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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 - [의식의 갑각류]
※ 일부 출처를 밝히기도 했으나, 출처를 남기지 않은 채 메모해 둔 것을 참조로 글을 쓰다 보니 끝내 출처를 기록하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이해를…
외골격 – 일부 동물에서 부드러운 조직을 지지하고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는, 단단하며 관절로 이루어진 외피. 연체동물의 석회질로 된 패각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곤충, 거미류, 갑각류 등과 같은 절지동물에서 키틴질의 외피를 가리킨다. (중략)
외골격은 성장하지 않고 규칙적으로 허물이 벗겨지며 새로운 것이 분비된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내 아기를 들여다 보거나 안거나 할 때,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조금이라도 거친 곳에 피부라도 닿을라 치면 이내 상처가 남는 것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 하다. 그 조심함이 지나쳐 아기를 사람들에게 보이기는커녕 사진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그만큼 애지중지 하고 있다.
보드랍기 그지 없는 연약한 피부를 보면서 인간에게 딱딱한 피부가 주어졌다면 훨씬 더 키우기에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그러고 보니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서 자연계에 동물이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피부의 형태는 두 가지가 있다고 기록했던 적이 있다.
하나는 겉에 단단하고 두꺼운 외벽을 두른 부류이다. 어패류나 갑각류가 그러하다. 겉이 매우 딱딱하여 외부에서 어지간한 자극만으로는 그 외벽을 뚫기란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일단 그 외벽을 벌이거나 깨트리기라도 하면 그 속에는 한 없이 연약한 살이 노출되어 있다.
또 하나는, 살이 겉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살을 지탱하기 위해 딱딱한 뼈가 가운데 버티고 있는 경우이다. 살은 약하여 쉽게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피부도 발달하고 근육도 발달하여 그 살을 지탱해 주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비슷한 형태의 두 부류를 본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일 줄도 모르고 자신의 모순을 해결할 줄도 모른다. 딱딱한 키틴질의 외골격으로 둘러싸여 그렇게 자신만의 생각으로 세상을 재단하며 상대를 쉽게 판단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폐쇄적이다. 멍청한 게 아니라 폐쇄적이다. 이어령 선생님은 이들을 사회적인 아스퍼그, 즉 사스퍼그라고 이름 붙였다.(설명은 좀 뒤에)
난 좀 더 적나라하고 단순한 단어를 사용한다. 이 갑각류들!
그들은 자신의 논리가 파괴되어 버리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한번 담이 무너지고 나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무너진다. 그걸 아는 까닭에 더욱더 자신의 외골격을 두텁게 두텁게 쌓아간다. 한번씩 탈피라도 하면 그렇게 성장이라도 하겠건만 그런 기회조차 스스로 차단한다.
피부노출형은 아무래도 상처를 쉽게 입는다. 하여 늘 조심스럽다. 다른 이를 비판하는 것에는 늘 둔하다. 상대를 재단하는 그 잣대를 자신에게 들이댈 때 자신 또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조심한다.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그에게는 지켜야 할 신념도 의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지켜야 할 신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다. 어제와 다른 오늘인 까닭에 어제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다.
당신은 쉽게 상처받는 내골격을 가진 피부노출형인가, 아니면 딱딱한 껍질을 두른 외골격의 갑각류인가.
갑각류의 특징
갑각류는 받아들이고 싶은 정보만 받아들인다. 역시 알고 싶은 것만 알고자 한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한다.
중국에 투자를 하고 난 뒤에는 중국에 대해 좋은 정보만 취사선택해 본 적 없는가. 나쁜 정보는 스스로 귀를 닫고 눈을 감아버린다. 부동산을 사고 나면 부동산이 오른다는 정보만 취하고자 한다. 마찬가지로 팔고 나면 자신이 잘 팔았다는 정보만 취사 선택한다. 다른 정보는 원하지 않는다. A 라는 회사의 주식에 샀다고? 그 회사에 긍정적인 기사는 두 번 세 번 읽는다. 흔하게 나오는 기사가 아니니 한번 나온 것을 눈에서 태양광이라도 나오듯 뚫어져라 반복해서 읽는다. 하지만 부정적인 기사는 이내 넘겨버린다.
갑각류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에 대해 그 생각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상스럽게도 그 사람을 매도한다. 당신의 생각은 무엇이 잘못되었어~ 류의 대화란 없다. 그런 말을 하다니 매국노네, 또는 그런 말을 하다니 저질이네, 그런 말을 하다니 천민자본가네…
그것은 대화를 하지 말자는 뜻이다.
쉽게 상대를 재단하는 당신, 이 시대의 갑각류로 인정합니다~~.
현대인에게 주어진 저주는 “얇음”이라고 했다. 즉, 경박함이다. 인터넷에 난무하는 저속한 댓글을 보면 그 경박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경박함에 대하여 기가 막힌 묘사를 시골의사의 블러그에서 보았다.
“경박단소 키치의 시대, 원본이 사라진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진지함이란 새로운 형태의 소외일지 모른다.”
공감하며 무릎을 친다. 그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본다. 경박의 시대에 진지한 의견이 설 자리가 없다. 하여 나도 시사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음이 아니라 말 할 수 없음으로 입을 다문다.
결정적으로, 갑각류는 자신이 똑똑하고 다른 사람들은 죄다 아래로 여긴다.
당신이 그토록 똑똑하게 잘 처신해 왔다면 지금 당신의 형편과 처지에 만족하였으면 좋겠다. 들켰는가? 난 지금 빈정거리는 중이다.
갑각류의 미래
그 모양 그 꼴로 평생 사는 수 밖에 없다. 가끔 탈피라도 하듯 허물이라도 벗어야 할 텐데, 그 자신 그것도 거부한다. 그나마 그가 태어난 환경이 좋은 곳이라면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 좋은 환경이 깨어졌을 때 그의 인생에서 외골격이 깨어진 것과 같은 충격파를 받게 된다.
당신은 자신의 갑을 지킬 만큼 좋은 환경을 누리고 있다고? 글쎄다.
<세계는 평평하다>에서 토머스 프리더먼이 기록하듯, 다가올 미래는 스스로 자신의 껍질을 깨트리지 않는다면 외부에서 그 껍질을 파괴하게 된다. 갑각류인 당신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게 당신의 미래이다.
주장하던 의견을 철회하고 상대의 의견을 받아들였던 적 있는가? 귀가 얇은 것과는 다르다. 부부싸움에서 설복 당했던 적은 있는가? 상대의 주장이 너무 거세어서 체념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오류를 진지하게 인정하였던 적이 있는가? 그런 적이 없다면 당신은 갑각류이다.
<블링크>에는 20년 뒤에 남녀가 헤어질 징조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표징이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고. 사람들은 왜 안 들을까? 듣기도 전에 다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상대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고 있다면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그런 연인이 20년 뒤에도 함께 있는 경우는 없다지 않는가.
총명하다는 뜻은 귀밝을 총을 쓴다. 잘 듣는 사람이기에 총명한 사람이다.
당신은 누구에게 진지하게 열광했던 적은 있는가? 존경하는 인물은 있기나 한가? 역사 속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 말고, 당신이 만난 사람들 가운데 존경하는 인물은 없는가? 없다면 당신은 갑각류이다. 아니 어찌 단 한 사람도 못 찾을 만큼 당신이 그 모든 사람들 보다 우월하더란 말인가.
제안
세상에 대해서는 관찰자가 되는 것은 어떤가. 경박하게 부화뇌동하지 말고 투자자의 위치를 고수한 채 진지한 관찰자가 되는 것은 어떤가. 딴지 걸지 마라. 난 지금 관찰자가 되어라 했지 방관자가 되어라고 말 하는 게 아니다.
대신 배움에 대해서는 관찰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판단하고 재단하고 나면 배울 게 없다. 상대를 규정지어 버리면 그기서 더 이상 배울 게 없다. 쉬 판단하는 것이 곧 경박의 증거다.
로버트 키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2권째를 읽다 보면 이 사람이 이 책을 쓰는 것으로 돈을 버는구나 알만하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 책을 판단해버리고 나면 그의 제안이 그의 안목이 내게 접목될 기회를 얻지 못한다. 분명한 사실은 그 판단을 미루어두고 그 책에서 제시했던 여러 안목을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많은 이들의 삶이 변했다는 사실이다.
판단해 버린 사람들이 스스로 지적 우월감을 느꼈을지는 모르지만, 판단을 보류한 사람들은 남들이 그들의 성취를 인정해 준다. 판단이 빠른 사람은 시간이 지나 지적 허영에 대한 흔적은 볼 수 있을지언정 성장과 성취의 흔적이 없다.
우리의 마음에 빈 공간을 남겨두자. 그게 배우려는 자세이다. 유리는 공간이 없다. 스폰지는 공간이 있어서 물을 빨아들인다. 그게 쉽게 가는 길이다.
모순인가? 세상에 대해 참여자가 되기 보다 관찰자이기를 요구하는 것, 배움에 대해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가 되기를 요구하는 것. 아니다. 같은 이유이며 같은 원리이다.
지표
표피를 깨트리는 것, 외골격을 깨트리는 것에 대한 지표를 살을 수 있다. 그것은 당신이 사람들을 대하는 그 관계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어령 선생님은 만남은 맛남이라고 했다. 맛나는 관계를 당신이 유지하고 있다면 아마도 당신은 성공적으로 외골격을 깨트린 것으로 인정할 만하다. 알지 않은가. 주고받는 말 한 마디 없는데, 저 사람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을 갑갑하게 하고, 저 사람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 당신은 어느 쪽인가.
아스퍼그 신드롬, 현대인이 자신의 세계에 파묻혀 사는 경향을 이야기 한다. 이 경향이 조금 더 병적으로 발전한 것을 소셜 아스퍼그, 즉 사스퍼그 신드롬이라 이름 붙였다 하니. 해석한즉, 자신에게 지독히 관대하면서 타인에 대해서는 지독한 엄격주의자.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당신은 그 부류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다가올 미래에 살아남을 사람은 4종류밖에 없다고 한다.
1) Special 특별한 사람
2) Specialized 전문화된 사람
3) Anchored (이게 정확하게 번역이 안 되는데… 감각적으로 번역해주길 부탁도 해 보며) 자리잡은 사람(?)
4) Really Adaptable 유연한 사람(적응력 강한 사람)
우리가 선택할 것은 유연한 사람이다. 특별한 사람이나 전문화된 사람은 나와 거리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유연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는지.
하여 우리는 의식의 외골격을 벗고 성장을 도모하고자 책을 든다. 책을 든 것으로 신분을 삼으려는 쿤데라가 만든 마리아의 모습도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책은 신분도 계급의 증거도 아니다. 구별되고자 하는 허영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겸손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난 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증명이 되어야 한다. 수를 채우기 보다 진정 정반합을 이룬 결과처럼 과거의 나를 치고 나를 깨트리는 책 읽기를 하고자 한다.
우리는 유연한 사람이기를 원한다.
그러니 이제 나보다 실력도 없는 쟤가 합격했다고 말하지 마라. 나보다 못한 쟤가 승진했다고도 말하지 마라. 실력 외에 다른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라. 그게 유연한 자세이다.
또한 세상이 썩었다고도 말하지 마라. 저수지에 2.5%만 살아있는 물이 공급된다면 그 저수지는 죽지 않는다고 한다. 당신과 내가 그 2.5% 노릇만 똑바로 하더라도 이 세상이 썩지 않는다.
첫댓글 제가 가는 재테크까페(선한부자)에 까페지기님이 올린글입니다.. 이분의 관점은 재테크의 입장에서 사고의 유연함을 강조하고자 쓰신 글 같습니다.. 저는 이것을 종교와 관련해서도 적용가능하다고 봅니다... 증인들에게 특히 그렇지요.. 내가 관념에 있어서 갑각류는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볼만합니다..
비밀님도 저와 같은 곳에 가시네요~.저도 최근에 읽고 좋았는데...시골의사 분 사이트도 꽤 좋은 글이 많지요. 우와~의외의 반가움이 있네요.2개의 카페에 같이 가입되어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