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신 성자
반야심 권오영|자영업
내 나이 20대, 1970년대 후반 어느 해 가을. 경기도 의왕시 백운산 백운사에서 일생의 스승이 될 성자를 만났다네. 그 분은 황금빛 가사를 수하시고 빛나는 이마, 우물처럼 깊고 신비 가득한 눈에서는 천년의 샘물이 일렁거리듯 광명이 솟구쳐 올랐고, 붉은 입술을 가만히 열어 감로수를 토하셨네.
“그대는 반야심(般若心)이로다.”
나는 그만 두려움 같은 감동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털썩 엎어져 절을 올려버렸네. 그로부터 성자를 가슴에 품고 또 다시 만날 날을 꿈꾸며 살았다네.
(당시 백운사의 주지이던 정화스님께서 큰스님을 모시어 수계법회를 열었다. 첫 번째 만남)
그로부터 3년 후, 어느 겨울 날. 북풍이 매섭게 몰아치던 서울 종로 묘동의 대각사 앞길에서 몇 명의 무리를 이끌고 가시는 은빛 털모자의 성자를 다시 보았네. 반가워 그만 온 몸으로 아우성치던 내게 그 분은 조용히 말씀하셨네.
“어디선지 장소는 기억나지 않는데 분명 만났던 인연이로고 대각사 불광법회로 오너라.”
(그때 나는 대각사 바로 앞 삼화페인트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두 번째 만남)
어느 날 대각사 뜰. 성자를 시중들던 묘법성 이숙희 불자가 나에게 법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까지 내 법명인 반야심을 제대로 읽을 줄 몰라 나는 “반약심이야!”하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배를 잡고 깔깔거리며 소리 높여 웃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영문도 모른 채 얼굴 붉힌 나.
대각사 뒤꼍의 아주 자그마한 골방이 성자님의 거처였었네.
“큰스님, 얘가 자기의 법명이 반약심이래요”하고 또 웃음….
합장한 채 말없이 절을 받으시며, “반갑구먼.”
자애로우신 눈빛을 빙긋이 웃어주시던 모습. 그로부터 뭔가 모를 충만함과 환희심으로 넘치고 넘치던 나의 20대 청춘.
아, 이제는 그리움이어라. 나의 성자시여!
(세 번째 만났을 때의 광경이었다.)
대각사 시절의 불광법회는 씩씩한 활발발로 항상 원기 왕성했고 내 가슴에는 어느 때나 법희(法喜) 넘쳤다.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었다. 매주 목요일 저녁법회 후, 다시 법등모임을 하며 2차로 법회를 했는데, 일주일 만에 만난 법등가족들과 반가운 인사 몇 마디 나누다 보면 어느덧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기도 했고.
젊은 남녀가 많은 탓도 있었지만 어떻게든지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법하려고 뿜어대던 열기 속에 살던 때. 틈틈이 기도정진하고 법등 일하고 살림하고 직장 일하고 공부하는 등, 법우형제들은 모두가 25시간을 살았었다. 오직 크나큰 성자의 힘으로….
그런 중에서도 우리 법우들의 신심은 가을하늘처럼 푸르게 높아만 갔으니, 관광버스로 순례법회 갈 때면 차안이 온통 기도터였다. 차마다 목탁치는 거사가 기도를 인도했고 우리는 ‘마하반야바라밀’을 법열(法悅)로 염했다. 마치 마하반야바라밀다 염송 소리에 차가 밀려가는 듯 했으니.
어느 핸가, 나는 오대산 적멸보궁 철야기도를 잊지 못하네.
깜깜한 밤하늘 쏟아져 내리는 별, 별들. 그러나 너무나 거룩한 지상의 별, 우리 성자님. 아니 나의 성자님. 풀밭 가득 무릎 꿇은 법우들, 터져 나오는 함성, 나무마하반야바라밀다. 부처님, 하늘, 땅, 소리, 성자, 우리들, 그 모두가 오로지 하나였다. 태초의 모습이었을까.
이제 돌아보면 그때의 그 법열이, 오랜 세월 성자님과 법회를 멀리한 어리석은 나를 지켜주고 감싸주었다. 아, 그 밤의 모든 광경은 내 마음 속 평생의 밝은 등대이어라. 낙산사 홍련암. 홍련암의 그 바닷가 큰 바위 위에 앉아 광명행 최계순 보살과 목청껏 부르던 '관세음보살….' 하늘과 바다와 소리가 온통 한 몸이었네.
그 날의 잊지 못할 관세음보살님의 또 다른 모습, 그 푸르른 동해바다 한없이 우러렀어라. 우리 성자님 유난히 즐겨 비유하시던 그 푸른 바다. 거기 있었네. 넘실대는 파도, 용약하는 힘, 오 바다여! 성자이시여! 모두 함께 있었네.
바라밀다 합창단 시절. 재정이 풍족치 못해 나이 드신 불자님들이 늘 간식을 챙겨주었네. 작곡가임에도 무척 가난했던 서창업 선생은 그 흔한 피아노 한 대가 없었고, 아니, 있긴 있었는데 부인이 병고에 있을 때 치료비로 팔아 썼다고 했다지.
곡차를 무척 좋아하셨던 선생은 합창연습이 끝난 뒤 한 잔 자리를 마련하면 아이처럼 좋아했다. 어깨 축 쳐진 홀아비, 서선생이 가여웠네. 하도 가여워서 '반약심'이라고 나를 놀린 도반 묘법성과 모의하여 피아노 한 대를 권선했네. 성자님께서도 얼마를 보태주시며 "반야심이 큰 뜻을 내었구나"와,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아 주셨네.
또 언젠가 성자님께서 회사에서 무슨 일 하느냐?고 내게 물으셨다. 나는 그 분 앞에서는 항상 부끄럽고 까닭 모를 죄스러움에 그만 주눅이 들어 더욱 쪼그라지고 작아졌는데, 그 날은 말까지 더듬어 가며 대답한 즉,
"사람 다루는 일을 하고 있어요"
그 분께서 웃으시며 하신 말씀,
"저 말하는 것 좀 보게나…. 모두가 귀한 사람들인데 '다룬다'는 표현을 쓰면 어쩌나"하셨네. 아, 너무나 부끄러웠네.
평소에 매우 자애로우신 성자님, 한 번은 단호하고 차갑게 일성을 질렀다. 당시 젊은 작곡가인 환산거사가 합창단을 지휘할 때인데 법당 안이 대중들의 열기로 꽤나 더웠다. 지휘하던 환산이 마침내 한 곡 끝낸 뒤 윗옷을 벗었다. 그때 내쳐 "옷 입어!"하는 매서운 소리가 법당을 쩌렁 울렸다. 부끄러움과 민망함으로 얼굴을 붉힌 환산은 다시 옷을 입었고, 우리 합창단원들은 등골이 오싹했네. 그러나 성자님의 연용(蓮溶)의 존안은 여여하기만 했고 미소 머금은 평소의 모습대로….
부처님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시고, 법 앞에서는 더 없는 간절함으로, 계(戒) 앞에서는 너무나 치열하였고, 사람들 앞에서는 겸손하기만 하시던 우리 성자님, 나의 성자님 광덕큰스님!
일상생활에서는 신도들에게 자주 칭찬도 하셨고, 그러나 작은 잘못이라도 수행에 방해되는 일이라면 그 자리에서 바르게 이끌어 주신 참으로 능숙한 스승이셨던 성자님. 언제나 그러하셨네. 그렇게 여여하셨네.
또 어느 해, 초파일 봉축제등행렬의 집합장. 여의도에서 우리 성자님은 연단 아래 아스팔트 맨바닥에 앉아서 출발시간을 기다렸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와 함께, 조금도 예외의 특권을 갖지 않았던 분. 목적지 조계사까지 불광행진의 선봉에서 구세 보살단을 이끌었네. 장삼자락 출렁이며 만리동 고개를 넘으시던 스승, 너무나 성스러우셨던 나의 성자님, 그 분은 그렇게 우리들의 성자이셨네. 그 모습 진지하고 바람결처럼 표표하셨네. 지상에서 신비와 황홀을 느끼게 했던 유일한 인간이셨네.
그 분의 뒤를 초록 저고리 받쳐 입고 하얀 치맛자락 휘날리며 가슴이 터질 듯한 환희심에 등불 밝혀들고 구름 위를 걸었네. 허공이 찧어지나 내 목청이 찧어지나, 오직 '마하반야바라밀'만 가득했네. 우리는 울고 말았네. 나는 웃으면서 우는 비밀을 그때 알았지.
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내 심장의 박동은 그때의 것이었고 내 거친 호흡은 성자님을 종로까지 밀었던 그 힘일세. 오, 그날이여, 학 같으신 모습이여, 우리들의 진정한 성자이시어.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부르다가 죽을 이름, 나의 성자 광덕큰스님이시여.
대각사 뒤꼍의 조그만 골방에서 초라한 소반에 밥과 국과 두어 가지 찬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학처럼 공양하시던 그 모습. 난 그 모습을 몇 번이나 뵈었는데 그때마다 안타까워 내 가느다란 목젖이 따끔거렸네. 그리고 가끔 까닭 없이 눈물도 나왔네. 이런 기분을 김재영 님은 모체회귀의 떨림, 서로 부딪치며 한 덩어리가 되는 순수한 영혼들의 떨림이라 했겠다.
그때 20대인 내가, 50대인 성자님을 너무나 눈부심에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우아한 성스러움에 범접 못할 신령함만 더해갔네. 때로는 성자님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이 솟아나는 법열의 환희심에 웃음과 말씀이 뒤섞여 이루어진 모습은 참으로 천진이었고 무구였었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자님이 사바를 떠나시던 무렵, 또 그 이전으로 아주 오랫동안 나는 성자님을 뵙지 못했네. 하여 작아질 대로 작아지셨을 성자님은 나에게 아니 계시네. 이 좁고 어두운 나의 이기심이여.
나는 며칠 전, 회갑 때의 성자님 모습을 나의 작은 거실에 모셨네. 어느 때나 나의 생각과 언행을 감독 받기 위해서고 아침저녁 출입 때마다 꼬박꼬박 문안드리기 위해서라네.
아침마다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결의 찬 목소리로 이렇게 아뢰네.
"나의 스승이신 성자님, 다녀오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반야심으로 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더 잘 살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다."
불기 2549(2005)년 1월 23일
반야심 권오영 삼가 분향하고 무수 배 올림
첫댓글 큰스님의 자상하시고 자비하신 모습이 스며듭니다.
하나하나 섬세하신 모습,
이 글을 쓰신 분도 아주 섬세하신 분 같습니다.
조금도 예외의 특권을 누리지 않으셨다는 큰스님의 모습!
나의 삶을 돌아보고 더 겸손해 집니다.
천천히 꼭 읽어보시길 권하옵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자상하고 겸손하신 큰 스님의 성품이 전해오는 듯 합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이 글은 이상하게 더 코끝이 찡합니다. 글쓴 보살님을 따라 같이 다닌 느낌... 고맙습니다.
작은 일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고 지켜야할 계에는 철저하고 단호하셨다는 모습에서 제가 참구할 것을 얻습니다.
내생명부처님 무량공덕생명 마하반야바라밀 _()()()_
오늘 글에 보이신 큰스님 모습에 제가 찔끔 찔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더위에 웃옷을 벗은 지휘자에게 호통을 치신 일화인데, 이 부분에선 저도 아마 옷을 벗었을 것이므로 화들짝 놀라고, 또 서릿발 같은 큰스님의 젊은(?)날의 모습이 느껴지고, 한편으론 큰스님이 이 당시에는 아직 과거생의 분별실집이 남아있지 않았나, 하는 불경스런 생각입니다.
남의 잘못 보기로는 저야말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것입니다. 본인의 허물은 별로 못보고 못 고치고 늘 남의 허물은 티끌 하나라도 못 지나치던 제가, 행원과 화엄을 공부하면서 어느 날인가부터 그런 마음이 많이 사라졌어요. 모두가 존엄한 분들인데, 잠시 생각이 못 미치고 착각을 해서 그러셨을 뿐인데, 내가 뭘 그리 나서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지요. 그리고 저 역시 남이 보면 참지 못할 그런 잘못 착각을 얼마나 했겠습니까. 그러니 더욱 그럴 필요가 없지요. 그래서 이제는 그런 못남이 조금은 줄었습니다.
제가 만약 오늘 일화같은 일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는데, 저라면 웃옷 벗었다고 호통을 치진 않았을 듯합니다. 불광사 대법당은 지하에 있는데, 거기에 수백명이 노래 연습을 하니 얼마나 덥겠습니까. 그리고 아마 저 시절은 법당에 에어컨 설지가 안 되어 있었을 겁니다. 겨우 선풍기 몇 대 돌아갔을테니 다들 더웠겠죠. 여성분들이야 옷을 당연히 벗지는 못하셨을 거고, 지휘자는 남자니 그래도 웃옷 벗는 용기를 내었을 거에요. 물론 당연히 법당 안이라 벗으면서도 찜찜하셨겠지요. 불경스런 행동이니까요. 그렇지만 더위에 쉴새없이 팔을 휘두르며 지휘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정도는 이해해 드려도 되지 않을까해요
그리고 넌지시 "환산거사, 법당에서 옷을 벗었네? 부처님이 땀 냄새 맡으셨겠어?" 라고 슬쩍 말씀주셨으면, 지휘자가 다음부터은 아마 무슨 일이 있어도 경건한 법당에서 옷을 벗을 생각은 못했을 겁니다. 이런 부분을 보면, 우리 큰스님도 아직 모자란(?) 부분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 큰스님도, 역시 중생(?)이시거든요?
저는 법당에서 절을 오래 할때면, 으레 웃옷은 벗습니다. 땀이 많은 체질이라 도저히 견디지를 못해요. 젊었을 때 철 없던 시절에는 아에 런닌셔츠만 입고 절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부처님께 죄송하지만, 땀이 나서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거든요. 땀도 그냥 나오는 땀이 아니라 그냥 줄줄 흘러내리는 땀입니다. 그러다 젊은 어느 날,아마 쌍계사였나 싶은데, 조보다 조금 나이 많은 듯한 스님으로부터 호되게 야단 맞은 적도 있지요. 어디 법당에서 옷차림이 그러냐고요.
한가지 해명을 해야겠습니다. 제가 호통이나 야단을 치는 버릇이 사라진 건 아니고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다만 예전처럼 그렇게 쉽게 그러지는 않는다고 할지요. 그리고 아주 가끔, 정말 아주 가끔, 제가 야단치는 업을 짓기는 합니다. 업인 줄 알고 짓지요. 그건 그러지 않으면 상대가 알지를 못하시기에 그래요. 그래서 할수없이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야단을 칠 때, 당사자는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이세요. 하나는 즉각 참회하시는 분, 또 하나는 그냥 카페를 떠나는 분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야단 친 분, 야단 맞은 분이 모두 윈-윈하는 축복이 되지만, 후자의 경우는 모두가 동타지옥하는 재앙이 됩지요. 야단을 축복으로 바꾸지 못하고, 공부의 더 큰 계기로 만들지 못하고, 그저 그렇고 그런 범부의 자기 조절 장애로 만들고 마는 것이지요. 모두에게 재앙의 화살을 만들고 마는 겁니다.
누구에게든 야단을 맞을 때 꼭 명심- 거기서 내 잘못을 보고 교훈을 얻으면 모두가 더 나은 성장의 계기가 되는 축복이 됩니다.그러나 거기에 반발하고 더구나 나를 돌아볼 줄 모르면 모두가 동타지옥하게 되요. 나를 위해 거친 모습을 보이신 불보살의 그 은혜를 은혜로 만들지 못하고 고작 아수라들의 전쟁터로 만들고 마는 겁니다. 축복이 될지 재앙이 될지는, 오로지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카페에도 제가 야단을 친 분들이 몇 분 계세요. 그런데 참 기이하게도 그 중 절반은 금방 당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시고 반성하시고 더 큰 공부를 하시고, 나머지 절반은 대부분 그날로(?) 바로 카페를 떠나셨어요. 참 안타깝지요.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원고를 청탁받은 사람의 입장은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광덕 큰스님의 행장에 감히 글을 싣는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울만큼의 영광이기도 하거니와 심한 부담감도 있을것입니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찬탄과 공경의 글 외에는 실을 수가 없겠지요.
그리고 큰스님의 인품이야 절로 고개 숙여지게 만드는 것이었으니 어쩌면 그런 반응이 당연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과유불급이라 지나친 미화는 스승의 진정한 공덕에 그림자를 드리워 오히려 보지 못하게 하는 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금빛 찬란한 불사보다는 소박하고 단아한 불사나 일상생활에서 마하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불사가 더 기꺼운 것이라고 한다면 반야심 보살님의 성자 찬가는 조금 부담스러운 면도 있네요. 큰스님께서 살아 계셨더라도 이런 글을 좋아하셨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보다는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내가 이러저러한 삶을 살고 있고 이것이 스승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글이었다면 과거 큰스님과의 인연담이 얼마나 더 빛을 발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 역시 다른 사람 허물을 잘 보고 교만한 성격인지라 스스로는 그렇게 못하면서 다른 분들 좋은 글에 이렇게 딴지를 걸고 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_()()()_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으로서 아이를 무한한 자비로 봐 넘길것인가 아니면 지금 따끔히 가르쳐야 하는가 가 학년초마다 더 고민이 됩니다. 보현행원을 공부하고 무수히 많은 섬길 귀한분으로 여기게 되어 쉽게 화를 내거나 그 일이 인정되지 않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지만 혹 나에게 길들여진 아이들이 학년이 올라가 다른 선생님을 만나 더 힘들어하거나 ( 곧 또 적응를 하는 능력을 보여주지만 ) 아이로 인한 고통을 전 담임이 나에게 호소할 때 내 잘못인가 싶어 고민이 됩니다.
흔들리지 않고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생명에 집중하여 참마음으로 자비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_()_
반야심 보살님의 글은 마음을 찬란히 표현하는 그 능력때문이지 않을까요. 미사여구가 찬란한 제스타일과 비슷하여 좀 부끄러웠습니다. 어쩌면 넘치는 공경을 표현하다보니 그렇게 표현되지 않았을까 .. 저는 시봉일기를 읽을 때 광덕큰스님일화가 나오면 찌릿찌릿해질 때가 있거든요. 온몸의 전율 ... 워낙이 공감능력이 뛰어난? 터라 반야심보살님또한 그러지 않으셨을까 생각해봅니다. 저를 위한 변명인가싶기도 합니다만. 겉모습에 휘둘려 본모습을 보지 못하는 우를 글에서도 그러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아무 할 말이 없어져 댓글조차 달 수가 없어지는 때가 있더군요.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
마하반야바라밀....._()_
지나친 미화는 과유불급 이라는 말씀에 공감을 느끼며 ‥
좋은일이든 나쁜일이든 지나침은 언제든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크기에저는 카스에 지나
침을 경계한다는 문구로 제 마음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보현선생님이 야단치시면 무서울것 같아요 ^^;
여러분들,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