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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 여행4 - 평화스럽고 조용한 스이젠지 공원을 한가로이 거닐다!
구마모토는 이번이 세번째 여행 인데...... 시간이 없어 구마모토성 만 보고 갑니다만, 이 도시는
스이젠지 공원 이 더 좋다는 사람도 많으니 예전에 두번이나 방문했던 기억을 되살려 봅니다.
그때 구마마모토 雄本 역에 도착해서 코인로까 에 배낭을 보관한 다음 역 뒤편 정류장
에서 2번 트램 ( 電車 ) 을 타는데..... 트램(전차) 은 버스나 다를바 없네요?
6정거장을 가서 150엔 정액요금을 내고 구마모토조 마에 (熊本城前) 역에서 내립니다.
도로를 건너 조선의 울산사람들 을 동원해 축성한 우물이 120개 나 된다는
서남전쟁때 난공불락이 입증된 구마모토성 에 올라가서 구경을 합니다.
구마모토성 을 구경하고 내려와 전철 구마모토죠마에 熊本城前(웅본성전)
역으로 가서는 전철 2호선 켄쿤(健軍 건군) 행 전차에 탑승하여
9 정거장만에..... 스이젠지 코엔 水前寺 公園(수전사공원) 역에서 내립니다.
행인에게 물어서는 왼쪽으로 길을 건너 모퉁이를 돌아가서 세상 어느 마을에도 반드시
있다는 중국집 을 지나니.... 신사의 도리이 가 나타나 일순간 어리둥절 합니다.
공원에 웬 도리이? 나중에 보니 공원 안에 이즈미 라는 신사 가 있기 때문이네요!
스이젠지 공원 (水前寺 公園) 은 일명 조쥬엔(成趣園 성취원) 이라는데 번주의 정원 입니다!
1632년 가토 가문이 2대 에 들어서 에도 도쿠가와 막부의 미움 을 사서 망하고 고쿠라 번주
로 있다가 전봉되어 온 새 번주 호소카와 타다요시 가 3대 80년에 걸쳐서 만들었는데....
모모야마 양식의 우아한 회유식 정원 이라고 합니다! 막부는 요지인 15만석 고쿠라성은
오가사와라 다다자네에게 주니 후다이 다이묘로 메이지 유신까지 10대가 이어졌다고 합니다!
히고국 구마모토번 번주 호소카와씨 의 정원 이었던 스이젠지 공원 은 정원석과
소나무의 빼어난 조화 가 훌륭하며, 8월 13~14일에 인근 옥명군 국수정
(玉名郡 菊水町) 고분에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한자(漢字) 가 쓰여진
검 이 출토된 것을 기념하여.... “에다후나야마 고분축제” 도 매년 열린다고 하네요!
점포가 늘어선 거리를 지나 스이젠지 공원 으로 들어서니 호수 가 나오고 건너편에는
봉긋 봉긋한 마치 신라왕릉 처럼 생긴 산 들이 나타나는데 후지산 을 본떴다나요?
그리고 오른쪽에는 메이지왕(천황) 이 다녀간 듯 기념비 가 보이는데..... 우린 왼쪽
으로 먼저 발길을 돌리니 넓고 크지만 잔잔한 호수 에는 수많은 철새 들이 보입니다.
또 스이젠지 공원 호수의 아치교 다리 밑에는 잉어 가 한가로이 노는 모습을 보노라니
너무나도 평화 스러운 것이...... 사람의 마음을 참으로 편안하게 해줍니다!
다리 를 건너니 왼쪽으로는 신수 (神水: 長壽の水 장수노수) 라는 히고국
구마모토번의 첫번째 번주인 호소카와 타다토시 가 지었다는 茶室(다실) 이 보입니다.
타다토시의 아버지 호소카와 타다오키 는 단고국 미야즈성주로 있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편에 참전해 공을 세워 부젠국(오이타현) 으로 전봉된후 고쿠라성 을 쌓고는
나카스에서 고쿠라로 번청을 옮겼다는데, 타다오키는 일본 다도의 개조 센노 리큐 의
일곱명 제자 중에 하나 로...... 다도의 유파인 산자이류의 개조가 된 풍류인 이었다고 합니다.
타다오키 는 16세에 오다 노부나가 명으로 아케치 미쓰히데의 딸로 절세가인인 가라샤와
결혼했는데, 4년후 1582년 아케치 미쓰히데가 모반해 교토 혼노지에서 노부나가
를 죽이자 아내를 절에 유폐 시키고 장인 미쓰히데 영지를 공격한 전공 던분에....
아케치 미쓰히데군을 토벌한 하시바 히데요시 에게서 용서를 받아 살아 남았다고 합니다.
그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가 벌어지자 후시미에서 인질로 잡힌 가라샤 는.... 또 다시 남편
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가노에게 칼로 목을 찔러 달라 부탁해서 죽는데, 독실한
크리스챤이라 자결을 할수 없었기 때문이니 뮤지컬과 영화나 연속극으로 많이 만들어 졌습니다!
셋째 아들에 불과한 타다토시가 후계자 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타다오키의 부인
가라샤가 집에 불을 지르고 죽을 때, 함께 있던 장남 타다타카의 부인
마에다 도시이에의 딸 큰며느리 치요가 불타는 집을 탈출해 언니 집으로 피신하자...
시어머니가 죽었는데도 며느리가 도망쳤다며 분노한 타다오키는 장남에게 이혼 하라고 명하나
아버지를 닮아 부인을 사랑했던 장남은 차마 이혼하지 못해 가문에서 쫃겨난 때문 입니다!
사랑 때문에 영광스러운 번주가 되는 길을 마다하고 추방된 남자는 일본에서는 드문일인가요?
여기 공원에는 이즈미 진자 出水神社(출수신사) 가 자리를 잡았는데, 일본의 성 안에는
반드시 신사 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여기서도 봅니다? 아담한 것이 위압감을
주지 않아서 좋은데 신사에서는 번주였던 호소카와 가문의 위패 를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행 가이드북 책에는 “出水 神社(출수신사)” 를 소리 나는 대로 “데미즈 신사”
라고 해서 그런줄 잘못 알고 왔었는데.... 여기에서 팜프렛을 받아 보니.....
이런? “이즈미 신사” 이네요? 영어 로는 Izumi Shinto Shrine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옛날에 倭國(왜국) 에서는 百濟(백제) 를 소리나는 대로 “햐쿠사이” 라고 읽는 대신에
그 뜻을 취해서 조선이 중국 명나라나 청나라를 "대국" 이라고 불렀듯이
백제 를 당시에 大國(대국) 이라는 뜻으로..... “구다라” 라고 읽은 것과 같은 것일까요?
조금 다른 예이지만 일본인들은 규슈 서북쪽 무역항을 唐津(당진) 이라고 쓰고는
도우쓰 가 아니라 "가라쓰” 라고 읽으며.... 규슈 남쪽에 산을
韓國岳(한국악) 이라고 쓰고 강고쿠다케 가 아니라 “가라쿠니다케” 라 읽습니다!
이는 옛날에 선진 문명을 지닌 가야인 들이 한반도에서 바다를 건너오면서 “가야”
를 “가라” 라고도 쓴 데서, 일본 중세에는 “한국을 가라” 라고 했던 것이지요!
한국인들은 문자가 없었으니 훗날 중국에서 한자 가 들어오자 말로만 전해지던 지명을
한자어 로 옮기는데.... 가야 는 가야 (加耶·伽耶·伽倻)· 가라 (加羅)· 가량(加良)·
가락(駕洛)· 구야(狗邪· 拘邪)· 임나(任那), 한(韓) 으로 옮기니 모두 같은 뜻 입니다.
가라쓰 는 "가라 즉 한국" 으로, 무역선이 김해 금관가야(임나) 로 다니던 것이
세월이 흘러 중국(唐) 양자강 이남 영파 로 무역선 목적지가 변경됨으로써....
도시 이름도 韓津(한진,가라쓰) 에서 唐津(당진,가라쓰) 으로 바뀐 것일까요?
이후 일본에서는 "가야" 를 뜻하던 "가라" 가 "외국" 을 뜻하는 말로 바뀌게 됩니다!
이 호소카와 가문 에서 이십오년 전에 호소카와 모리히로 라고 일본 총리 가 나왔는데
지한파로, 할아버지가 한일병합 20년 전에 전북일대 수백개 일본인 대농장 중에
하나인 대 지주로.... 조선으로 나갈 때는 지주의 행차를 맞아 땅에 엎드린 수백명의
조선인 소작농들 에게 호떡 을 나누어 주었다고 말하는 기사를 예전에 본 기억이 납니다!
조선이 망하기 20년전인 1890년경에 이미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의 논들이 일본인에게 팔려
나가고 있었다는 것인데.... 일본이 인구가 늘어나고 공업화 가 되면서 쌀 값과 논 값이
조선 보다 훨씬 높아지니 벌어진 현상 입니다. 모리히로 총리 는 호소카와의 18대
후손으로 1993년 일본총리 가 된 바로 그해에 경주에서 김영삼 대통령 과 회담 을 합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는 보수 우익이 판치는 일본 정치환경에서 아주 드문 발언 을 합니다.
“ 식민지배시 참기 힘든 고통을 끼친데 대해 깊이 반성하며 사과한다” 라고
말했으며 “ 태평양전쟁은 침략 전쟁 으로 잘못된 것이니 아시아인에게 사과 한다”
라고 말했던 것이.... 보수 우익인 일본 총리 로서는 당시에도 무척이나 인상적 이었습니다?
梅園(매원) 을 지나 히고국 구마모토번 초대 번주인 호소카와 타다도시의 동상 과
가부키 와 쌍벽을 이루는 가면극 노(能 능) 가 상연되었다는 노가쿠전 能樂殿
이며 그러고는 찻집 으로 오랜 역사가 있다는 고금전수의방 을 흘낏 쳐다만 봅니다.
밖으로 나오면서 마눌이 집어드는 것을 보니 하나에 90엔 짜리인 이른바
호우라쿠 만쥬 蜂樂饅頭(봉락만두) 인 모양인 데....
현지인들이 “이케나리 당고” 라고 부르는 이 과자는 만두피 속
에는 고구마 를 으깨어 넣었는데..... 한입 베어무니 그 맛이 일품 입니다!!
당고 를 보니 오카야마 岡山 에서 열리는 귀신춤 경연대회 우라쟈 溫羅じゃ 축제가 떠오르는데
할아버지가 주운 복숭아에서 나온 소년 모모타로(挑太郞) 는 오니가시마에 사는 도깨비를
물리치러 가는데 할머니가 챙겨준 키비 당고 를 주고 개와 원숭이 그리고 꿩을 부하로
삼으니... 꿩이 자물쇠를 열자 개는 도깨비의 다리를 물고 원숭이는 도깨비의 몸을 활퀴던가요?
멕시코가 원산 고구마는 17세기에 일본에 전해지고 1702년 대마도에 들어왔는데 1763년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조엄 이 가져왔으며, 남미 원산지인 감자 는 1824년 중국을
통해 전해졌으니 감자와 고구마는 숱한 조선인들을 살리는 구황작물 이 되었습니다.
감자 는 1832년 영국배 로드 애머스트호의 구츨라프 선교사가 전라도에 전했다고도
하는데, 가장 널리 퍼진 품종은 "남작(男爵)" 이니 미국 품종이 일본을 거쳐 도입 됐습니다!
스이젠지(수전사) 공원역 에서 다시 2번 전차 를 타고는 돌아오는데 무언가 찜찜한
것은 2번 을 확인하고 탈 때 얼핏 “上熊本驛(상웅본역)” 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 같은데..... 해서 전차 안에 있는 노선도를 보니 이런? 기리시마마치
辛島町(신도정) 에서 웅본(구마모토)역 과 상웅본역으로 전차 노선이 갈라지네요?
구마모토조 마에역 에 내려서는 다시 2번(웅본역행) 전차 를 타고 6정거장을 가는데
차량이 마침 2량이라 뒤쪽의 보조 차장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걸 봅니다!
한참 망설이다가 150엔 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일본의 환승 시스템 이 어떤지 확인
을 할겸 서투른 일본어로 손에 동전을 쥔채 말합니다 "전차를 잘못 타서 환승 했는 데...."
앞 전차에서 내릴때 요금 을 냈는데, 지금 또다시 요금을 추가로
요금함에 넣어야 하느냐“ 고 말하니...... 처음엔
차장이 잘 못알아 듣기에 천천히 다시 한번 더 되풀이 말합니다!
그러더니 웃으면서 그건 (동전을 넣었다는 사실) “하이리마시타”
가 아니라 “이리마시타” 냐고 물어 오기로..... 조금 전에
설명하면서 내가 단어를 적절히 사용하지 못했음 을 깨닫습니다?
그냥 내리라고 합니다! 덕분에 푼돈에 민감한 마눌 에게 낯이 서게 생겼네요? 예전에 중국 전장
에서 잘못 탄 버스에서 내릴 때도 버스 입구에서 올라타는 손님에게서 2위안을 받아서
내렸다는.... 이게 다 마눌의 심기 때문이지요? 근처 구마모토 시가지 를 둘러 보는데
이제 구마모토를 떠나면서 조선과 얽힌 이 도시의 또다른 얼굴 을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네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프랑스, 독일 및 러시아의 3국 간섭 으로 그 전리품인
요동반도 를 다시 뺏기고 만주의 철도부설권등 이권을 러시아가 가로채자 친청파
대신들은 물론이고 친미파 이완용도 친러파 로 기울며 민왕비(명성황후) 도 러시아 에
기대게 되자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여우사냥” 을 벌이니.... 이른바 을미사변 입니다!
조선군 훈련대가 야밤에 경복궁으로 갔다는 소식을 접한 훈련대장 홍계훈이 본부 중대를 인솔해
광화문으로 달려가 제지했으나 훈련대는 거부했고, 일본군에 의해 홍계훈이 살해 되자 본부
중대는 흩어졌으며..... 일본 낭인(浪人) 들이 경복궁 담을 넘어가 경복궁 수비대인 시위대 발밑
에 위협 사격 을 하니 조선군은 겁에질려 총을 던져버리고 군복을 벗어 던지며 도망을 쳤습니다!
조선군 시위대 교관 미국인 윌리엄 다이 대령 과 러시아인 사바틴 은 이학균 부령의 보고를
받자 별군관실로 달려갔으나, 2명의 부령과 7명의 당직 장교가 야근하고 있어야 함에도
단 한사람도 보이지 않으니 이미 모두 도주한 것 이라.... 다이 대령은 급히 2백명의 궁궐
시위대를 모아 궁으로 침입하는 일본군과 낭인 및 조선인 훈련대에 맞서지만 결국 흩어집니니다.
고종은 정세가 불안하니 미국인과 러시아인을 고용 한 것인데, 시위대와 무예청등 2백여명은
대원군 이 일본군의 호위 하에 가마를 타고 입궐하자 흩어져 달아났고..... 궁내부 대신
이경직 이 저지하다가 살해됐으며 윌리엄 다이 대령과 사바틴에 시위대 연대장 현흥택은
총을 버린 비무장 상태에서 낭인들에게 무차별로 구타 당하지만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경복궁을 무혈점령 한 낭인들은 민왕비의 처소인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에 까지 침입해서는
궁녀복을 한 왕비를 색출 하느라 궁녀를 심문하며 마루아래 “돌바닥에 하나씩 패대기쳐”
죽이는데, 마침내 들통난 왕비를 머리채를 휘어잡고 칼로 시해하고 토막내어 그 시체
를 불지른후 전각 옆 녹산에 묻었으니, 그후 재판에 회부된 자가 미우라 공사등 48인 입니다.
조선 신식군대인 훈련대 1,2,3 대대 1천수백명 은 일본인 교관의 안내로 조선인 대대장인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 가 인솔해 다른 문으로 경복궁에 들어와 담너머 궁녀들이 죽어가는 단말마
비명을 부동자세 로 듣고 있었으며.... 그 옆 강녕전 뜰에는 가마를 탄 대원군 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세자가 멱살이 잡혀 나뒹굴고 세자비는 복부에 발길질을 당해 병상에서 죽게 됩니다.
그중에 낭인(浪人) 들은 구마모토 출신 으로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 가 고향 사람 중에서
낭인들을 모으다 보니.... 자연히 구마모토 출신들이 21명 이나 되었습니다! 오늘날
“뮤지컬 명성황후” 가 일본 보수 우익의 방해로 아직도 일본에서 상연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십수년 전인 10월 8일 명성황후 114주기 에 여기 낭인들의 고향 구마모토
가쿠엔대 기념관 에서 "뮤지컬 명성 황후" 의 발췌 영상 을 틀고서는.....
주제가 5곡을 부르는..... 약식 으로나마 특별 공연 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