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람브라 궁전의 추억1)
플라맹고를
보고 우리는 그곳에서 준비한 버스에 올라 호텔로 향하였다. 밤 11시가 훨씬 넘은 시각이다. 오늘도 세비야에서 론다 말라가로 해서 이곳까지
일정이 빠듯하였지만 내일은 더욱 그러하다. 아람브라 궁전을 보고 코르도바로 가서 그곳에서 발렌시아로 가야한다. 대충 거리로 쳐 7백 킬로
정도이니 시속 120킬로로 달린다하여도 거의 6시간이다. 그러니 아람브라 궁전에서 차질이 생기면 그 여파는 실로 크다. 그런데 우리는 스페인
기행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이곳의 입장 예약을 하지 않았다. 어찌 하는 것인지 몰라 예약제도란 것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못하였는데 막상 닥치니
그것이 부담이 된다. 사람이 아무리 많이 온다하여도 하루 9천명밖엔 안 들여보낸다는데 그것이 찜찜한 것이다. 혹시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호텔 로비에서 물어 보았는데 도움은커녕 개장시간이 정확히 몇 시 인지조차 헷갈리게 한다.
책에는 분명 아침 8시 반이라 적혀있는데 그는 9시라 한다. 겨울엔 대부분 개장을 늦추는데 그렇다면 그의 말이
맞는 것인가. 이른 새벽 그곳을 다녀오는 것이 차라리 속 편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나는 아내에게 새벽 산책 나갔다가 아침 밥 먹을 때까지
안 돌아오면 표 예매 때문 못 오는 것이니 밥 먹고 그냥 오라고 일러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이른 새벽 나는 곳을 향하여 걸었다. 생각보다
추운 아침이다. 이곳은 영화 닥터 지바고의 배경이 되었던 1년 내내 눈이 있다는 시에라네바다 산맥 바로 아래다. 같은 안달루시아 지역이라 해도
날씨가 세비야와는 틀리다. 이슬람교도들이 가톨릭인 들에게 쫓겨 이 산맥으로 들어가 반란을 도모하였었다. 1499년 이곳 알푸하라스 반란 이후
거의 반세기 가량 쫓고 쫓기는 싸움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나뿐아니고 대개 다 그럴 것이라 생각되는데 내가 아람브라란 곳을 알게 된 것은 아람브라 궁정의 추억이라는 기타
곡 때문이다. 한때 동네의 기타연주회에 가면 로망스란 곡 하고 이 곡은 늘 빠지지 않고 나왔었다. 그 바람에 아람브라 궁전이 스페인 그라나다에
있으며 생각지 않게 곳은 이슬람 왕궁이란 것도 알았었다. 당시엔 곳이 중동도 아닌데 웬 이슬람일까 했었다. 이곡은 현대 기타 발전의 터전을
닦아놓았다는 타레가란 사람이 작곡한 것이다. 그는 이곳을 그의 제자인 콘차 부인과 같이 함께 왔었다는 데 그때 받은 깊은 감명을 트레몰로
주법으로 그려놓았다. 매혹적이며 우수적이기도 한 트레몰로는 은구슬 뿌리듯 투명하여 왕궁이 아기자기한 오묘한 미가 담겨있을 것 같은 감을
전해준다. 거기에 우수적인 멜로디는 콘차 부인과 헤어진 실연의 아쉬움이 배경에 깔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그는 말년 들어서는 그리
애지중지하던 기타마저도 치지못하는 신세가 된다.
아직도 어둠이 내린 도심이다. 으스스하다 싶지만 그래도 걷다보니 땀도 나고 마음이 가볍다. 한낮이면 수백
명도 넘을 도심 중 도심 한복판인데 나 홀로 카테드랄과 왕실예배당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에 기독교왕들이라 칭하는 영묘가 있던가. 기독교
왕들이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를 말한다. 두 왕국을 대표하였던 그들은 1469년 결혼을 했는데 이는 당시
가톨릭왕국을 모두 통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은 그 여세로 이슬람 최후의 왕국인 그라나다의 나사리 왕국을 반도 내에서 축출하였다. 이사벨 1세
여왕은 콜럼버스를 후원하여 그가 신대륙을 발견하게 해준 여왕이기도 하다. 건물은 아주 전형적인 르네상스 풍의 이곳에선 보기드문 굵직한 대리석
건물형태다. 이사벨 여왕은 교황청과 가까웠으며 대단한 가톨릭 신자였으니 그 의미를 강하게 나타낸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카테드랄을 보고 조금 더 걷다가 좌로 틀어 언덕위로 바로 올랐다. 아람브라 왕궁의 첫 관문인 그라나다의
문이 보인다. 청소부들이 나뭇가지를 쓸어내느라고 여념이 없다. 가만 보니 언덕 위 숲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물이 대단하다. 한쪽으로만 흘러내리는
것이 왕궁의 숲에 인공적으로 물을 적셔주는 장치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언덕을 20분 정도 올라 드디어 입구를 발견하였다. 아직도 어둠이라
지척만 구별이 될 뿐 어디가 어딘지 모를 상황이다. 도착한 시각이 7시 5분, 5시 50분 쯤 출발 했으니 1시간10분은 걸어 온 셈이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와 입구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 미국인 부부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어제 이곳에 왔다가 예매를 안 하는 바람에 못보고
다시 온 것이라 한다.
몇 시에 문을 여는가 했더니 게시판에 8시 30분 개장이고 예매는 8시10분부터 한다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1시간만 기다리면 표를 살 수 있다. 창구가 넷인데 셋은 예매 인들을 받고 한 창구만 오는 순서대로 30분씩 끊어 사람을 정해 들여보내 준다는
것이니 줄이 늘어지면 예약 우선이라 자연 입장 시간이 늦어질 것이다. 9시 넘어 줄을 서면 아마 11시 넘어서야 입장이 가능할 것이라고 어제의
쓴 경험을 한 사람이 충고한다. 그 말을 들으니 상황 파악만 하고 돌아서려는 것을 차마 못하겠다. 발이 시려 버티기가 힘들다. 걸어서 흘린
땀이 한기까지 느끼게 한다. 안되겠다 싶어 택시를 타고 갔다가 바로 돌아와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하지만 택시 승강장에 내리는 사람들이
부쩍 느니 돌아갔다간 여기까지 와서 알아본 것이 허사가 될 것도 같아 또 그러지를 못하겠다.
그렇게 시간은 또 지나 8시 10분까지는 고작 25분 남았다. 이제는 돌아설 수가 없다. 줄이 많이 진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들오들 떨려 입을 굳게 다물어도 실룩거리는 입술이다. 8시가 넘으니 매점이 문을 열었는지누군가 매표소 뒷편 오는 길에 커피를 물고
있다. 나는 일부러 아침인사와 더불어 오는 사람에게 숫자를 매겨 말하였다. 나는 넘버 3이고 내 바로 뒤에 스페인아저씨는 넘버 4다. 그리고
중국여자 둘이 그 다음이다. 잠시 자리를 비워도 나는 확실한 넘버 3이다. 나는 커피를 사러 잠시 자리를 떴다. 가보니 그곳 매점의 줄도
만만하지가 않다. 이왕 시키는 것 두 잔을 시켰다. 스페인 아저씨를 주기 위해서다. 그에게 커피를 건네자 당연 자리를 지켜두었다는 듯이 줄
옆에 선다. 드디어 문이 열렸다.
나는 표를 샀다. 시간이 정해진 표다. 몇 시로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입장시간을 8시 30분에서 9시 사이로
정하였다. 그런데 표를 사고 8시 반이 가까운데도 일행들이 오지를 않는다. 분명 어제 아내에게 일렀는데 그 말을 까먹었는가. 초조함에 택시
승강장으로 나가서 오는 이들을 일일이 확인하였다. 그 때이다. 아들과 동료 한 명이 택시에서 내린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데 그들은 어제 아내에게
전한 말을 파악하여 미루어 짐작하고 온 것이 아니다. 단지 새벽에 나간 사람이 안와서 걱정이 되어 왔다 한다. 뭐 어쨌든 그 시각 그것을 따질
겨를이 없다. 호텔에 전화를 해 급히 다른 일행도 급히오라고 전하였다. 그래서 모두 모인 시각은 8시 50분.
10분이 더
지났으면 산 표는 허사이고 다시 표를 사야 했다. 그러면 아마 11시 이후 것으로 밀려나야 할 것이다. 시각 맞추어 아람브라를 보게되니
코르도바를 제대로 볼 시간을 얻어 나는 안심이다. 내 어릴 적 빵꾸 난 양말 생각은 안 해주고 추운 겨울 날 운동장에 모여 교장선생님의 훈시를
들은 것이 늘 그쯤의 고통이 아니었던가. 그나저나 20년을 넘게 살았는데 나하고 텔레파시가 그 정도 밖에 안 되는가 하여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가 미안하였던지 차디찬 내손을 녹인답시고 오랜만의 영감대접이다. 나중에 아차 그랬었지 하였다니 그래도 아내와 텔레파시는 통한다고 봐야지
어쩔까. 그곳은 그렇게 나에게 기억될 아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만들어주며 어렵게 문을 열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