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수유리에서
푹푹 찌는 날씨였다. 흐르는 땀도 땀이지만 습기찬 공기가 치덕치덕 몸을 휘감았다. 불귀신 물귀신이 한꺼번에 달려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칠 지경으로 더운 날이었다. 춥다든가 덥다든가 시원하다든가, 혹은 경치가 좋다 나쁘다, 용모가 어떻고 따위의 감각적 표현에 절제가 강한 유인성은 음식에 관해서도 누가 맛이 있네 없네, 짜네 싱겁네, 그런 말을 할라치면
"맛이 있으면 맛나게 먹어. 맛이 없으면 수저를 놓고. 사내자식이 그러는 게 아니야."
따끔하게 일침을 놓아 상대를 무색하게 하였다. 그런 유인성도 오늘 같은 날씨는 견디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사랑의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안동포 적삼의 고름을 풀어헤친 채 연신 땀을 닦다가 부채질을 하다가, 그러고 있는데 선우 형제가 찾아왔다.
"이런 날 방구석에서 체력 소모하는 것은 그야말로 불경제라는 거다."
쪽문을 열고 좁은 사랑 마당으로 들어서며 선우일이 큰소리로 말했다.
"불경제라……"
옷고름을 여미고 일어서며 유인성이 중얼거렸다. 회색 바지에 반소매 흰 셔츠를 입을 선우신이 웃으며 인사를 했다. 광대뼈가 솟고 양볼이 꺼져서 여우상 같은 그의 인상, 그러나 날카로움은 많이 마모된 듯했으나 달콤하고 깨끗해 뵈는 웃음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선우일은 마지의 양복 차림이었고 나비 넥타이에 파나마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올라오게. 왜 그리 우투커니 서 있기만 하는가."
"아닐세, 나가자구."
선우일이 말했다.
"어디로?"
"물 찾아가는 게지. 옷 갈아입을 것도 없네."
안동포 홑바지의 걷어올린 가랭이를 풀어내리고 다시 한 번만 접어올린 유인성은 밀짚 모자를 머리에 올렸다.
"친구 따라 강남 가더라고, 그럼 나서볼까?"
대절하여 대기하고 있는 자동차에 올라탄 세 사람은 우이돌 골짜기를 찾았다. 물소리만 들어도 땀이 식는 것 같았다. 골짜기마다 수박·참외·복숭아, 싱그러운 여름 과일을 물에 담가놓고 여인에 아이들이 물맞이를 하고 있었다. 영계백숙을 뜯으며 소줏잔을 기울이는 남정네들도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뜸해졌고 물소리만 줄기차게 들려왔다.
"잘 왔지?"
선우일이 말했다.
"그런 것 같네."
"자넨 표현에 인색해. 언제나 그렇거든."
"반풍수 안 되려고 그런다."
"비트는군."
"아니 다행이다. 이것저것 반풍수 아닌 게 없지."
"흠 이것저것이라…… 이것저것 다 대신해줄 놈이 있어야 물러날것 아닌가. 빌어먹을 놈의 세상, 나 같은 놈을 세상이 만들었지. 모두 명분만 찾고 원칙만 고집하고 허니 어쩌겠나."
선우신은 개울 한켠에 돌을 쌓아 흐르는 물을 막아서 수박, 참외를 담가놓고 그늘 밑의 평평한 바위에다 술병과 술안주 따위를 펴놓는다. 오는 도중 매점에서 꾸려온 것들이다.
"사방에서 욕은 바가지로 먹으면서, 그래도 어쩌겠나. 급하면 날 찾는걸."
"……"
"이 선우일은 머슴이냐 피에로냐, 허허헛헛……"
유인성은 싱긋이 웃는다. 선우일은 양복 윗도리와 바지를 벗는다. 무릎까지 오는 인조견 속바지 밑에 종아리는 가늘고 희다. 노리끼한 털이 물결같이 밀려 있다. 유인성도 바지 가랑이를 걷어올린다.
"적삼 벗고 은가락지 낀다더니 그 꼴이 뭔고?"
유인성 말에
"아아."
하다가 선우일은 나비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의 단추도 끄르고 소매를 걷어올린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바위에 걸터앉으며 물속에 발을 담근다.
"시원하구나 어이 시원타!"
선우일은 탄성을 질었다. 선우신은 술자리를 펴놓은 바위 옆에서 세수를 하고 얼굴을 닦은 뒤 유인성과 형을 바라본다. 이윽고 두 사내는 술자리에 와서 앉았다. 묘한 침묵이 한순간 흘렀다. 술을 마시고 수박을 베먹고 씨를 뱉으며 선우일은 먼저 입을 떼었다.
"인실의 소식은 들었는가?"
"……"
"아직 소식을 모르고 있어?"
"……"
"형님한테 오가다가 찾아가지 않았던가요?"
이번에는 선우신이 물었다.
"왔더군."
"그러면 인실이 소식은 들었겠군."
선우일 말에 선우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형님!"
"왜?"
"오가다가 인실씨 소식을 어찌 알겠어요. 그도 궁금해서 방학을 이용하여 나왔을 뿐인데."
하자 인성이
"그애는."
하다가 술을 마신다.
"죽은 거나 다름없어."
"그게 무슨 뜻인가?"
"몰라 묻는 겐가!"
"자네 말뜻 나는 모르겠네. 형무소 출입을 했기로, 그건 조선의 딸로서 영광 아닌가."
선우신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영광이라…… 영광, 하하핫핫…… 영광?"
유인성의 웃음 속에는 분노와 비애가 있었다. 잊을 만하면 어디선가, 누군가가 끌고 나와서 인성의 가슴을 쓰라리게 한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큰누이 인숙이 찾아왔다. 병석에 누워 있던 모친이 큰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 가엾은 것, 가엾은 것 하며 흐느꼈던 것이다. 모친의 울음 속에는 아들 인성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인실이 집 나간 것은 지난 봄이었다.
"오빠, 인실이 죽어서 장사지내는 비용쯤 생각하시고 돈 좀 주세요."
느닷없이 그런 말을 인실은 했다.
"무슨 말버릇이 그러냐?"
"절 믿으시지요."
"너를 안 믿으면 누굴 믿겠냐."
유인성은 어릴 적부터 총명했던 막내 인실을 사랑했다. 꺾이지 않는 그의 기상을 사랑했고, 옳고 그름이 분명한 그의 의사를 존중했다.
"신념대로 살 거예요. 강하게 살거예요. 빈손으로 나가느니보다 얼마간의 돈 쥐고 나가야 오빠 마음도 덜 아플 거예요. 물론 전 지금 돈이 필요합니다."
돈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실이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인성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긴 세월 인실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손을 벌리고 돈 달라는 그 자체의 의미, 인실은 긴 세월이거나 아니면 영원한 이별이 아니고서는 그같은 행동을 취할 성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실이 오가다의 아이를 배태했다는 사실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오가다는 초라하고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밖에서 인실의 소식이라도 들었더라면 그는 결코 인성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성은 오가다를 보면서 일종의 안도감을 가졌다. 인실은 오가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갔을 거라고. 그러나 오가다의 진실에 연민을 느꼈다. 말없이 술을 마시다가 그는 돌아갔다.
"사회가 인실씨를 잡아먹은 거지요. 배신에 대한 분노가 정당한 경우는 그리 흔치 않자미나 쉽사리 등을 돌리더군요. 사회자체가 거대한 에고이즘의 덩어리 아닙니까."
선우신이 씹어뱉듯 말했다. 그 말에 선우일은 찔금했다.
"다행이네. 신이가 몽상에서 깨어난 건."
유인성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선우일이 물었다.
"자넨 관에다 못질할 때까지 의문으로 끝날 거야."
"안 그럴 사람이 어디 있누."
그 말 대꾸는 없이 인성은
"사회 자체가 거대한 에고이즘의 덩어리라는 말은 맞는 말이네. 전폭적인 긍정으로 감상주의에 흐르는 것도 대단히 위험한 일이야. 더더구나 민족주의를 휘두르고 나가는 사람들에겐……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야. 민중에게 절망하는 것도 그러하나 큰 기대를 거는것도 어리석어. 실체를 뚤어보지 않고 하는 일은 결국 붕괴된다."
인성은 말을 계속할 듯했으나 그만둔다.
"그래 어떤 뜻에서 사회가 인실을 배신했지. 그러나 인실이도 피해망상이었어. 친일파나 할일 없는 한량들의 입방아쯤 무시해도 좋았던 게야. 누가 뭐래도 인실은 조선의 딸이고 조선의 잔다르크야."
"형님은 늘 그렇게 순진하시지요."
선우신이 비꼬듯 말했다.
"뭐라구?"
"친일파 한량들이 뭐라 했습니까? 그들은 관심도 없어요. 소위 일한다는 것들 진보적이라 자처하는 것들, 그것들이 계집같이 종알대는 주둥이를 몰라 그러십니까?"
평소 성격을 봐서 선우신의 어세는 매우 강했다.
"주둥이 하나 가지고 다해먹는 놈들, 검거 선풍이 불면 이상하게도 빠져나가는 놈들, 개의할 것 없어. 나보고도 회색분자니 기회주의자니 하며 매도하는데 정작 그들이야말로 정체가 뭔지 모르겠더군."
"그들 주둥이에 난도질 당할까봐 고분거리는 무리는 어떻고요."
"그만들 두게. 인실을 배신한 것은 없어. 뭐 그애가 거물이야?"
인성은 쓰게 웃다가
"차가운 눈길이나 노골적인 비난에 좌절할 인실은 아니야. 그애는 지 자신이 선택한 대로 갔을 뿐이다."
유인성 말에 선우 형제는 입을 다물었다.
"자아 술이나 붓게."
선우신이 유인성 술잔에 술을 붓는다.
"여름이 가고 나면 의돈형님이 나올 텐데. 나와도 세상이 뒤숭숭하니 걱정이야."
선우일이 말했다.
"가족들한테도 충분히 못해 서운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소."
계명회사건 때문에 잡혀간 사람 중이서, 선우신, 유인성, 유인실 그리고 오가다 그 밖의 몇 사람은 비교적 일찍 풀려났고 작년에는 최길상(김길상)이 출소를 했으며 마지막 서의돈이 올 가을에는 형기를 마치고 나올 것이다. 그런데 선우일의 걱정과 자책 비슷한 말에 유인성은 왠지 냉담했다.
"권오송이 나왔다며?"
서의돈에 관한 말을 묵살하고 인성은 말머리를 돌렸다.
"나오기는 나왔는데 말들이 많아."
권오송은 지난 늦좀 예맹검거 때 잡혀갔다. 그러나 권오송은 예맹과는 깊은 관계가 없었고 오히려 약간의 알력도 있었던 터이어서 주의 사람들은 권오송의 검거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예맹검거 사건에 앞선 정월, 사무실 아래층 다실에서 저녁 늦은 시간, 귿단 산호주는 실험 비슷하게 연극 동호인만 모아놓고 고리키의 「밑바닥」을 공연한 바 있었는데 그것 때문이 아니겠느냐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재취한 강선혜 때문에 더 말이 많은 모양이더군"
"나와서 일체 외부와 연락을 끓은 것도 오해에 부채질을 한 것 같습니다."
선우신이 덧붙여서 말했다.
"늘 있어온 일 아닌가."
유인성은 가볍게 말했다.
"그런 정도의 얘기가 아니네. 아주 흉칙스러워. 사전에 양해가 되어 잡혀갔다는 말도 있고 극단 산호주에 정체 모를 전주가 붙었다는 말도 있고."
"권오송이가 이 모아 비교적 가까운 사이라 그런 말 들은 거 아닐까?"
"그 점도 있지. 과거 이 아무개가 총독부에 의해 회유되었던 것은 사실이고 지금 민족주의라는 미명 하에 매문 행위, 괴상한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인데 권오송에 관한 흉칙한 소문이 사실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말치고는, 현실성이 없구먼. 이 모같이 이용 가치가 있는 일물도 아니고, 희곡 몇 편 썼기로 거의 대중에게는 알려진 사람도 아닌데."
"잡지라고 극단이 있거든."
"……"
"만일 총독부의 손의 권오송에게 갔다면, 그건 이 아무개가 미치는 대중에의 영향을 꺾어버리려는 의도하고는 내용이 다를 게야. 이 아무개의 작업은 혼자 하는 것이지만 잡지 언저리에 모여드는 사람, 극단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 결국 예술인들 속을 파고 들어온다, 그렇게 봐야 하고 잡지나 극단의 방향도 일본 정책에 따라 조정할 수 있고, 한반 더 나아가서 친일의 선전장일 수도 있고, 이건 어디까지나 가상이지만."
"그건 일본을 과소 평가하여 하는 얘기다. 치밀하고 교활하며 황당하고 대담한 일본이 문화 정책을 내세웠다 하여 예술을 육성할 의사는 물론 없지만 예술인들을 이용하여 친일의 선전장으로 만들만큼 자신 없는 놈들도 아니라구. 이 모의 경우는 그가 지녔던 정치적 비중 때문이지, 그의 문학에 있었던 건 아니야. 하기야 이 모에게 있어서 정치와 문학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긴 하나…… 뭐, 권오송의 손을 빌릴 것도 없이 그들은 개인을 상대하며 회유하거나 위협할 수 있고, 극단쯤 몇 개 만드는 게 뭐 그리 대수겠나. 현재로선 조선의 예술 따위는 그들 안중에도 없어. 독립운동가, 수상한 사상을 가졌다 하면은 집어내는, 다만 그것뿐인 게야. 권오송 이를 어쩌구저쩌구 하는 발상부터 황당하기 짝이 없다. 어디서 그런 말이 나왔나?"
"말의 진원지는 대강 짐작이 가네만 하여간."
"권오송이가 수완이 좋아서 잡지도 하고 극단도 있고, 그러나 사재를 털어넣을 만큼 자기 나름의 사명감은 있을 것이며 섣불리 돈에 넘어갈 그 따위로 우둔한 사람도 아니야."
"시기심이지요. 강선혜 씨가 적도 만들었구요. 결혼 전에 강여사는 좌충우돌, 하지만 따지고 보면 좌충우돌하게끔 몇몇 주변이 시선이 잔인했습니다."
유인성은 술을 마시려다 말고 선우신을 쳐다본다.
"동경 유학했다는 걸로 강여사 콧대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별재주도 없는, 그 남녀평등을 주장한 글 때문에 조롱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씨를 쓰네 연극을 합네 하고『청조』주변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주로 그랬었지요. 인간이란 무리를 지으면 바닥 없이 잔인해지고 무책임해지고, 그건 마치 무대를 보는 관객과도 같이 신랄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철부지에다 돈푼깨나 있는 집 딸, 낭비를 일삼는 꼴, 보기에 아니꼬운것은 사람의 상정이지만,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그런 자들도 까불어보아야 지가 마포강 강서방 딸이지 누구겠는가, 그런 주제에 동경 유학이라니,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실에 언사로 내뱉는 겁니다. 상대가 모질로 표독스러웠으면 면대하여 그랬겠습니까? 심지가 약하고 보면 계속 짓밟는 겁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게 아니고 약점을 꺼내어 계속 망가뜨리는 거지요. 건드려도 별 해가 없을 것이다 하면 계속 건드리게 되는 속성, 주변에서 가세하게 되고, 여자가 뭐, 하는 것도 여자가 지는 특성보다 약자라는 전체 하에 감정이 자행되는 것 아닙니까. 무리란 상향과 하향, 양면을 지닌 것 같습니다. 무리가 사명으로 뭉쳐지면 지고선으로, 협동과 사랑으로 가지만, 힘으로 뭉쳐지면 큰 것은 큰 것대로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공격의 대상을 찾게 되고 가장 취약한 것을 골라잡아 괴롭히며 쾌감을 느끼며, 크게는 다른 민족을 침해하고, 작게는 골목 대장식의 잔학성을 나타내는데…… 생각해보면 역사란 늘 그래왔다, 언제나 강자 편에 서 있었다. 조그마한 그룹에서도 그런 것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뭔지 살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지요."
선우신이 흥분하고 있었다. 강선혜를 비호하는 말이라기보다 그는 오가다라는 일본 남자로 인해 취약점을 안고 있다고 보는 인실의 처지를 가슴 아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인간 본성으로 확대되어 선우신에게 절망감을 안겨주었을 테지만.
"막상 강여사가 오송형님하고 결혼을 하고 보니, 또 잡지나 극단에 강여사 족에서 출자를 하는 형편이고 보니 일이 묘하게 됐어요. 오송형님 주변에서 심히 강여사를 괄시했던 사람들 입장이 곤란해졌지요. 청조사 최기자도 사표를 내고 나갈 수밖에 없었지요. 이번에 검거 사건이 터지니까 그들은 은근히 좋아했을 겁니다. 어디 골탕 좀 먹어봐라, 『청조』도 망하고 산호주도 해산할 것이다. 한데 그 감정이란 게 줄기를 찾아보면 참으로 하찮은 것에서 출발했거던요. 그런데 그들의 뜻한 바와는 달리 오송형님이 나오게 되니 또 곤란해졌다 그 말입니다. 내친 걸음 되돌릴 수도 없는 고약한 루머가 퍼진 거지요. 한마디로 추악합니다. 아무 원수진 것도 없고 이해상관도 없이 어는 서슬엔가 출발을 해서 험악한 관계로 치닫는 그런 상황을 도처에서 보게 되면 정말 견딜 수가 없지요. 머리 박박 깎고 절에 가든지 동해물에 빠져죽고 싶어집니다. 독립이고 해방이고 뭐 되는 것 있겠습니까! 기아로부터 해방! 인간 소외로부터 해방! 빛 좋은 개살굽니다. 서로 유리 조각 들고 아무것도 아닌 걸로 서로의 살갗에 상처를 내는."
선우신은 자신의 흥분을 깨달았는지 말을 끓었다.
"언제나, 어디서나 있어왔던 일인 게야.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쓰레기는 나게 마련 아닌가. 지엽 때문에 근본을 망각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닌 게야."
선우신은 약간 무안스러운 듯 고개를 숙인다.
"자네 같은 사람도 있으니 모든 것에는 다 양면이 있는 게야. 그는 그렇고 그놈의 잡지는 뭣하러 해."
"나쁠 거야 없지 않나. 좁은 우리들 지면을 생각하면."
선우일이 말했다.
"민적민적 민적거리고 있는 그까짓 것."
"폐간당하지 않으려면 할 수 없다. 없는 것보다 나아."
"없는 것보다 낫지가 않아."
"어째서?"
"연극이란 사람을 모아야 되는 일이고 잡지가 있으면 사람 모으기 편리하긴 하지. 이론의 뒷받침도 되고 연극에 대한 계몽·관심도 확산되고, 우리 처지에선 미미한 거지만, 그러나 모여드는 사람들이 자칫 잡지 하는 쪽의 추종자가 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게 우리 현실아닌가. 그런 면에서 오송이가 계산을 하는 모양인데, 그러나 잡지를 존속시키기 위해 미온적으로 계속하다 보면 알맹이는 빠져나가고 이해 관계에 민감한 껍데기들만 남아서, 지금 오송이가 치르는 곤욕도 그런 선에서 비롯된 거야. 세상 돌아가는 것은 물론 미흡하지만 신문이 있으니 내 생각에는 잡지보다 시집이나 창작집, 정선한 번역물 혹은 학술 논문 같은 것을 단행본으로 출판하는 편이 낫겠어. 그건 우리들의 작업이라 할 수 있지만 총독부 눈치 보아가며 독자들 취향을 살려가며, 또 자기 측근에다 지면을 안배하려 하고, 죽도 밥도 아닌 꼴이 되지 뭐. 게다가 일본을 거쳐서 온, 그나마 일보서 선택되고 해석한 것을 재탕하자니 그것도 단편적으로 말씀이야. 궁색하기 짝이 없지. 한구석만 보고 사물의 전부라 생각하는 반풍수 만들기 십상이고 겉멋 든 속물들이 단편적인 것 치켜들고 지식인 행세나 하고, 그놈의 계몽주윈가 뭔가 하는 것을 보라고, 와장창 부숴버리는 게 그들의 능사 아닌가. 엽전이 어떻고 자기 비하 자기 부정은 일본인과 궤도를 같이 하고 있거던, 마치 우리것을 부정하는 일이 독립에는 첩경이요 민족을 구제하는 거로 착각을 하고 있어. 그런 망상의 도배들을 나는 반역자라 규정하겠네. 문화란 하루 이틀에 되는 것도 하루아침에 버려지는 것도 아닌게야. 독립이란 국토와 문화를 되찾고 지키는 것, 국토가 육신이라면 문화는 연혼인 게야. 뭐 그렇다고 해서 남의 것 무조건 배격하자, 그런 얘기는 아니네. 묵묵히 종전대로 사는 백성들 꼭대기에 서서 미치광이처럼 남의 것의 찬송가를 불러대는 소위 그 지식층, 산호주니, 『청조』니 하는 따위의 극단이나 잡지 이름은 또 뭔고? 사이죠 야소풍인가? 사소한 일이지만 그런 경박함은 언젠가는 아래로 흘러 백성들의, 민족 전체의 경박성으로 화하는 게야."
사이죠 야소는 사픈사픈 달작지근한 시를 쓰는 일본의 삼류 시인이다.
"불과 십 년 전인 삼일운동 때도 아직은 우리의 뿌리가 남아 있었어. 십여 년 동안 무섭게 변했다. 더욱더 무섭게 변하겠지. 내가 걱정하는 거는, 악용달할 수도 있다.……"
"잡지 말인가?"
"아까 소문이 어쩌구 했는데 사실 무근인 것은 알지만, 앞으로 오송이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지."
"내 생각에도."
"소문도 그러하니 쾅 때리고 폐간해버리는 게, 이용당하는 고통보다 덜할 건데 나 같으면 그러겠다."
"그건 아까 얘기하고 다르지 않나?"
"앞으로 달라질 거라는 예상이지. 만보산사건으로 전쟁이 된다면…… 일본의 야심이 도중하차는 아니할 게야.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 양상이 나타나겠지. 안중에도 없는 조선의 예술인에게도 메가폰을 들릴 수도 있을 게고『청조』같은 것 폐간시켜버리면 그건 다행이지만 인원 동원이 도구로 쓰일 수도 있고 일본 찬송의 글 나부랭이 실어라 할 수 있고 악용당할 소지는 있지. 그와는 경우가 다르지만 『조선일보』의 경우, 아주 교모하게 악용당하지 않았나."
"그 일은 참 고약하게 됐지."
"이제 와서? 되놈들 다 때려잡자 하고서 입에 거품을 물던 작자가 누구였나. 그게 엊그제 일이야."
"그, 그때야 누구나 다 그랬었지. 신문의 요란한 기사 보고 안 그럴 사람이 어디 있었겠나."
선우일은 쩔쩔매며 얘기한다.
"경거망동, 그게 민족주의가 가진 취약점이다. 민족주의만 내세우면 어떤 범죄도 합리화하는, 나는 오늘날 식민지 정책을 강행하는 나라에 대해 민족주의보다 국가주의, 그러니까 그건 제국주의지만 그들 스스로는 모두 민족주의자지. 생각해보게. 만보산에서 농민들의 충돌이 있었다 하여 조선일들이 중국인들을 습격하고 살상하고, 입막 쓴 얘기야."
유인성은 담배를 꺼내어 붙여물었따. 선우일은 술을 마시고 술에 약한 선우신은 안주로 사온 콩을 집어먹고 있었다. 개울물 흐르는 소리, 숲에서 찢어지게 우는 매미 소리, 물 마시러 왔을까 작은 새 한 마리가 바위 사이를 건너뛰고 있었다. 오랫동안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자는 청맹과니더란 말인가."
술잔을 내려다보며 유인성은 드릴ㄹ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누구 말인가?"
"누구긴…… 기사를 넘긴 그자 말일세."
"하긴, 태수형도 비난을 하더군. 경거망동이었다구. 공산당 했던 김아무개 아닌가."
"그거 다 사회주의 낭인이 우굴거리는 동경서 보고 들은 때문이야."
"자네는 안 그런 것 같네구려."
유인성은 쓴 웃음을 띠었다. 그리고 물었다.
"자네라면 어찌 했겠나?"
선우일은
"글쎄에."
"되놈들 모조리 때리잡아라, 기살 넘겼을 테지."
"너무들 그러지 말게, 자네같이 이성에 투철한 사람이 흔하겠나."
비꼬아놓고 다시
"너무 그러는 것도 나는 불만이네. 동경진재 때 조선인 학살하고 뭐가 다르냐 하면서 지나치게 비난하는 것, 난 불만이야. 어째서 그 일하고 이 일이 같으냐 말이야. 이번 사건은 역사적으로 쌓이고 쌓였던 우리 민족의 원한이 폭발한 거야. 물론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가 왜놈 계략에 놀아난 꼴이지만."
하자 선우신이 말했다.
"신문사에서는 전에도 특종을 보낸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장춘 주재기자의 통신을 그대로 받았다 하더군요."
"만보산사건의 진상은 몰랐다 하더라도 그곳에 있던 놈이면 그곳실정쯤 파악하고 있어야지. 일본 기관에서 고의적으로 흘린 오보를 판단 없이 송고해? 의도적이 아니었다 하더라고 『조선일보』는 어용지『경성일보』와 함께 일본의 계략을 도운 셈이야. 함정에 빠진 거라 해도 좋고."
"하지만 우리 농민이 핍박받는 것은 사실 아닌가. 따지고 보면 그 땅이 누구 땅인데? 태고적부터 우리 땅이었다구."
"꿈 같은 소리하는군.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땅은 우리 땅이야?"
철없는 아우 바라보듯 유인성은 선우일을 본다.
"지금 중국인들, 속속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있는데, 대체 일본은 어쩔 요량일까요?"
선우신이 물었다.
"돌아가서 통곡하고 길길이 뛰고 외치는 거지 뭐겠나. 중국을 싸움판으로 끌어내자는 일본의 수작이야. 중국이 총칼 들고 달려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본은 여러 가지 이득을 본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재만독립군이 발붙일 곳이 없고 독립운동도 날로 하기 어려워져가는 상황인데, 앞으로 더 어려워질 게야. 그리고 그곳 조선인들에게 핍박이 가중되면 될수록 일본에라도 의지하려 들 것이고 또 한 가지는 형편없는 민족, 잔악하고 분열을 일삼는 조선 민족, 일본이 계속 목탁 두드리듯 해온 소리 아니었나. 국제적으로 실증이 되었으니 일본으로선 매우 만족스러웠을 게야. 게다가 중국인이 빠져나간 뒤 그들의 상권도 일본인이 차지하고."
"그렇다 하더라도 결과만을 따지는 건 역시 난 불만이야. 간도 땅은 우리 민족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 있는 우리 땅이라구. 우리 민족이 가서 살 권리가 있는 땅이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요동이 고구려 땅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고 발갈병을 이끌고 고구려는 요하를 넘어 요서까지 나간 일이 있어. 요서가 어디야? 몽고를 가는 곳 아닌가. 고구려의 광개토왕 때 동부여를 치고 예순 네 개의 성을 공략했다 하니, 또 영류왕 때는 동북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여 리의 장성을 쌓았다, 그러고 보면 그 영토의 넓이를 상상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삼국이 통일되면서 당에 빼앗겼던 땅도 고구려의 대조영이 세운 발해 국으로 실지가 회복되었다 할 수 있고, 누가 알어? 우리 조상들이 우수리강, 흑룡강도 넘었을는지『동이전』이었던가? 어디서 보았는데, 하여간 우리 민족의 큰 활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그만큼 사정 거리가 멀었다는 얘기가 되지. 십육세기에 와서 몽고 지배 하에 있던 러시아가 겨우 국가를 형성하였고 시베리아는 그보다 훨씬 후에 모피를 얻기 위하여 러시아가 개척했으니,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민족이 그곳까지 진출했을 가능성도 없는 것도 아니라구."
"그럴 것 없이 이보게 동생, 하는 게 어떨고? 에스키모에게 말이야."
유인성의 놀려대는 말은 들은 척하지 않고 선우일은
"그런 저런, 옛날 옛적, 고릿적 얘기는 다 그만두라고 두만강 압록강으로 국경은 정한 것이 어디 우리였나? 우리였느냐고! 왜놈들이 저희 마음대로 조약을 맺은 거 아닌가. 나라 안이 쑥밭이던 이조 말엽에도 조선을 결코 간도를 포기 안 했어. 이중하는 내 목을 쳤으면 쳤지 국경선을 좁힐 수 없다 했어. 간도는 우리 땅인 게야. 왜 우리 백성이 되놈한테 구걸하고 살아야 하나."
"태평성세에 풍월 읊는 그 따위 소리 하면 뭘 해. 그러면 한반도는 조선인이 일본에 갖다바쳤단 말인가? 왜놈 마음대로 한 짓이 아니란 말인가? 집안이 불바단데 들판의 볏가리 챙기러 뛰어나가는 꼴이군."
유인성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나 선우일의 말이나 분노를 잘못이라 할 수는 없었다. 흑룡강을 넘고 우수리강을 넘고 어쩌고 하는 말은 당소 황당했을지 모르지만, 간도가 우리 민족의 원한이 사무쳐 있는 곳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기난날, 용정촌 상의학교의 젊은 교사였던 송장환은 생도들에게 말하기를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치고 고구려를 쓰러뜨려 삼국을 통일하여 팔백 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신라는 통일의 대가로 요동 일대의 우리 영토와 영토 내의 수많은 우리 백성을 잃었다, 지금 여러분들이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청인들 속에 우리가 잃은 조상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이 땅 간도도 옛날에는 우리 땅이었고 가시덤불과 울창한 수림을 낫으로 헤치고 도끼로 찍어내어 용정촌을 만든 것도 우리들의 부모님이 아니었던가― 사라져간 민족의 영광을 강조하고 물거품이 된 개척 정신을 애통해했던 송장환, 그의 비분은 나라를 빼앗긴 약자의 부질없는 감상이라 할 수 있겠고, 선우일 역시 약자의 허세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본연의 어쩔 수 없는 감정이며 자신들이 소속된 집단에 대한 도덕이기도 하다. 한만, 일본이 조선을 먹어들어올 무렵, 의병 봉기에 이어 오늘 현재까지 과히 민족의 대이동이라 할 만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고향을 버리고 남부여대, 이주해갔고 항쟁의 터전으로 부상된 곳, 조선 민족에게는 서사시적 무대이며 아득한 옛적부터 민족의 혈흔이 점철된 그곳 간도의 땅을 선우일이 말한 대로 중국에게 결정적으로 넘겨준 것은 일본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사살했던 그해, 1909년 청일간에 간도협약을 맺음으로써 그 땅은 청국으로 넘어갔다. 말하자면 일본은 두 걸음 전진하기 위하여 한 걸음 후퇴한 것이다. 간도를 중국 땅으로 확정지으면서 일본이 얻어낸 것은 일본 영사관 내지 영사관 분관을 설치하는 일이었고 장차 청국의 길장철도를 연길 남쪽까지 연장하여 회령의 조선 철도와 연락하게 하는 것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영사관 설치는 조선 독립군을 색출 탄압하는 합법적 본거지가 될 것이며 철도의 연결은 병력과 군수품의 신속한 이송을 위한 장차의 포석이었던 것이다. 요동 일대가 한민족의 고토였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밀리고 밀어붙이는 끓임없는 판도의 변한 속에서도 여진족은 금과 후금이라는 국가를 형성하기까지 대체로 한민족의 지배, 혹은 영향권 속에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주변 국가에 둘러싸여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였던 만주는 그 자체가 하나의 완충지였으며, 어쩌면 반만년 역사에 단일 민족으로, 독특한 문화를 이룩하여 족속해왔던 조선은 만주라는 완충 지대의 덕분인지도 모른다. 한민족과 중국, 몽고의 각축장이기도 했던, 그러나 대청제국이 성립되고 만주는 중국을 정보한 대제국으로 부상함으로써 완충 지대는 간도 지방으로 좁혀지고 고정되기에 이르렀는데 그 사정 또한 매우 복잡하게 되었던 것이다. 간도 지방에 할거했던 오란가이족과 충돌이 있어 사십여 호의 부족을 이끌고 돈화방면으로 도주한 건주여직의 간타리족에서 청의 시조 누루하치가 나왔다 하여 그들 발생의 영지를 보존한다는 의지와 그밖에 정복한 타부족이 월경하여 도피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것을 방지하려는 정치적 배려도 있고 해서 1628년 청의 태종은 간도를 비워놓고 피차 사월하는 것을 엄단한다, 그것을 제시하여 조선의 인조왕의 사이에 협약을 맺은 것인데 소위 간광지대로서 봉금한 것이다. 강약이 부동하여 조선을 불평등 협약에 응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조선에서도 권리는 있었다. 이쪽에서 그 땅으로 넘어가면 아니 될 일이나 그쪽 역시 농부들이 넘어와 주거를 마련할때 조선을 청에 통보하여 그들을 철수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옥한 땅, 국법이 아무리 엄하다 하여도 굶주린 쌍방의 백성들이 옥토를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있었겠는가. 청이 쇠퇴기에 들면서 간도지방을 돌볼 겨를이 없을 때 그 틈을 타서, 또 흉년을 맞이하여 많은 유민들이 그곳으로 흘러간 것이다. 그런데 1881년 청은 도문강동북의 간광지를 개간할 계획을 세워 미리 조선에게 통고하고 시찰을 한 바, 많은 조선 백성은 간광지에서 나갈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조선 백성은 그들 요구에 불응했고, 많은 유민들은 갈 곳이 없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그것은 심히 난감한 문제였다. 당시 조선의 동북경략사였던 어윤중이 종성의 사람, 김우식으로 하여금 백두산을 답사하게 하고 정께비와 토문강의 원류를 규명하게 한 것이 이 무엽이다. 그리하여 토문과 도문은 별개의 것으로서, 정계비에 씌어진 토문강은 북류하여 송화강에 이르는 것이므로 철수해야 할 조선 유민은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조선은 청에다 제기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국경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1885년 두 나라는, 청의 가원계·진영, 조선의 이중하·조창식이 마주앉아 담판을 벌이게 되었다. 그들은 정계비에 쓰여진 강 이름의 차이 따위는 별로 개의치 아니하다가 실지를 답사하고 산천의 형세를 살핀 뒤 당황하기 시작했다. 결국 결판을 내리지 못하고 그들은 물러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차 삼차로. 담판은 속개되어 청은 협박으로 밀고 나왔으나 이중하는 내 목을 쳤으면 쳤지 국경을 좁힐 수는 없다 하여 강경히 맞섰던 것이다. 간도 내에 거주하는 유민 중 조선인이 십만이요 청인이 삼만, 십 대 삼이었지만 그간 대국의 세를 믿고 청인의 핍박을 조선 백성은 겪어야 했고 그 고초는 오죽했겠는가. 끓임없이 변발과 복색의 변경을 강요당하며 그러치 아니할 때 땅을 몰수당하는 등, 군과 경찰이 그들 수중에 있는 만큼 소수 청인들의 횡포는 격심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빗발 같은 간도 유민들의 보호요청을 받은 조선 정부는 이범윤을 시찰원으로 파견하였고 이범윤은 들의 참상을 보고 정부의 허가를 무시한 채 사포대에 가담했는데 그것은 북청사변때, 러시아가 진주했으때 청의 정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곳 백성들 경향에 따라 한 짓이며 그 러시아의 힘을 빌어 청을 밀어내려는 일말의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러시아가 패전하게 되자 이범윤은 노령으로 잠적했던 것이다.
간도의 대강 이상으로 설명이 되었는데 그러면 만보사사건은 어떤 것이었는가. 동북 지방, 길림성의 장춘에서 서북방 삼십 지점에 있는 만보산 부근에서 중국 농민과 조선 놈민의 충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일 관헌의 무력 충돌이라 해야 옳고, 더 정확하게는 무력 충돌이기보다 쌍방간의 시위로 보아야 옳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측 농민 한 사람이 약간의 부상을 입었을 뿐 쌍방간에 사상자는 없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사건은 그렇게 엄청난 것으로 발전했고 국내 중국인 확살로 격화되었는가. 그러면 간도협약 이후의 간도 사정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말하여 백만을 헤아린다는 조선인은 중국과 일본 사이의 쿠션같은 존재였다. 중국은 조선인을 때림으로써 일본을 때리는 효과를 얻으려 했고 일본을 조선인을 방패 삼아 밀고 나간다 할 수 있었으니까. 조선인의 대부분이 소작농과 고용의 입장에서 비참하게 살아야 되는데 오 할이 소작료, 전수입의 일할 오부가 공과금, 팔부의 이자, 게다가 일본 경찰의 지배 하에 있는 우리 백성들, 착취는 중국이, 탄압은 일본이,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간도 주민 자체가 완강한 저항 세력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경찰권은 강 일본 경찰권의 강화에 불안을 느끼는 중국의 조선독립운동을 저지하려 들었고 일본이 중국 침략을 계획하는 만큼 조선인을 앞세워 토지 매수를 공작하고 중국은 또 불안하여 토지매매는커녕 토지상조권에 대해서조차 창구를 닫아버리는 현상. 일본은 조선인의 국적 치탈을 절대로 승인 아니 하는가하면 중국은 귀화해야 땅을 준다, 해서 이중 국적자는 늘어났고 따라서 조선인은 이중의 탄압에 신음해야 했다. 그리고 배일 민족운동은 조선인 배척운동으로 나타났는데 물론 일본의 앞잡이가 조선인에게 없지 않았으나 동북 정권이 일본을 업으려던 지난날의 행적이 있고 팽배해오는 배일 민족운동은 그들에게 일말의 위기 의식을 불러 일으켜 그 칼끝은 조선인 배척운동으로 돌려왔다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민중들은 단순한 민족 배외운동으로 흐르기 쉬운 존재였기에 결과적으로 관민 모두가 합세하여 쫓기는, 상처입은 짐승 한 마리를 일본과 함께 몰아붙였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은 중국인이 조선인을 몰아붙이면 그럴수록 좋다. 독립운동의 지본은 없어지는 것이 우선 좋고 중국이 가혹해지면 그럴수록 조선인이 일본에 기대려는 것을 기대할 수 있어서 좋은 것이다. 중국은 분쟁의 씨로 보기 때문에 조선인을 내몰려 하고 이런 사정에서 중국인 장농도전공사지배인이 만보산 부근의 토지 삼백 헥타르를 지주 열두 명으로부터 십 년 계약으로 빌려 그것을 아홉 사람의 조선인에게 빌려주었고 이들 빌린 사람은 이백여 명의 조선인을 동원하고 개간에 착수했는데 개간 비용의 삼천 원은 일본 영사관 감독하에 있는 조선인민의 금융부에 서 조달하였고 수전의 설계, 씨앗 구십 석은 남만주 철도주식회사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니까 애당초 문제가 있었던 공작으로 보아야 옳고 지주와 중간에 땅을 빌린 자와 또다시 조선인니 빌리는 이 과정에서 계약상의 하자도 있었으며, 그러나 무엇보다 수로 개설로 인근의 다른 농토에 침수 위험이 있다는 것이 분쟁 발단의 가장 큰 이유였다. 중국 농민들은 일을 막으려 했고 조선 농민은 강행하려 했고 중국 공안국에서 사람이 나오게 되고 일본 영사관에서 압력을 넣고 아홉 명의 조선인 개간 당사자가 체포되는가 하면 다시 영사관 경찰에서 출동하고, 일은 확대일로로 치달아 무장한 쌍방 경찰, 보안대가 대치하고 이쪽저쪽 농민들이 대치하고, 위기 촐발의 상태로까지 갔던 것이다. 앞서도 말 한 바와 같이, 그러나 쌍방간에 중국인 농부가 약간의 부상을 했을 뿐 사상자는 없었고, 결국 일본의 압도적 무력 하에 공사는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 경우 여러 가지 면에서 억울했던 것은 중국 농민측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7월 2일 『조선일보』호의로 만보사사건은 조선 국내로 비화되었다. 일본 기관에서 흘린 허위 자료를 받은 장춘 주재의 기자가 본사에 타전했던 것이다. 남의 땅에서 가난한 내 동포가 생명에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강조한 그 보도는 순식간에 민족 감정을 자극했던 것이다. 7월 3일에 벌써 인천에서는 중국인 습격이 시작되었고 서울, 가장 격렬했던 곳은 평양이었다. 연이어 부산·신의주·원산, 학살된 중국인 백이십칠 명. 부상자 삼백구십삼 명, 물적 손해는 이백오십만 원에 이른다 했다. 이러는 동안 일본 경찰은 봥관했고 또는 극히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물론 만보사사건이 파급되어 국내에서 일어났던 폭풍은 일본이 면밀하게 짜낸 각본 때문이었다. 칠월을 넘기고 팔월을 넘기고 구월 만주사변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음 카페의 ie10 이하 브라우저 지원이 종료됩니다. 원활한 카페 이용을 위해 사용 중인 브라우저를 업데이트 해주세요.
다시보지않기
Daum
|
카페
|
테이블
|
메일
|
즐겨찾는 카페
로그인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마음을 채우는 쉼터
브론즈 (공개)
카페지기
부재중
회원수
1,003
방문수
0
카페앱수
3
카페 전체 메뉴
▲
검색
카페 게시글
목록
이전글
다음글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박경리]의토지
[박경리] 토지(4부/3권/4편) 8장 수유리에서
黎明 김형수
추천 0
조회 87
13.08.11 13:18
댓글
0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저작자 표시
컨텐츠변경
비영리
댓글
0
추천해요
0
스크랩
0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
선택됨
옵션 더 보기
댓글내용
댓글 작성자
검색하기
연관검색어
환
율
환
자
환
기
재로딩
최신목록
글쓰기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