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가 넘도록 들어오지 않는 딸애를 기다리며 애를 태우다가 선잠이 들었다.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시계를 보니 4시였다. 딸애 걱정에 거실로 나갔는데 화장실 앞에 딸애의 옷이 널브러져 있었다. 두드려도 대답이 없는 화장실 문을 열자 변기 위에서 딸애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아 졸고 있었다.
속옷만 입고 앉아 잠든 모습을 보니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참, 어이가 없었다. 딸애가 술을 먹을 줄 알리라곤 전혀 상상을 못했던 일이라 너무 당황이 되고, 한편으론 어린아이 같기만 하던 딸애의 술 취한 모습에 새삼스런 생각도 들었다.
작년에 수능시험을 실수한 딸애는 술을 마시느라 자주 귀가시간이 늦어졌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렇게 술을 마셨을까. 외동딸이지만 말썽 한 번 안 피우고 자란 아이라 딸애가 그 정도로 괴로워하는지를 몰랐던 내가 엄마로서 미안하기도 했다. 괴로움을 잊으려고 먹은 술을 이기지 못해 힘들어하는 딸애를 보니 오래전에 내가 술 때문에 겪은 일이 떠올랐다.
딸아이가 아장아장 걸어 다닐 무렵이었다. 서른 살이 되도록 술이라곤 막걸리 한 모금도 못 먹던 내가 언짢은 일로 집에 있는 양주를 머그잔으로 반 잔 가량 마셨다. 아니, 반 잔을 마셨는지, 한잔을 마셨는지는 19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없다.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술을, 그것도 독한 양주를 마셔 아침에 일어날 기운도 없었다. 전날 남편이 늦게 돌아오니 방안 구석구석 토해놓아 옷을 세 번이나 갈아입히고, 이불도 모두 새 이불을 꺼내 덮어주었다고 했다. 그러고도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얼마나 토했던지 나중엔 초록색의 쓴 물까지 넘어왔다.
다음날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전날 밤 무슨 짓을 했는지 나는 기억이 없는데, 남편은 그렇게 괴롭고 힘들면 말을 하지 그랬느냐며 속상해했다. 술주정을 많이 하긴 한 모양인데 먹지도 못하는 술을 먹어 고생하느냐는 말만 할 뿐, 남편은 전날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겁 없이 마신 독한 술 때문에 보름 정도는 고생했다. 워낙 몸이 안 좋을 때였기에 몸살로 위염으로 옮겨와 병원에 다니고 약을 먹고 했던 것 같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나 남편한테 정식으로 술을 배우게 되었다. 부부동반으로 모인 자리에 가서 나만 술을 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앉아 있는 것이 어색 해보였나 보다. 저혈압이니 술 한 잔씩 하면 건강에 좋다며 자꾸만 권하는 남편과 함께 한 잔씩 마시다 보니 술이 늘었다.
처음 얼마간은 견디지 못해 술상 앞에서 바로 쓰러져 자기가 일쑤였는데, 어느 사이에 주당이 되어버렸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늦게 배운 내 주량이 이젠 남편을 훨씬 뛰어넘었다. 식사를 할 때도 홀짝홀짝 한 잔씩 하고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와인을 한 잔씩 마신다.
남편이나 나나 술을 전혀 못하는 것으로 아는 바깥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술 공장과 친한 친구를 둔 인연으로 우리 집 베란다엔 언제나 술이 상자로 놓여 있다. 내가 조금씩 술을 마신다는 것을 안 남편의 친구는 우리 집에 술만 떨어지면, 어느새 알고 술이 앉았던 빈자리를 채워준다.
나는 가끔, 날씬하게 빚어 올린 목이 긴 유리잔에 얼음을 채우고, 포도주에 과일을 칵테일 하여 나만의 술을 만들어 마시기도 한다. 그리고 혼자만의 분위기에 취해본다. 사실 난 술을 마시는 것도 좀 우아하게 품위 있는 곳에 가서 마시고 싶다. 술을 마시는 즐거움보다는 음미하며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좋다.
결혼 20년 차가 되었고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술을 왜 마시는지, 이젠 좀 알 것 같다. 술을 마시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적당히 오르는 취기와 함께 텅 빈 가슴에 남아있는 여백을 메워주는 감미로움을 남들은 알지 못할 거다. 남편이 일찍 들어오는 날이면 가끔 남편과 술잔을 기울인다. 알코올이 한 방울만 들어가도 얼굴을 비롯한 온몸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남편과는 반대로 난 술을 마셔도 얼굴에 변함이 없다. 오히려 마실수록 더욱 창백해지는 얼굴 때문에 친정올케들은 날 보고 주당이라고 놀린다.
가끔은 술이 아스피린처럼 진통제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떤 날 마시는 술은 사람을 용서하게 하고, 어떤 날 마시는 술은 얼어붙은 내 가슴 저 밑바닥까지 훈훈하게 녹여주기도 한다. 술 한 잔을 나누며 용서를 구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고, 술 한 잔을 나누며 가까이하고 싶어지는 사람들도 있다.
저마다 다른 빛깔의 그리움과 고통으로 술잔을 섞을 수는 없지만, 가슴에 전해지는 알코올의 따뜻한 온기가 비어 있는 서로의 가슴에 허전한 쓸쓸함을 채우기는 충분하다. 요즘은 막걸리가 유행이라 하여 막걸리 맛에 푹 빠졌다. 그리고 막걸리를 같이 마실 수 있는 지인도 생겼다. 공감대를 나누며 같이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행복이 아닐까.
▶2000년 월간문학세계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 ▶제 3회 서울시 음식문화 개선을 위한 수필공모 대상수상 ▶제29회 동국대학교 전국만해백일장 시 부문 장려상 수상 ▶2008 MBC라디오 신춘문예 '신춘편지쇼' 입상 ▶2009년 광주김치문화축제 스토리텔링 전국공모전 우수상수상 ▶2009년 제 10회 전국 시흥문학상 우수상 수상 ▶2009년 건강한 노사만들기 작품공모전 동상수상 ▶ 저서: '나와 너의 울림' 발간 ▶충북여성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편집위원), 에세이플러스문학회회원, 한국작가회의충북지회회원 ▶email :essay022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