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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니치 천문대(Royal Observatory, Greenwich)는 1675년에 세워진 영국의 천문대이며, 세워질 당시의 이름은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Royal Greenwich Observatory)였다. 찰스 2세는 천문대를 설립할 때 존 플램스티드를 초대 천문대 대장으로 임명하면서 왕실천문관이라는 호칭을 만들기도 했다. 현재 그리니치천문대는 런던 그리니치의 그리니치 공원에 위치해 있다.
영국 천문학자들은 오랫동안 그리니치 천문대를 위치 측정의 기준으로 삼아 왔다. 네 개의 자오선이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경도의 기준이 되는 본초 자오선은 1851년에 정해져서 1884년에 국제 회의를 통과했다. 이 자오선은 그리니치 공원에 황동(지금은 스테인리스 강)으로 표시되었으며, 1999년 12월 16일 이후로는 초록색 레이저도 함께 내보내고 있다. 그러나 당시 정해진 천문학적 본초 자오선은 현재는 지오이드를 기준으로 한 새로운 본초 자오선으로 대체되었다. (이 본초 자오선은 원래 자오선보다 동쪽으로 1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그리니치 평균시(GMT)는 그리니치에서의 관측을 토대로 계산되는 시각이었다. GMT 역시 1954년 이후로는 그리니치가 아닌 다른 천문대의 관측을 토대로 정해졌으며, 현재는 협정세계시를 비롯한 세계시들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GMT와 협정세계시와의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GMT를 협정 세계시의 뜻으로 쓰기도 한다.
그리니치 천문대의 모습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는 1924년 이후로 그리니치가 아닌 다른 곳으로 여러번 옮겨졌다. 1924년에는 당시 건설되던 철도가 자기장과 기상 측정에 영향을 줘서 해당 분과가 서리 주로 옮겨 갔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39년에는 런던과 함께 대부분의 분과가 피난을 가고 그리니치에서의 활동은 최소한으로 제한되었다.
전쟁 이후인 1947년에 천문대는 런던의 광공해를 피하기 위해 허스트몬서 성과 주변 320 에이커 지역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왕립 천문학자는 1948년에 성으로 들어 왔지만, 과학 장비들은 새 천문대 건물이 완공된 1957년까지 옮겨지지 않았다. 건물이 완공되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분과들은 모두 성으로 완전히 통합되었다.
아이작 뉴턴 망원경이 1967년에 허스트몬서에 세워졌으나, 1979년에 에스파냐의 카나리아 제도에 위치한 Roque de los Muchachos 천문대로 옮겨졌다.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는 1990년에 케임브리지로 다시 옮겨 갔고, 입자 및 천체 물리학 연구평의회(PPARC)의 결정을 따라 1998년에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 천문대에 위치해 있던 몇몇 연구실 등은 러더포드 애플턴 연구소 등으로 옮겨졌고, 원래 천문대가 있던 그리니치 공원에 런던 해사 박물관의 일부로 그리니치 왕립 천문대가 새로 세워졌다.
건국동맹 결성
1944. 8. 10
![]() 여운형 | 1944년 8월 10일 여운형의 지도 아래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모여 건국동맹을 결성했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일제의 통제 아래에서 침묵을 지키거나 소그룹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형편이었고, 민족주의자들도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 이후 활동이 미미한 상황이었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고자 뭉친 건국동맹은 "각인각파(各人各派)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제국주의 제세력을 구축(驅逐)하고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일, 반추축(反樞軸) 제국과 협력하여 대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 일, 건설부면에 있어 일체 시위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농대중의 해방에 치중한다"는 강령에 따라 활동했다. 또한 좌익·우익을 묻지 않았으며 불문(不問)·불어(不語)·불명(不明)을 철칙으로 삼았다. 1944년 10월경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책임자를 내정했으며, 자주적인 독립쟁취를 이루기 위한 준비로서 군사위원회·식량대책준비위원회·치안대 등을 결성했다. 다른 한편으로 결정적 시기에 해외 동포들의 힘을 결집시키기 위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반일단체와의 협력을 도모했다. 건국동맹은 8·15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할 수 있는 모체가 되었다. |
관련 인터넷 링크
[한글 사이트]
디지털 한국학은 한국의 역대인물에서 여운형의 생애와 업적, 참고문헌 등의 정보를 제공한다. 목포대학교 박찬승 교수의 한국근현대사연구실에서는 논문 <1910년대말 - 1920년대 여운형의 민족해방운동론>을 제공한다. 한 개인 홈페이지에서 해방 후 정치상황을 도표로 간단하게 정리한 해방 후 정치계보를 제공한다. 또 다른 개인 홈페이지 아! 대한민국 한국의 역사에서는 문학평론가 임헌영이 문학작품 속에 나타난 여운형을 조명한 글(<한겨레> 1994. 8. 24)을 제공한다.
광주대단지사건 발생
1971. 8. 10
![]() 성남시 | 1971년 8월 10일 경기도 광주군 신개발지역주민 수만 명이 도시를 점거한 광주대단지사건이 일어났다. 광주대단지는 서울시의 빈민가 정비 및 철거민 이주사업의 일환으로 계획된 위성도시로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이다. 이 계획에 따라 서울시는 경기도 광주군에 대규모 이주단지를 조성하고 사건 당시까지 2만 1,372가구 10만 1,325명을 이주시켰다. 그러나 이 이주사업은 토지 투기 만연과 이주민 분양권의 불법전매, 이주민 생계대책의 외면 등 본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서울시는 이러한 문제는 덮어둔 채 평당 8,000~1만 6,000원의 지가를 일시에 불입할 것과 각종 세금납부를 독촉했다. 생존권을 요구하는 주민의 요구를 묵살하고 행정 편의적인 정책으로 일관한 서울시의 이러한 태도가 사건 발생의 원인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8월 10일 서울시장이 주민과의 대화 약속마저 일방적으로 지키지 않자 이에 격분한 주민들이 지역 내 토지불하가격인하·취득세감면·세금부과연기·긴급구호대책마련 등을 요구하며 도시를 점거했다. 같은 날 오후 서울시장이 이주단지의 성남시 승격과 주민 요구의 무조건 수용을 약속함으로써 사태는 겨우 진정되었다. 이 사건은 196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농업의 해체와 실업문제 등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집약된 도시빈민문제의 본질을 드러냈다. |
관련 인터넷 링크
[한글 사이트]
<성남일보>에서 광주대단지사건 재조명활동에 관련된 기사들을 일괄 제공한다. 목포대학교 박찬승 교수의 한국근현대사연구실에서 분당 택지개발 현장 사진 등 광주대단지사건 관련 보도사진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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