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 위에 붓으로 큼직하게 내려쓴 여섯 글자.
'三一園主를 任함'.
오른편에 받는 이의 이름이 있다.
三一園 大德 張道斌.
왼편에는 발령 일자와 발령권자가 나란하다.
開天 4411년 10월 18일, 大倧敎 總典敎 尹世復.
개천은 대종교가 쓰는 연호이니 서기로 환산하면 1954년이다. 예순 중반의 노학자 산운(汕耘) 장도빈이 대종교의 도원(道院)인 삼일원의 책임자로 임명되는 순간이, 붉은 인장 두 방과 함께 종이 위에 붙들려 있다. 단군대황조를 받드는 교단이 왜 이 사람을 불렀는가. 답은 그가 걸어온 반세기 전체에 있다.
시작은 1908년 봄이다. 한성사범 시절 교단에 섰던 황성신문 주필 백암 박은식이 스무 살 갓 넘은 청년을 대한매일신보에 데려간다.
스물한 살의 논설위원.
여덟 살 위의 단재 신채호, 그리고 양기탁과 한 필진이었다. 입사 몇 달 만에 병을 앓던 신채호의 후임으로 논설주필이라는 자리를 떠안았으니, 망해 가는 나라의 정론(政論)을 이십 대 초반의 붓이 감당한 셈이다.
그는 지면에서 친일 내각과 일진회에 맞섰고, 지면 밖에서는 안창호의 신민회에 비밀회원으로 가담했다. 근대 계몽기 언론이 곧 운동이던 시대, 박은식에게서 국혼(國魂)의 사학을, 신채호에게서 투쟁의 사론을 물려받은 막내가 장도빈이었다.
1910년 신문사가 문을 닫자 그는 오성학교 학감을 거쳐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다. 신한촌에서 신채호와 재회했고, 최재형과 홍범도, 이동휘, 이상설 같은 이들과 교류하며 권업회 부의장 이종호 등이 이끌던 기관지 '권업신문'에 논설을 실었다.
훗날의 회고들은 그가 이 시기 연해주의 발해 옛 터를 직접 밟았다고 전한다. 그의 사학이 단군조선에서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국통(國統)의 계보를 고집스럽게 복원한 것이 책상이 아니라 망명지의 흙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이유다.
병든 몸으로 귀국한 뒤에는 영변 서운사에서 요양했고, 요양 끝에 민족혼을 일깨우는 '국사'를 펴냈으며, 그 인연으로 조만식이 교장으로 있던 정주 오산학교에서 1년 남짓 교편을 잡았다.
1919년에는 동아일보 발간 출원자의 한 사람으로 창간 과정에 참여했다가 운영에서는 물러났고, 대신 한성도서주식회사를 발판으로 출판에 투신했다. '서울'과 '학생계', '조선지광' 같은 잡지들이 그의 손을 거쳐 나왔고, 출판사 고려관에서는 '조선사요령'과 '조선위인전' 같은 책자를 잇달아 편찬했다. 언론에서 출판으로, 출판에서 저술로, 싸움의 도구를 바꿔 가며 같은 싸움을 계속한 것이다.
1928년의 '조선역사대전'은 조선사편수회로 상징되는 식민사학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에 맞선 대항 서사였고, 기자조선설을 정면으로 부정한 그의 논변은 조선 역사의 첫머리를 중국에서 온 기자에게 내어주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일제 말 총독부가 끈질기게 내민 중추원 참의 자리를 뿌리치고 산중에 은둔한 것은, 그 선언을 몸으로 지킨 일이다.
오늘의 사학사는 산운의 저술이 사료 비판의 엄밀성에서 한계를 안고 있었다고 지적하나 학문의 정밀함을 따질 수 있는 시대는, 먼저 역사를 빼앗기지 않은 시대라야 온다.
단재가 '조선상고사'총론에 남긴 정의 그대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던 시절이다. 산운의 붓은 그 투쟁의 최전선에 있었다.
해방이 오자 예순을 바라보는 그는 다시 창간의 사람이 된다. 월남 직후 민중일보를 세웠고, 신문이 화재로 주저앉자 판권을 윤보선에게 무상으로 넘겼다. 그리고 1947년, 같은 결성 장씨 일가인 범정 장형 등과 함께 대학을 세우고 초대 학장을 맡는다. 그 대학인 단국대학교의 교명 단국(檀國)은 백범이 지었고 단군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1949년부터는 육군사관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쳤다.
신문과 출판과 학교.
평생 그가 세운 것들의 목록은 다르지만 지향은 하나였다.
그러니 다시 1954년의 임명장으로 돌아온다. 나철이 중광(重光)한 대종교는 1950년 도통전수제를 신권공화제로 바꾸면서 최고지도자를 '도사교'에서 '총전교'로 고쳤고, 그 총전교 윤세복의 이름으로 산운을 삼일원의 자리에 앉혔다.
물론 임명장 한 장이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이까지 말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교단이 그를 택한 이유와 그가 그 부름을 받아들인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일가인 범정 장형은 이미 1914년 대종교에 입교해 이듬해 원로원참의에 올랐던 터이고, 장도빈 자신은 단군에서 시작하는 국통을 반세기 동안 글로 세워 온 사학자이자 '단국'이라는 이름의 대학을 만든 교육자였다.
임명장 한 장은 대종교와 민족사학이 별개의 물줄기가 아니라 같은 수원(水源)에서 갈라진 두 갈래였음을 보여주는 사료다.
박은식이 국혼을 말하고 신채호가 투쟁을 말할 때, 장도빈은 그 혼과 투쟁에 '단군'이라는 이름의 주소를 붙였다.
1963년 9월 12일 그가 눈을 감은 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유해는 2000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옮겨졌다.
붓 한 자루로 나라의 첫 장(章)을 지킨 사람의 자리로는, 늦었지만 마땅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