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말씀을 하십니다. 실제 보면 원수를 사랑한 사례를 본 적이 있긴 합니다. 개신교 목사의 사례이지만 익히 잘 알려진 사례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받아들인 사례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결론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의 절차적인 단계를 보면 첫째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만 하는 것으론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건 다른 민족들도 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이 사례를 언급하시면서 결론을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철저히 완전하다라는 말의 기준을 복음만을 놓고 묵상해봤습니다. 잠에서 깨 다시 자려고 하다가 그냥 복음을 읽고 묵상글을 남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는 완전한 게 이것밖에 없겠습니까? 그건 아닐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큰 이 세 가지 사례 속에서 이걸 완전의 기준으로 말씀하셨다면 그 사이 틈새의 행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묵상해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원수에 대한 내용이 첫 번째로 나오긴 했지만 이건 거의 몇몇 사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거의 성인 수준에 이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인간으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 내용은 잠시 접고 그 다음을 유심히 봐야 할 것입니다. 왜 제가 그다음을 언급하느냐 하면 너무 고차원적인 ‘원수 사랑’은 사실 언급하는 게 무용지물과도 같은 것이고 우린 그 단계 이하도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만이라도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보는 게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 기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나는 것을 기대하고 희망해야 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면 그럴 듯하지만 말장난입니다. 그게 맞는 말인 경우도 있긴 하지만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사실은 오늘 복음의 핵심은 제가 판단했을 땐 두 번째와 세 번째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이 사례도 우리는 실천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사실 실천을 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례입니다. 불가능은 아닌데 어렵습니다. 사실 냉정하게 말하면 이건 기본입니다. 그나마 두 번째 사례는 그렇다쳐도 세 번째인 인사는 가장 기본적인 사례입니다. 이것조차도 안 된다면 그건 참 뭐라 이야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2000년 전에도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인사까지도 완전한 사람이 되는 조건에 그걸 넣으셨겠습니까? 제가 개종 후 본 사례를 보면 가장 기본적인 예의인 이것도 안 되는 사람 정말 많습니다. 인사를 해도 어떤 특정한 사람은 인사 자체도 안 하지만 또 인사를 해도 무덤덤한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도리로 아랫사람이 안 할 수도 없고 이런 무례한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당을 다닌다는 사실을 보면 완전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다른 글에서도 언급을 한 적이 있지만 바로 기본입니다. 기본이 안 되면 완전은 그냥 이상입니다.
저는 다른 종교에서도 20대부터 항상 주장한 게 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기지도 못하면서 날 것부터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 나오는 것부터 실천할 게 아니라 인간 세상 법도부터 실천해야 한다”는 이 사실을 제 주위 사람들에게 공손하게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인사만 가지고 이야기하신 게 아닐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을 다녀도 거창한 것부터 할 게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의 기본 도리라도 지킬 수 있는 신자가 되는 게 최소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얼굴에 먹칠이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편의상 3월 매일미사를 구입하지 못해 물론 전례독서집 평신도용 다섯 권짜리가 있지만 복음을 굿뉴스를 통해 보려고 하다가 폰에서 김혜수 탤런트 기사 하나가 있어 봤는데 이 기사를 보고 순간 떠오른 생활묵상이 있었는데 한번 올리고 싶습니다. 사실 이 내용도 오늘 복음과 매치를 할 수도 있었는데 너무 길 것 같아 생략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는 일 년에 두 번하는 가스점검을 했습니다. 이걸 사순 판공성사와 관련한 생활묵상 글 하나를 남기고 싶었습니다. 또 어제 낮에 폰에서 잠시 굿뉴스에 들어오니 자유게시판에 주목을 끄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냉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내용이라 눈에 끌려 클릭을 해보니 글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내린 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제목을 보면서 저는 어제 많은 묵상을 했습니다. 이 세 가지 내용을 가지고 시간을 내 묵상글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지금 세 가지 다 작성을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면 진이 다 빠질 것 같아 천천히 하나씩 공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