吳道子)로 하여금
그려오게 하였는데 오도자는 가릉지방을 둘러보고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현종이 그 이유를 물으니 “저는 비록 밑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나 모두 마음속에 담아왔습니다”라고 답하였다 훗날 오도자는 대동전이라는 건물에 벽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여기에 3백3여리에 걸친 가릉지방의 풍경을 담아 하루 만에 완성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우선 사물을 관찰함에 있어 동양의 화가들은 고정된 시점으로 바라보지 않고 걸으면서 보고 생각하면서 대상의 각 방면을 세세하게 관찰하며 추후 관찰한 기억에 의거해서 재현하는 방법으로 창작하게 된다. 특정한 시간과 장소 일정한 거리와 각도에서 보여지는 사물을 관찰하고 묘사하며 형태와 빛 색등의 객관적인 상황을 추구하는 고정된 시점의 서양화와는 분명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산수의 경우 서양화에선 고정된 시점으로 보여지는 산의 형상과 명암 색 채의 변화는 반드시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객관적인 요소의 제한을 받게 된다 하지만 동양화에선 산속을 거닐며 경치를 즐길 때 변화하는 봉우리의 모습과 산속에서 만나는 계곡과 작은 암자 숲속의 마을등 마음속에 담아둘 내용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초기 산수화에서부터 이동 시점의 이른바 ‘산의 모습은 걸음에 따라 변하고’, 산의 면면을 모두 본다. 라는 묘사방법이 이미 존재 하였던 것이다
2. 형상보다 그 정신을 취한다.
동양화가들은 현실을 관찰할 때 전면적인 관찰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시종 느낌이 크고 깊으며 생동 하는 면을 취사선택하여 포착하였다 즉 정신이 깃들어있는
부분은 분명하고 정확하게 공들여 표현하고 배경을 포함하여 중요하지 않은 부분은 간략히 하거나 생략하여 여백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이것은 예술적인 중요한 형상을 돋보이게 함은 물론 동시에 보는 이 들에게 더욱 넓은 상상의 여지를 남겨 주게 되는 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 이외에 다하지 못한 또 다른 의미까지 작품에 포함 시키는 것이다
3. 구조적 속성을 묘사한다.
동양화는 빛에 의한 명암의 변화보다 대상의 구조묘사를 중시한다. 수묵의 농담 변화 선의 가볍고 무거움 휘어지고 구부러짐 등은 모두 물체의 조직구조를 표현
하기 위한 것이고 밝고 어두운 처리는 단지 화면의 필요에 따라 적당히 배치하는 것으로 화면의 리듬감과 체적감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다
4. 형상을 기억해서 묘사한다.
동양화는 형상을 기억하는 관찰방법을 강조한다. 이는 복잡하고 잡다하게 얽혀 있는 현상에 얽매이지 않고 관점에 따라 선택된 골격을 생동감 있게 표현할 수 있
게 한다. 왜냐하면 기억속의 형상들은 대상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부분들로 이는 화가의 머릿속에서 종합되고 개괄되어 복잡하고 미세한 부분들이 제거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결국 동양화가들은 대상을 시종 앞에 놓고 천천히 모사함을 반대하고 순간에 발생하는 동세를 포착하여 시각기억 혹은 형상기억에 의해 표현해
낼 것을 강조한다. 만약 형상 기억에 의한 창작방법이 없었다면 동양화의 독특한 예술양식 역시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의 고전 화론(畵論)에서는 인물을 그 릴 때에는 ‘눈앞에서 갑자기 벌어지는 순간적인 것에 주의하여야’하며 산수를 그릴 때에는 ‘각지의 절경을 두루 찾아 밑그림을 많이 그려야’하고 꽃과 대나무를 그릴 때에는 ‘반드시 오래된 밭을 찾아서 아침 저녁으로 관찰해야 한다’라고 했다 눈앞에 보여지는 현상에 국한하여 판단하는 것보다 그 형상의 속성과 그럴 수밖에 없는 이치에 접근 하려하는 것 외형보다 내용적인 면을 강조하고자 함일 것이다.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서 무수한 말을 늘어놓았을 때 그 말에 대해 하나하나 분석하려하는 것 보다 그 친구가 왜왔는지를 살피고 간파하려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속성인 것처럼 동양화의 다양한 그림 속에서 화가가 표현 하고자했던 뚜렷한 관점과 이야기를 간파한다면 우리 민족 고유의 우수한 정신성과 해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선 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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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중유시(畵中有詩) 시중유화(詩中有畵)
왕곤(汪琨) 공취습인의(空翠濕人衣)
#2. 화중유시(畵中有詩) 시중유화(詩中有畵)
북송(北宋)의 곽희(郭熙1023-1085)는 ‘그림은 소리 없는 시이고 시는 형상 없는 그림이다(畵是無聲詩 詩是無形畵)’라고 말하여 시를 소리, 그림을 형상으로 등식화했다. 이때의 소리는 이야기가 율격과 리듬에 맞게 표현된 것이고 형상은 이미지가 음영과 색조로 표현된 것이다. 이것은 군자와 문인은 산수를 사랑하면서 자기를 수양해야 한다는 수기치인의 예술론이다.
한편 남송의 동파 소식(蘇軾 1037-1101)은 [동파지림(東坡之林)]에서 당의 왕유(王維 701-761)에 대해 ‘마힐의 시를 보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 시와 그림은 원래 하나이며 자연스럽고 청신해야 한다(味摩詰之詩 詩中有畵 觀摩詰之畵 畵中有詩 及詩畵本一律 天工与清新)’고 평했다. 소동파가 왕유의 시와 그림을 함축적으로 정의한 것은 왕유(王維 701-761)의 산수화 남전연우도(藍田煙雨圖)를 평한 것에서 기원한다.
이 그림에 상응하는 왕유(王維)의 산수시(山水詩) 산중(山中)은 이렇다.
荊溪白石出(형계백석출) 형계 계곡 흰 돌들 드러나 있고
天寒紅葉稀(천한홍엽희) 날이 추우니 붉은 잎도 드무네
山路元無雨(산로원무우) 산길에는 비 내린 적도 없는데
空翠濕人衣(공취습인의) 푸른 빛 스며들어 옷을 적시네
이 시를 읽는 사람은 계곡의 흰 돌과 가을 단풍잎을 선연하게 떠올릴 것이고 비가 갠 가을의 산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옷과 하늘이 조화로운 모습을 선명하게 연상할 것이다. 산수화 <남전연우도>에 시가 있어 화중유시라면 산수시 <산중>에는 그림이 있어 시중유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림을 그리면서 시를 쓰고, 시를 쓰면서 그림을 그린 셈이다. 하지만 시가 그림이 되는 것은 아니고, 시의 회화적 요소 때문에 회화적인 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중유화 화중유시는 예술적 감흥 또는 정신적 사유가 다른 장르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불(詩佛)로 불리면서 남종화의 시조로 알려져 있고 음악에도 뛰어났던 왕유(王維, 701-761)는 중세의 전형적인 문인이었다. 당송의 문인들은 완성된 인격을 지향하면서 교양과 학식을 두루 연마했지만 전문 예술가는 아니었다. 동양의 문인은 시서화악(詩書畵樂)을 섭렵하고 여러 장르로 감흥과 사상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는 것은 문인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 표현을 한 소동파 역시 시문과 회화 그리고 서법과 음악을 두루 섭렵했다. 이처럼 시중유화 화중유시는 동양예술론의 형상적 특징이면서 장르적 본질을 나타낸 미학개념이다. 특히 산수, 전원, 화조를 주제로 수묵화를 많이 그린 왕유의 작품에는 이야기적인 요소가 많아서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그림 속에 뜻이 있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시(詩)는 언지(言志) 즉 뜻을 이야기로 표현한 언어예술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것이 ‘시 속에 그림이 있다’라는 시중유화(詩中有畵)다. 반면에 그림은 구도, 색채, 청각과 시각의 이미지, 음영, 농담으로 표현하는 시각예술이다. 그러므로 시중유화는 시가 그림과 같다는 것이 아니라 시에 그림의 요소가 있어서 그림을 보는 것 같다는 뜻이다. 이와 반대로 ‘그림 속에 시가 있는’ 화중유시(畵中有詩)는 그림 속에 뜻과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화중유시는 그림이 시와 같다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시의 요소가 있어서 시를 보는 것 같다는 뜻이다. 따라서 시중유화는 시가 풍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시가 표현한 풍경에 의경, 의상, 운미(韻味)가 무궁하다는 뜻이고, 화중유시는 그림의 정취가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보다 그림이 표현한 정취에 의경과 의상이 깊고 무궁하다는 뜻이다.
충북대교수 김승환
*참고문헌 蘇軾, [東坡之林].
*참조 <기운생동>, <우의심원>, <의경>, <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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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인(朝鮮人)의 시정(詩情)과 화의(畵意)
동호(東湖)1 김홍도의 도강도(渡江圖), 시의도(詩意圖)
동호(東湖)2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3. 조선인(朝鮮人)의 시정(詩情)과 화의(畵意)
정초부(鄭樵夫1714-1789)는 조선 후기의 노비 시인(詩人)이다. 초부(樵夫나뭇군)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대부 여춘영(呂春永 1734-1812)의 집에서 나무를 하고 잡일을 하는 신분이었다. 이러한 정초부가 지은 시(詩) 중 동호(東湖)는 조선 후기 서정시(敍情詩)의 백미(白眉)로 손꼽힌다.
동호(東湖)
정초부(鄭樵夫1714-1789)
東湖春水碧於藍(동호춘수벽어람) 동호의 봄 물결은 쪽빛보다 푸르고
白鳥分明見兩三(백조분명견양삼) 백로 두세 마리 또렷하게 보인다
柔櫓一聲飛去盡(유로일성비거진) 노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고
夕陽山色滿空潭(석양산색만공담) 노을진 산빛만이 빈 물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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翰墨餘生老採樵(한묵여생로채초) 시인의 남은 생애는 늙은 나무꾼 신세
滿肩秋色動蕭蕭(만견추색동소소) 지게 위에 쏟아지는 가을빛 쓸쓸하여라.
東風吹送長安路(동풍취송장안로) 동풍이 장안 대로로 이 몸을 떠다밀어
曉踏靑門第二橋(효답청문제이교) 새벽녘에 걸어가네 동대문 제이교(第二橋)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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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호(東湖)는 현재 옥수동 주변의 한강(漢江)을 이른다.
※ 동호(東湖) 화제(畵題), 김홍도의 도강도(渡江圖)
쪽빛보다 푸른 봄 물결을 가르며 유유히 강을 건너는 배, 강가에 깃들었던 백로 두세 마리는 노 젓는 소리에 놀라서 날아간다. 새가 떠난 강에는 노을 아래 산 빛이 가득하다는 내용이 평화롭고 담박한 봄날의 서정을 전해준다. 이 시는 당시 문인은 물론 무지한 아이들까지 알 정도로 인구에 회자되었던 시이다. 여춘영은 이 시를 “왕공(王公)도 혼자 차지하지 못하고 장사도 억지로 빼앗지 못하는 것”이라고 칭송했다 한다. 그는 정초부가 죽자 〈제문〉을 짓기도 했다. 노비로서 이런 시를 지은 정초부의 문재(文才)도 놀랍지만, 반상이 엄격했던 사회에서 비천한 정초부의 문재를 진심으로 아끼고 존중했던 여춘영의 품성 또한 존경스럽다.
정초부(鄭樵夫)의 시(詩) 동호(東湖)를 그린 작품이 김홍도의 도강도(渡江圖)이다.
조선인의 시(詩)를 그림으로 옮긴 작품들 중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 수 있는 작품이다. 화면 중앙에는 섬인 듯, 강가인 듯 낮은 절벽과 나무가 그려졌다. 그 앞을 지나는 작은 배에는 사람과 물건이 실려 있음이 간일한 필선으로 묘사되어 있다. 화제인 정초부의 시 〈동호〉는 화면의 균형을 위해 화면 중앙에 차분히 자리했다. 김홍도는 이 같은 경물 배치를 통해 보는 사람의 시선을 화면 중앙으로 모으고 한편으로 좌우의 여백을 통해 동호의 평온하고 잔잔한 물결을 유추하게 하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화면이 가득 차 있다. 여백으로 시의(詩意)를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을 가만 살펴보면 왜 조선시대 제일의 화가로 김홍도를 앞세우는지 알 수 있다. 화면에 그려진 갓을 쓴 인물, 배를 젓는 상투 튼 사공…… 조선인의 모습이다. 어색한 유복(儒服)을 두른 학자, 쌍상투를 튼 중국 동자의 모습이 아니고 김홍도가 살던 시절, 김홍도와 함께 살아가던 소박하고 진솔한 조선인의 모습인 것이다. 김홍도는 조선 후기 화가 중 누구보다도 많은 시의도(詩意圖)를 그렸다. 이 시의도 또한 화가로서의 역량을 알 수 있지만 더욱 중요하게 와 닿는 것은 시대적 주체성을 가진 화가라는 점이다. 김홍도는 조선인이 쓴 시를 조선인의 모습으로 그려낸 것이다. ‘역시!’ 하며 무릎을 치게 한다.
다시 한 번 화면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김홍도는 배를 타고 가는 인물 중 가장 좌측의 인물은 뒷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측면이 주로 그려지는 인물 표현에 익숙한 회화 감상자로서는 인물의 뒷모습 표현이 생소하기만 하다. 김홍도는 왜 선비의 모습을 뒷모습으로 표현했을까? 선비가 마치 동호와 원경의 섬(혹은 강가 절벽)을 감상하고 이 시를 읊은 화자로 보인다. 어쩌면 김홍도는 그림을 보고 있는 우리에게 뱃전에 앉은 그 선비가 되어, 선비의 눈을 빌려 동호를 감상하라 조언하고 있는 듯하다.
안대회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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