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北漢山) 837m / 북한산성(사적 제162호)
서울특별시 북부와 경기도 고양시의 경계에 있으며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과 함께 대한민국 오악(五嶽)에 포함되는 명산이다.
세 봉우리인 백운대(白雲臺, 836.5m), 인수봉(人壽峰, 810.5m), 만경대(萬鏡臺, 787.0m)가 큰 삼각형으로 놓여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삼각산(三角山) 또는 삼봉산(三峰山), 화산(華山), 부아악(負兒岳) 등으로도 불린다.
주봉인 백운대에 오르면 서울 시내와 근교가 한눈에 들어오고, 도봉산·북악산·남산·관악산은 물론 맑은 날에는 강화도·영종도 등 황해의 섬도 보인다. 노적봉(716m)·영봉(604m)·비봉(碑峰:560m)·문수봉(716m)·보현봉(700m) 등 이름난 봉우리만도40여 개나 된다.
사모바위는 1968년 1.21 사태와 얽혀 있는 곳이다.
북한 특수부대 124부대 요원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무장 침투한 후,최종적으로 은거했던 장소이다. 당시 유일한 생존자 김신조씨(현재 목사)가 있다...
족두리봉은 정상에 족두리와 비슷하게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동북쪽의 모양이 '작은 인수봉'이라는 애칭이 있을 정도로 크고 힘찬 '족두리봉'은 독수리 머리같다고 해 '수리봉'으로도 불리며, 독바위라고 한답니다.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대 꼭대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누구나 ‘좌경천리 입경만리(坐景千里 立景萬里)’라는 말을 떠올린다. 앉아서 1000리, 서면 1만리를 볼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삼국시대부터 요충지로 자리메김 한다
삼국시대의 마지막 북한산 주인은 신라다. 24대 진흥왕(眞興王)은 몸소 북한산을 찾았고, 이를 대내외적으로 도장 찍듯 기념한 것이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다.
즉위 16년째인 서기 555년 북한산 순행 직후 세운 비석이다.
아마도 ‘서울을 중심으로 국가를 경영 하겠다’는 뜻일게다 국보 3호라 진품은 중앙박물관에 모셔두고. 이곳에 있는 비는 모조품이다.
고려 시절 북한산은 잠시 인간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고려가 개성에 도읍을 정한 때문이리니..... 조선의 선조(宣祖)와 인조(仁祖)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두 왕은 북한산으로 피신했었다.
병자호란 중 남한산성의 치욕을 잊을 수 없는 효종은 북한산으로 눈길을 돌렸다.
청으로 잡혀갔던 봉림 대군이 바로 효종이다. 절치부심 끝에 유비무환의 적격지로 북한산을 지목했다. 1659년 북한산에 안가(安家)를 차렸다.
당시 효종의 지시로 북한산성 요새를 처음 기획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혼백은 요즘도 날이 좋으면 북한산에 들른단다.“임란이어처(臨亂移御處·전쟁발발시 왕의 피란처)로 북한산을 택했는데, 효종대왕 당대에는 계획만 하다 말았고 숙종37년(1711년)에 시작하여, 6개월 만인 그해 10월에 완공하였다 한다.
북한산성은 ‘산 속으로 옮긴 한양’이었다. 북한산성은 험한 산세를 이용하여 정상을 기점으로 서쪽 산자락부터 원효봉, 염초봉, 백운대, 만경대, 용암봉,문수봉,나한봉, 나월봉, 용출봉, 의상봉까지 연결하여 쌓은 산성으로 총 길이가 10km에 달한다.
당시 산성에는 산성의 정문 격인 대서문을 중심으로 14개의 성문을 냈고, 연못 26개, 우물이 99개나 됐다.문수봉 남장대, 노적봉 북장대, 대동문 동장대 등 전투 지휘본부격인 장대(將臺)도 3곳을 가동했다.
일찍부터 명산으로 알려진 북한산 일대에는 신라때 창건된 유서깊은 고찰들을 포함하여 현재 15개의 전통 사찰과 100여개의 크고 작은 사찰 및 암자가 있다
이중 대표적인 사찰이 대한 불교 조계종에 속한 도선사로 1,100여년 전 신라말엽의 도승이었던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그 외에도 화계사 진관사 천축사등의 유명한 사찰이 있다 대한민국의 수도를 지키는 최적의 산이 북한산이다. 북한산이 버티고 있기에 서울은 천혜의 요충지가 됐다.
예 접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