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경구가옥 평면도
여경구 가옥 전경(이하 사진 홍정기)
진접 여경구가옥榛接 呂卿九家屋(중요민속자료 제129호)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내곡리 286
태묘산 자락 높은 언덕에 지어진 가옥은 여경구의 장인인 이덕승의 8대조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집은 180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산을 배경으로 지어져 있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야 도달하는 집은 서쪽에서 진입하도록 되어있다. 전체적인 배치는 누운 日형 배치이다.
이렇게 안채와 사랑채가 병렬로 된 배치는 화성 정용채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24호)하고 같다. 전체적인 배치 개념은 화성 정용채가옥과 같지만 세부 배치에서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첫 번째 차이는 출입의 방향이다. 정용채가옥은 동쪽으로 들어가고 여경구 가옥은 서쪽으로 진입하고 여경구가옥은 건물들이 별동으로 이루어져 있어 안채가 열린 ㅁ자 구조로 되어있는데 반해 정용채가옥은 완벽하게 폐쇄된 ㅁ자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이 다르다.
정용채 가옥의 배치는 사랑방과 안방이 마을을 향해 길게 배치되어 있고 그에 직각방향으로 문간채, 중문채, 부엌들이 배치되고 그 앞으로 광들이 안방이나 사랑방과 같은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현재 사랑채 앞에 있었던 곳간채는 없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건물을 병렬로 배치한 것은 경사가 급한 곳에 집을 앉혔기 때문이다. 사랑채와 안채를 앞뒤로 배치할 만큼 대지가 깊지 않기 때문에 병렬배치를 한 것이다.
여경구 가옥 사랑채
사랑채에서 본 경관
이렇게 병렬배치를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좁은 대지에 위치한 것은 명당도 명당이지만 부수적으로는 좋은 전망을 원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랑채에서 바라다보는 경관은 아래 마을 뿐만 아니라 마을 앞 왕숙천 너머 넓게 펼쳐진 들판까지를 바라볼 수 있다. 꽉 막혔던 가슴이 확 트이는 경관이다. 이런 시원한 경관를 바라보기 위해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집을 배치한 것이리라
솟을대문을 지나 사랑마당으로 들어서면 좌측에 사랑채가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우뚝 사랑채는 전면 네칸 반 측면 두 칸 규모인 일고주 오량집이다. 반 칸 규모의 전퇴를 두고 뒤에는 1/4칸 규모의 광과 툇마루를 두었다. 우측부터 건넌방, 대청 각 한 칸 사랑방 두 칸, 벽장 반칸으로 구성되었다. 대지 경사 때문에 사랑채 기단이 높아졌다. 그러나 높은 기단 때문에 마치 정자에서 올라 온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사랑채 건넌방과 대청을 가르는 툇마루 기둥에는 문을 설치한 흔적이 보인다. 툇마루도 큰사랑방과 건넌방 사이를 구분을 하였던 것 같다. 사랑채 건넌방과 며느리가 기거했을 안채 건넌방이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건넌방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대한 배려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랑채 앞에도 초가로 된 헛간채가 있었는데 70년대에 헐렸다고 한다. 사랑채는 전체적으로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꾸밈없는 집을 지으려한 집주인의 생각을 느끼게 한다.
사 당
사랑채 뒤쪽 언덕 위에는 사당이 있다. 사당은 전면 2칸 측면 한 칸 반규모의 맞배지붕 집이다. 이 집에서 눈여겨볼 집이 바로 이 사당이다. 사당 평면은 다른 집과 별다를 것이 없지만 이 집 사당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품이 있다. 사당은 위패를 모시는 공간 한 칸과 전퇴 반 칸으로 구성되었으며 삼면은 다른 사당처럼 벽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나 다른 사당과는 달리 측면 벽이 아름답게 꾸며졌다. 방화장에서 중방까지는 자연석을 쌓고 화장줄눈으로 마감하였고 그 위에 위 아래로 뒤집어진 숫키와를 엇갈려 쌓아 구분을 지었다. 숫키와 위에는 다시 길다란 방전을 엇갈려 쌓은 후 화장줄눈으로 마감한 것을 도리 밑까지 붙였다. 지금 모습도 다른 곳과는 차별되고 있지만 이것은 예전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사당 측면
문화재청의 사진에서 보이는 예전 모습을 보면 중방까지 자연석을 쌓되 하부는 큰 자연석 막쌓기를 하다가 상부에 올라오면 작은 돌을 가지런히 쌓아 변화를 주었고, 숫키와는 지금보다 더 가지런히 쌓았으며, 그 위는 지금과는 달리 암키와를 비스듬히 쌓아 문양을 만들었다. 암키와 문양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 부드럽고 온화하면서도 격조가 있어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렇게 암키와 문양을 배푼 곳은 위, 아래 및 좌, 우를 전돌로 사각형을 만들어 구분지었다. 전돌로 구획된 직사각형 화면 때문에 암키와 문양은 더욱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암키와 문양 위로는 다시 기와를 석장 엎어 쌓고 그 위로 지붕 용마루 부고처럼 세워 마감하여 벽면 전체에 변화 주었다. 이와 똑 같은 문양을 안채 동쪽 부분에 새로 만들어 놓았지만 격조가 떨어진다.
사당채 측면 옛 모습(자료 : 문화재청 사이트)
또한 구조도 예전 모습과 다르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반오량가(半五樑架)인 것은 같은데 보수 전 사당의 종도리는 용마루와 위치가 빗겨나 맞지 않았고 앞뒤 지붕 물매도 다르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쳐진 집은 일반 집처럼 종도리와 용마루 위치가 맞게 되어있고 지붕물매도 맞추어 놓았다. 예전 집이 왜 일반적인 구조 방식과 다르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새롭게 고치면서 과거의 모습을 무시해 버렸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 모습대로 하려는 노력이 있었면 좋았을 것이다.
* 반오량가는 삼량집에 퇴칸을 붙여 전면은 오량집이고 후면은 삼량집 구조로 된 집을 말한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대문간채와 마주하고 있는 광채 아래 끝 쪽에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T자형 안채와 ㄴ자형 광채가 엇갈려 있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안채가 T자 형태로 되어있는 집은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주로 충청이북지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형태이지만 그렇다고 지역적 특성이라고 보기도 힘들만큼 그 예가 많은 것은 아니다.
안채는 안방 앞으로 돌출되어 있는 부엌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뉘었다. 안방 몸채 깊이는 칸반규모이고 1고주 5량집이다. 안채는 1고주 오량집인데 대청은 고주없이 대들보를 가로질러 넓게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대청 높이는 다른 집에 비하여 낮아 조금 답답해 보인다. 전체적으로 사랑채에서 보았듯이 집을 검소하게 지으려는 생각이 돋보이는 집이다.
안채 대청과 부엌부분
안채는 좌측으로부터 건넌방 두 칸 대청 두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방은 두 칸 규모이고 앞으로 두 칸 부엌이 돌출되어 있고 안방 뒤쪽으로는 골방과 마루 광이 붙어있다. 안방 앞쪽으로 부엌 두 칸이 붙어 있다. 입구가 서쪽이다 보니 안방이 서쪽에 위치하는 전형에서 벗어나 안방이 동쪽에 놓였다. 광은 ㄴ자 형태로 되어 있는데 사랑채 쪽은 사랑채에서 사용하도록 배치되었고 아래쪽 만 안채에서 사용하도록 계획되었다. 광채는 지금은 모두 광으로 개조되었지만 원래는 중문칸에서부터 외양간 광 두 칸, 뒷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집은 최근 전체적으로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수를 하면서 원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되어 있었다. 앞서 말한 사당도 원래 모습에서 많이 변경되었고 현재 안채 마당의 기단도 고쳐졌다. 안채 기단은 원래 3단으로 되어 있어 마당에서 자연스럽게 올라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지금 한 단으로 고쳐졌다. 그러나 복원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사당 외벽이 가지고 있었던 품격이 사라졌고, 안채 기단은 가지고 있었던 기능성이 사라졌다.
안채 대청
문화재를 보전한다는 것은 예전 모습 그대로 살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그 모습을 살리는 것도 장인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능력이 없을 경우 원래 것에 훨씬 못미치게 복구되고 만다. 현재 금속공예나 미술품 복원부분에는 정성을 많이 들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건축부분 특히 한옥부분에 대해서는 이런 장인 정신을 가지고 임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이렇기 때문에 최근 보수되는 한옥이 예전 보다 수준이 더 떨어지는 경우를 수없이 보아왔다. 능력이 되지 않으면 차라리 하지 말 것이지 솜씨가 부족한 사람이 손을 대어 원래보다도 못하게 만들었다. 제발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보수하도록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추신 :
여경구가옥은 오랜만에 보는 관리가 잘되는 집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람이 살아도 될 만큼 집안 구석구석 잘 정돈되었고 어느 곳 정결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방문하던 당시 안방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었다. 관리인 말로는 이틀에 한 번은 불을 때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큰 사랑방은 이전에 온수보일러를 설치하면서 아궁이를 폐쇄했다고 한다. 아쉬운 부분이다.
집을 잘 관리해야하는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집을 잘 관리하면 집의 생명은 길어진다. 따라서 장기적으로는 문화재 보수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문화재를 관리하는 비용에 투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두 번째는 관리가 잘 되는 집은 보는 즐거움도 있어 문화재를 활성화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준다. 조금 더 고려한다면 당대의 생활상을 알 수 있도록 관리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