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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왜군과 함께 조선에 왔다가 두사충처럼 귀화해 조정으로부터 이름까지 하사받은 김충선 장군을
기리는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녹동서원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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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핵심참모로 조선에 왔다가 귀화한 두사충을 기리는 모명재 전경. |
고가 탐방은 필자에게 다소 부담이었다. 하지만 ‘숙제’를 제때 하기 위해 이곳저곳 답사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건성으로 보다가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공부가 되었다. 남에게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고가탐방이란 코너
덕이다. 오늘을 끝으로 연재를 마무리하려 하니 한편으로는 독자에게 더 많은 곳을 소개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마지막으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녹동서원과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모명재를 찾았다.
이 두 곳은 임진왜란 때 일본과 중국에서 각각 귀화, 대구에 정착한 두 장군의 유적이다. 녹동서원은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의 참모였다가 조선에 귀화, 혁혁한 공을 세우고 가창 우록리란 한적한 산골에 정착한 김충선 장군을, 모명재는
명나라 이여송 장군의 전략참모로 활약하다가 두 아들과 함께 터를 잡은 두사충을 기리는 곳이다.
필자는 이 두 곳의 현판·주련·비석 등을 모두 탁본해 이달 말 대구문화예술회관 갤러리에서 1주일간 전시를 하고 자료집을 만들
계획이다.
한 곳은 규모가 있는 서원이고 다른 한 곳은 재실이지만, 문중의 관심 속에 잘 보존되고 활용되는 공간이어서 지인·가족과 야외
나들이를 겸해 답사해 볼 만한 곳이다.
◆ 녹동서원(임란때 明서 귀화한 두사충을 기린 곳)
녹동서원은 임진왜란 때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朴晋)에게 귀화한 후 많은 전공을 세웠던 김충선(金忠善)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789년(정조 13)에 건립하였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그 후 1885년 영남 유림과 김충선의 후손들이 합심하여 재건하였고, 1914년에 다시 세워졌다. 1972년에는 서원의 규모가 협소
하다고 하여 원래의 위치에서 100m 떨어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면서 증축하였다.
외삼문인 향양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숭의당(崇義堂)이 위치하고 있다. 강당 오른쪽으로 내삼문에 둘러싸인 사당
녹동사(鹿洞祠)가 자리하고 있으며, 강당 오른쪽, 사당 앞에는 유적비가 서 있다. 강당의 오른쪽에는 98년 개관한 유물전시관
충절당과 생활관인 첨모당이 있다.
2012년에 규모 있고 새로운 한일우호관을 열어 많은 방문객이 체험하고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는 전시관 역할을 하고 있다.
충절당에는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 등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다.
한일우호관 뒤산으로 나무로 만든 계단길이 나 있는데 솔숲을 걸어 한참 가면 산 중턱에 모하당 김충선 선생의 묘소가 있다.
풍수를 모르는 사람이 봐도 정말 아늑한 곳에 유택이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소위 명당에 산소가 있어 풍수지리를 연구
하는 사람들의 답사 필수 코스로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굳이 명당을 보려는 욕심이 아니어도 솔숲을 산보해 본다는 기분으로
산소를 찾아가도 좋을 듯하다.
녹동서원 강당과 기둥에는 많은 편액과 주련이 걸려 있다. 건물을 지은 내력을 적은 기문과 대들보를 올릴 때 축원하는 상량문,
기둥을 장식하여 지은 시문과 집 이름 등 여러 가지 현판 주련이 있어 소개를 하고자 한다. 현판을 적은 분은 잘 모르겠으나
주련을 적은 분은 대구의 유명한 서화가였던 석재 서병오 선생이다.
雲情留駐 僊洞左邃(운정유주 선동좌수) 구름 같은 정 머무르니 선동이 왼편에 깊숙함이요,
塵心洗却 寒泉右流(진심세각 한천우류) 티끌 마음 씻어내니 한천이 오른편으로 흐르네.
兄巖列立 基業長修(형암열립 기업장수) 형암이 늘어서서 살아갈 터전 길 닦으니,
三頂明山 親占十地(삼정명산 친점십지) 삼정 밝은 산에 몸소 열 곳을 점지했네.
◆모명재
수성구 만촌동 형제봉 자락에 자리한 모명재(慕明齋).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원병으로 왔던 이여송과 진린을 따라 조선에 파병됐던 두사충의 재실이다. 두사충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였던 이여송과 함께 원병으로 조선에 들어와 활동을 했고, 정유재란 때 다시 두 아들과 함께 참전했다가 전쟁 후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이다.
그가 맡은 일은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라는,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임무였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참모로서 항상 군진을 펴는데 조언해야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
긴밀한 협의를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아주 친했다. 임란이 평정되자 두사충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의 매부인 진린(陳璘)도독과 함께 우리나라로 나왔다. 이때 두사충은 충무공과 다시 만나게 되었고,
충무공은 두사충에게 한시를 지어 마음을 표했다고 한다.
모명재는 1912년 경산객사의 재목을 구해서 후손들이 건립한 것이다.
재실안에는 많은 편액과 주련이 걸려 있다.
모명재의 대문에 걸린 편액은 만동문(萬東門)인데, 그 의미는 ‘백천유수 필지동(百川流水必之東)’에서 택한 이름이다.
재실 중앙 처마에는 모명재 편액이 있고 오른쪽 방 앞에는 숭정유루(崇禎遺樓)와 왼쪽엔 경의당(敬義堂)이 각각 걸려있다.
대청안에 이락헌(二樂軒), 형제봉(兄弟峰), 거연천석(居然泉石) 등의 편액과 기문이 걸려 있다.
기둥에는 이순신 장군이 두사충에게 준 시 한수가 걸려있다.
奉呈杜僕射(봉정두복야)
北去同甘苦(북거동감고)
東來共死生(동래공사생)
城南他夜月(성남타야월)
今日一盃情(금일일배정)
두복야(두사충)에게 받들어 드립니다
북으로 가면 고락을 함께 하고
동으로 오면 생사를 같이 했네
성곽 남쪽 타향의 달밤에
오늘 한잔 술로 정을 나누네
◆대구 풍광 읊은 詩와 둘레길 연결을
대구의 고가를 조사하면서 서원 재실 정자를 중심으로 주위의 풍광을 노래한 시들이 여러 수가 있음을 살펴 볼 수 있었다.
대구 주변의 뛰어난 풍경 10곳을 정해 노래한 서거정의 ‘달성십경’은 우리가 익히 들어보고 자주 인용하는 내용이다.
이 달성십경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대구의 경치를 노래한 시가 있음을 공유했으면 한다.
지면의 제한으로 대구의 경치를 읊은 한시 내용을 소개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우선 그 제목만 열거하면서 고가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모당 손처눌의 문탄재십경(聞灘齋十景), 의락당팔영(宜樂堂八詠)
▷윤종대의 영벽정팔경(暎碧亭八景)
▷일암 김용호의 학화재팔경(鶴和齋八景)
▷혜재 양재호의 학산재십경(鶴山齋十景)
▷학암 신성섭의 대구팔경(大邱八景)
▷노암 우하교의 상화대 십경(賞花臺十景)
▷엄태두의 아양팔경(峨洋八景)
▷시산 채영걸의 매산초당팔경(梅山草堂八景)
▷양매당 채치룡의 양매당팔경(養梅堂八景)
▷운계 서석보의 고산서당팔경(孤山書堂八景)
▷남주 채헌기의 고산팔경(孤山八景)
▷하옹 이익필의 하목당십육경(霞鶩堂十六景)
▷옥연재팔경(玉淵堤八景) ▷다사십경(多沙十景) 등이 있다.
주자의 무이구곡가를 본떠 대구의 강하(江河) 풍광을 노래한 시들도 있다.
▷수남구곡(守南九曲)
▷서호 도석규 서호병십곡(西湖屛十曲)
▷학암 신성섭의 와룡구곡(臥龍九曲)
▷경도재 우성규의 운림구곡(雲林九曲)이 있다.
이외에도 여러 문헌에 대구를 노래한 시들이 많이 있다고 본다.
집중조사하여 이를 정리하고 대구 둘레길과 연결시키면서 대구를 홍보하는 조경·문화자료로 삼았으면 한다.
동방금석문연구회장·능인고 교사 jiju222@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