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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8;50-58, 2. 나는 아노니, 주님은 아십니다. 2017. 3. 19.
지난주에 이어 같은 본문을 가지고 다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 속에 드러난 유대인의 신앙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의 순종과 영생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유대인들은 52절 - 53절을 통해 3가지로 반응을 했습니다. 그 세 가지는 유대인들이 아는 안다, 그리고 죽었다, 그러면 누가 크냐? 이렇게 반응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유대인들의 신앙이 있습니다.
1. 그러면 유대인들의 신앙이 무엇일까요? 그들의 표현 속에 그들의 생각과 신앙이 들어있습니다.
1-1. 안다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첫 번째 반응은 ‘안다’입니다. 52절 상반 절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유대인들이 ‘안다’고 말한 헬라어 ‘ἐγνώκαμεν(에 그노카멘)’은 경험과 관찰을 통해 안다는 단어 ‘γινώσκω(기노스코)’의 완료시제입니다. 다 파악을 했다. 무엇으로요? 자신들이 예수님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경험해 본 결과 이제 다 파악했다고 합니다. 알만한 것은 다 알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기노스코로 이야기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경험과 이성과 판단을 통해서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으로 신앙이 됩니까요? 세상을 다 인식합니까? 다 보입니까? 유대인들은 경험과 이성과 판단으로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보지 못했고, 메시아로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보는 것으로, 느끼는 것으로, 판단한것으로 아는 것 이것이 유대인들의 아는 신앙입니다.
1-2. 모든 사람은 죽었다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두 번째 반응은 ‘죽었다’입니다. 52절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들의 말대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이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신앙의 표본이 되었던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하나같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공허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유대 역사나 성경을 보면 이미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간 두 사람이 있습니다. 에녹과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말씀합니까? 샘플이 있다는 것, 모델이 있다는 것은 실체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파트 분양 전 모델 하우스를 둘러본 뒤 계약을 합니다. 만약 모델 하우스가 실제와 다르면 위법행위로 처벌을 받고 보상을 해야 합니다. 에녹, 엘리야 선지자는 영원한 생명의 약속에 대한 샘플입니다, 죽음이 죽임당한 것입니다. 인생의 한께가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것을 인식했으면, 인정했으면 분명 예수님의 말씀 앞에 이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있는 전체를 다 알아야 그 현실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한 사실들이 모델처럼 샘플처럼 부분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이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적을 모르고, 은혜를 모릅니다. 영원과 부활을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경험도 체험도 없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현세적입니다. 영원과 다음 세대가 없고 현세적인 종말만 있습니다.
1-3. 크냐? 누구냐? 입니다. 여러분,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정신 나간 소리라고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 2가지를 반문합니다. 네가 아브라함보다 크냐?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한마디로 정체가 무엇이냐 입니다.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가르쳐 주고 영원을 가르쳐 주고, 기적을 베푸시고 복을 주시는 예수님에게 유대인들의 이런 질문은 그들의 영적 무지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드러냅니다. 신앙의 상태가 비교, 순서, 질서, 계급, 위와 아래, 있고 없는 이런 것을 담고 있습니다. 비교가치입니다. 아브라함으로 비교합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예언이 되어있고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인데 주님을 진심으로 모릅니다. 신앙을 자랑하지만 이 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르면 신앙을 자기 위주로 해석을 하고 자기 위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지요. 정확하게 주님을 아는 것이,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 주님의 일 하심을 아는 것이, 이런 신앙에서 벗어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프란다스의 개를 잘 알지요? <플란다스의 개>의 주인공 네로와 관계된 화가로 잘 알려져 있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vens 1577 - 1640)가 있습니다. 17세기 유럽의 대표화가입니다. 그의 대표작인 ‘노인과 여인’이라는 작품을 1612년에 한번, 그리고 1630년에 또 다르게 한번을 그렸습니다. 푸에르토리코의 국립 미술관에 상반신을 벗은 채 두 손이 착고에 채워진 노인이 젊은 여인의 젖을 물고 있는 작품입니다. 루벤스의 ‘노인과 여인’입니다. 국립 박물관의 방문객들은 이 노인과 젊은 여자의 그림을 보고 의아해합니다. 문제의 그림을 얼핏 보면, 수의를 입은 주책없는 노인과 이성을 잃은 젊은 여성입니다. 그런데 그림 속의 푸른 수의를 입은 노인은 다름 아닌 젊은 여인의 아버지입니다. 커다란 젖가슴을 드러내놓고 있는 여인은 노인의 딸입니다.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싸우다 수감된 투사였습니다. 노인을 투옥시킨 독재 정권은 잔인하게 음식물 투입 금지를 명했습니다. 이에 노인은 서서히 굶어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노인의 딸이 해산한지 며칠 지나지 않은 무거운 몸으로 수감 중인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 입니다. 앙상한 뼈만 드러난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에 핏발이 섰습니다. 이에 딸은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를 위하여 웃옷을 풀고선 부른 젖을 아버지의 입에 물렸습니다. 부녀간의 숭고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조국에 대한 사랑이 담긴 명화입니다. 푸에르토리코는 캐리비안 베이에 있는 작은 섬으로 콜롬부스의 2차 항해 시에 발견된 섬입니다. 1508년 이래 390년 동안 스페인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1898년 이후 미국령에 속하게 된 푸에르토리코 인들은 이 그림을 민족의 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으로 자랑합니다. 여러분, 동일한 그림을 놓고 어떤 이들은 비난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최고의 작품으로 격찬합니다. 왜 그럴까요? 큰 차이의 시작은 간단합니다. '노인과 여인'에 깃든 내용을 아느냐, 모르느냐 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림 속에 담긴 본질을 알면 눈물을 글썽이며 루벤스의 작품을 감상합니다. 본질을 알면 시각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교만과 아집, 편견을 버려야 어둠 속에 다가온 빛이 보입니다. 위조된 빛으로 만족하며 살았던 교만하던 자신이 보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늘로부터 임한 은혜로 주님과 아름다운 세상이 보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위조된 빛으로, 편견과 아집의 신앙으로, 교만한 신앙으로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소망은 있는데, 메시야는 기다리는데, 그리스도가 올 것이라고 기도는 하는데, 그래서 신앙이 있는 것 같은데, 주님이 보시는 유대인들은 신앙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다, 죽었다, 크냐? 누구냐? 보다도 오늘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그래서 한계를 벗어나고 복을 받게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유대인들이 보는 기준이 또 하나 있는데, 신앙이라고 할 수 없는 50살 그 기준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엔도 슈샤쿠작가가 있습니다. 그의 저서중 사일런스, 침묵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 기치지로는 극단적인 인물이지만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인간의 악마성이 부각됩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함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흔들림을 거치면서 기치지로는 점점 강해집니다. 기치지로가 마침내 순교자로 죽을 용기를 얻고 순교의 장으로 끌려갑니다. 비열하고도 약한 인간이 점점 강해지고, 존엄해 가는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예수님의 얼굴 성화를 짓밟으면서 성자이 됩니다. 비록 침묵 가운데서 아무런 능력도 행하지 않으시는 주님이지만, 그 가운데서 세미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은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느니라. 그 성화 속에 들어있는 주님의 모습을, 그 성화 속에 있는 그 마음을 밟으며 인간은 비열함을, 약함을 탈피해 갑니다. 여러분, 우리는 대부분 기치지로처럼, 밟으며 동시에 밟히며 그렇게 성장해 갑니다. 밟는 사람들의 얼굴과 밟히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얼굴이 교차됩니다. 밟히고 밟히던 성화 속의 예수님의 얼굴은 광채 나는 모습이 아니라, 그저 밟히기 위해 오신 초라한 모습입니다.
1941년에 미국인 화가 워너 샐먼이 그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그리스도의 초상'(Head of Christ)으로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당시 이 그림이 엄청난 대박을 터트리면서 미국 전역과 유럽과 아시아에 5억 점 이상 판매했습니다. 한 때 참전하는 미군들에게 워너 샐먼의 작품을 작게 인쇄한 것을 선물했습니다. 샐먼은 후속 작품으로 <Christ Our Pilot '우리의 인도자 그리스도’>, <The Lord is My Shepherd '나의 목자이신 주님'>, <Christ at Heart's Door '문을 두드리시는 그리스도'>, 이 그림들은 교회 액자나 상, 기독교 관련 용품에서 봅니다. 그런데 워너 샐먼의 그림을 보면, 예수님은 하얀 피부색의 백인이고, 긴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서양인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2,000년 전 이스라엘 땅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중동지방에 태어나신 분입니다. 피부는 검은 구릿빛에 가깝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나실인'으로 서약한 사람을 제외하곤 남자가 긴 머리를 하지 않습니다. 당시 문화적 환경 속의 유대인 남자들에게 긴 머리는 '수치'입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예수님의 머리가 이렇게 '긴 머리'로 표현된 걸까요? 로마시대와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예수님의 모습이 긴 머리로 왜곡되었습니다. 세속적인 헬라문화의 영향이 교회 안으로 들어 왔는데,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는 '신의 아들', '신'이라고 하면 '긴 머리'에 수염입니다. 왜냐하면 신성함과 능력과 권위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천년이상 반복되면서 우리의 의식 속에 예수님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긴 머리와 수염이 풍성한 모습입니다. 이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예수님의 모습과 용모에 대해 어떻게 말씀할까요? 사 53; 2-3.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성경은 기원전 8세기에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님의 모습을 “훌륭한 풍채도 없다,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도 없다. 미움받고, 버림받고, 고통을 많이 겪은 고난당한 얼굴일 뿐 아니라, 언제나 늘 병을 달고 다닌 사람이다.” 우리의 시선을 끌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을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중에 나타나는 예수님입니다. 유대인들은 요 8;31-32,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반문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여지껏 그 누구의 종이 되었던 적이 없는데, 무슨 해방이니, 자유니 그런 말을 하느냐? 예수님은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그 길은 말씀을 따르는 것, 주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유대인들은 아브라함도 선지자들도 모두 죽었는데, 헛소리 하지 말하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아브라함도 예수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 는 말씀을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발끈하며 57절 네가 아직 오십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0살을 말합니다. 50이 기준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 유대인들의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 것이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입니다. 민8;24-25절, 당시 성전에서 일하던 제사장의 복무연령은 25세부터 50세까지입니다. 50세가 은퇴연령입니다. 50세는 나이든 원로의 기준입니다. 네가 아직 오십세도 못되었는데, 라는 유대인들의 말은 아직 원로라는 기준에도 들지 못하는 젊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기준이 안되는 사람이 우리에게 충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하이지요.
또 하나는 예수님이 실제보다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4-5세 아이들이 말 대꾸 하면 보통 무엇이라고 합니까? “아직 10살도 안된 애들이…” 십대들이 그러면… “아직 20살도 안된 애들이…” 이제 갓 30살이 된 청년이 뭘 좀 아는 척하면 어른들이 뭐라 합니까? “이제 겨우 30살 밖에 안된 주제에” “아직 40살도 안된 사람이…” 30살 넘은 청년에게 “아직 50대 안된 사람이, 아직 환갑도 안 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보통 근접한 나잇대를 말하며 나이 좀 더 들어봐야 알 것이라고 충고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유대인들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를 두고 엔도 슈사쿠는 <예수의 생애>라는 책을 통해 예수님께서 40대 후반이셨다고 추측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 산간 지방을 거쳐 북으로 약 134Km 지점, 해발 약 375m 분지인 빈민촌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직업이 목수입니다. 2 천 년 전 나사렛이 속해있던 갈릴리 지역은 가난한 빈민촌입니다. 돌투성이고, 나무가 귀한 곳이기에 목수로 산다는 것은 가난의 상징입니다. 일감이 없습니다. 아버지 요셉을 일찍 여위고 어머니와 여동생 둘, 남동생 세 명을 부양해야 했던 예수님이 무슨 돈이 있어서 비싼 나무 원자재를 구입하겠습니까? 당시 목수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대패와 망치와 못을 넣은 공구 통을 메고, 갈릴리의 여러 마을로 고객들을 찾아다니며 일을 했습니다. 부숴지거나 고장 난 가구 고쳐드립니다. 삐걱거리는 문짝 고쳐요~ 라고 소리치며 온종일 내리쬐는 햇볕 아래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산자락을 누볐습니다. 골목을 누비고, 고생을 하다 보니 30살을 갓 넘긴 청년이 마치 40대 중, 후반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것처럼 훌륭한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도 없고. 미움 받고, 버림받고, 고통을 많이 겪은 고난당한 얼굴일 뿐 아니라, 언제나 늘 병을 달고 다닌 사람의 모습입니다. 나이보다 고생하신 분이시기에 고단한 사람의 아픔을 알고, 고통하는 이들의 눈물을 아십니다. 공구를 메고 가족부양을 위하여 흙먼지 나는 자갈길을 걸어 다니셨기에 오늘도 생계와 가족부양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노고를 더 잘 아십니다. 여러분, 사순절 세 째 주일에 “네가 아직 오십세도 못되었는데…”라는 이 구절이 그래서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50살로 대표되는 사람의 기준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외면당하신 예수님. 온갖 고초와 수고를 거쳐야 살 수 있는 고단한 삶,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힘들었던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심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사순절 세 째 주일에 교회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어떤 길입니까? 비록 세상이 보는 기준에 못 미치는, 인기 없는 길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결정이 고단한 삶을 전제로 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면 그 부르심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작은 것, 세상이 돌보지 않는 어두운 곳, 세상이 선택하지 않는 낮은 곳을 찾으셨던 주님이시기에 오늘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존재,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한참 미달이어서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지!”라는 충고를 들을지 모르겠지만, 비록 그 결정이 우리를 더 고단하게 하고, 더 힘들게 몰아갈지라도 우리를 부르신 분이 가신 그 길을 계속 걸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50’이라는 세상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하여 외면당하고 배척당하신 주님을 이 시간 묵상해 봅니다. 질고와 고통과 아픔을 겪으셨기에, 세상의 풍파에 할퀴셨기에 나이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이셨던 주님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러지 않아도 될 분이, 그렇게 사시지 않아도 되었던 분이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하시고, 걸어가신 모습을 보며 사순절 세 째 주간을 살아가게 될 우리의 눈이 기준점 위의 정상이 아니라, 기준점 아래 저 바닥을 향하게 하옵소서. 밝고 화려한 것보다도 어둡고 소외된 곳을 향하는 우리의 발길이 되게 하옵소서. 그런 한 주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그러면 유대인들이 말한대로 어디에 속하였는가? 사람에게 있어서 소속감은 정말 중요합니다. 왜요?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에 따라 사람의 행동양식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행동양식이 바뀐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도 바뀐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유대인들은 교만과 아집과 무수한 편견을 갖고 예수님을 대했습니다. 초라하고 볼품없는 갈릴리 시골 청년의 속에 감추인 본질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요 3:16이 증거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주신 독생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진정 알았다면 결코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도리어 감격하며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질을 보지 못한 유대인들은 요5;18에서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습니다. 곡해하고 가공을 더합니다. 요 8:21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이 말씀에 강조하신 부분은 ‘너희 죄 가운데 죽겠고’ άμαρτία(하마르티아)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죄 가운데 죽겠고…”라는 말씀에 유대인들은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비아냥거립니다. 22절.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예수님에 대해 본질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가? 그 본질에 대해서도 볼 줄 모르던 유대인들은 죄 가운데 죽게 될 자신들에 대하여 놀래지도 인식하지도 못합니다. 선민 유대인이라는 혈통과 더불어 율법과 그 수행에 철저한 의로운 사람이라 자부했기에 그들은 죄 가운데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무시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반응 앞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게 말하고 반응할 수밖에 없는 원인과 이유에 대해 진단하셨습니다.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진단에 의하면, 서로 난 곳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소속된 곳이 다릅니다. 그래서 보는 것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판단하는 것이 다릅니다. 정체성은 중요합니다.
3-1. 세상에 속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유대인입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겨운 여정에 지쳐 속이 상한 모습이 있습니다. 마음이 상한 그들의 반응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민 21: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이 원망의 소리를 들은 하나님께서는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죽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좀 과하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아니, 불평 좀 했기로서니 독을 가득 품고 있는 불 뱀을 보내어 물려 죽도록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백성들이 원망해서 한 말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들은…첫째,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그들의 이 원망 속엔 정체성과 신뢰라는 심각한 두 가지 문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살도록 가만두지, 왜 불러내서 고생시키는 가에 대한 원망이 있습니다. 이미 그들은 홍해를 건너는 순간 바로의 백성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소속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옛 소속을 그리워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소속이 바뀐 그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뢰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그들을 광야에서 죽게 내버려 두려고 불러내신 분 정도로 인식합니다. 자신들의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분, 광야를 거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실 하나님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 유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이들의 신앙은 세상에 속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둘째,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광야는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결핍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먹이시고, 반석에서 샘물로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집트에서 가져나온 양식이 거의 두 달 만에 다 떨어졌는데, 바로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외한 매일 아침 서리처럼 만나를 내리셨습니다. 그 만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 수 있도록 한 하늘의 양식입니다. 아침마다 작고 둥글고 서리 같은 것이 땅에 내렸는데, 그것은 마치 꿀 섞은 과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 (מָן 뭐야? 이게)라고 말하면서 신기하게 여겼으며, 맛나게 먹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하늘의 양식이었고, 매일 아침 해뜨기 전에 만나는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기적 앞에서 그들은 지겨워했습니다. 꿀섞은 과자처럼 맛있다고 했던 만나를 향해 결국 ‘이 하찮은 음식’이라고 말하기 까지 했습니다. 하늘로부터의 과분했던 은혜를 지겨운 것, 하찮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의 원망은 단순한 불평이나 못마땅한 여김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새로운 소속, 정체성에 대한 부정이고, 하나님에 대한 부정입니다. 누리고 받아왔던 은혜에 대한 부정입니다. 그들의 원망은 믿음에 대한 부정이고, 불신앙의 표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불 뱀을 보내시고, 그 불 뱀에게 물려 죽음 앞에 선 그들을 향해 장대에 높이 단 구리 뱀을 보는 사람은 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느 편에 속할지 소속을 확실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유대인이나 우리에게도 어느편에 설 것인지, 어느자리에 소속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3-2. 그러면 참 신앙이 무엇일까요? 하나님 편에 속하는 것입니다.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빌 3:18-21.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반대편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땅의 것만을 생각하고 계속 살다가 인생을 마감합니다. 그런데 19절, 그 마지막을 멸망뿐이라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을 향하여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임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의 시민권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켜 영광으로 빛나게 할 곳입니다. 그때와 그 변화를 기대하기에 이 땅의 것만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답게 당당하게 살라 하십니다, 요 8: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4절 이 한절 속에서는 매우 심각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2번이나 “너희가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너희가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반복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에게 미칠 심판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그 불행한 심판의 원인은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메시야,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바로 알려 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알고 있는 정보로 그분을 판단하고, 배척하고, 대적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결과에 대해 책임져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요 5:24-25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유대인들은 본질을 알지 못했기에 왜곡된 시각으로 보았습니다. 고집스레 지녀온 교만과 아집과 편견으로 인하여 어둠 속에 찾아오신 빛을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메인 것이 풀리지 않고, 멍에가 그대로 있습니다. 한계적인 신앙을 소유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편인 것 같으면서도 저 편인 것처럼 살아왔던 모호한 소속, 그 정체성이 문제입니다. 땅에 속한 사람으로 이 땅의 것만을 바라보다 저희 죄 가운데서 죽을지,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하늘의 시민권 자처럼 살아갈지 분명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떠나온 애굽의 삶을 그리워하며 회귀하고자 하는 모호한 정체성으로 살지 않아야 합니다. 그 왕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빛 속에서 걸어가는 우리 인생 여정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다 아십니다. 주님은 부활이고 생명입니다. 주님은 구세주이시고 나의 주인입니다. 사순절 세 째 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새롭게 하시고 주님만을 바라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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