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학교마다 쉬는 시간이면 떠들썩하기 마련이다. 여기 성진 고등학교 2학년 5반 교실도 그 한 축에 속한다. 이 좁은 교실 구석구석을 달려 다니는 아이들, 책상은 뒤죽박죽 어질어져 있고, 칠판에는 온갖 낙서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이 씨발 새끼 거기 안 설래!"
"잡으면 내가 죽을 때까지 맞아줄게!"
이런 와중에도 교실 앞쪽에는 공부에 열중하는 아이들이 몇몇 보였다. 그 중 민들레도 오른 손에 볼펜을 쥐고 열심히 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뿐, 머리 속은 병원에 있을 상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어제 못 간다는 문자메시지를 못 보고 날을 꼬박 샌 상제 걱정이었다.
"바보 같은 놈이야, 정말. 하는 짓이 정말 누구랑 꼭 빼 닮았어. 그래도 예쁜 짓만 골라하니까 내 서방인 건 확실해. 훗. 이제 수능도 며칠 안 남았는데, 어딜 놀러간다고 그래, 상제는…. 안 갈 수도 없고…."
두 눈은 책상 앞에 놓여진 문제집에 붙어있고, 손에 잡힌 볼펜은 마음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야, 민들레! 민들레!"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머리 속에 생각은 새가 되어 날아갔다. 그녀 옆에는 두 손을 마이 주머니에 집어넣고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지혜가 서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불량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새침때기 같았던 모습도 이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곱게 땋아 내린 머리카락이 그녀의 옅은 눈썹과 잘 어우러져 있었다.
갑자기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볼펜을 땅바닥에 떨어트린 들레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지혜를 쳐다봤다.
"어, 지혜야. 왜?"
"왜냐고? 너 이번 주 토요일 날 제주도 같이 갈 거지? 가야돼. 꼭 가야돼! 상제가 아직은 널 좋아할지 몰라도 이번에 확실히 상제 마음 내가 뺏어 갈 거야. 네 두 눈으로 꼭 지켜봐. 흥!"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지혜는 휑하니 뒤돌아 교실을 빠져나갔다. 얼굴이 굳어진 들레였다. 지혜가 자신에게 방금 무슨 소리를 했는지 다시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들레도 지혜가 상제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온 교내에 이미 파다하게 퍼진 사실이었다. 그녀가 상제의 약혼 상대라는 것까지 들레는 알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까지 다 알고 있는 들레였지만, 왠지 화가 나지 않았다. 늘 상제의 얼굴을 보면 믿음직스러웠고, 꼭 그의 외모에서 박종탁이 떠오르곤 하였다. 종탁과 상제는 완전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들레는 상제가 꼭 종탁처럼 보였다. 그래서 상제에게 마음이 더욱 끌렸는지도 모른다.
아직 상제가 지혜에 대한 말을 들레에게 해주지 않았다. 물어봐야지, 물어봐야지 하면서도 상제 얼굴만 보면 어느 샌가 깊은 바다에 빠져버리는 들레였다.
상제가 있을 때만해도 친절하게 대해주던 지혜는 예전의 지혜가 아니었다. 들레 얼굴만 보면 코방귀를 끼고 무시한 채 돌아서기가 일쑤였다.
"들레야! 이 지지바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노?"
"어? 아, 은숙아... 아무 것도 아니야."
"지지배…. 이번 주에 제주도 꼭 같이 가기다! 안 간다고 하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경비는 지혜가 모두 대준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그냥 편히 몸만 가면 돼. 꺄∼ 제주도가 나를 부르는 구나! 저번에 제주도로 수학여행 갔을 때, 재미없는 데만 돌아다녀서 버스에서 잠만 잤는데. 너도 알지? 그때 너 배신 때리고 혼자 나갔잖아. 나쁜 뇬."
"아주 좋아죽네, 좋아죽어, 임은숙. 내가 모를 줄 알아? 나랑 같이 간다는 핑계를 명분으로 지 남편이랑만 놀라고 하면서!"
"그, 그럼 너는! 너도 천상제 있잖아. 나보다 지가 더 좋으면서 내숭은..."
성제의 웃는 얼굴이 들레 머리 속에 떠올랐다. 은숙 말대로 상제와 같이 하루를 보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 들레였다.
"야, 담탱이 새끼 온다!"
그 소리에 교실 안으로 다시 한 번 큰 파도가 몰아 닥쳤다. 금세 뒤죽박죽 되어 있었던 책상들은 각자 제자리를 맞춰 질서정연하게 줄이 세워졌고, 칠판에 온갖 낙서들은 두 명의 주번에 의하여 몇 초만에 깨끗이 지워졌다.
놀러갈 생각에 설레던 마음도 잠시, 들레 머리 속은 다시 수능이라는 시험아래 심장이 뜀박질을 해댔다.
"요즘 따라 아빠 얼굴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들레야, 오늘 하루도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공부하자!"
이런 젠장 맞을! 오늘은 그렇게 가슴 설레던 제주도로 놀러 가는 날인데, 이게 무슨 폭풍우란 말인가. 정말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어떻게 도망갈 수도 없고 참말로 돌아가 버리시겠네.
"저 토요일 날 친구들과 함께 머리도 풀 겸 제주도로 놀러가기로 했습니다. 그 중에 지혜도 있어요."
"제주도?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제주도를 가니? 그리고 거기에는... 안 돼. 절대 가면 안 돼!"
죽을 표정을 짓고 반대하던 어머니를 생각하니, 아직도 머리가 다 아프다. 그래도 다행히 제주도에 갈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이야, 쥑이는데!"
이곳이 말로만 듣던 인천공항이다. 좌우로 가득 찬 사람들의 모습은 시내에 있는 그 많은 사람들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함을 느끼게 해준다. 외국인도 참 많다.
인천공항이라 하면 위 아래로 뻥 뚫린 투명공간이 진짜 죽이게 멋있다. 아마 처음 인천공항이 문 열었을 때, 치마 입은 처녀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지? 침이 질질 흐른다. 어디 치마 입은 여자 없나, 좌우로 눈깔을 돌려보지만, 이게 웬걸. 아쉽게도 그러한 여인들은 내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런 망할.
"도련님, 친구 분들이 혹시 저 분들 아닙니까?"
"이런, 쓰발! 아호, 졸라 졸라 짱나."
어떻게 밖으로는 내뱉을 수 없고 속으로만 썩힐 뿐이다. 지금 내 주위로 사람들이 지나가지 않는 이유가 무어라 묻는다면, 난 그 자리에서 아마 꽁꽁 얼어붙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래도 괜찮았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도착한 할아범이 문제였다. 제주도는 죽어도 가면 안 된다니, 어쩐다니 소리지르는데, 식은땀을 흘려가며 그 자리에 서있었던 내가 정말 장하다. 가까스로 할아범을 설득해 간신히 제주도는 갈 수 있게 됐는데, 이게 무어란 말인가.
기사아저씨부터 해서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 검은 그림자들. 그렇다. 이 아저씨들은 특별히 나 하나를 지키기 위해 출장을 가는 조폭들이다. 이 놈들이 나를 따라가게 된 이유는 한마디로 제주도는 위험하다, 였다. 그곳은 아직 남조선 파가 터를 잡지 않아 잘못 걸리면 그대로 뼈를 묻고 만다고 한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특히 나는 말이다. 벌써 제주도에 벌써 이 정보가 들어갔다느니, 어쨌다느니, 나랑 상관없는 일이지.
"친구들이 무서워하니까 옆으로 좀 떨어져서 가 주세요."
내 말에 옆으로 싹 피하는 모습이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들고 있는 짐이라 해봤자, 옆에 메는 딸랑 가방 하나뿐이다.
방긋 웃으며 친구들이 서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어이, 얘들아!"
내 모습에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의 얼굴이 점차 굳어진다.
덜덜 떠는 증상까지 보인다.
"뒤에 있는 사람들은 상관하지 말고! 다 왔냐? 오리, 영만, 옥동자, 뽕오. 음, 다 왔네."
"상제야∼"
갑자기 옆에 찰싹 달라붙는 지혜. 얘 뭐냐.
"나 너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이제는 다 나은 거야? 어디 보자... 다 나았네! 이렇게 멋있는 걸 보니까."
"닭살 돋는다. 좀 떨어져라."
모두 다 멋있고 예쁘게 차려입고 왔다. 아니, 말만 그렇다는 거지. 저 새끼들은 하나 같이 양아치 스타일에 가스나들은 이 추운 겨울날 패션 쇼하러 왔냐! 그래도 인천공항에 대해서 알건 다 아는지, 잘 입고 다니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가스나들은 보이지 않는다.
"어? 들레는? 지혜야, 들레 아직 안 왔어? 야, 임은숙, 들레는 왜 같이 안 있냐?"
갈색 빵 모자를 뒤집어쓴 은숙이의 얼굴에도 걱정이 하나 가득 묻어있다.
"온다고 했어. 지금쯤 올 때가 됐는데, 왜 아직 안 와, 얘는. 핸드폰도 안 받고. 이러다가 비행기 놓치면…. 이 놈의 지지배 또 길 잃어버린 거 아냐?"
뭔가 허전하다고 했는데, 역시 들레 문제였어. 이 미친 새끼야, 왔으면 먼저 들레가 있나 없나 부터 확인했어야지! 망할, 진짜 길 잃어버렸나?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가서 들레 찾아올게."
"나, 나도 같이 가!"
바로 뒤돌아 들레를 찾기 위해 발을 때려던 찰나, 저 앞쪽에서 익숙한 모습 하나가 보인다. 들레였다. 긴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무릎 위까지 올라가 있는 청치마를 입고 달려오는 여인. 역시 내 예쁜 애인 들레였다.
"치, 치마!"
바닥을 내려다보니 위를 쳐다보고 있는 남정네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이런 씨발. 난 다급히 들레가 오고 있는 방향으로 달려간다.
"상제야!"
참 웃을 만도 하겠다. 밑에선 늑대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얘는 생각이 있는 앤지 없는 앤지 도통 모르겠다. 평소에는 침착하기만 한데, 이런 면에서는 잘 모르는 애가 바로 들레다.
나를 향해 활기찬 미소를 내보이는 들레를 난 냅다 안아 올린다.
"왜, 왜 그래!"
"내가 증말 너 때문에 미친다, 미쳐! 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런 옷 입고 왔어?"
"이, 인천공항..."
"바닥을 내려다봐."
그제야 얼굴이 굳어지는 들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아래층으로 내려가 있는 남자들은 싹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뭐 내가 참아야지.
"이젠 걱정 마. 내가 비행기 탈 때까지 꼭 안고 있을 테니까. 가방도 이리 줘."
주기도 전에 빼앗아 내 한쪽 어깨에 멘다.
"야, 들레 왔으니까 이제 출발하자. 비행기 먼저 날아가겠다. 얼른 얼른 움직여!"
들레를 안고 있는 내 모습에 한 동안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 있던 애들이 내 큰 소리에 이내 정신을 차리며 바삐 움직인다. 그 한편에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눈빛을 째리고 있는 지혜가 보인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무섭다는데, 뭐 내가 언제 이런 거 따졌냐.
친구들은 먼저 앞장서서 걸어가고, 내 발걸음을 뒤로 조금 많은 조직원들이 따른다.
"에효, 이걸 진짜 어떡한다지."
내게 안겨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웃고 있는 들레를 보니, 그나마 걱정이 덜 된다.
"이야, 바닷물 죽인다! 지금이 여름이면 얼마나 좋냐."
"김영민, 너 죽는다! 바로 옆에 내가 있는데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미, 미안, 은숙아. 흐흐."
양쪽 어깨에 기대 잠들어있는 두 여인. 많이 피곤했었던 모양이다. 비행기 안에서는 그렇게 활개를 치고 다니더니, 휴. 창문 밖으로 파란 바닷물이 보인다. 역시 제주도에서 보는 바다라서 그런지, 다른 곳과는 확연히 틀리다. 하얗게 안개 낀 것 같으면서도 속 안이 훤히 다 비치는, 진한 파란색이 아닌, 연한 하늘색이다. 예전에는 미처 몰았었던 사실이다. 그때 아마 잠만 잤지.
오밀조밀 바다 근처 땅에 모여있는 바위들과 날아다니는 비둘기의 모습이 정말 저 바다와 잘 매치가 되어 내가 다 아름답다고 느낄 정도이다.
관광 버스 두 대가 지금 우리를 나르고 있다. 한 대는 11명인 우리를, 또 한 대는 몇 명인지 세 보지 않은 조직원들이. 그나마 같은 버스를 타지 않아 다행이다. 만약 그랬다가는 이렇게 마음놓고 놀 수도 없겠지.
맨 뒷자리에는 들레와 지혜가 내 양 옆자리를 차지하고, 양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푹 잠들어있다. 정말 이것도 미칠 노릇이다. 처음에는 이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들레하고 둘만 자리에 앉아서 저 푸른 바다를 보며 담소를 나눌 생각이었는데, 처음부터 이렇게 일이 꼬이는 것을 보니 아마 내가 생각했었던 일들을 이루기에는 적지 않은 방해가 있지 않을까.
들레는 정말 아름답다. 아마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해도 될 것이다. 한 손으로 들레의 머리카락을 쓸어 내린다.
"너 왜 이렇게 사랑스럽니?"
이마에 쪽, 키스를 한다.
바다가 한 눈에 다 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지혜네 별장은 모든 애들이 감탄을 금하지 못할 정도로 멋있었다.
울타리가 쳐진 곳에 가만히 서서 저 넓은 바다를 보고 있으면,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서 날 날려버릴 것만 같다. 나를 따라온 조직원들은 다섯 명을 여기 별장에 남겨두고 바로 아래 모텔로 갔다.
"너무 아름답다…."
"풋. 너만큼 예쁠까? 저 바다가 부러워? 내가 가져다줄까? 말만 해. 내가 당장 뛰어들어가서 네 앞에 무릎 꿇게 해줄게."
"바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바다 님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분이셔. 저∼기, 바다 속 깊은 곳에는 뭐가 있을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하늘이 아니라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게 아닐까?"
들레의 두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또 내 생각을 하나보다. 네 옆에 있잖아, 이 바보야. 어떻게 말해줄 수도 없고. 그래도 행복하잖아?
들레를 꼭 안아준다.
"야, 천상제! 바다 그만 구경하고 빨리 밥 먹으로 안 들어올래!"
지혜는 정말 심술쟁이다. 저녁이 되고 난 후부터는 아주 내게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려고 하지를 않는다. 밥 먹을 때도 옆에 꼭 달라붙어 마치 지가 내 마누라인 마냥 반찬을 집어주고 밥을 먹여주고, 들레는 가만히 있는데, 왜 지가 난리인지.
어딜 가던 꼭 쫄래쫄래 따라다녀 엄청 귀찮게 만든다. 그 덕에 들레와 함께 오붓한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오려고 했으니, 할 말 다한 것이다.
밤이 되자 마치 꼭 와야할 손님인 마냥 술이 고개를 내밀었다. 다 친한 사이기에 술자리는 그 어느 때보다 흥겨웠다. 옆에 지혜가 달라 붙어있는 것만 빼면은 말이다.
지금은 또 나 혼자 남아 술을 먹는다. 모두 뻗어버려 일어나려고 하질 않는다. 슬금슬금 지들 짝하고 사라진 애들 빼고는 솔로들만이 바닥에 내버려져 있다.
바로 옆에는 내 무릎을 베고 잠들어있는 지혜가 있다. 들레는 자꾸만 지혜가 하는 행동이 눈에 거슬렸는지, 다행이 술 한잔 먹지 않고 먼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기 이 여자 때문에 쫓아갈 수도 없었다.
TV에서 나오는 노래 소리만 빼면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하다.
마지막 한잔을 입에 들이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쿵, 지혜 머리가 땅바닥에 부딪쳤지만, 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래도 잘만 자지 않는가.
첫댓글 어,...ㅠㅠ 들레한테 상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