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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미안합니다. 어제는 일정이 있어서 밤 늦게 귀가
했기에 임진각 도라산역 평화마을 등의 게시물 이제야 올립니다..
파주 임진각 도라산역을 다녀와서!
파주 임 진각
서울시청에서 북서쪽으로 약 54km 떨어진 임진각은 6.25 전쟁의 비통한
한이 서려 있는 곳이다. 6,000평 대지 위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임진각
은 1972년에 북한 실향민을 위해 세워져 지금은 관광명소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평화와 환경의 중요성을 전달하는 경기평화센터가 있다.
또한, 철마는 달리고 싶다(철도중단점), 북한 실향민을 위한 망배단, 미얀마
아웅산 순국외교사절 위령탑, 한국전쟁의 대표 유산으로서 50여년 만에
개방이 된 자유의 다리와 한반도의 지형을 본딴 통일연못, 평화의 종, 미국
군인 참전기념비 등이 있는 통일안보 관광지이다. 더불어 남북교류 및 화해
협력의 장소로 통일관련행사를 많이 치르고 있다. 판문점처럼 복잡한 허가절차
를 필요로 하지 않는 관광지로서 경기도내에서 가장 외국인이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최근 소규모 어린이 놀이시설을 개발하여 바이킹,
미니열차 등을 이용할수 있다.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京義線) 철도역 중 하나로, 현재 남한 지역 경의선
내 휴전선 이전의 마지막 역이다. 행정구역상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희망로 307
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무장지대(DMZ) 남방한계선에서 700여m 떨어져 있다. 또
도라산역은 평양까지 205km, 서울까지 56km 거리에 있다.
이 역은 당초 DMZ에 복원하기로 했던 장단역이 취소되면서 남쪽의 문산역과 북쪽
의 봉동역 사이에 신설되었다. 2000년 9월 남북합의로 시작된 경의선 복원사업
으로 2001년 4월 착공, 2002년 3월 말 완공되었다. 도라산역에는 도라산 전망대,
제3땅굴, 판문점 등 안보 관련 시설들이 밀집해 있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도라
산 역사(총 면적 4940m2)는 모두 100억 원의 건축 공사비가 투입돼 대합실,
역무실 등 역사 시설과 향후 남북 왕래에 대비한 간이출입장(통관검사소)이 설치돼
있다. 그러나 도라산역은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위치하고 있어, 민간인이 자유롭게
역을 이용할 수 없다. 이전 역인 임진강 역에서 특별수속과 헌병 검문을
거쳐야 역내 출입이 가능하다.
역명은 해발 156m의 도라산에서 따왔다. 도라산은 신라 1000년 사직을 고려
왕건에게 바치고,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와 결혼한 경순왕의 한(恨)이 서려 있는
곳이다. 낙랑공주는 마음이 우울했던 경순왕을 위로하고자 이 산에 암자를 지었고,
경순왕은 아침저녁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경주)을 그리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도라산이라고 불렸다.
한편, 도라산역은 남북분단의 단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경의선이 연결되는 희망을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02년 2월 설 연휴 기간에는 문산역 북쪽으로 철도
운행이 중지된 1950년 이후 처음으로 특별 망배열차가 운행돼 700여 명의 이산
가족들이 찾기도 했다. 또한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곳
을 방문해 연설을 하고 침목에 공동서명을 하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특히
부시 대통령은 역사 입구에 놓인 경의선 철도 침목에 ‘이 철도가 한국 이산가족
들을 연결하기를 바란다(May this railroad unite Korean families)’
라고 쓴 뒤 서명한 바 있다.
출처:(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북한의 남침용 땅굴
북한이 기습작전을 수행할 목적으로 휴전선
비무장지대의 지하에 굴착한 남침용 군사통로.
북한은 1971년 9월 25일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땅굴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른바 ‘9·25교시’라 일컬어지는 명령에서 김일성은 “남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속전속결 전법을 도입하여 기습전을 감행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하
였다. 이에 따라 북한에서는 각 군단별로 땅굴작전이 수행되었으며, 현재
까지 약 20여 개의 땅굴이 굴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한의 땅굴은
1974년 11월 15일 고랑포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후 1975년 3월 19일
철원에서, 1978년 10월 17일 판문점부근에서 차례로 발견되었다. 이때
까지만 해도 북한의 땅굴은 서부와 중서부전선에 집중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1990년 3월 3일 강원도 양구 북방에서 4번째 땅굴이 발견됨에
따라 우리나라의 모든 전선에 땅굴이 존재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발견된
땅굴은 순서에 따라 제1, 제2, 제3, 제4땅굴로 명명되었다.
1. 제1땅굴
고랑포지역에서 발견된 제1땅굴은 1974년 11월 15일 오전 7시 35분에
비무장지대를 수색하던 육군 제25사단 수색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수색
임무를 수행하던 중 땅 밑에서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한 수색대는
지표에서 약 46㎝ 아래에 터널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흙을
파다가 군사분계선 북쪽으로부터 약 3분간에 걸쳐 300발 가량의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이 사격으로 3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날
밤 주한유엔군사령부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서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 사실
을 확인하고 이를 군사정전위원회에 정식 제기했다고 발표하였다. 이로써
제1땅굴의 전모가 드러났다. 땅굴이 발견된 장소는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
동북쪽 8㎞ 지점으로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약 1.2㎞ 지점이었다. 땅굴
은 폭 1m, 높이 1.2m의 조립식 콘크리트 벽과 콘크리트 슬래브 천장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지표에서 250∼450㎝ 깊이로 얕게 파져 있었다. 220V
·60W의 전선, 전등시설이 되어 있었으며, 전체 길이 3.5㎞의 땅굴 안에는
레일이 깔리고 궤도차(軌道車)가 놓여 있었다. 또한 땅굴에는 우회통로와
궤도차를 돌리는 지점 및 취침장소와 배수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유사시
전술능력은 1시간에 1개 연대 이상의 무장병력을 통과시킬 수 있었으며, 궤도
차를 이용할 경우 포신(砲身)과 중화기 운반도 가능하였다. 땅굴이 발견된 후
우리 정부는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하여 북한측에 땅굴현장의 공동조사를 제의
하였으나, 북한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땅굴이 발견된 지 5일 후인 11월
20일 한미 공동조사반이 수색에 나섰는데, 북한이 매설한 폭발물에 의하여
국군장교 1명과 미군장교 1명이 순직하고 6명이 부상당하는 참변을 겪기도
하였다. 제1땅굴은 1976년부터 1988년까지 국민안보 교육 목적으로 일반
인들에게 공개되다가 1988년 이후 안전문제로 일반인 공개가 중단되었다.
2. 제2땅굴
제2땅굴은 제1땅굴이 발견된 지 4개월 뒤인 1975년 3월 19일, 철원 동북쪽
13㎞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은 군사분계선 남쪽 800m지점이었으며,
항공사진 등을 근거로 시추탐사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땅굴을 조사한 결과 규모
는 폭이 2.1m, 높이 2m, 전체 길이 3.5㎞로서 군사분계선 남쪽 1.1㎞지점
까지 굴착되어 있었다. 깊이는 지표에서 50∼160m이었으며, 남방한계선
남쪽에 여러 개의 출구를 만들어 유사시에 한꺼번에 출구를 헤치고 나올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지하수가 땅굴 속에 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약간의
경사를 이루는 기술공법을 쓴 흔적이 역력하고, 많은 병력이 집결할 수 있는
광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군의 실험결과 이 땅굴은 시간당 구보 24,000명,
속보 20,000명, 도보 18,000명의 병력이 통과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정규전에서 땅굴을 통해 시간당 1개 사단 병력을 후방으로 침투시켜 군사
적 요충지를 점령함으로써 전방부대를 일거에 고립시켜 전선을 붕괴시킬 수
있고, 비정규전에서는 대남공작원의 침투는 물론 후방교란을 위한 경보병 1개
여단 병력을 은밀하게 후방으로 침투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야포와 차량
의 통과는 물론, 땅굴의 마무리공사가 이루어졌을 경우에는 전차의 침투도 가능
하였다. 제2땅굴 발굴 과정에서 북한군이 설치한 지뢰와
부비트랩에 의해 8명이 전사하였다.
3. 제3땅굴
제3땅굴은 1978년 10월 17일 판문점에서 4㎞, 군사분계선 남방 435m 지점
에서 땅굴수색 시추공사를 하던 중, 한 시추공에 박혀 있던 PVC파이프가 튀어
나오고 지하수가 공중으로 12m 가량 솟아오르면서 발견되었다. 땅굴이 발견된
지점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군사정전위원회를 지원하는 유엔군 전진기지
로부터 2㎞ 떨어진 곳으로 임진각에서 서북쪽으로 4㎞지점에 위치하였다. 이
땅굴은 임진강 하구에서 판문점을 향하여 남북으로 그어진 군사분계선의 서쪽
1,200m지점으로 추정되는 북한측 지역의 입구에서부터 지하평균 73m의 암석
층을 굴착하여 1,635m가량 남쪽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폭 2m, 높이 2m로
제2땅굴과 같은 구조인 아치형이었으며, 전술능력은 1시간에 3만 명의 병력과
야포 등 중화기를 통과시킬 수 있었다.
4. 제4땅굴
제4땅굴은 1990년 3월 3일 강원도 양구 북동쪽 26㎞지점에서 발견되었다.
폭 1.7m, 높이 1.7m, 지하 145m 깊이에 길이는 약 2㎞에 달하는 암석층 굴진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땅굴은 동부전선에서 발견된 최초의 땅굴로 북한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용 땅굴을 굴착하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땅굴과 관련하여
숨겨진 북한의 전략적 기도는 첫째, 전면전을 전개할 때 대량병력의 신속한 이동
으로 중요 전략지역을 점령하고, 둘째, 사회혼란이나 무장폭동이 일어났을 경우
게릴라부대인 ‘특수8군단’과 ‘경보병부대’를 침투시켜 후방을
교란시키려는 데 있다고 추정된다.
『대비정규전사』2(국방군사연구소, 1988)
『북괴의 대남도발사』(내외통신, 1980)
『북괴만행사십년』(한국반공교육연구원, 1985)
『북괴도발30년』(북한연구소, 1978)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삼 팔 선 의 봄
작 사 . 김 석 민
작 곡 . 박 춘 석
노 래 . 최 갑 석
눈녹인 산골짝에 꽃이 피누나
철조망은 녹쓸고 총칼은 빛나
세월을 한탄하랴 삼팔선의 봄
싸워서 공을 세워 대장도 싫소
이등병 목숨바쳐 고향찾으리
눈녹인 산골짝에 꽃은 피는데
설한에 젖은 마음 풀릴길 없고
꽃피면 더욱 슬퍼 삼팔선의 봄
죽음에 시달리는 북녘 내고향
그동포 웃는얼굴 보고 싶구나
2008년에 타계하신 최갑석의 대표곡인 '삼팔선의 봄' 이 노래
도 6.25와 관련된 노래다. 다만 다른 6.25와 관련된 노래 발표
년도에 비해 조금 늦게 나왔지만. 그래도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노래로 최갑석의 특유의 바리톤 음성이 참 듣기가 좋은 노래이다.
이 노래를 만든이들은. 작사가로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석민이 작사를 하였고,'별아 내 가슴에' '비 내리는 호남선'
등을 작곡한 박춘석이 작곡하였고, '고향에 찾아와도'
등의 히트곡을 낸 최갑석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정확한 발표년도는 잘 알지 못하겠고,
1950년대 후반쯤에 발표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노래의 내용은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로 공을 세워 고위관직도 바라지 않고 오직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호국영령들을 기리는그런 내용을
지니고 있다.
데뷔곡으로 알려진 '고향에 찾아와도'가 굉장한 반응을 보인후
에 이 노래도 크게 히트했으며, 최갑석은 인기스타가 되었고,몇
년 후에 이 '삼팔선의 봄'과 '휴전선 고갯길'을 발표, 히트를 치자
최갑석은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 노래는 최갑석을 만들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노래는 6월달이면 어김 없이 가요 프로그램 등에서 들려오고 있다.
나이 드신 6.25참전 용사분들이나, 이산가족들의 회한의 노래
가 돼 버린 이 노래는
우리나라의 비극을 생생하게 전달한 노래이며,
우리나라 국민들이 꼭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고 작사가 정두수 선생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안타깝게 타계하신 최갑석선생의 명복을 빌고, 동족상잔에서
처참하게 짓밟힌 우리 국토와 생명을 지키려다 돌아가신 호국
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2019-03-11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