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부
보닛을 어루만지며 쓰다듬었다. 트렁크를 올려 바닥을 들어도 봤다. 좌우 문들을 열어보고 핸들을 꾹 쥐었다. 앞창문을 보면서 ‘잘 가.’ 인사하고 올라왔다. 얼마 뒤 방송에 ‘차 나갑니다.’ 소리가 들려 얼른 창밖을 내려다봤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해변 도시 이름인 까만 지엠 코리아 쉐보레 말리부가 도로로 들어서기 전 잠시 머뭇머뭇하며 섰다. 그러다 좌회전하며 미끄러져 갔다.
사위가 렌터카를 보내줬다. 몰던 차가 낡아 버리게 되자 아직 필요하리라 믿고 주선했다. 4년간 얼마나 정갈하게 즐겨 탔는지 모른다. 교회와 텃밭, 엄궁 농산물 시장 등 길쭉한 차를 몰고 많이도 다녔다. 안동 모친 묘소며 물야 고향 땅을 봄철마다 굴러갔다.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스한 정든 차였다.
그만 떠나보내고 먹던 홍시를 든 채 눈물을 글썽이는 아내다. 무정물이 가슴팍에 착 안기는가. 그동안 여러 차례 폐차하면서 몰고 나갔어도 이러진 않았다. 연간 수백만 원이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보험료며 어쩌다 찍히는 교통 범칙금 등 세금과 함께 딸에게 부담을 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이다.
마침 허름한 소형 가스 차를 구해 몰 수 있게 되어 돌려줄 때가 됐다. 갑자기 두 대나 되어 이것도 몰았다 저것도 타 보는 등 뒤숭숭하다. 가끔 말리부로 아내 고향을 간다. 다니던 학교에 들어가 보고 집터만 남은 살던 집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가까워 점심시간에 나와 따뜻한 음식을 먹고 다녔던 곳이란다.
비 올 땐 물이 흐르고 그 외는 말라서 건천이라 한단다. 살던 기와집이 꽤 컸는데 뜯어내고 보니 손바닥만 하다. 우물도 있어 두레박으로 퍼 올리면 여름에 얼음물처럼 시원하다. 마당 한쪽엔 밭을 일궈 상추와 배추, 파가 싱싱하고 고추가 주렁주렁 열렸다. 지붕엔 호박이 기어 다니며 누런 맷돌을 여기저기 앉혔다. 그런 집이 간곳없다.
멀리 갈 때는 가스 차보다 승차감이 나은 말리부가 좋다. 사르르 가는 차내에서 이내 잠이 드는 아내다. 요람인가 실컷 자다 일어나 여기가 어디냐 묻는다. 고향에 다 왔다 하면 벌떡 일어나 살핀다. 어릴 때 지루하게 살았을 텐데도 건천이라 하면 자다가도 번쩍 귀가 뚫리는가 반응한다.
뒷자리는 용상이다. 비슷이 앉아 눈을 감거나 모로 누워 자기도 한다. 그러다 불편한지 반드시 눕는다. 그때 발을 유리창 좌우로 올려놓고서 별스럽게 간다. 아주 편안한 자리다. 아들이 운전하는데 혹여 졸릴까 해서 옆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눈을 뜨게 한다.
처음은 운전이 즐거웠는지 윙윙 속도를 내다가 요즘은 느긋하게 찬찬히 몬다. 네 가족 중 딸이 빠져 늘 허전하다. 시집가서 경기도에 산다. 얼마나 잘하는지 사흘이 멀다고 전화하며 부산 부모에게 관심을 보인다. 맨날 가족 카톡방에서 만나도 속이 덜 차는가 아침저녁으로 어떤가 물어올 때도 있다. 시집가면 멀어진다던데 그렇잖다.
어릴 때 허튼 말 중에 ‘아빠 좋아하는 탁구장을 만들고 소도 사 드릴게요.’ 난데없는 소 말을 한다. 설과 추석 명절, 부모 생일 때, 봄가을 꽃피고 단풍 들 때면 꼬박꼬박 찾아와 인사하는 딸이다. 시골, 시골 노래하는 엄마에게 산골짝 집에 들면 외양간 소를 말하니, 그게 말리부란다. 사위와 딸이 해준 게 너무 많아 헤아릴 수 없다. 침대와 정수기, 청소기 등 좋다는 건 다 사 보낸다. 가족의 옷을 철철이 갈아입게 하는가 하면 제때 과일을 맛본다.
탁구는 늙어 숨차다. 오전엔 텃밭 일 돕고 오훈 당구 친다. 이 모임 저 일로 매일 나간다며 빤한 날이 없다고 뭐라 한다. 늙바탕에 눈치 보며 슬며시 나다녀야 한다. 아파트에 피트니스가 있어 다른 데처럼 당구대를 들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당구에 미쳤단다.’ 아들 앞에서 소리치는 아내가 밉살스럽다. 정말 내가 미쳤을까.
오전은 집안일 거들고 오후에 나가기로 했다. 남정네가 삐치고 갈 곳 없이 들앉아 있으면 좋겠나. 안 사람이 답답할 것이다. 글 쓴단 핑계로 죽치고 있으려면 거추장스러워 기척도 없이 지낸다. 가장이라 맞장구치고 화내어 아내 기를 누르면 내 없을 때 아들이 따라 할까 조심한다.
그건 왜 그리 좋아서 자나 깨나 눈에 선한지 모르겠다. 싫증 나면 괜찮겠는데 또 그럴 때가 됐는데 여전해 미움을 산다. 쳐서 붉은 볼이 앞으로 모이면 닭 모이 쪼듯 하나둘 세는 4구 재미가 쏠쏠하다. 저리 야단인데 저거 안 하면 난 어찌 사나. 복식 탁구도 빙 돌리면 상대가 받기 어려워 쩔쩔매는 게 웃음을 자아냈다. 오르막을 걷거나 달리면 그만 숨차 이제 팔짝팔짝 뛰는 운동은 할 수 없다.
서안동과 창령 가술 산기슭에 대놓고 중턱을 올라 모친과 장인, 장모 산소에 기도 올린 뒤 앉아 하모니카를 분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 산새들이 모여 같이 짹짹 노래한다. 기다리던 듬직한 차 옆에 자리 펴고 앉아서 음식을 먹으면 맛이 그저 그만이다. 교대 교대로 몰고 집으로 가노라면 참 편안하다. 차가 부부를 이렇게 행복하게 하는구나.
100호 6000을 시동 걸어놓고 여기저기 부서졌나 찍힌 데는 있나, 살피며 이리저리 사진 찍느라 시간이 지체되자 그냥 올라왔다. 차 가지러 온 회사 젊은이가 차근차근 살펴서 잘 가라 인사 못한 채 왔다. 13층에서 내려보니 반짝반짝하다. 아들이 반납하려고 청소를 깨끗이 한 것 같다.
중고로 팔리거나 또 렌터카로 할 것이다. 소 아니 말리부야 함께 즐거웠다 잘 가거라.
첫댓글 선생님 정든 소를 돌려주셔서
너무 서운 하셨군요
예전에 배내기 송아지를 얻어와
한 삼 년 키워 어미 소가 되어 새끼를
놓으면 어미 소는 주인에게 돌려 주든
일이 생각 났어요
정 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어제 키우던 소를 돌려 보냈습니다.
음메하며 곰실곰실 떠나는 게 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