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원주 거돈사지 - 바람도 멈추는 고요...

[박초시]

하늘이 춥다. 바람이 귓전을 때리고 양 볼이 얼얼해져 옴을 느낀다. 간간히 가는 길엔 아직 녹지 않은 잔설들이 군데군데 보이고 누구의 슬픔인지 모를 고요와 적막이 내 가슴에 엄습해 온다. 오래된 폐사지를 찾아가는 내 마음은 늘 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그날의 날씨와 내 기분과 몸 상태와 심지어 뱃속을 꼭꼭 채워 넣고 다녔을 때와 텅 비어있을 때와 그때마다 다른 것은 아마도 내 마음의 동요가 아무렇게나 흔들릴 만큼 심지가 굳지 않음이요, 앞전에 들렸던 법천사터의 황량하던 그 잔재가 남아 있음이 아닌가 모르겠다. 

  잘 포장된 중간 도로 건너편에는 실개천이 흐르고 맞은편엔 결코 작지 않은 돌들로 석축을 길게 쌓아 놓았다. 보는 이로 하여금 석축 넘어 에는 대단한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부풀게 한다. 절터의 시작점이 되는 석축 모서리에는 아마도 천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 느티나무가 튼튼히 버팀하고 앙상한 잔 가지들이 겨울바람에 늘어져 기울어 있다.

  터덜터덜 걸었다. 긴 도로를 따라 저 끝에 무엇인가 가물가물 보일 듯도 하여 막연한 기대감에 눈을 떼지 못하고 언 손에 카메라만 만지작만지작 시린 눈을 들고서 바람을 정면으로 한껏 받아먹는다. 저 멀리 시골버스 한 대가 텅 빈 채 아무도 없는 길손을 기다리고 있다. ‘여기가 버스 종점인가....?’

  언덕에 올라섰다. 일순 바람도 멈추는 듯 황량한 고요가 찾아온다.

  메마른 겨울날씨가 햇빛을 찬란히 받아 영롱해지는 착각을 하게 된다. 나는 경견해 지고 엄숙해 지고 숙연한 마음이 된다. 텅 비어있는 그곳에는 바람도 멈추고 시간도 멈추어버린 시공을 뛰어 넘는 또 다른 세상 같아 보였다.

  잘 정리된 풀들이 막바지 겨울을 보낼 채비를 하는 듯 점점 옅어지는 살색을 띄고 가물한 끝자락엔 하얀 빛이 반짝인다. 하늘도 맑아 보였다. 한편의 공허한 정경이 이토록 정겹게 다가온 한 순간과 내 양쪽 눈으로 다 담지 못하는 전경들이 눈 부셔 온다.

잔설이 보이고 금당터 앞 햇살을 받은 면에 석탑의 양감이 살아난다. 조는듯 미동도 없는 석탑...

그곳은 내가 생각했던 절터보다 너무나 넓었다. 낮은 야산을 삼면으로 둘러 끼고 절터 동쪽엔 이곳에서 열반에 든 고려 초기 천태학승인 원공국사 부도비가 서 있고, 절터 앞쪽 가운데에 단아한 삼층석탑 한기가 겨울날의 오후 햇살 을 쬐며 나른하게 서 있다. 7000여 평은 족히 될 듯, 절터에 높고 낮은 석축들이 제각각 옛날의 그 흔적만 남겨줄 뿐이고 이루지 못한 영광의 흔적만 가득 들어 차있다.

  나지막한 뒷산으로 천천히 걸어 올랐다. 발아래 밟히는 마른풀의 감촉이 바삭바삭 소리를 낸다. 원공국사 부도가 서 있던 자리에는 썰렁한 안내판만 서 있고, 지대석과 기단만이 썰렁하게 남아 있다. 그 주인인 부도는 일제강점기 때 욕심 많은 일본인 집 뜰에 있던 것을 지금은 국립 박물관에 모셔져 있다하니 부도가 서 있던 자리에 서서 상상만 해 본다. 동쪽 끝에 부도비가 서 있고 여기가 부도가 있던 자리라 하니 아마도 위치로 보나 부도비가 누구의 손에 의해 지금의 그곳으로 옮겨 심어졌나 보다.

  팔짱을 끼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발아래 넓은 터를 두고 저 멀리 남아있는 두 개의 조형물 가운데 하나인 석탑이 낮은 토단위에 놓여 져 보이고 금당터가 남아 있고 아마도 회랑터 였음직 한 낮은 토단들이 금당터를 중심으로 둘러 처져있고, 그 넘어엔 짙은 그림자를 남긴 작은 산허리가 넉넉한 공간을 두고 바람을 비켜 막으며 서 있다. 다시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한발 한발 걸어서 내려온다.

멀리 원공국사 부도터에서 바라본 금당터와 삼층석탑...

  거돈사는 신라시대에 창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자료가 아무것도 없으나 남아 있는 석물들로 추정만 한다니 아마도 이 거돈사 또한 임진왜란 때 폐사가 된 것이라 추정을 한다. 아마도 승병을 일으켜 대단한 활약 뒤에 오는 보복을 피해 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내 상상만으로 추정을 해 보나 이것 또한 정답이 아니니 역시 늘 상 선배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모르는 만큼 자유로운 것’이 아닌가!

  신라 말기에 구산선문의 선종사찰이 지방 호족들과 때를 같이하여 부흥의 시기를 맞으니 이 또한 선종사찰이라 생각되지만 천태학승이던 원공국사가 이곳 거돈사에서 열반에 든 인연 때문인지 또한 천태학을 집대성한 법천사터의 지광국사의 제자였던 대각국사 의천이 고려 천태종을 창종 했을 당시에 이곳이 천태종의 기반사원이었다 한다.

                                                                

                                                                 눈이 부셔 무리하게 역광으로 담은 사진하나 못 건졌으니

                                                                 사진으로 다 옮겨올 수 없음이 아쉽다.

  삼층석탑을 향해 걸었다. 해가 산 위에 올려져 있고, 넘어 가는 해를 앞으로 하고 말없는 석탑은 미동도 없다. 그늘진 곳에는 아직 녹지 않은 겨울의 잔재들이 올려져 있고,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눈길을 준다. 빛을 받은 면과 그늘진 면과의 단절된 깨끗함이 파란 하늘과 함께 이리도 정겨울 수 있을까? 하얗게 빛을 받은 부분의 질감은 어쩌면 맑은 크리스탈 같은 생각이 든다.  지붕돌의 끝만 살짝 들어 올린 각진 반전 또한 깔끔하며 날렵한 인상을 주나 정절을 지켜가는 듯 최소의 자존심을 부린 듯 하고, 우리 조상들은 화강석을 떡 주무르듯 해 왔음을 볼 때 별도의 문양도 없는 기교부린 흔적 없이 단아하고 소박해 보이기도 하니 나 같은 덜 떨어진 중생에게는 더욱 정답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을....

  탑신부에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있으며 다섯 개의층급 받침으로 위로 올라 갈수록 좁아지며 지붕돌 모서리에는 청아한 풍탁을 달았던 흔적이 나 있다. 일층 몸돌에 비해 이층과 삼층 몸돌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안정감이 훨씬 돋보인다. 아마도 밑에서 올려다보는 이의 시선을 안배하여 만들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바가지를 거꾸로 엎어놓은 듯 복발만 남아있다. 그 위 찰주까지 각각의 부재들을 상상하며 참으로 건방지지 않고 멋스러운 깔끔한 석탑이었을 그 모습을 상상하며 완성시켜 본다. 이것은 나만의 즐거움이라 아마도 쉬이 건방진 소리리라 만은 명상하는 시간이라 나름으로 흥겹고 자유롭다.

  원공국사 부도비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겨가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여전히 정겹고 아름다운 석탑이 주위의 너른 절터와 함께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서 있다. 과연 내가 옛 폐사지와 함께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을까? 하나의 티끌이 되어 보이는 것은 아닐까? 언감생심 내 스스로 서둘러 부끄러워진다.

원공국사 부도비

  거돈사에서 입적한 원공국사 부도비는 부도가 있던 자리와 멀리 떨어져 있다. 아마도 훗날 무슨 사연이 있어 누군가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 왔을 것이나 너른 절터를 감안한다면 그 옛날 절터의 영역을 표시하는 것 같아 그리 어색함이 없다. 굳이 부도와 나란히 서 있지 않을 양이면 말이다. 문화재는 한곳에 모아두면 관리하기 편하다? 이곳에 이 아름다운 부도비가 부도와 나란히 있다면 한층 더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주었으리라 일제 강점기 때 서울의 일본인 집에 있었다 하니 어찌 지금인들 부도비와 함께 있었다면 도굴범들의 손길을 과연 피해갈 수 있을까? 나만의 욕심으로 앞으로 천년을 더 이어가고 일 만년을 이어갈 문화재라면 후세를 위해 그리 한곳에 모아 놓고 관리하는 방식도 그리 비판만 하기보다 이해의 폭을 넓게 구하는 것이 나을 상 싶다.

  거친 세월을 거치며 천 년 가까운 세월을 흘러온 석재 미술품으로 보기엔 너무도 깔끔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지금까지 둘러본 깨어지고 피폐해진 미술품과 비교 했을 때와 안타까움의 심정이 없이 그 감동은 여전히 아름답다. 무거운 듯 목을 한껏 움츠리고 있는 용머리 형의 거북의 머리에 이빨은 가지런하게 나 있으며 입을 꽉 다물고 있어 무엇인가 다짐하는 인상이나 그 조각 디테일 한 부분 하나하나가 정교하다. 목에는 주름이 도안된 듯 잡혀있으며 갑옷 같은 두꺼운 거북등에는 정육각형의 틀 속에 임금 왕(王)자와 연꽃무늬와 만(卍)자가 교대로 새겨져 있다. 참으로 정교하고 아름답고 특이한 모습이다. 돌 조각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무엇으로 찍어낸 듯 깔끔한 인상을 준다. 등껍질에 눌려 삐져나온 발가락 모양에도 주름이 잡혀있고, 머리 양 옆으로는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생긴 귀 모양이 이채롭다. 가히 그 옛날의 장인의 그 솜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만큼 당대에 미친 원공국사의 정신적 세계가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가지런한 이빨과 힘에겨운 듯-

                                     

                                      등껍질엔 卍자와 임금 王자와 연꽃무늬가 교대로 새겨져 있다

부도비의 상륜부 -

  얇은 비신에 비해 귀부와 이수는 큰 편이여서 더욱 비신이 가늘어 보인다. 최충(崔冲)이 쓴 안내문에는 국사의 덕을 기리는 글이 실려 있다하나 가히 까막눈 수준의 내가 띄엄띄엄 읽어보나 부끄러울 뿐이다. 서체는 구양순과 그의 아들 구양통의 필법이 어우러져 있다 한다. 고려시대 비 중에서 가장 뛰어난 글씨라는 평이라 기록되어 있다.

  얇은 비신에 비해 상륜부인 무거운 이수에는 두 마리의 용이 구름위에서 서로 하나의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노니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양각되어 있다. 이수와 비문 그리고 귀부를 하나하나 분리시켜 보아도 모자람이 없이 각각의 독립된 예술품으로 손색이 없을 법 하다.

  바람도 숨죽이던 조용한 절터에 두런두런 인적의 소리가 들려온다. 스님 한 분과 청초한 여자 한 분이 황량한 빈터로 들어선다.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내 모습보다 스님한 분의 모습이 넘어가는 해를 앞으로 하고 탑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가는 모습이 훨씬 아름답다.

  이때를 같이하여 잠자고 있던 시골버스가 부릉부릉 거친 소리를 내며 시동을 걸고 있다.

  이것은 나를 흔들어 깨우는 소리가 아닌가?.

The Flight Of The Earls / Phil Coulter

[요시]

초시님 안녕하시죠? 덕분에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 내일 떠나는 님의 고향 길이 설레임을 주네요. 서울로 행차하실땐 소문내세요. 팬이 많습니다.^^

[인덕원참새]

초시님의 안목은 참 높지요. 게다가 다방면에...내일 예천답사, 저도 설렙니다.

[향기야]

초시님,앉아서 아주 좋은 후기 읽고 갑니다..공부도 많이 됬구요..늘 감사 하고 있지요...^^

[Happy4U]

집에 갈때 가끔 들리는 곳인데.. 고즈넉하니 참 좋은 곳이에요.. 계절이 계절인지라 스산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