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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일기] 남극의 환경변화 지구상 가장 민감
인류의 미래 지켜낼 감시활동 자부심
단란한 펭귄가족 보면 고향생각 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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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하면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곳’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이곳에도 계절이 있습니다. 특히 세종기지는 해안가에 위치해 있어 피부로 느끼는 계절의 변화는 더욱 확연하게 느껴집니다.
지금 이곳은 달력상으로는 초여름이지만 올해는 이상스럽게 날이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해수 온도는 여전히 한겨울 평년치인 영하 1.8℃이고, 바람이 잠들면서 바다 표면은 어느새 얼어붙었습니다. 예년에는 한겨울인 7~8월에만 볼 수 있던 현상이지요.
바다가 결빙될 때에는 두 가지 신기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바로 빈대떡 모양으로 얼음이 뭉쳐 자라는 ‘팬케이크 모양 얼음(pancake ice)’과 해안의 물밑 바닥이 얼어붙는 ‘묘빙(錨氷·anchor ice)’이 그것이지요.
세종기지 건물은 바닥에서 1.5m를 높여 고상식(高床式)으로 지어 놓았습니다. 눈에 파묻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요. 하지만 폭풍설(blizzard)이 계속 불어 눈이 쌓이면 걷잡을 수 없지요. 올해에는 눈이 녹아도 시원치 않을 시점에 거꾸로 점점 쌓여만 갑니다. 덕분에 설상차(雪上車)로 치워낸 눈이 기지 옆에 커다란 산을 하나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눈 속에서 저희 대원들이 치르는 여러 이벤트 가운데서도 최고 히트작은 ‘알몸 생일파티’입니다. 다소 ‘외설스러운’(?) 이 행사는 88년 세종기지가 처음 생긴 이후 15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생일을 맞이한 대원의 옷을 벗겨 눈 속에 파묻거나, 기지 앞 바다인 맥스웰만에 집어던지는 세리머니입니다. 바다에 빠진 대원은 수온이 너무 낮아 10초 이상을 견디지 못하지만 얼굴엔 미소가 가득합니다. 무식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저희들 스트레스 해소에는 최고입니다. 97년 파견됐던 여의사 이명주(32)씨를 제외하고 알몸파티를 경험하지 못한 남극대원은 거의 없습니다.
올해는 특별히 남극 생물들에게 가혹한 해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따뜻한 북쪽 나라로 떠났던 펭귄을 비롯한 철새들은 이미 다 돌아왔지만, 둥지를 틀 만한 땅이 드러나지 않아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야생 생물의 생활 리듬은 온도보다는 태양이 비치는 정도, 즉 일주기(日週期)를 따르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계속 몰아치던 폭풍설이 모처럼 잠든 오늘은 설상차를 타고 대원들과
함께 산 너머 ‘펭귄마을’로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그간 건물 안에만
갇혀 있었으니 모두들 갑갑했겠지요.
▲사진설명 : ‘남극 신사’ 펭귄은 지극한 가족 사랑으로 월동대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 |
펭귄의 생활사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날지 못하는 대신 뛰어난 잠수능력으로 수중에서 먹이를 찾는 유일한 바다새라는 점도 그렇지만, 각별한 부부애와 모성애를 보이는 펭귄들을 보고 있노라면 두고 온 가족들이 무척 그리워집니다.
번식지에는 수컷들이 먼저 찾아와 좋은 집터를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며, 뒤이어 도착한 암컷들에게 열띤 구애(求愛)를 합니다. 부리를 마주 댄 채 하늘 보고 땅을 보는 구애에 성공하면, 함께 돌을 물어와 둥지를 마련하고 짝짓기를 합니다.
대륙의 ‘황제 펭귄’처럼 몸집이 큰 펭귄들은 1개의 알을 낳지만, 우리 기지 주변에서 번식하는 작은 펭귄들은 2개의 알을 낳습니다. 보전 능력이 부족한 생물은 다산(多産)을 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지요.
산란한 알은 차가운 바닥에 열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발등에 얹은 채 품어 부화시킵니다.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오면 암컷은 영양보충과 함께 새끼에게 되새겨 먹이기 위해 크릴 사냥을 나가며, 수컷과 교대로 양육을 합니다.
그러나 새끼들의 몸집이 커지면 먹이도 많이 필요하고 스쿠아(skua·남극 도둑갈매기) 같은 천적으로부터 보호하기도 힘들어집니다. 이 시기가 되면 탁아소(creche)를 운영해, 새끼들을 한데 모아놓고 둘레에서 몇 마리의 펭귄들이 ‘집단 보호’를 합니다. 부모들은 쉴 새 없이 부지런히 먹이를 나릅니다.
날이 추워 피해를 입고 있는 생물들은 해양동물뿐만 아니라 남극의 해안가에 자생하는 육상 식물들도 있습니다. 남극에는 주변대륙과 연결된 북극권과는 달리 나무가 없습니다. 꽃을 피우는 단 두 종의 현화(顯花) 식물이 더러 관찰되기는 하나, 남극을 대표하는 육상식물은 지의류(地衣類)·선태(蘚苔)식물로 구성되는 은화(隱花·꽃이 피지 않고 포자에 의해 번식하는 식물의 총칭. 민꽃식물) 식물들입니다. 이들은 눈 속에 파묻혀 생장을 멈춘 채 겨울을 나며, 눈이 녹고 햇볕이 강한 여름에 되살아나는 강한 생명력을 갖고 있지요.
암반이나 자갈에 붙어 생육하는 지의류는 종(種)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1년에 고작 1㎜ 정도 자라납니다. 그런데 요즘처럼 해는 길어져 오전 3시면 동녘이 밝아오지만 뒤덮인 눈이 녹지 않는 상황이면 올 여름 농사는 시작부터 망친 셈이지요. 그나마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색깔을 가진 식물들인데 부디 죽지 않고 살아남기만을 바랄 따름입니다.
이에 비해 물개와 해표들은 큰 문제 없이 새끼들을 돌보며 추운 여름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최근 기지 앞에 올라온 웨델 해표 모자(母子)를 보니 이미 새끼의 몸집이 어미와 비슷할 정도로 통통하게 살이 올랐습니다. 영양이 풍부한 어미 젖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지요.
자외선 차단 크림을 바르고 모처럼 기지 밖을 나선 대원들은 펭귄마을을 둘러본 후 번식지에서 멀리 떨어진 빙원으로 이동해 삼겹살 바비큐를 즐겼습니다. 몇몇 대원은 동심으로 돌아가 눈 쌓인 언덕에서 눈썰매를 즐기기도 했지요.
좀더 지켜봐야겠지만 남극의 초여름이 예년에 비해 춥다는 사실은 온난화라는 관점에서는 다행스러운 징후일 수도 있습니다. 남극은 지구상에서 환경변화에 가장 민감한 곳인 동시에 남극대륙을 뒤덮고 있는 빙원은 해수면 상승 같은 재앙의 방아쇠가 될 수 있으므로 지구 환경변화를 연구하기에 가장 적합한 연구 대상지입니다.
우리는 국가의 명예를 걸고 국제 공동노력의 선두에서 앞으로도 그 변화를 감시·추적하는 연구를 꾸준히 추진해 나갈 계획입니다. 비록 춥기는 하지만, 남극의 때묻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정호성 세종기지 제15차 월동대장 hchung@kordi.re.kr>hchung@kordi.re.kr )
---------------------------------------------- ◆남극 가는 길 서울→세종기지 짧게는 5일, 길면 10일 걸려 ----------------------------------------------남극 세종기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한국인 거주 지역’이다. 비행기를 타고 최대한 빨리 날아가야 5일이 걸린다. 날씨가 좋지 않거나 최종 교통수단으로 배를 타면 10일 이상 소요된다. 가고 싶다고 누구나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엔 아직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남극 관광상품이 없고, 방문 허락을 받은 사람만 세종기지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남극 여정은 인천공항에서 미국의 ‘LA’나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는 것에서 시작된다. LA는 10시간, 뉴욕은 12시간쯤 걸리며 첫번째 기착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다음날 오전 비행기를 이용해 남미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로 날아간다. 12시간쯤 걸리기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 하루가 지나간다.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하면 곧바로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탄 뒤, 4시간 거리인 남미대륙 최남단 도시 ‘푼타 아레나스’로 향한다.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는 ‘모래톱’이란 뜻으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마젤란 해협을 끼고 있다. 세종기지 방문객들은 남극으로 가는 관문인 이 도시에서 하루를 쉬며 긴 여정에 지친 몸을 잠시 추스른다.
여기서 남극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푼타 아레나스 공항에서 칠레 공군 수송기를 타고 2시간30분쯤 비행하면 남극 반도 끝, 킹조지섬에 위치한 칠레 공군기지에 도착한다. 마중나온 세종기지 대원들의 안내를 받아 고무보트(일명 조디악)를 타고 30분쯤 바다를 가르면 드디어 세종기지가 눈에 들어온다. 총 소요시간은 5일.
그러나 푼타 아레나스에서 세종기지로 가는 물자 보급선을 타면 3~4일이 걸린다. 바다에서 폭풍우라도 만나면 5일 이상 걸리기도 한다. 이럴 경우 서울에서 세종기지까지는 10일 이상 소요된다.
호화 유람선도 있다. 남극 여름인 11~2월 사이 푼타 아레나스에서 출발해, 남극 반도 주변을 10~15일간 항해하는 관광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비용이 1인당 1만~2만달러선(일반실 기준)으로 비싸기 때문에 젊은 사람은 찾아 보기 힘들다고 한다.
(安勇炫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