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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남의진 기념사업회 자료에서 옮김
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42
총지휘대장 정환직(鄭煥直) 선생①
자는 백온(伯溫), 호는 동엄(東广), [초명(初名) 치우(致右), 자 좌겸(左兼), 호 우석(愚石), 또 다른 이름으로 치대(致大), 호 열남(洌南)]이다. 임진왜란 당시 영천 의병대장 정세아(鄭世雅)의 10세손이다. 단기4177(서기1845)년 5월19일 경북 영천시 자양면 검단리(현 충효리)에서 출생. 재주가 뛰어나 12세에 향중 백일장에 장원으로 휘장되어 소년재사로 이름을 날렸다. 지은 詩 94수, 잡저(雜著) 청전예격(請戰藝檄) 5절(節) 등 많은 저작이 산남의진 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43세 되던 해에 태의원(太醫院) 전의(典醫)로 입직(入直)되었고, 지방순찰을 담당하는 직무에 여러 단계를 역임하여 정치부패를 교정하고 민생도탄을 구원코자 하였다. 1894년 동학란이 궐기하자 완전사(翫戰使)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선유사겸토포사(宣諭使兼討捕使)로 배명(拜命)되어 삼남(三南)을 순무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친일파가 득세하여 나라가 어지러울 때 고종황제의 명으로 호군당상(護軍堂上)으로 천거되었다가 시종신(侍從臣)으로 임명되어 당파충돌의 화를 면했다. 아관파천(俄館播遷) 등의 혼란을 겪으면서 선생은 시(詩)로서 통한(痛恨)을 달래고, 혹은 상소나 격문을 지어 친일파들의 이적(利敵)행동을 비판하기도 했다. 마침내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어느 날 시종신으로서 입직(入直)하자 고종황제께서 흐느끼며 “경은 화천지수(華川之水)를 아는가, 짐은 바라노라” 하면서 짐망(朕望)을 써서 선생에게 주었다. 화천지수의 유래는 중국의 춘추시대에 제나라 경공이 여러 제후국의 집중공격을 받아 거의 사로잡힐 지경에 이르렀다. 그 때 차우장(車右將)으로 있던 봉추부란 장군이 경공의 수레에 올라가서 경공과 의복을 바꾸어 입고 봉추부는 수레 위에 앉고 경공은 말을 몰고 있다가 적장에게 잡힐 찰나에 봉추부가 경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목이 마르니 화천에 가서 물을 한 그릇 떠오라.” 하였다. 경공이 이 기회를 타서 도피하여 신하가 주공(主公)을 구원한 일이 있었으니, 이때에 우리 정부에 적의 감시가 극심하였으므로 옛 고사를 들어 군신(君臣)간에 밀의(密議)를 한 것이다. 선생은 밀조를 받고 눈물을 머금고 궁을 나오니 1905년 12월 5일의 일이다. 선생은 관직을 사절하고 사저(私邸)에 돌아와서 장자(長子) 용기(鏞基)에게 분부하되 “나라 형세가 이러하고 민족의 존망이 말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는 국가 은혜를 입은 몸이 되어 죽음으로서 그 은혜를 보답하기로 되었는데, 오는 황궁에서 중대한 책임을 맡았으니 너는 집에 돌아가서 우리 집 후사를 보존하는 것이 옳다.” 하고 밀조(密詔)를 보이고 거의(擧義)할 계획을 말하니 아들 용기가 울면서 “임금이 신하에게 부탁하는 칙명(勅命)과 어버이가 자식에게 지휘하는 명령이 그 의리는 동일한 법입니다. 대의는 국가를 구한 연후에 사가(私家)를 보존하는 것이 도리에 마땅한 일이며, 하물며 이 중대하고 모험되는 일은 젊은 자들의 할 일이요 노쇠하신 어른께서는 감당 못할 바입니다. 바라건대 대인께서는 집안일을 걱정하지 마시고 이 일을 소자에게 맡겨주시면 저는 힘을 다하여 나라를 구하고 집을 보존하겠습니다.” 하고 연 3일을 애걸하는지라. 여러 가지 이해를 들어서 만류하다가 다시 생각하니 자식이 벌써 나라를 위해 대의를 잡고자 하는 마당에 어버이된 의무에 내 집 사정에 구애되어 만류할 수는 없는지라 드디어 허락하였다. 그리고 부자가 의논하기를 선생은 서울에서 준비를 하고 아들 용기에게는 인원 모집에 착수하라고 영남에 내려 보냈다. 선생은 그 해 섣달 그믐께에 서울을 출발하여 1906년 정월말까지 영남 일대를 순회하여 동지들을 찾아 약속을 정하고, 영천 고향에 도착하여 친척고구(親戚姑舅)들과 시국사태를 이야기한 뒤 부산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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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휘대장 정환직(鄭煥直) 선생②
“큰 뜻을 발휘 못하고 벌써 백발이 되느냐. 꿈같은 임진년의 난이 또 생겼다. 일평생에 백성을 돌보는 계책이 헛되이 되고 죽음을 바치고자 한 나라를 위한 수심은 잊을 수 없다. 옛 정자에서 예전 문학만 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 글에 어찌 좋은 놀음을 생각할 여가가 있으랴. 내가 풍진 속에 골몰하는 것을 만류하지 말라. 조상의 유업을 계승하고 임금을 구원한 연후에 나도 쉴 때가 있으리라.”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으로 영천·경주 양성을 수복하는 데 큰 전공을 세운 10대조(代祖) 호수 정세아 공(公)이 국가에서 수여하는 모든 영예를 사양하고 고향인 용산동에 정자를 지어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인 그 강호정사(江湖精舍)에서 정환직 선생이 친척고구들을 모아놓고 지어 읊은 시(詩)다. 1906년 정월 그믐에 서울로 돌아온 선생은 군자금 조달에 착수한다. 황궁의 하사금 5만 냥을 내관 라시환(羅時煥) 편으로 전달받고, 퇴관 동료들의 모금액 2만 냥은 전(前) 참찬 허위(許蔿)로부터 받았다. 흩어진 군인들을 모아 때를 기다리도록 보호하는 한편, 청나라 사람 왕심정(王心正)으로 변장한 밀정 김사옥(金思玉)을 양식 총 5백 정과 기타 군수품을 구입하도록 上海로 파견했다. 4월 초에 정대하(丁大厦)와 이창송(李蒼松)이 상경하여 영남의 거사 경과를 보고하되, 군인 숫자는 천여 명이 되나 무기가 부족하여 당황해 한다고 전한다. 4월 중순에 모집된 군인 100명을 강원도 강릉 금광으로 보내 영남의진을 맞이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그런데 영남에서 5월23일 정용기 대장이 대구감옥에 피체(被逮)되었다는 연락이 오매, 크게 놀라 대구로 향하다가 금릉의 재종제 참판 환덕(煥悳)의 집에서 영천서 올라오는 종제 치훈(致壎)을 만나서 상세한 경위를 듣는다. 도로 상경하여 대구 사건을 판서(判書) 심상훈과 교섭하여 해결되도록 하고 8월초에 대구로 내려오니 이미 석방조치되어 있었다. 영천 고향집에 도착하여 아들 정용기 대장과 여러 장병들을 위로한 후 재거(再擧)할 것을 독촉하여 내년 5월 이전에 강릉에 도달할 것을 약속받았다. 8월 16일 영천을 떠나 영남 각지를 방문하고 9월 9일 서울에 도착하니 종로의 요지마다 일본군 파수대가 배치되고 거리에 노는 아이들은 일본말 배우는 장난질이다. 다음 날 라시환을 불러 황궁 소식을 듣고 영남 상황을 주달(奏達)하다. 동지들과 연락하여 알아보니 적들이 민간에 흩어져 있는 무기까지 탈취하고 상해로 간 왕심정은 행방이 묘연하다. 1907년 4월에 서울에 잠복하고 있는 군인들과 무기를 강릉으로 모두 이송했다. 7월 하순에 이창송․ 정완성 등이 상경하여 보고하기를, “우리 산남진이 각 열읍에 분대(分隊)되어 유격전을 벌이는데 그 인원수를 합산하면 수천 명이 되고 활약하는 지역은 경상도 전역이라. 매일 수삼 처 접전을 벌이는데 제일 고통은 무기가 태반 부족하고 약탄이 핍절되어 앞길을 열기 어렵다. 또 적이 유독 강원도 입구를 단속하고 있어 북진이 어려우니 강릉 부대를 경상도로 이동시켜 주소서.” 하고 간청하므로 이창송 등을 강릉으로 먼저 보내 강릉부대를 영남으로 인솔케 하였다. 그리고 서울 내 동지들과 황궁에 상황을 주지(周知)시킨 후, 심복자 수십 인을 대동하고 강릉을 거쳐 동해안으로 잠행하여 청하면 반곡리에 있는 친동생인 환봉(煥鳳)의 집에 도착하여 진중(陣中)을 탐문하고 서울 사람들을 의진에 입진시켰다. 고향집에 당도하여 장병들을 독려하고 기계방면에서 수일간 머무는 사이에 왜적이 검단리 선생의 사택과 민가 여러 채를 불사르고 노략질을 하고는 우리 의병부대에 쫓겨났다. 운주산 안국사에서 인근지방의 문중대표들과 회합하고 기계 막곡리에 있는 처제 이눙추(李能樞)의 집에서 수일간 머물게 되었는데, 9월1일 새벽 입암전투로 본부 요인들이 대거 순절(殉節)했다는 진중 소식을 보고받아 곧바로 입암에 도착하여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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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휘대장 정환직(鄭煥直) 선생③
아들을 먼저 보낸 아픔을 뒤로 하고 정순기 ․ 우재룡 등의 간청을 받아들여 3대 대장으로서 진두지휘의 책임을 맡게 된다. 입암패전으로 좌절감이 큰 의진(義陣) 전군을 추스르고 각지에 통유문(通諭文)을 발송하여 신병을 모집하니 그 동안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요인들이 군자금과 군인 모집, 군수품을 수집하여 돌아왔다. 청송 ․ 진보 - 김일언 ․ 박문선 : 서종락 ․ 우영조 ․ 배연집 ․ 윤무건 ․ 심일지 ․ 남석구 ․ 오상영 ․ 남승하 ․ 남석우 등과 군인 모집, 군수품 수집 / 동래 ․ 부산 - 홍우섭 ․ 유화실 - 철도공사장과 교섭하여 화약 수집 / 하양 등지 – 정춘일 : 군인 모집 / 대구 등지 – 손선일 ․ 손양윤 ․ 손양상 : 군인 모집, 군수품 수집 / 인동 ․ 칠곡 – 장성우 ․ 손기찬 : 군인 모집, 무기 수집 / 죽장 등지 – 최기보 ․ 최치환 : 군인 모집, 임병호 ․ 임창규 : 군자금 수집 / 포항 등지 – 박광 ․ 김태환 : 군인 모집, 무기 수집 / 의성 ․ 의흥 – 김성극 ․ 김진영 : 군인 모집 / 군위 ․ 비안 – 조상환 ․ 김순도 : 군인 모집, 무기 수집 / 기계 ․ 신광 – 이종곤 ․ 윤복은 : 군자금 모집 / 울산 ․ 언양 – 이규환 ․ 정성도 : 군자금 모집 / 운문산 인근 – 정래의 ․ 김상규 : 이형표, 윤부의 등과 군인 모집, 무기 수집 / 안동 등지 – 이규필 : 군인 모집 / 영덕 등지 – 구한서 : 군인 모집 / 흥해 ․ 청하– 안수원 : 군인 모집, 군수품 수집 / 청하 등지– 이규상 : 군자금 모집 / 경주– 이상호 : 군자금 모집, 이세기 : 군인 모집, 군자금 모집 / 영천 등지– 최익문 ․ 정완성 : 군인 모집, 군자금 모집 / 밀양 등지– 백남신 ․ 임중호 : 군인 모집, 무기 수집 / 흥해– 최세한 : 연해(沿海)각지의 정탐 기록 등이 그 내용이다. 정환직 대장은 정순기의 추천을 받아 3차 진영을 조직하고, 홍구섭 등이 북부 각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다가 안동 등지에서 고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재룡 등을 보내 구출했다. 각지 정보를 수집하니 경기(京畿)에서는 허위, 호서(湖西)에서는 이강년, 관동(關東)에서는 민긍호 등이 활약하고 있다. 강원도 남부와 경상도 북부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성화 ․ 신태호 ․ 변학기 ․ 이춘양 ․ 류시영 ․ 강진선 ․ 정경태 ․ 성익현 ․ 이하현 진영들과 연결하여 서로 호응하도록 약속을 체결했다. 본진은 남부연락을 윤부의, 북부 연락은 김석정에게 위임하고 영해 신태종(돌석)진영과 서로 통모종사(通謀從事)를 보내 연락을 주고받았다. 김학 등을 포항으로 보내 정탐하게 하고 대구 정탐을 위해 박경화를 보냈으며, 박동림 ․ 박기동을 연락책으로 지명하였다. 최세한(세윤) ․ 조성목 등의 흥해지방 정보, 정환봉의 청하지방 정보 연락이 들어왔다. 분대를 각지로 파견하니 남동대산 ․ 북동대산 ․ 구룡산 ․ 일월산 ․ 운문산 ․ 비학산 ․ 운주산 ․ 화산 ․ 향로산 ․ 토함산 ․ 팔공산 ․ 두봉산 ․ 갈라산 ․ 왕두산 ․ 문수산 ․ 장군봉 ․ 의봉산 ․ 금오산 모든 지역에 일분대식을 주둔시켜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본부의 조종을 받도록 하고 보급 기관은 각 사찰에 연락하여 거동사 ․ 주사사 ․ 도덕사 ․ 운문사 ․ 불국사 ․ 용운사 ․ 보경사 ․ 청양사 ․ 기림사 ․ 개흥사 ․ 묘각사 ․ 동화사 ․ 은해사 ․ 인각사 ․ 수정사 ․ 파계사 ․ 고운사 ․ 백운사 ․ 각화사 ․ 불념사 ․ 해인사 ․ 통도사 등 모든 사찰에 승통(僧統)들을 참모종사(參謀從事)로 위촉하였다. 9월22일 흥해읍을 습격하여 적 수명을 포살하고 분파소 등을 소각했다. 그 후 신령읍으로 진격하여 분파소 등을 소각하고 엽총 4백여 정을 몰수하니 수백명의 의병 자원자가 나와서 좌포장 임중호가 신병을 인솔하여 주사산성 훈련장으로 들어갔다. 흥해읍으로 진격하여 적의 분파소 등을 불태우고 무기 150여 정을 몰수하고 신병과 무기를 화산성으로 보냈으며, 의성읍으로 진격하여서는 적이 도주하고 없어 분파소 등을 소각시키고 퇴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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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휘대장 정환직(鄭煥直) 선생④
북진(北進)을 지휘하여 10월 초순에 청송지방에 도착했는데 아침 안개와 더위의 이상기후가 3일간이나 계속되더니 큰비가 종일 계속된 상황에 적의 대부대가 침입하여 파수병 2명이 전사하고 약탄 핍절과 화승총의 사용 불가로 전군이 패주하게 되었다. 이때 김성극 등이 선생을 업고 고봉(高峯)을 넘어서야 적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보현산 두마[죽장면 두 마리]에 본부를 설치하고 상황을 분석하니, 적의 민간인 탄압으로 화약을 구하기 어려워 탄약이 핍절되고 적의 대부대가 청송․진보 방면을 포위하고 가로막아 북진할 수 없는 처지라, 일단 탄약 준비를 한 후에 다시 계획을 수립하기로 명을 내렸다. 정순기에게 100명을 인솔하고 자천을 경유하여 봉화에 출현케 하고, 백남신도 100명을 인솔하고 현동을 경유하여 영양에 출현케 하여 적을 유인한 후 귀진(歸陣)하도록 명했다. 그 사이 최치환은 북동대산, 홍구섭은 보현산, 김성일은 운문산, 박광은 남동대산, 이규환은 팔공산, 이규필은 주사산, 조상환은 화산, 안수원은 운주산에서 각각 부대를 인솔하고 약탄을 제조한 후 돌아오게 했다. [전설에 의하면, 화약(火藥)은 백상자(百霜子:솥검정), 연초경(烟草莖:담배줄기) 등을 민간에서 수집하여 연초 줄기를 태워 백상자와 혼합하여 만든다. 또 탄환(彈丸)은 고철파편을 수집, 흙 독에서 끓여 녹은 수액을 땅에 산포(散布)하면 대두(大豆)형의 차란(*쇠붙이로 잔 탄알같이 만든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 된다. 그리고 화승(火繩)은 산마 껍질을 잿물에 6~7회 침수하여 부드럽게 하여 노끈을 만들었다고 한다.]또한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유세자(遊說者)를 정해 보냈는데 정래의 ․ 박동림 등은 흥해지방, 정치우 ․ 이두규 등은 영천지방, 장성우 ․ 김진영 등은 인동 ․ 칠곡지방, 이종곤 ․ 이규상 등은 경주지방, 이형표 ․ 김진현 등은 청도 ․ 밀양지방, 정춘일 ․ 손양상 등은 하양 ․ 자인 ․ 경산지방, 남석우 ․ 윤무건 등은 청송 ․ 진보지방, 박경화 ․ 최익문 등은 군위 ․ 의성지방, 손양윤 ․ 조경옥 등은 안동지방, 허열 ․ 김상규 등은 대구지방으로 각각 파견하고 본부는 비학산 주위에 의거(依據)했다. 각지로부터 유세하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각 지방 분대로부터 군수품 등이 운반되어 들어오자, 신병 수백인을 소모하여 돌아온 공이 큰 백남신을 선봉장으로 임명하고 연해 방면으로 출발했다. 행진(行陣) 중에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으며 군법을 어긴 도포장 고찬을 참(斬)하거나 남경숙이 전사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적의 대부대가 영덕, 포항 해상과 청송, 안강, 기계 등지에서 포위하여 들어온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탄약과 군수품이 핍절(乏絶)되니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북동대산 본대에 제군(諸軍)을 모아놓고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관동(關東)지방으로 본대를 옮길 것을 분부하니 이구동성으로 찬성한다. 이에 각기 상인이나 광산 인부, 농부로 변복하고 관동으로 출발하게 하고 정환직 대장 또한 심복 수명을 데리고 출발하였는데, 청하 각전에 이르러 병으로 2일간 치료차 머무르고 11월 6일 출발하려는 차에 적의 포위망을 갇혀 잡히고 말았다. 사로잡혔어도 안색이 태연하고 호령이 늠름하게 적을 꾸짖자 적장은 온순한 태도로 마차에 마련하여 정환직 대장을 이송했다. 영해로부터 포항-경주-영천-하양-경산을 거쳐 대구옥에 도착했으며, 갖은 방법으로 심문하고 회유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으니 도로 영천으로 돌아왔다. 옥중에서 身亡心不變(몸은 죽으나 마음은 변치 않으리) 義重死猶輕(의리가 무거우니 죽음은 오히려 가볍다) 後事憑誰託(뒷일은 누구에게 부탁할꼬) 無言坐五更(말없이 앉아 오경을 넘기노라) 라는 임종시를 남긴 선생은 단기 4240(서기 1907)년 음력 11월 16일 영천 남교(南郊)에서 적탄에 순절하였는데 이날 갑자기 광풍이 일어나고 하늘이 캄캄해졌으며 우레소리가 크게 울리면서 모래와 돌이 날리었다. 비보를 들은 자양면민들이 이용훈, 김석구, 권치상 3인을 선발하여 보냈다. 그들은 적장과 문답 후에 시신을 염습하여 운구하는데, 운반 인부는 군민이 동리 순서로 교대하여 자양면 검단 동산에 권조(權厝:임시로 장사지냄)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909년 음력10월에 장례를 거행하여 영천군 자양면 상구미(上龜尾) 광현산 선영에 안장했다. 당시 사람들이 정환직,용기 부자를 흠모하여 검단 마을 이름을 충효라 고쳐 불렀다.
1963년 대통령장 추서. 2013년 12월 이 달의 경상북도 독립운동가’로 선정, 전쟁기념관 2016년 11월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 <산남의진유사 제2편 總指揮大將 鄭煥直先生 略歷 P15~182><山南倡義誌 卷下 P2~14>
정치석(鄭致錫) 義士
자는 진삼(晉三), 좌익장(左翼將) 정치우의 백형(伯兄)이다. 문행(文行)이 있어 병오‧정미 연간[1906~1907]에 기묘한 계책으로 산남의진을 보좌하고 의진이 무너진 후에는 은신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42><山南倡義誌 卷下 P80>2015년 대통령표창 추서, 2017년 11월30일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회 주관으로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에 추모비 건립
정치우(鄭致宇) 義士
자는 계로(季老), 관향은 영일(迎日).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좌익장(左翼將)으로 활약하였고 후에 은신하여 광복운동에 협력하다가 광복 청천을 못보고 서거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470><山南倡義誌 卷下 P51>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2017년 11월30일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회 주관으로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에 추모비 건립
정치화(鄭致化) 義士
초명(初名)이 치열(致烈), 자는 예중(禮重), 정환직 대장의 사종제(四從弟)다. 가계가 부유하여 의진 초기에 여러 차례 물자로서 진후(陣後)를 원조하고 의진이 무너진 후에는 은신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42><山南倡義誌 卷下 P80>2016년 대통령표창 추서, 2017년 11월30일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회 주관으로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에 추모비 건립
정진소(鄭鎭韶) 義士
자는 국경(國卿), 호는 해난(海難), 정용기 대장의 오종제(五從弟)다. 산남의진 의거 초에 정용기 대장이 부채 하나를 주면서 “오도(吾道) 추선(秋扇:가을부채, 쓸모없어짐을 뜻함)이라. 심장(深藏) 면려(勉勵)하라” 라고 훈계하니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학문을 닦으며 진후(陣後)를 원조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43><山南倡義誌 卷下 P81>
정진욱(鄭鎭郁) 義士
자는 기옥(器玉), 정용기 대장의 사종제(四從弟)다. 처음에 종군하여 활약하다가 정용기 대장이 죽음을 각오하고 나아감에 대장의 가족을 피난시키고 은신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43><山南倡義誌 卷下 P82>
정환집(鄭煥集) 義士
정환직 대장의 재종제(再從弟). 병오(丙午:1906)·정미(丁未:1907)년 사이에 서울과 영남의 연락을 담당하였고 후에 은신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47>
정석기(鄭晳基) 義士
정용기 대장의 삼종제(三從弟)로 벼슬은 참봉(參奉). 처음에 금릉[지금은 김천] 지례지방 소모활동을 하였고 후에 은신하다. <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47><山南倡義誌 卷下 P81>
정치훈(鄭致壎) 義士
자는 경팔(景八), 호는 남초(南樵). 정환직 대장의 종제(從弟)다. 병오년의 경주사건[1906년 정용기 대장이 경주에서 적에게 붙잡혀 투옥된 사건]을 서울 정환직 대장에게 연락하였고 대소가(大小家) 가족들을 피난시키면서 전 가산(家山)을 산남의진 진중(陣中)에 헌납하였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33><山南倡義誌 卷下 P74>
정옥기(鄭沃基) 義士
자는 옥여(玉汝). 정환직 대장의 둘째 아들로 당숙(堂叔)인 정치훈 의사의 양자로 갔다. 군기감(軍器監)을 맡아 비바람을 피하지 않고 진중에서 활약하며 정보연락과 물자수집에 주력하였으며, 아버지를 잃는 참변을 당하고는 은신하여 형인 정용기 대장의 아들 4형제를 어루만져 키우고 광복 동지 우재룡 등과 자주 연락하였다. 을유(乙酉:1945년) 해방을 보고 병술(丙戌:1946) 정월 18일에 서거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33><山南倡義誌 卷下 P74>
정환봉(鄭煥鳳)의사는 정환직 대장의 동생이다. <산남창의지(山南倡義誌)卷下 P74>와 <산남의진유사(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33>에 그 활약상이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서훈을 받지 못한 이유가 20여년 전 그 후손이 서훈 신청을 했을 때 당시의 담당자가 금전을 요구해서 포기했다는 고손자(高孫子)의 전언을 들으니 씁쓸하다. 마침 5월11일 그 후손들이 포항시 신광면 반곡리에 가족묘원을 단장하고 정환봉 의사의 묘비를 제막한다는 소식이다. 기록이 분명함에도 서훈을 받지 못한 산남의진 선열들만이라도 서훈(敍勳) 작업에 박차를 가할 일이다.
정순기(鄭純基) 의사
자(字)는 사홍(士弘), 호(號)는 검와(檢窩), 관향은 오천(烏川), 동엄(東嚴) 정환직 대장의 종질(從姪). 정용기, 이한구, 손영각 등과 창의, 소모장(召募將)으로 활약. 왜군에 피금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석방. 의진 해산 후 20여년간 지하활동을 하며 참동계(參同契)를 만들어 산남의진 열사를 추모하다가 해방 후 서거. 1990년 애국장(愛國章) 추서〈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343
정진욱(鄭鎭郁) 義士
자는 기옥(器玉), 정용기 대장의 사종제(四從弟)다. 처음에 종군하여 활약하다가 정용기 대장이 죽음을 각오하고 나아감에 대장의 가족을 피난시키고 은신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43><山南倡義誌 卷下 P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