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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동문학 말하기 원문보기 글쓴이: 고요
다음 글은
지난 8월 15일,
한국문인협회 주최로
금산사가 있는 전북 김제 '모악산 유스호스탤'에서 열린
제48회(2009년도) 한국 문학 심포지움의
대주제 <세계화 시대의 한국 문학>에서
시, 소설, 수필, 아동문학 등 4개 분야 중
아동문학 분야의 주제 발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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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업의 콘텐츠로서 판타지 문학
세계화 시대의 한국 아동문학
최지훈 / 아동문학평론가
(1)
예술의 미학적 가치와 상업적 가치는 갈등 관계이거나 상충될 수밖에 없는 관계인 것으로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문학 작품을 포함해서 상업적으로 성공했다는 예술 작품은 통속적으로 타락한 것으로 보고 미학적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고, 반대로 미학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것은 오히려 상업적으로 외면당하고 있는 일반적인 현실은 우리는 자연스럽게, 혹은 당연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미학적 가치가 인정되는 작품이 상업적으로 홀대당할 때 매우 섭섭해지고, 많은 작가들이 미학적 가치 추구를 포기하고 상업적인 성취를 위하여 기웃거리거나 아예 그 쪽으로 몸을 던지게 됩니다. 그러면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를 그렇지 못한 작가들이 그를 타락한 매춘부 취급하거나 눈길을 보내면서 비웃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21세기를 가리켜 문화의 시대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배경은 경제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 문화 상품이라는 것입니다. 그 문화 상품에는 예술 창작 문화도 포함됩니다.
문화의 세계화라는 말은 경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경우 미학적 가치는 경제적 가치에 종속되는 것입니다. 이는 문학의 경우도 예외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세상 만사가 경제적 가치 척도가 모든 가치의 우선적 척도가 되는 세상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개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그러므로 이에 순응하여 현실을 수용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종의 타협점을 모색하자고 하는 것이 오늘 발표의 주안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상과 현실은 절대적으로 모순 대립되므로 어느 한 쪽만 선택하여야 한다는 믿음을 버린다면 오늘 저의 이야기가 이야기꺼리로서 성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예술 창작의 경우 미학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이상이요, 모든 문화활동에 포괄하여 경제적 가치를 우선시하며 미학적 가치를 종속화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 때, 그 두 개의 시각에는 겹쳐지는 부분이 없다는 믿음이 아니라 이 두 개의 가치 기준에는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의 바탕에서 그 겹쳐지는 부분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또는 그 겹쳐지는 분야에 대하여 어떻게 발전적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것을 말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미학적 성취를 이룬 작품이 상업적으로도 높은 대접을 받게 되거나,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이면서 미학적으로도 인정될 수 있는 방면을 모색한다는 뜻입니다.
미학적 성취에 경제적 가치도 인정 받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 금상첨화의 기회를 눈여겨 보고 이를 향해 도전해보자고 말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속된 표현을 빈다면 이른바 임도 보고 뽕도 따보자는 뜻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문화 경제 시대, 곧 세계화 시대의 문학이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문학의 세계화라고 할 때 가장 전통적인 방법은 번역에 의한 해외 소개 또는 출판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문학이 해외에 알려지고, 해외의 유명 문학을 도입해온 수단으로써 번역은 유일무이한 방법이었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번역 출판은 오늘 현재에도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강력한 방법이며 일반적인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번역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방법으로서, 또는 번역에 의존하더라도 전통적인 방법인 우리말과 상대국가의 언어를 서로 옮겨놓는 것에서 다른 매체와 수단을 동원하게 되는 경우를 말하고 싶습니다.
이는 특히 아동문학의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이야기그림책의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신뢰성 있는 통계 자료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 출판계에서 체감되고 소문에 의하거나, 대형서점의 점두에 나가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바가 외국도서 중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수입]되는 도서 중 압도적인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이야기그림책이고, 우리 도서로서 해외에 가장 활발하게 소개[수출]되는 것도 이 분야의 출판물일 것입니다. 물론 수입의 경우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원서를 도입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는 번역된 텍스트(문학 부분)에 의하기 보다 그림과 제책 스타일에 그 자체가 그대로 수출되거나 수입되는 현상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이야기그림책의 경우가 아닙니다.
(2)
‘문화 콘텐츠’라는 말이 유행을 거쳐 일상적인 말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21세기는 문화 경제시대라는 말도 공공연히 합니다. 이 말에는 문화의 상품화를 담고 있습니다. 거꾸로 ‘상품화된 문화’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관광 상품입니다. 지역마다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어떤 문화적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있는 지 홍보하는 것이 이 지음 지방자치 단체마다 가장 크게 골몰하는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는 지방 자치단체마다 자기 고장에 적절한 문화적 상품이 될 수 있는 콘텐츠를 개발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상품화를 전제로 한 콘텐츠 개발은 비단 국내용이나 관광 사업에만 해당하는 것은 물론 아닐뿐더러 이러한 데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이미 한 시대 이전의 사고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지역의 특색을 드러내는 고유 문화를 발굴하는 것은 대단히 제한적이지만 창작 예술 작품을 콘텐츠로 삼는 것은 무한 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1세기를 문화 경제의 시대라고 말할 때의 문화는 전통 문화나 지역적 특색을 갖는 고유 문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에 의하여 창작 개발되는 작품에 무게중심을 둔 발상이요, 발언이라고 할 것입니다.
예술작품이 경제적 자산이 되던 것은 비단 오늘에 와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예술 작품이 생산되던 바로 그 순간부터 경제적 자산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술 작품은 반드시 상품적 목적으로 생산되는 것은 아니었고 지금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술 작품을 창작 생산할 때 상품 가치를 고려하거나 목적했다면 그것은 이미 예술성을 상실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세기에 이미 ‘상업 예술’이라는 말도 있어서 ‘순수 예술’과 구별하면서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순수 예술 작품이라고 발표된 작품들 중에서 특정 작품이나 작가를 비판하는 말로서 ‘상업성’ 또는 ‘상업적’이라는 말도 사용했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세기의 세기말에 가까울수록, 문화 수준이 높다는 나라, 또는 경제력으로서 선진국의 잣대로 삼는 세기에 이르게 된 오늘날에는 상업 예술과 순수 예술의 구별이 모호할 정도가 되어가고 있음도 사실입니다.
21세기는 문화 상품이 한 국가, 한 사회의 경제력을 쥐락펴락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바로 그러한 세상 흐름의 현실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작 예술 장르 중에는 ‘상업 미술’과 같이 장르 자체가 아예 상업적인 것도 있습니다. 이러한 장르의 작품의 가치는 오로지 경제성을 지닐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미학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순수 예술인조차도 오늘날에 와서는 예술성만으로 자부심의 근거가 되거나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 의심스럽도록 경제적 소득 가치가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미술품 옥션 시장에 가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 고액의 미술품이 고귀한 예술 가치가 인정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이미 일반적 세태입니다. 영화를 비롯한 대부분의 공연 예술장르에 속하는 작품들도 마찬가집니다.
오늘 영화와 방송 드라마는 사실 상업적 창작품과 예술적 창작품의 경계가 모호한 장르 중에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장르는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면 예술적 가치조차도 무시되는 경향이 농후하며, 그러한 성향은 날이갈수록 노골적입니다. 그래서 이들 예술 장르는 이미 그 자체가 상업적 예술 장르라고 해서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공연 예술 분야로 일컬어지는 연극, 오페라도 무조건 뮤지컬화하는 요즘의 경향이 바로 그러한 방증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뮤지컬이 애당초부터 상업 장르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날 그러한 대명사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공연 예술로서 음악 분야도 심상치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상업적 장르와 순수 장르가 뚜렷이 구분되는 음악계임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공연조차 상업적 고려가 없이는 공연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타락 현상으로 보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그러한 태도가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아니면 상업적 성공이 곧 작품으로서 성공이나 명작의 반열에 오르게끔 된 작금의 현실적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를 심각하고 진지하게 반추해보아야 할 때가 된 것이 오늘의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논란을 뛰어넘어 상업적 성공과 순수미학적 성공이 거의 일치하고 있는 장르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동문학입니다. 그중에서도 동화문학이 그러합니다.
(3)
지난 세기 말 이래로 동화문학은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복되다고 할만큼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다른 모든 문학과 예술 분야에 걸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적 상황과 비교할 때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화문학은 전통적인 잣대로써 우수한 작품으로 평판이 나야만(또는 날 가능성이 있는 작품이라야) 상업적으로도 성공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동화문학의 경우 그 작품의 문학적 성패는 상업적 성공과 거의 궤를 같이 한다고 보아도 거의 어긋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아동도서 출판 시장에서 수요자의 특수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아동도서의 구매자는 실수요자인 어린이나 청소년이 아니라 그들의 대리자요 보호자인 부모 특히 ‘어머니’들이라는 데 문제의 특수성이 숨어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나라 젊은 어머니들은 책을 고르는 안목에 있어서 웬만한 전문가에 버금할 선별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아동도서에 대한 정보에 매우 민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들 자녀를 위하여 고르는 책은 당연히 그야말로 양서 이상의 수준이 아니면 안 됩니다. 자녀에게 독서를 시켜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를 넘어서 내 자녀가 읽을 책은 내가 일일이 ‘꼼꼼하게 살펴 골라서’ 자주 사서 읽히겠다는 의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아동도서는 상품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아무리 살림이 쪼들려도 자녀에게 독서교육은 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있기 때문에 아동도서 시장은 불황을 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장의 뒷받침은 동화작가를 크게 고무시켰으며, 덕분에 동화문학은 최근 20년 가까이 아주 건강하게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동문학은 문학계에서 외면되고 서자 취급되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싶을만큼 오늘날은 많은 시인, 소설가들까지 아동문학가와 경쟁하려는 듯이 동화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창작 대열에 들어서고 있는 실정입니다. 확실히 세상은 놀랍게 달라진 것입니다.
(4)
동화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도 특히 판타지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는 것이 또한 작금의 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최근의 관심과 논의로서는 한국아동문학학회의 2009 봄 학술대회의 대주제가 <판타지 동화의 이론과 문학적 성과 점검>이었습니다. 여기서 ‘판타지동화의 개념과 범주, 유형 고찰(권혁준)’을 비롯하여 여섯 개의 주제가 다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판타지 창작 활동과 업적이나 판타지에 대한 논의가 최근에서야 비로소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판타지가 동화문학의 꽃이라고도 하고, 순수한 동화문학은 바로 판타지에서 찾을 수 있다고도 주장되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김요섭이 생전에 줄기차게 이에 관한 관심을 환기해왔고, 스스로 판타지 작품을 다수 발표해온 것은 아동문학계에서는 주지하는 바입니다. 주장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실제로 판타지는 신화와 전설을 비롯한 수많은 전래동화가 구전되어 오던 그 옛날부터 우리에게 익숙해 있었습니다. 특히 현대적 창작 동화문학이 전개되고서도 주류는 판타지에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60년대 이래 30여 년 동안, 동화문학도 판타지보다 어린이의 현실 생활을 그린 동화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었습니다. 그러한 소설적 동화의 주류에는 이념적 작품이 논의의 중심을 이루면서 자극적으로 견인한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던 것이 소위 ‘해리포터’를 비롯한 서구의 거대 판타지 문학과 영화가 이 땅을 휩쓸 듯 하면서 새로운 창작 세계에 대한 의욕을 크게 불러 일으켰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용어에 대한 정리를 해두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판타지라고 할 때 그것은 환상동화 또는 환상소설을 포괄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영미 계통과 대륙 쪽과 북유럽 등 나라에 따라 약간씩 다른 용어를 쓰고 있고, 같은 용어인데도 개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판타지에 관한한 대표적인 흐름은 영미에서 쓰는 용어가 일반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이 경우의 것을 살펴 보겠습니다.
Fairy tale : 요정 이야기와 그에 준하는 동화로서, 그림 형제의 동화를 비롯한 전래동화와 같은 환상동화로서 대개 단편에 해당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선녀와 나무꾼이나 견우직녀 이야기와 같은 전래동화들이나 50년대 이전에 있었던 초기 창작동화들 중에 별과 꽃과 새와 무지개 등이 소재가 되는 동화들이 여기에 해당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Märchen도 이 개념과 방불합니다.
Fantasy : 영국에서 19세기 말부터 톨킨과 루이스에 의하여 창작되기 시작한 거대 담론적인 파천황의 환상적 모험 스토리들을 일컫는 장르 개념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의 조앤 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문학수첩 판), 코넬리아 푼케의 <잉크하트>(문학수첩리틀북 판)도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면에는 동양이 수백년 앞서서 발표된 중국 오승은의 <서유기>는 16세기 작품입니다. 이를 Heroic Fantasy로 구별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Science fiction/fantasy : 소위 과학공상 소설에 해당하는 것입니다만 이 점에 관해서는 별도로 언급이 될 것입니다.
그 외에 Speculative fiction[사색적 소설], Horror fiction[공포소설, 공포 이야기] 같은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뭉뚱그려서 판타지로 가름하고 있고 이 자리에서도 그렇게 다룰 것입니다.
그런데 새 세기에 들어서 우리에게 보여준 외국의 판타지는 종전 우리 동화문학이 이해하던 차원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주어 판타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습니다. 우선 외관상 규모가 거대한만큼 구조 또한 복잡한 얼개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종래,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환상세계를 작은 그릇(10매 내외의 길이에서 긴 장편이라고 해도 3백매 이내의 것)에 담아내왔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음에는, 오로지 거창한 세계를 대상으로 파천황의 모험을 그려내는 이야기로 ‘대하’라는 관형어를 달아야 할 만한 규모의 거대 담론이라야 판타지라고 할 만하다는 인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대 담론적 판타지가 요즘 서구에서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이미 동양에서도 <서유기>와 같은 거대한 모험 담론 판타지가 있었으므로 낯설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제1부 다섯권이 프랑스어로 소개되어 그곳 청소년 독자들의 투표로 선정되는 아동청소년 문학상인 앵코립티블상을 수상해서야 국내에서도 크게 화제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던 김진경의 <고양이학교>는 이 땅에 거대 판타지에 대한 직접적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김혜진의 3부작<아로와 완전한 세계>(바람의아이들, 2004-2007), 장성유의 <마고의 숲(전2권)>(현암사, 2008), 그 외 남찬숙(2004), 김기정(2004), 조성은(2006), 오진원(2007), 그리고 가장 최근에 류은(2009) 등의 작품이 그러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판타지가 관심을 끄는 것은 오로지 맹랑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거대담론적 모험담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소위 상업 문화의 콘텐츠로서 가장 크게 각광 받는 장르라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판타지가 영화화 되고 애니매이션이 되고 컴퓨터게임의 캐릭터나 소재도 되고 드라마가 됩니다. 그렇게 개발된 캐릭터는 다양한 산업 홍보의 전사도 되고 상품의 브랜드도 됩니다. 결국 성공한 팬터지는 문화 콘텐츠의 광맥으로 말 그대로 황금의 알을 낳는 거위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판타지 동화로부터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동화문학에 대한 일반적인 신뢰를 업고 있으면서, 문화 콘텐츠의 핵심적 구실을 하게 됨으로써 상업적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능성 높은 작품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의 판타지가 다른 상업적 예술 장르로 수용되었다는 소문이 없습니다. 이는 자본과 기획력의 취약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수 시장에서 투자에 대한 수확의 확신이 서면 이러한 작품들이 빛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5)
우리의 판타지동화로서 화제의 중심에 선 작품으로 단연 김진경의 <고양이학교>를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이른바 해리포터 시리즈 우리말 번역판 중 첫 권인 <마법사의 돌>이 도서출판 문학수첩에서 처음 소개된 것이 1999년 연말인 듯하니까 불과 2년 만에 우리의 <고양이학교>(문학동네, 초판1쇄 2001. 8. 4)가 선을 보인 셈입니다. 집필과 출판 기간을 친다면 이 작품은 어쩌면 해리포터가 우리 앞에 나타나기 이전부터 구상되고 집필되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짐작이 들기도 합니다. 저의 일방적인 짐작입니다만, 이 작품이 구상되는 동기는 해리포터보다 몇 년 앞선 1990년대말 아이티로 통하는 컴퓨터 통신 사업-오늘의 월드와이드웹 시스템이 일반화되기 전에 있던 천리안이나 나우누리와 같은 것-들이 오늘의 인터넷을 대신하던 때에 중요한 콘텐츠 노릇을 하던 마법 이야기로서 판타지소설들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체재 밖의 문학에서 자극을 받아 작품이 구상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구상하며(어쩌면 집필하는) 중에 해리포터가 이 땅에 소개되고 판타지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짐작하게 됩니다. 이러한 짐작이 옳다면 이 작품이 해리포터의 모티프를 차용했다거나 하는 의심하는 바에 대한 반증이 될 수 있을 것이기도 합니다.
<고양이학교>의 문학적(또는 문학사적) 가치와 의미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이미 몇 차례 진지하게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제한된 자리에서 그런 논의는 줄입니다.
다만 객관적인 사실을 보면서 판타지동화의 문화 콘텐츠로서의 위상과 가치를 점치는 자료로서 그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다섯 권으로 된 <고양이학교> 시리즈의 제1부가 첫 권이 나온 지 5개월 여 만인 2002년 1월에 완간되었습니다. 어쩌면 작가는 애당초 이것으로 이 작품의 완결로 삼을 작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한 시장의 호응도가 이후의 속편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고 여러 해가 지난 뒤(2007)에 다시 제2부와 제3부를 각각 세 권씩 펴냈습니다. 그리고 부(部)의 표시가 없던 처음 다섯 권이 제2, 3부를 펴냄으로써 자연히 제1부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창작과 출판의 형태는 해리포터의 시리즈가 이어지는 스타일과 흡사합니다. 관심이 없으면 그것으로 끝이고, 화제가 되고 장사가 되면 속편이 계속되는 방식. 마치 전작의 영화가 크게 성공을 거두면 그 속편이 제작되는 것과 꼭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업예술의 속성이 한 편의 창작으로서 완성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상업 목적에 따라 완결은 다시 미결이 되고 새로운 연속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길이나 분량을 미리 예정했던 것과는 달리 시청자의 반응(이른바 시청율)에 따라 신축이 고무줄처럼 자유로운(?) 드라마나 장편 극화(스토리만화)의 속성도 바로 상업예술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러한 판타지는 마해송, 이원수, 강소천, 김요섭, 권용철 등으로 이어지던 시대의 판타지가 아닙니다. 김진경을 비롯하여 김혜진, 장성유, 공지희, 김윤영, 남찬숙, 김기정, 오진원, 류은 등 젊은 작가들이 펴보이는 판타지는 그것이 여러 권으로 된 거대 장편이 아닌 단 권의 장편(단편은 발견되지 않습니다.)이라 할지라도 그 공통점은 몽환적 서정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낭만적 모험에 모티프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화 시대의 영웅서사시와도 방불합니다. 그래서 2천년대 들어서 최근 수년간에 볼 수 있는 우리의 판타지는 거의 예외없이 우리의 신화나 설화에 그 모티프를 찾고 있다는 점도 2천년대 한국 판타지의 특색이 될 것입니다.
판타지 동화와 함께 생각해야 할 장르가 과학공상소설(SF ; Science Fiction)입니다. 논의하는 이에 따라 이 장르도 포괄적으로 판타지의 범주에 넣기도 하고, 구별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상당부분 겹친다고 봅니다. 판타지로 보아야 할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는 ‘과학적 공상’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과학적’이라는 관형어가 붙는 ‘공상(fancy)’이니 현실은 어차피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은 ‘환상(fantasy)'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SF는 Science Fancy Story 또는 아예 Science Fantasy의 의미로도 씁니다.
어쨌든 이 SF는 일반 판타지보다 더 일찍부터 상업적 속성을 발휘하여 다른 상업적 미디어 예술 장르를 위한 원본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한 영화의 본산은 미국의 헐리우드로 손꼽힙니다. 거대 자본을 들여서 인류 이전의 공룡 시대라든가, 미래의 세계 혹은 우주 밖의 상황이나 외계에 대한 환상적 장면을 전 화면에 걸쳐서 압도하는 장관으로 보여줍니다.
우리 아동문학에서 이러한 SF에 일찍이 눈뜨고 열심히 이 방면의 작품 창작으로 한 우물을 파온 작가로 한낙원이 있었으나 주목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SF 장르에 대한 문학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은 풍토 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고 아쉬운 점이 크다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로 이 장르에 새롭게 주목하여 다시금 개척의 삽질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문화 산업을 위한 콘텐츠의 개발에 기여하게 되리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장르에서는 조성은, 문선이 등이 눈에 띄는 창작 활동을 벌이고 있는 신인들이고, 엠비시금성 창작대상을 받아 판타지 작가로서 역량을 입증한 공학도 김윤영 같은 이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방면의 전문 작가로서 아마 적임자가 될 것입니다.
(6)
이제 문학은 활자화된 작품을 읽어주는 독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시대를 지나 바야흐로 다양해진 미디어를 활용한 그야말로 다양한 시청각적 장르의 상업예술로서 문화 콘텐츠 구실을 해야 하는 시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장르의 문학은 당연히 이러한 고려를 전제로 한 창작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종전에는 시나리오나 희곡이 그러한 역할을 했고, 운문으로는 동요시가 동요의 가사로서 봉사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말 어디까지나 다른 장르를 위한 문학이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원본 구실을 하면서 다른 예술 장르에 기여하는 문학으로 되는 때가 된 것입니다.
즉, 소설은 소설로서, 동화는 동화로서 자신의 장르를 지키면서 영화, 드라마, 연극과 뮤지컬 그리고 인형극, 방송 드라마, 애니메이션과 만화(극화), 그리고 인터넷 동영상과 게임의 소재 등으로 전용될 뿐 아니라 광고 시대의 캐릭터, 작품의 고향이나 배경이 된 지역의 관광 산업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 콘텐츠가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장편만화가 누리고 있는 바를 곧 능가하게 되거나 대체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가능성으로 가장 크게 각광을 받는 장르가 바로 SF를 포함한 판타지 동화에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경제의 큰 몫이 될 문화산업의 콘텐츠로서 그 핵심적 장르가 될 문학 장르가 판타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상업 예술이나 상업적 문학이 아니라 미학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공유하는 문학인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화와 예술 작품의 세계화 시대에 가장 빠르게 효과적으로 전파될 수 있는 문학 장르가 바로 이 장르가 될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모든 장르가 그렇기는 하지만 이 판타지야말로 아동문학가의 전유물이 될 수 없는 전체 문학인이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장르가 될 것입니다. (2009.8.13 개고)
첫댓글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