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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윤관이 함경도의 여진 정벌후 9성을 쌓았으나 결국 철수하다 (중국 34)
신라가 3국을 통일했을 때 우리나라 국경선은 황해도에서 원산만이었는데.... 918년에
세워진 고려는 926년에 발해가 거란에 망하자, 왕건은 폐허로 사람이 살지 않던
평양으로 진출하였으며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고구려 멸망후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여진족이 수백년간 대를 이어 거주하고 있었으니.... 이들
은 발해의 지배를 받다가 발해가 망한 이후에는 '흑수국', '보로국' , ‘흥료국’, ‘정안국’ 을
세우는데, 거란족 요나라가 전광석화 처럼 순식간에 발해를 멸망시키긴 했지만 요나라는
송나라 및 서하 와도 전쟁하면서 몽골족도 견제를 해야 하는지라..... 온 사방이 적이었습니다.
서, 남, 북 세방향이 모두 적인 요나라는 한반도의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 까지는 미처 손에 넣지
못한 상황이었으니..... 이 틈을 노려 고려는 북진을 시작해 수백년간 조상 대대로 거주해온
여진족들을 죽이고 쫓아내면서 서쪽은 청천강 평안남도, 동쪽으로 화주(영흥) 까지 북진합니다.
거란족 요나라는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만주를 장악한 다음, 고려에 송과 친교를 끊고 요나라
와 수교할 것을 요구하면서 993년 10월 소손녕이 6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서 80만 대군이라고
칭하니..... 과거에 발해를 순식간에 멸망시킨 요나라가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했다는 소식에
고려 조정은 놀라 황해도 중간 자비령 이북을 요나라에 떼어주고 항복하자는 의견이 대세였습니다.
유일한 주전론자 서희는 거란이 송나라와 피터지는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고려를 침공했으니 고려에 오래
있을수는 없다고 판단하고는.... 외교 담판으로 압록강 하류 평안북도 "강동 6주" 를 얻는 수확이 있었
으니.... 강동 6주는 거란땅은 아니지만 고려가 여진족을 쫓아내고 차지하는걸 인정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1010년 거란 성종은 강조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고려 임금을 폐위한 것을 문책한다며 40만 대군(실제는
20만?) 으로 침공하니 강조는 30만 대군으로 맞섰으나 패해 죽고 수도 개경이 함락되자 현종은 나주로
도망쳤으며, 그후 고려왕이 친조약속을 지키지 않자 1018년 소배압이 3차로 침공해 깊숙이 내려옵니다.
그러자 강감찬은 거란군의 2배인 20만 8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출진해 귀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두니
거란군은 도주하고 전쟁이 끝났는데, 고려는 거란과 군신(君臣) 관계를 맺으며 사대(事大) 를
하면서 전쟁을 종식시켰고.... 정종 시대 부터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통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니? 고려가 거란족 요나라와 전쟁에서 이겼는데도 왠 군신관계며 사대냐? 3차 여요전쟁 거란은
황제가 아닌 일개 장군이 불과 10만명으로 침략한 것이라, 패배했지만 본국에는 수십만 병력이
있었으니 국력과 군사력의 차이 때문으로 여겨지는데, 요나라는 황제국의 명분을 취한데다가
배후 걱정없이 송나라와 전쟁에 전념할수 있게 되었고..... 고려는 실리를 취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고려는 거란(요) 한 나라 하고만 싸우면 되지만, 916년에 건국한 요나라는 온 사방이
다 적이었으니 먼저 925년에 동쪽 발해를 공격해 멸망시킨후... 몽골족과 기타 소수민족들
을 손아귀에 넣고는 요 태종은 남진해 개봉을 포위하기도 했으며, 959년 후주 세종과 싸우고
979년에는 송나라와 싸웠으며... 981년 송나라는 연운 16주를 찾기위해 1차 북벌을 개시합니다.
송나라는 986년 2차 북벌로 요나라는 멸망직전에 간신히 송군을 격퇴했는데, 송군과 본격적으로
전쟁하기 위해서 송나라와 우호적인 고려가 배후를 공격할지도 모르니 그 후환을 없애기 위해
993년 1차 고려를 공격한 것이고..... 서희와 화의로 배후 걱정이 없어지자 999년 부터 송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해서 1004년 20만 대군으로 남진해 송나라를 굴복시키고 "전연의맹" 을 맺었습니다.
송나라와 화의로 여유를 갖게된 요나라는 1010년 황제가 40만(실제 20만?) 으로 침략해 강조의
30만 고려군을 격파하고 개경을 점령했는데, 그럼에도 성종은 몸은 고려에 와 있어도 마음은
송나라에 가 있었으니 고려에서 시간을 끌면 반드시 송나라가 북진해 올 것이라..... 고려왕
친조 약속으로 철수를 했으며 이후에도 송, 서하, 여진족의 금나라와 끊임없이 전쟁을 치릅니다.
70년 세월이 흐른후 11세기 말 북쪽 흑룡강 유역에 옛날 흑수말갈의 후예인 완안부 여진족
의 추장인 오고내(烏古迺) 와 그의 아들 영가(盈歌) 가 완안부를 급속도로 성장
시키기 시작해서는 남진하자......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여진족 내부에 갈등이 촉발됩니다.
고구려시대의 말갈족은 후삼국시대에는 호족 윤선을 따른 '흑수번중' 을 거쳐 여진족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함경도 함흥등지의 여진족들은 동해 해안을 따라 경상도 및 우산국(울릉도)
에다가 일본 서해안과 심지어 대마도와 규슈까지 해적질을 하러 갈 정도로 왕성히 활동했습니다.
일본은 함흥의 여진족 해적을 도이(島夷) 라 부르니 1019년 3월 도이인(刀伊人 여진족)들이 50척
의 배를 타고 쓰시마(대마도對馬島) 에 쳐들어왔다고 기록했는데.... 저 약탈을 하던 1018년에
중간 지점인 울릉도에서 무자비한 약탈로 우산국 주민들은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고, 1022년
에는 요행히 살아 남았던 우릉성주와 아들 부어잉다랑등 주민들이 섬을 나와 고려로 귀부 합니다.
고려 후기와 조선초 울릉도는 왜구로 사람이 살수 없었으니, 조선 태종과 세종때 공도령(空島令) 으로
주민 쇄환정책을 펼쳐 470년간 사람이 살지 않은 무인도 상태로 있었으며.... 고종 때인 1882년에
이규원과 순시선을 보냈더니 조선인 116인과 특히 일본인 79인이 불법 거주하고 있는지라 쫓아냅니다.
숙종때인 1693년에 안용복이 울릉도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일본인들의 배가 울릉도의 항구에
정박중이며 울릉도 섬에 일본인들이 움막을 짓고 거주(봄~가을) 하는 것을 보고 조선땅인
울릉도에 왜 거주하느냐고 항의했듯, 조선 조정은 일본인들의 거주에 놀라서 공도정책을
폐지하고 1883년에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 20호를 이주시키니 현재 울릉도 주민들의 조상입니다.
1. 고려 천리장성
통일신라의 국경선은 황해도와 원산만이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은 사람을 보내 당나라가 고구려인들을 모두
잡아간지라 황무지로 오래토록 비어있던 국경지대인 옛 평양에 목책을 두르고는 남쪽 사람들을 이주
시켰으며, 점차 올라가 평안남도 지방을 차지했고 동쪽으로는 영흥까지 올라갔으며 여진족을 몰아내는데
서희가 993년에 강동 6주를 거란에서 인정받아 평안북도의 3분지 1에 해당하는 압록강 하류를 확보합니다.
蠻狄侵略 柳韶築千 북방 오랑캐의 침략에, 유소(柳韶) 가 천리를 쌓았다. 북방 오랑캐의
침략을 막기 위해 (평안도 의주목의) 옛 장성을 세간에서는 속칭 만리장성
이라고도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고려장성(高麗長城) 이라고도 한다.
고려의 천리장성은 요나라(거란), 금나라(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되었으니 현재도 그
흔적이 남아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고구려 천리장성이 요동 반도에서 만주
중부까지 이어져 있다면, 고려의 장성은 압록강 어귀(강동 6주) 에서 평안남도 북단을 가로
질러 함경남도의 영흥과 함흥 중간인 동해 바닷가 정평 해안의 도련포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이 위치에 세웠던 이유 중의 하나는 개마고원을 동북방향으로 앞세워 짓고 서북방향을 압록강을
경계로 지어서 방어 효과를 극대화 시킬수 있다는 것이니.... 한반도가 중국에 직접
종속되는 일을 피할수 있던 2가지 지정학적 요인이 바로 압록강과 개마고원으로 압록강
은 깊고 넓은 강이라..... 강 건너편에 수비병력을 배치하면 방어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개마고원은 그 험준함 때문에 그쪽 방면으로는 공세가 굉장히 제한되므로, 고려는 방어력을 압록강
전선에 집중할 수 있으며.... 또한 개마고원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채로는 압록강을 돌파
한다고 해도, 고려내부로 진군했다가 측면에서 공격당할 위험이 너무나 크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3차에 걸친 여요전쟁이 끝난후 1033년 덕종 2년 평장사 유소(柳韶)로 하여금 성을 쌓게하였는데
유소는 옛 석성(石城)을 수리하고 위원진, 정융진을 두어 국방을 강화하였으니, 국경 각지에
산재해 있던 성들을 연결하고 새로 축조하거나 보수하여 11년이 지난 1044년 정종
10년에 완성하였는데 거란이 이에 항의했으나 덕종의 뒤를 이은 정종은 끝까지 건설했습니다.
석재를 사용하였고, 기초에는 흙을 단단히 쌓아 성축을 높였으며 평지에는 양면 축조 방법으로, 절벽에는
절벽 그 자체를 성벽으로 삼는 방법을 사용했으며 그리고 경비 초소를 두는 등 최전방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시킨 것으로 보이니 성벽의 높이와 폭이 4m ~ 7m 정도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성으로 대몽항쟁 때 무너졌으나, 평안북도 의주군 등지에 일부 성곽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천리장성을 쌓은 60년뒤 윤관의 여진정벌이 일어나며 천리장성을 경계로 함경도의 방언이 나뉜다고
하니 그 북쪽은 성조를 사용하는 지역이고.... 남쪽은 그렇지 않은 지역이라 방언의 차이가 많이
나니 북쪽의 말투는 흔히 '조선족 말투' 로 유명하나 사실은 함경도에서 유래한 말투를 쓰는 것입니다.
고려에 우호적인 남쪽 부족과 적대적인 부족인 북쪽 완안부(完顔部) 여진족 사이에 대립이 발생했으니
이 내분으로 인해 완안부가 남하하면서 고려의 위협이 되었고 이에 고려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옛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길주(吉州) 북쪽에 요새를 설치하기 위해 여진 정벌을 시행합니다.
고려의 여진 정벌은 1차 정벌은 1104년 1월 ~ 3월이고 2차 정벌은 1107년 10월 ~ 1109년 7월
3일이니 전장터는 한반도 북부 함경도 및 두만강으로 결과적으로 본다면 금나라의 승리
이니... 고려는 동북 9성 점령후 결국 반환했고 그후 고려는 금나라에 신하의 예를 취하게 됩니다.
2. 제 1차 여진 정벌
숙종 9년(1104년) 1월 동여진인 1,753명이 귀부해왔고, 완안부 추장 오아속(烏雅束)이 또다른 부족장인
부내로(夫乃老)와 갈등으로 부내로를 쫒아 기병을 이끌고 천리장성의 정주성까지 진격해 진을 치니
고려 장수 이일숙(李日肅)이 여진 추장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불러 잔치를 벌이며 물어본
결과 완안부의 진짜 목적은 고려 침공이라는 말을 듣지 허정과 나불을 감금하고는 개경에 알립니다.
여진이 침공할 것이라는 급보를 전해들은 숙종은 문하시랑평장사였던 임간(林幹) 에게
부월을 하사하며 판동북면행영병마사(判東北面行營兵馬使)로 임명하고 정주성
(영흥과 함흥 중간 천리장성 안쪽)으로 보내 대비토록 함과 동시에 여진족이 오고
가는 마천령 일대에서 차차 점령하며 남하해 오는 여진을 토벌한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임간은 공에 눈이 먼 나머지 오아속의 여진군을 자기 마음대로 선제 공격했고, 오히려 여진의 석적환에게
크게 패하며 조정에서 그들의 패전을 물어 파직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임간이 공을 세우려고 교련
하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급히 나가 싸워 패전해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고려사절요》 권 7, 숙종 9년 2월.
임간의 참패에 고려는 급히 추밀원사 윤관을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으로 임명하며
정주성에 위치한 여진족을 치게 했는데.... 벽등수(闢登水)에서 마주친 5백명 고려군과 여진군은
소규모 결전을 치뤘으나 고려군의 참패로 끝났고 승리한 여진은 일대를 약탈한후 유유히 돌아갔습니다.
결국 여진이 1104년 6월에 사절단 68명을 보내 고려에 화친을 청하고, 고려는 받아들임과 동시에 고려에
귀화했던(친고려파) 6명 추장을 포함한 14명을 돌려보내주면서 당장의 갈등은 봉합했지만 선제공격을
하고도, 이전까지 제후국 혹은 야인 정도로 여기던 여진 무리 따위에게 어이없이 참패한 충격은 컸습니다.
숙종은 이때 패배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천지신명이시여 만약 저놈들을 깨트리면
그 땅에다 신을 받드는 사원을 짓겠습니다!" 라고 할 정도였고 남경(한양)
으로 수도 천도의 실패 이후 분노를 여진 정벌에 쏟아 부었다고 할 정도로 전쟁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게 됩니다. 王發憤告天地神明, 願借陰扶 掃蕩賊境 仍許其地創佛宇.
미개한 야인으로만 생각했던 여진의 군사력이 강성한 것을 알게된 고려는 큰 충격을 받으니 윤관은
이 패배를 바탕으로 "고려는 기병을 상대로 불리한, 수성 중심의 보병 편제로 이루어져있는
것이 문제다." 라며 이전까지는 없었던 국민의 직위에 상관없이 차출하며, 능력 위주의
부대를 만들자는 건의를 하게되고 숙종이 승인을 내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별무반 입니다.
"신이 적세를 보니 아주 강해 측정하기 힘드니, 쉬면서 생도와 병사를 길러 후일을 도모하는게 좋습니다.
그리고 신이 보기에 패인은 적은 기병인데 우린 보병이니, 상대가 되기 어렵습니다." 고려사
윤관열전조에 보면.... “臣觀賊勢 倔强難測, 宜休徒養士, 以待後日. 且臣之所以敗者, 賊騎我步, 不可敵也.”
신기군(神騎軍), 신보군(神步軍), 항마군(降魔軍)으로 구성된 별무반은 매우 강력한 군기와
군법을 적용했고 무려 17만 8천에 이르게 되는데 숙종은 여진 정벌을 보지 못하고
서경 순시 도중 장락궁에서 사망하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지만
별무반은 그대로 유지하고, 1105년 11월에 동북면에 지형 정찰대를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여진 정벌이 숙원 사업이었던 숙종과는 달리 예종은 내치와 왕권 강화에 힘을 쏟게 되며 또한 1106년
3월에는 동여진 추장이 화친을 청하며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자, 예종은 그곳에 파견했던 동계
가발병마사(東界加發兵馬使) 김덕진(金德珍) 과 부사(副使) 임신행(任申幸) 를 개경으로 복귀시킵니다.
3. 제 2차 여진 정벌
1107년 예종 2년 12월 1일, 윤관은 17만 대군으로고 정벌에 나섰으니‘ 300리로,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蓋馬山)에 닿았으며 남쪽은 장주(長州)·정주(定州)에 접한다’ 전과를 올렸는데 윤관
은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복주(福州)·공험진(公嶮鎭)·통태진(通泰鎭)·숭녕진(崇寧鎭)·
진양진(眞陽鎭)등 동북 9성을 쌓고 남쪽 민호를 옮겨 살게 하면서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습니다.
좌군 병마사 문관, 중군 병마사 김한충, 우군 병마사 김덕진이 육군을 담당했으며, 병선 별감 양유송과
원흥도부서사 정숭융이 수군을 담당했으니 고려군은 출전후 20만이나 되는 대군이 나간다! 라는
소문을 퍼트림과 동시에, 최홍정, 황군상을 장주와 정평으로 보낸 후 여진족에게 "우리가 예전에
사로잡았던 허정과 나불을 돌려보내 줄테니 화의를 축하하는 잔치에 다들 오세요." 라는 말을 전합니다.
여진은 이 말을 듣고 소규모 부락의 우두머리인 400여명의 추장들이 달려왔고 장춘역에서 윤관
은 이들을 환대했는데.... 유목 민족에게는 초대한 손님을 가족 처럼 환대하는 풍습이
있는지라, 이들이 별 의심없이 술에 취했을 때 윤관은 그들 모두를 무참하게 살해하니
이제 여진족 전체의 미움과 불신을 사게 되어 얼마안가 여진족의 강력한 반격을 받게 됩니다.
아군 병력이 너무 작아 적과 싸우면 죽을 형편에서는 속임수를 쓸수도 있다지만 당시 여진족은 아직
나라를 세우지도 못했고 부락단위로 나뉘었으며 병력도 고려가 17만 대군인데 비해, 여진은
수천명에 불과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저런 속임수와 야비한 짓을 했다는게 역사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누구는 “대도무문” 이라고 했는데..... 화평하자고 손님을 초대해 모두 죽였으니 여진족들의 원한을
샀으며 저들은 그 원수를 갚자고 죽기살기로 싸우게 되는데, 대군이니만큼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이겨야 저들이 패배를 시인하고 머리를 숙이겠지만, 속임수에 당한지라 승복하지 않습니다.
제갈공명이 남방 이민족을 정벌하면서 7종 7금이라고 사로잡았던 적의 수령인 맹획을 풀어주며 여러번
싸운 것은 적이 졌다는 것을 승복해야 인정적인 지배가 유지되기 때문이니, 고려가 비열하게도 속임수
를 써서 이긴 것이니 여진족들은 승복하지 않고 계속 싸우는지라 결국 9성에서 철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윤관은 속임수로 여진족 추장들을 모두 죽여버린후 고려군이 천리장성을 나가 함경도 함흥방면으로
진격하자 우두머리를 잃고 구심점이 없어진 여진족 부락민들이 흩어져서 도주하는데.... 이후
동북 9성을 쌓게 되지만 원한에 사무친 여진족들이 수백년간 조상 대대로 살아온 자기
고향 마을을 찾겠다며 악착같이 공격해 오니 점령을 유지할수 없는 진퇴양난의 지경에 빠집니다.
고려군 17만은 본군은 원수 윤관, 부원수 오연총 53,000명으로 영흥과 함흥 사이 천리
장성내에 있던 정주 대화문을 나가 대만파지촌을 지니 동음성으로 진군했고
좌군은 병마사 좌상시 문관 33,900명 으로 정주 홍화문을 나가 심곤으로 진격했습니다.
중군은 병마사 좌복야 김한충 36,700명으로 안륙수로 나가 함흥 평야 → 함관령 → 홍원 →
석성 → 북청으로 진군했으며 우군은 병마사 병부상서 김덕전 43,900명으로 선덕진
으로 나가 북진했으며 수군은 양유송과 정숭용이 바닷길로 받치며 도린포로 진격했습니다.
최초 전투는 문내니촌에 있던 동음성이었고 병마령할(兵馬鈴轄) 임언(林彦)과 최홍정의 활약으로 함락한
윤관의 본군은 석성 (石城)으로 곧바로 이동했으니 석성 아래에서 진을 치고 있던 여진족에게 항복
을 권했으나 “우리는 항복하지 않겠다” 는 여진의 답을 들은 고려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게 됩니다.
예상외로 고전하게 되자 윤관은 척준경을 부르게 되는데 척준경은 "과거 제 과오를 용서해주셨으니,
오늘이야말로 그 도움에 보답할 것입니다." 라는 말을 하고는 칼 한자루와 방패 하나를 둘러매고
성벽을 타고 올라가 적병 수명을 죽였고 이에 고려군의 사기가 올라 석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윤관이 척준경더러 “해는 저물고 전황이 위급하니 그대가 장군 이관진(李冠珍) 과 함께
적을 공격하라.” 하고 지시하자, 그는, “제가 일찍이 장주(長州)에서 공의 부하로
일하면서 실수로 죄를 범하였는데 공께서는 저를 장사라고 말씀하시면서 조정에
죄를 용서해주도록 청하셨으니 오늘이야말로 제가 몸을 던져 은혜를 갚을 때 입니다.”
이렇게 다짐한후 석성 아래로 가서 갑옷 차림에 방패를 잡고 적진 속으로 돌입해 추장 여러명을 쳐서
죽였다. 이틈을 타 윤관의 휘하 군사와 좌군이 합세해 결사적으로 싸워 적을 대파하니 적은
절벽에서 투신해 자결하기도 했으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섬멸되었다.《고려사》 열전 윤관
석성전투가 종료 후 최홍정·김부필·녹사(錄事) 이준양(李俊陽)에게 병력을 주어 이위동(伊位洞)을 공격하게
해 대승을 거두며 여진 정벌은 마무리 되었는데 여기까지 본군, 중군, 좌군, 우군이 사살한 여진족만
4,940명이며 파괴한 부락은 135개, 여진족 포로는 1,030명이었으며 그후 수천명 포로를 추가 포획합니다.
별무반의 뛰어난 전투 능력과, 고려 지휘부의 적절한 판단력, 그리고 척준경을 비롯한 무장들의 초인적인
활약으로 고려는 단 한달만에 예상했던 목표를 완료하고 영주, 웅주, 길주, 복주에 성을 쌓게 됩니다.
"옛날 주나라 왕이 험윤(玁狁)을 친 일과 한나라 황제가 흉노(凶奴)를 정벌한 것은 강토를 개척하고 백성
의 피해를 없앴던 쾌거였으나 그것조차 오늘의 승리(고려의 여진정벌)에 비교하면 하찮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승리가 어찌 보잘것없는 신의 얕은 지혜와 둔한 재질에서 이룩된 것이겠습니까?
이야말로 폐하(고려 예종)의 거룩한 계책과 신령스러운 전략으로 조정에 앉으신 채 먼
변방을 안정시키신 결과이니 진실로 그렇지 않았으면 누가 이 일을 이루었
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역사에 기록함으로써 청사에 그 업적이 빛나게 하옵소서"
4. 여진족의 반격
1108년 1월 윤관이 오연총과 함께 정예 병력 8천을 이끌고 여진족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가한촌
(加漢村) 병목의 작은 길로 지나가던중 매복한 여진의 공격에 지휘부까지 궤멸되어 윤관
주위에 단 10여 명만이 남아 전멸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척준경이 목숨을 걸고 적진
을 돌파해 10여 명의 목을 베었고...... 최홍정, 이관진이 병력을 수습해 여진을 겨우 격퇴 합니다.
윤관은 영주성으로 전 병력을 집결시켰는데 이때 공험진에서 군대를 이끌고 내려오던 권지승선 왕자지가
도중에 여진군과 만나 대패하고 왕자지는 말까지 잃어버려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척준경이 급파해
왕자지를 구해주고 적진으로 들어가 철갑 기병이 타고 다니는 말 한필을 빼앗아 그에게 주기도 했습니다.
2월 11일에는 여진의 알새가 이끄는 병력 수만명이 최홍정이 지키는 웅주성을 포위했고,
최홍정은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해 한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세는
서서히 불리해져 성이 점령되기 직전까지 이르게 되니 최홍정은 척준경에게 "그대가
구원병을 데려오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오." 라며 원병 요청을 지시합니다.
척준경이 허름안 옷을 입고 야밤에 줄을 타고 성벽 밖으로 나가 혈혈단신으로 여진족 진영을 돌파
하고 정주성까지 달려가 병력을 요청하는데 성공하니 척준경과 구원군은 통태진(通泰鎭) 과
야등포(也等浦) 를 거친후 길주에서 여진군을 크개 격파하며 웅주성의 포위를 푸는데 성공합니다.
웅주성을 포위했던 여진은 다시 3월에 영주성을 포위했으나 척준경이 "나가
싸워야 이길수 있습니다!" 라고 주장해 병력을 이끌고 성문을 나서 여진족
수십명의 수급을 베고 19개 부락을 점령하니.... 여진은 소득없이 물러갑니다.
4월 또다시 대군을 이끌고 웅주성에 도달한 여진은 목책으로 둘러싸 겹겹이 포위하니 임언과 최홍정이
이끄는 웅주성의 고려군은 치열하게 싸웠으나 서서히 힘이 부치기 시작했고, 4월 23일에 웅주성
이 위험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 오연총에게 1만의 병력을 주며 급히 지원을 보내게 됩니다.
여진은 이 소식에 5월에 오음지령(烏音志嶺)과 사오령(沙烏嶺)에 병력을 배치해 고려군을 막으려 했으나
고려군은 두차례 접전 끝에 482명의 적병을 참살하고 웅주성 일대를 둘러싼 여진의 목책 뒤에 진지를
구축해 앞뒤로 공격당할 위기에 빠진 여진은 웅주성에서 퇴각하게 되며 7월에는 행영병마판관어사
(行營兵馬判官御史) 신현(申顯)이 고려 수군을 이끌고 영인진(寧仁鎭)에서 적을 공격해 20명의 목을 벱니다.
척준경의 엄청난 활약상에 완안부 여진은 전략을 바꾸어 전면전이 아닌, 소수 병력
으로 지속적인 소모전을 펼치는 방식을 선택했고, 고려는 이에 맞서기 위해
척준경과 왕자지를 별동대 역을 맡겨서는 여진의 기습 공격을 방비토록 했습니다.
무자일. 병마판관(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함주(咸州)·영주(英州)
에서 여진과 싸워 33명의 목을 베었다.《고려사》 권 7, 예종 3년 8월 행영병마판관
(行營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사지령(沙至嶺) 에서
여진을 공격해 27명의 목을 베고 세 명을 사로잡았다.《고려사》 권 7, 예종 3년 9월
8월 함주 전투와 영주 전투에서 각각 왕자지와 척준경이 여진족을 격퇴했으며 8월 길주 전투에서 여진과의
교전에서 유익, 송충, 박회절 등 지휘부가 전사했는데 문제는 이런 지속적인 공격에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으니 농민들의 신음은 깊어 갔고 자급자족이 안되니 물자들도 머나먼 고려에서 운반해야 했는
데..... 상인들 마저 도적이 들끓고 여진의 공격이 언제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듯 나설리 만무했습니다.
결국 고려는 동북 9성의 유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는데..... 나라에서 여러 방면으로
군사를 징발하니 기근, 유행병까지 겹쳐 백성의 원망이 드디어 일어났다.
(중략) 적이 (동북 9성을 잇는 도로마다) 매복하여 왕래하는 사람을 노략질함이 잦았다.
1109년 1월 함주 전투에서 여진의 기습에 왕사근, 하경택이 전사했고 3월 숭녕진 전투에서 장문위가
이끄는 수군이 숭녕진에 도착해 여진군 38명의 목을 베었으며 3월 길주 전투에서 허재, 김의원이
길주성에서 여진군 30명의 목을 베었고 5월 여진이 선덕진을 공격해 물자를 침탈하고는 퇴각했습니다.
5월 ~ 7월 길주성 전투가 벌어졌으니 여진군 6만이 성을 포위해 무려 130일 간의 격전 끝에 물리
쳤고 5월 오연총이 이끄는 중앙군이 길주성을 구원하기 위해 올라갔으나 공험진과 갈라수에서
대패를 당했으며 5월 사묘아리가 이끄는 여진군이 갈라수 전투 이후 타길성을 공격해 점령합니다.
여진족이 길주성을 공격하자 부원수 오연총은 병력을 소집해서 길주성 구원에 나섰으니 고려군은 공험진
과 갈라수에서 여진족을 맞아 큰 전투를 펼치지만 공험진 전투와 갈라수 전투에서 총합 7만의 고려군
이 여진족들에게 대파되는 엄청난 참극이 발생함에 따라 고려의 여진 정벌 또한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고려조정은 다시 윤관 휘하 군단을 편성한후 재파병하려 했으나 출정 직후 여진이 화친을 요청해왔고 이에
여진정벌 과정에서 예상한것 이상으로 피해가 컸던 고려도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하여 여진족의 화친 요청에 순순히 응함에 따라 전쟁이 종결되면서 추가 파병 또한 결국 중단되게 됩니다.
구원군이 끊긴 길주성은 독자적으로 항전을 지속하는데 여진족은 눈엣가시 같았던 길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고려와 화친 협상을 하는 동안에도 수만 대군을 동원해 총공격을 시도했으니 수비 병력이
2,000명 밖에 되지 않는 길주성은 성이 무너져 함락 직전까지 갔으나 날이 저물어 여진족은 물러납니다.
성을 지키던 허재와 이관진은 밤 사이에 내성을 급히 새로 쌓았으니 다음날 새 성벽을 본 여진족은 공격
의지가 줄어들어 결국 길주성 공격을 포기하고 말았으니 이때 까지 길주성이 버틴게 무려 130일 입니다.
講和, 非兵馬使所得專, 宜遣公兄等, 入奏天庭.
강화는 병마의 관리가 논할 것이 아니다. 그러니 공형(公兄 여진 관리) 등을 천정(天庭 고려 조정)
으로 들어와 아뢰게 하라.고려사, 열전, 윤관, 예종이 동북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다. 中
이 공험진 전투와 갈라수 전투에서의 충격적인 대패로 인해 어떻게든 동북 9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고려 조정의 여론은 180도 달라져서 여진정벌을 주도했던 윤관과 오연총을
탄핵하는 여론이 빗발치게 되고 때마침 여진측이 먼저 화친 요청을 보내왔고 이를
받은 고려 역시 화친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동북 9성을 모두 여진족들에게 반환 합니다.
당시 고려는 여진족들이 사백7십년간 거주해온 함경도의 지리에 대한 지식이 없었으니... 윤관의 전략은
9성으로 진출하는 통로가 병목 지형으로 막혀있다는 정보를 믿고 짠 것이었는데 가보니 우회 루트가
여러곳에 존재하는 바람에 9성이 모두 여진족의 공세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전쟁 전 지리와 판세 분석을
엉터리로 한 것이며 9성 간의 거리도 너무 멀어 연계가 안되고 적에 둘러쌓인채 각자도생을 해야했습니다.
여진족 부족에 대한 무리한 학살 정책, 0점 수준의 대전략으로 적을 대책없이 늘려버려 고려에 우호
부족으로 막을수 있었던 루트까지 모조리 적대 구역이 되어 버렸으니 이러한 수비상의 문제점
과 재정 문제등 여러 문제가 겹쳐 결국 9성을 도저히 지킬수가 없으니 여진족에게 돌려주게 됩니다.
수백년간 조상 대대로 거주해온 함경도 땅을 빼앗긴 여진족들을 두만강 넘어 만주의 여진족들이 지원하는
양상이었는데 특히 땅과 고향을 빼앗긴 여진족들은 '죽기 살기' 로 덤벼들었으니 말이 좋아서 동북
9성 진출이지 여진족 입장에서는 잘 살고있던 고향이 침략당한 것이니 135개의 여진 마을이
불태워졌고 3,740명을 학살했다고 하니 여진족 입장에서 고려는 부모와 형제를 죽인 원수였습니다.
만약에 저 여진족의 후손들이 지금 살아있다면 현수막을 들고 모여들어 "고려는 침략전쟁에 대해 사죄하고
평화롭게 살던 여진인을 죽이고 재산을 약탈하며 불지른데 대해 용서를 구하고 배상하라고 외칠른지도?
윤관(尹瓘)이 여진을 정벌할 때 김한충은 중군병마사 (中軍兵馬使) 로 힘껏 싸워 전공을
세웠다.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가 되었을때 윤관이 명령을 내려 내성(內城) 목재와
기와를 거둬서 9성을 쌓고 남쪽 지역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성민의 수를 채우도록 하였다.
그러자 김한충은, “만약 외성(外城)이 아직 완공되지 않은채로 갑자기 위급한 일이 생기면,
안에는 완전한 성이 없으니 백성들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원수께서 명령했지만 나는
감히 따르지 못하겠다.” 고 굳이 반대했는데, 과연 그 말처럼 되었다.《고려사》 열전, 김한충
석성의 여진족들은 싸움에 졌음에도 항복하지 않고 바위에 몸을 던져 자살할
정도였으며..... 고려군에 원한을 품은 여진족은 완안부에 복수를 요청했고
완안부 아골타는 "지금 가만히 있는다면 어찌 갈라전(함경도) 만 잃겠습니까?
모든 부족이 우리의 곁을 다 떠날 겁니다!" 라는 주장을 하며 주변 세력을 끌어모아 죽을 각오로
저항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고려는 9성 중 2성을 잃었고 여진족과 회전을 벌여 대패합니다.
여진이 동북 9성에 대한 반환요청을 하기 전에 이미 2성은 함락된 상황이었고 고려는 역대 손꼽
히는 패전인 갈라수 전투를 맞이한 상태였는데..... 갈라수 전투에서 오연총이 이끄는 6만
규모의 고려 대군이 회전에서 여진족들에게 참패를 당했으니..... 여진족은 9성의 곳곳으로
공격해 들어왔고 한 때 길주성은 여진족이 성벽을 넘어 들어와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윤관의 구원군은 여진족의 방어선에 가로막혀 길주성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으며 다행히 밤 사이에 고려군이 토벽을 쌓아 가로막기는 했지만 고려
의 방어능력도 거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으며..... 여진족은 장기전을 계획하고
있었던데 반해 고려는 갈라수 전투 참패 이후에는 전쟁 수행 역량이 거덜난 상태 였습니다.
그렇지만 여진족이 승리는 했어도 9성 전부를 함락시킨 상황도 아니었고 고려가 멸망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여전히 고려는 여진족에게 위협적인 강적이었으니 따라서
여진족이 시도한 것이 강화 요청이며 그들은 무력과 외교로 9성을 반환시킨 것입니다.
이는 귀주대첩 이후 고려가 거란족에게 취한 자세와 비슷한데.... 여진족 역시 갈라수 전투 이후에는
처참한 소모전으로 인해 국력을 모조리 상실해 가는 상태였으니 따라서 그들도 너죽고
나죽자는 식의 치킨게임 보다는 희생을 줄이기 위해 외교적 화친에 동의할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9성을 돌려받은지 얼마 안 되어 여진족이 금나라라는 신흥 제국을 건설한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의 여진족은 강했으며, 어찌보면 고려의 침략이 분열되 싸우던 여진족에게 “완안부”
라는 구심점을 만들어 주었고 단합을 도모하게 해준 꼴이니...... 따라서 고려가 금나라
를 건국시켜 줘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결과적으로 이는 큰 “이적행위” 가 된 것입니다.
여진 정벌에서 돌아온 후 윤관은 패전했다는 이유로 대신들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기도 했으나 예종의
비호로 최고 재상직인 '수태보 문하시중' 으로 복직했으나 얼마 못가 111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5. 고려가 쌓은 9성
아직 여진은 금나라를 건국하기 이전인데도 동북 9성 주변 지역이 매우 넓은데다가, 완안부 세력
이 산 속에 거주하면서 집요하게 약탈하며 9성 반환을 애걸하였고, 고려는 여진과 오랫동안
대치하면서 국력이 소진되었으며, 향후 거란과도 다툴수 있다는 여론과, 공험진 전투와
갈라수 전투에서 총합 7만의 고려군이 여진족들에게 대파되는 엄청난 참극이 발생 했습니다.
고려의 여진 정벌은 한계에 부딪히게 되니 힘이 부친 고려는 이주한 백성을 본거지도 되돌려 보내고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는데, 완옌부의 아구타는 이 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1115년 황제를 자칭
하며 금나라를 세우고 강력한 통일 국가로 성장하였으니 고려가 어슬프게 금나라 건국에 이바지
한 셈이었고, 금나라는 처음에는 고려에게 형제관계를 요구하다가 이후 군신관계까지 이루게 됩니다.
동북 9성 위치는 함흥설, 함경도설, 두만강 이남설, 두만강 이북설등이 있는데 현재 정확한 위치는 미정
이며 다만 함주와 길주는 각각 오늘날의 함흥과 길주군으로 보는 건 대부분 견해가 일치하는 편입니다.
1107년 12월에 축성
영주성(英州成) - 둘레 1,729m. 가장 먼저 축조된 성으로 사실상 본영이었다.
웅주성(雄州成) - 둘레 1,805m.
복주성(福州成) - 현재의 함경남도 단천
길주성(吉州成) - 둘레 1,219m. 점령 이후 가장 많은 전투가 펼쳐진 격전지로 여진의 대군
이 1년새 5번이나 침공했는데도 고려가 철수하기 전까지 빼앗기지 않았던 것은
길주성을 방어하던 고려 무관 이관진(李冠珍)의 역할이 컸으며 현재 함경북도 길주입니다.
1108년 2월에 축성
함주성(咸州城) - 현재의 함경남도 함흥
공험진성(公嶮鎭城) - 동북 9성 중 최북단 지역에 위치한 성으로, 공험진에 있는
선춘령(先春嶺) 이라는 고개에 척경비를 설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척경비를 발견하는 순간에 동북 9성의 위치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것 입니다.
하지만 오연총이 이끄는 고려군이 길주를 구원하려 가다가 공험진에서 여진에게 대패를 달했는데,
길주는 현재 함경북도 남쪽에 길주이므로 당장 길주성이 포위되어 무느지는 위급한 상황에서
오연총이 한가롭게도 길주 북쪽 700리에 위치한 두만강 까지 엄청나게 우회하며 갈 이유도
없고 갈수도 없었을 것이니.... 공험진의 위치를 두만강 일대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합니다.
1108년 3월에 축성
의주성(宜州城) - 현재의 함경남도(강원도) 원산 (여진 지역을 개척하고 쌓은 성이 아님)
통태진성(通泰鎭城), 평융진성(平戎鎭城)
윤관(尹瓘)이 포로 346명, 말 96필, 소 3백두를 바쳤다. 윤관이 또 의주(宜州)·통태(通泰)·평융(平戎)의
세 성을 쌓고 남계(南界)의 백성들을 새로 수축한 9성으로 이주시켰다. 《고려사》 권 7, 예종 3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