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2월 5일 목요일
[(자)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의 시대가 오면 힘없는 이들이 오히려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간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26,1-6
1 그날 유다 땅에서는 이러한 노래가 불리리라.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2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3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4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5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6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1.24-2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기준은 명확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예수님 말씀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믿음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줍니다. 그렇다면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7,22-23). 이 말씀을 살펴보면, 하느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과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가 사라진 봉사,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였지만 정작 함께하는 사람들과 이루는 친목만이 전부인 모임들, 자기 뜻을 이루고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만족을 채우려는 많은 활동,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을 잃어버린 아주 분주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먼저 기도하십시오. 성체 앞에 머물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마련하십시오. 기도와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알려 주는 힘을 반드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봉사와 활동을 하십시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7,24)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활동과 봉사가 여러분을 하느님 나라로 이끄는 힘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그간 주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은 얼마나 큰 것인지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즘 저는 세상 부족하지만 교우들에게 성숙하고 균형 잡힌 성모 신심을 전하기 위해 나름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 가톨릭교회 교우들의 깊고 강한 성모 신심 앞에 놀랄 때도 많습니다.
성모님에 대한 사랑이 각별합니다. 전 세계 어떤 나라 신자들보다도 묵주기도를 많이 바칩니다. 레지오 마리에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각 본당에는 성모님을 총사령관으로 모신 레지오 단원들이 때로 기도 요원으로, 때로 봉사 부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모 신심은 조금 성찰과 점검을 필요로 한다고 여겨집니다. 우리가 지니는 성모 신심이 때로 지나치게 개인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성모님을 바라볼 때, 신앙의 모델이나 우리 신앙 여정의 동반자로 보기보다 우리의 끝도 없는 바람을 들어주시는 기적의 요술 방망이로 여깁니다. 30년 전 지니고 있던 성모 신심이 조금도 성장하지 않고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성숙하고 균형잡힌 성모 신심을 지니기 위해서는 복음서 안에 등장하는 마리아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의 신앙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으며, 마침내 신앙인으로서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하셨습니다.
우리는 카나 혼인 잔치의 어머니로서 당신 자녀들의 결핍과 고통을 절대로 나 몰라라 하지 않고 팔을 걷어붙이는 어머니, 이웃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어머니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성금요일 골고타 언덕 십자가 아래서 끝까지 혼절하지 않고, 아들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에 영신적으로 동참한 어머니, 자신에게 다가온 극심한 고통을 거부하지 않고, 그 고통에 담긴 참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자 노력했던 어머니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구세주 하느님의 잉태라는 자신에게 다가온 너무나 놀라운 초대앞에, 다른 부르심 받은 사람들처럼 거절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기꺼이 예라고 응답한 나자렛의 마리아를 바라봐야 합니다.
성숙하고 균형 잡힌 성모 신심의 소유자는 더이상 성모님께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라며 졸라대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앙 여정에 언제나 동반해주신 성모님의 도움에 깊이 감사하며, 이제는 내가 어머니께 무엇을 드릴까? 고민하는 그런 사람이 올바른 성모 신심 소유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맥락의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주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남은 생애 동안은 더이상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라고 졸라대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 대신 내게 베푸신 그분의 크신 업적과 자비에 수시로 감사하면서,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매일 그분께 한 가지씩 선물을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믿음만으로?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실천하지 않으면 믿음도 무너진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제 꿈을 꾸었습니다. 축구선수 메시와 함께 산속 어딘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즐거운 상태였습니다. 깊은 계곡물을 발견했고 각자 수영을 즐겼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들어갈 수 없는 깊은 물이었습니다. 두려움 없이 반대쪽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는 방향 쪽에서 뱀 두어 마리가 헤엄쳐서 오고 있었습니다. 피할 수는 없는 상황이고 해서 ‘그냥 지나쳐 가줘라!’하는 마음으로 그 옆으로 비켜섰습니다. 그러나 그 뱀들은 여지없이 저를 공격했습니다. 팔로 막아 팔을 두 군데 물렸습니다. ‘빨리 독을 빼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잠에서 깼습니다.
사제가 그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꿈을 꾸면 꿈 해석을 찾아봅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어서, 꿈은 나의 무의식의 표현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뱀에 손을 물리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고 무언가를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새해 첫날에는 저희가 주교좌 성당이라 주교님들과 교구청, 대리구청에서 사목하는 사제들이 모두 오니 좀 부담되는 날이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긴장되거나 하지는 않는데 ‘그것 때문인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하다 보니 깊은 계곡물도, 지나가는 뱀에 물리는 것도 예전보다는 덜 무서워하고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뱀에 물렸을 때는 두렵기도 하였지만, 심한 두려움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아직 믿음이 많지 않고, 앞으로는 뱀에 물려도 죽지 않는 존재라는 믿음,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함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어떻게 키워갈까요? 성경 읽고 성체 영하면 믿음이 증가할까요?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그 믿음으로 살아내면서 그 믿음이 확고해지고 증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에도 계속 저의 서품성구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라는 말을 속으로 되뇝니다. 예수님의 따듯한 심장을 갖는 것이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성체를 영해서 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었다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실천에서 이 믿음이 증거되지 않으면 내가 완전히 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계속 실천으로 믿음을 확고하게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신교에서 주장하듯 믿음만으로 구원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이 “주님, 주님!”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신앙입니다. 믿음과 실천은 손수레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하나가 없으면 바퀴 빠진 손수레처럼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의 사울 왕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지만, 그의 불순종은 그의 기초가 취약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의 위기감이 치솟자 자신이 제사를 지냈습니다. 주님을 부르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는 ‘불순종의 행위’였습니다. 믿음은 있었으나 실천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왕직을 박탈당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위험이 닥치면 무너집니다. 믿음만을 강조하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에 다른 성당의 어떤 신자분이 오셔서 면담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모르는 분이라 없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교구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그렇게 유명할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분은 미사 때 맨 앞에 앉고 기도도 오래 합니다. 그러나 행동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 성당에서는 어떤 봉사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내가 그분에게 아무 할 말도 없다는 것을 거짓말로 여기고는 그럼 자신도 할 얘기가 없다며 나가버리셨습니다. 본인이 먼저 면담하자고 해놓고.
그분은 적어도 아주 조금은 자신이 유명한 인물이라는 믿음이 저를 통해 줄어들게 되었을 것입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그렇게 조금씩 허물어져 갑니다.
반면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나 코리텐 붐 여사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은 죽기 싫어하는 사람을 대신하여 자신이 죽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보통 인간은 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그 행위를 통해 콜베 신부님은 당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용서하기 싫은 원수를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용서할 때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확고해집니다.
행동이 예수님처럼 되지 않으면 베드로는 결코 예수님처럼 완전하게 물 위를 걷지 못할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겠어!’라고 의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며 당신처럼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청할 수 있었을까요? 행동이 그리스도를 닮아있다고 스스로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청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도 죽게 됩니다.
믿음은 집과 같습니다. 행동은 집의 기초입니다. 행동이 없으면 믿음의 집은 모래 위에 지은 것처럼 고난이 닥쳐오면 허물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뜻에 대한 실천 의지가 확고하면 비로소 허물어지지 않는 믿음의 집이 지어질 수 있습니다. 비록 믿음이 작아도 성장시키고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행동이 기초고 믿음이 집임을 잊지 맙시다. 하느님은 믿음 안에 사시지만, 행동에 기반을 두지 않은 믿음의 집에는, 그 집이 얼마나 화려하건 간에 머무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실 때 몸은 믿음의 집이고 물은 그에 따른 행위입니다. 행위가 없는 자의 믿음은 결국 익사로 끝나고 맙니다. 이 말씀을 명심합시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금 지구에서 살고 있는 인류를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릅니다. 30,000년 전까지 지구에는 현생인류 이외에 네안데르탈인이 함께 살았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어느 순간 지구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와 비슷한 지능을 가졌습니다. 체격은 현생인류보다 더 강인했습니다. 네안데르탈인도 도구 지능, 자연 지능, 언어 지능, 사회적 지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은 이런 지능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사회적 지능이 현생인류보다 약했습니다. 사회적 지능은 관계를 맺고, 조직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회적 지능은 ‘종교’를 만들었고, 종교는 고통과 재난을 이겨내는 힘이 있었습니다. 종교는 조직을 통합하고, 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신념이 되었습니다. 사회적 지능은 목적을 위해서 남을 속이기도 하고, 선물을 주기도 하고, 무릎을 꿇기도 합니다. 우리말로는 ‘눈치’가 생긴다고 합니다. 네안데르탈인은 구슬을 만들었지만, 구슬을 이용해서 목걸이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통합할 수 있는 지능이 부족했던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와의 경쟁에서 뒤처졌고, 빙하기와 기후변화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2000년이 넘도록 계속 이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는 ‘성사(聖事)’입니다. 성사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시작되고, 성사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자라납니다. 성사는 무뎌진 신앙을 하느님께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을 모시는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도록 말씀의 식탁으로 이끌어 줍니다. 고백성사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성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들 또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성사입니다. 두 번째는 ‘애덕(愛德)’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너희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걸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치료해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다. 너희들 중에 가장 굶주리고, 병들고, 목마른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교회의 역사는 제도와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진정한 교회의 역사는 ‘애덕’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나눔, 가난한 이와 더불어 사는 모습을 공동체 안에서 실현하였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고 과부와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 교육, 복지는 교회의 이런 나눔이 발전하여 병원, 학교, 사회복지시설로 성장한 것입니다. 산업의 발전과 대량 생산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자본주의 시대로 들어오면서 어린아이들이 노동의 현장에서 학대당하였고, 많은 노동자가 일한 만큼 급여를 받지 못했습니다. 고용주의 편의에 따라서 부당하게 해고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세상은 발전하고 좋아졌는데 그 혜택이 균등하게 돌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교황님들은 ‘노동헌장, 새로운 사태, 지상의 평화’와 같은 회칙을 통해서 예수님의 삶을 따라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지금의 근로기준법과 노동자들을 위한 배려는 교회의 이런 주장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내 가족, 내 이웃, 우리 교회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은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잊어버리고 나의 영혼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생각도 예수님께서 원하신 방법이 아닙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하고, 세상의 어두운 곳, 소외된 곳, 가난한 이, 병든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영성체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현세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네.”
오늘의 성인
성 사바 (Sabas)
신분 : 수도원장(아빠스)
활동지역 : 팔레스티나(Palestina)
활동연도 : 439-532년
같은이름 : 사바스
체사레아의 카파도치아 교외 무탈라스카에서 어느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성사바는 부친이 알렉산드리아로 전근됨에 따라 삼촌의 도움으로 자랐다.
숙모의 학대를 이기지 못한 그는 불과 여덟살의 나이로 다른 삼촌에게 도망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삼촌들이 집안 재산에 대한 소송 문제로 괴롭히자, 이번에는 고향에서 가까운 어느 수도원으로 피신하였다.
456년,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 테옥티스토의 지도를 받으며 수도생활을 하다가, 30세 때에 성 에우띠미오의 제자가 되어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스승이신 성 에우띠미오가 운명하시자 그는 예리고와 가까운 사막에서 혼자서 4년 동안 지냈는데, 이때부터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함으로, 483년에는 일종의 수도공동체인 "라우라"를 형성하였다.
150명이나 되는 제자들의 요구 때문에 그는 하는 수 없이 예루살렘의 총주교로부터 사제가 되었는데, 에집트와 아르메니아에서 제자들이 계속 몰려 들었기 때문에 또 다른 수도원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팔레스티나 지방의 모든 은수자와 독수자 그리고 회수자들의 지도자로 임명되었으나, 그 권한을 행사한 사실은 없다고 한다.
그는 병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만 음식물을 섭취했을 따름이다.
또한 사막의 은수자였지만 정통 교리 수호를 위하여 헌신했는데, 오리게네스파와 그리스도 단성론을 특히 배격하였다.
531년, 91세의 고령인 그는 콘스탄티노블로 가서 사마리아인들의 봉기에서 주민들을 보호하려는 운동을 전개할 만큼 현실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가진 은수자였다.
이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자신의 후계자를 선임한 뒤에 운명하였다.
그는 초대 수도자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며, 동방 수도회의 창설자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부산교구홈에서)
팔레스티나에서 탄생. 깊은 산속에서 기도생활을 결심했다.
밧줄과 사다리로만 통할 수 있는 그런 깊은 동굴에서 은수자의 삶을 살았다.
수많은 은수자들이 몰려 왔다. 성인은 수행자를 위한 여러 공동체를 창설했고 1년에 몇번 모였다.
그러나 은수자의 삶은 어려웠다.
이단자와 맞서 싸워야 했고 여러번 아랍야만족과 싸웠고 수없이 고난을 당했다.
성 바소 (Bassus)
활동년도 : +250년
신분 : 주교, 순교자
지역 : 니스(Nice)
같은 이름 : 바수스, 바쏘, 바쑤스
프랑스 니스의 주교인 성 바수스(또는 바소)는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황제에 의해 시작된 박해 중에 널빤지에 큰 금속 대못에 박혀 순교하였다.
성 달마시오 (Dalmatius)
활동년도 : +304년
신분 : 주교, 순교자
지역 : 파비아(Pavia)
같은 이름 : 달마시우스, 달마씨오, 달마씨우스, 달마티오, 달마티우스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몬차(Monza)의 이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한 성 달마티우스(또는 달마시오)는 어른이 되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그는 북부 이탈리아와 프랑스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303년에 파비아의 주교가 된 그는 다음 해 막시미아누스 헤르쿨레우스 황제의 박해로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