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바라밀 속에는 정진이 있는데 수행이란 정진 속에 있지만 보시, 지계, 인욕바라밀을 닦아 선정과 반야에 이르는 전 과정을 포함한다고도 볼 수 있다. 수행이란 실천을 의미함으로 행위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마음에 남기지 않고 바라밀 하는 것, 그래서 내가 수행한다는 생각이 없는 것, 이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생각 없는 수행을 하기 위해서 ‘너는 무엇을 어떻게 정진했는가’가 나의 수행에서 성찰해야 할 마지막 대목이다.
부처님께서는 반야에 이르는 수많은 수행방편을 일러 주셨지만 그것이 다 제 마음에 분별을 내지 않고 밝은 본 자리에 이르는 길이니 그것을 실천 하려면 부처님이 일러 주신 경을 독송하고 내 마음을 부처님께 바쳐서 내가 분별한 미망을 남기지 않고 부처님 마음을 닮아가는 방법이 내가 단적으로 귀의한 수행방법이고 이것이 백성욱 박사님과 그 아래서 수행하신 분들이 일러주신 방법이기도 하다.
이 것을 실천하고 있는 단체가 금강경독송회인데 새벽 3시에 깨어 금강경 7독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업장과 분별은 ‘미륵존여래불’께 온 정성으로 ‘바치는’ 정진을 30분 이상 병행한다. 이 ‘바치는 법’은 어느 일정한 시간과 처소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며 일상사의 모든 일과 인연을 맺는 모든 사람과 사물에 계속되는 것이다. 미진한 부분은 자기 전 저녁에 금강경 독송과 함께 마치며, 되도록 그 날 일어난 일들을 마음에 그려서 저장하지 않는다.
매일 새벽 3시경에 금강경 7독…
아상 없애는 ‘생각없는 수행’실천
저장한 모든 것은 업장이 되어 현상계에 투사될 것인데 아직 탐진치(貪瞋痴)가 많이 남아 있는 중생으로서는 이러한 것이 다 어두운 결과를 낳기 쉬울 것임으로 이 모든 생각은 오직 부처님께 바쳐 해탈시킬 뿐이고 이 순간의 멸도가 현재와 미래를 밝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나는 세세생생 불연이 깊었던 듯한데 이 생은 불심이 깊은 어머님을 통해 첫 불연을 맺었고 그 다음엔 좋은 스승과 벗을 통해 수행의 길을 닦았다. 아마 이러한 복은 그 어떤 복보다 수승하다고 믿는데 금강경에는 한 마음 밝히는 공덕이나 남의 마음 밝혀 주는 공덕(爲他人設)을 수 없이 칭송하고 있다. 아마 이 생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 이 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소위 예술을 창작하고 교육하는 것을 삶의 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이 자체가 하나의 수행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인데 이 일은 스스로가 정화(淨化) 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 본다. 그래봐야 겨우 소승 4과(果)의 제1과라 부르는 수다원에도 못 미칠 터인데 무정삼매(無諍三昧)의 아라한 과(果)를 얻으려면 얼마나 내 의식의 모든 세계를 정화시켜야 할 것인가. 하나의 작품을 창작해 내는 것이 고통스럽듯이 한 단계의 고개턱을 넘기도 몇 생을 닦아야 할 만큼 힘들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해냈을 때의 환희와 무량한 기쁨을 아는 이는 그 고통을 기꺼이 감내할 줄 아는 사람이며 이것은 산을 오르는 이의 마음과 흡사할 것이다.
이 한 생에도 힘든 깔딱 고개가 얼마나 많은가. 포기하지 않는 마음 그 곳에 길은 통하게 되어 있으며 밝은 본래의 자리로 언젠가 돌아 갈 것이다. 내가 서두에 ‘생각 없는 수행’에 대해 글을 쓴 것은 불교의 여러 수행 방법을 모색하던 20대에 여러 훌륭하신 분들을 떠나보내고 상(相)이 없는 수행은 없는 것인가를 찾던 30대에 아상(我相)이 없는 수행, 통달무아법자(通達無我法者)가 되는 수행을 금강경독송을 통해 만난 기쁨 때문이다. 탐진치 3독도 다 나라고 하는 집착에서 오는 것이니 나를 정화하는 마지막 수행은 사상(四相)을 남기지 않는 것이고, 이 수행은 내가 수행자라는 생각마저 마음 바쳐서 없어야 마지막 수자상에 착(着)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수행을 시작한지 일만 일이 되는 이해 5월 달에 부처님이 비춰주시는 거울을 한 번 들여다보리라. 이 생에 네 모습이 어떠한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