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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로] 장민석
001 opening
음악이 흐르고...
여인(세진)의 감은 눈이 화면 가득 보인다.
그렇게 감은 눈 위로 부서져 일렁이는 빛들... 감은 눈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번진다.
천천히 눈을 뜨는 여인.
초록의 나뭇잎들 사이로 햇살들이 한데 엉켜 흔들리고 있다.
가 을 로
002 프로덕션 편집실 [낮]
앞 씬에서 이어지던 음악소리 멈추면서 엄청 분주한 프로덕션의 소음들.
카메라, 마치 계주를 하듯 누군가의 손에 들려진 베타 테잎을 따라 뛰어다니면서
프로덕션의 바쁜 모습을 스케치한다.
베타 테잎이 모퉁이 편집실로 들어가면... 카메라(민주)를 쳐다보는 사람들.
가쁜 숨을 고르면서 모니터를 보는 민주. 그 옆에 미안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후배AD.
편집기사
서PD님, 아직 AD시절이 몸에서 안 빠졌나 봐요. 그냥 잡히면 뛰는 거 보니까.
민주
(겸연쩍게) 헤... 그냥 내가 하는 게 편하니까...
(후배를 보며) 뭐 어때...
깜박 깜박 움직이는 전자시계.
3시를 넘어가고 있다.
민주
잠깐, 저기 마지막으로 여기 한 번만... 네, 거기요.
편집기사
... 이렇게 해봤자 이따가 한 번은 다시 빠꾸 맞을 텐데 ...
민주
(웃으며) 그땐 그때고... 네, 그렇게 ... 그렇게... 오케이.
7데크에서 퉁하고 베타 테잎이 튕겨 나오면, 테잎에 붙여지는 라벨.
시계를 보는 민주. 3시가 훌쩍 넘어있다.
후배AD
선배님. 오늘 약속 있는 거 아니에요?
* * * * *
가방 안에 대충 이것 저것 우겨넣는 민주.
민주
저기 황선배 오면 잘 말해주고... 그리고 이거 빠꾸 안 당하게 좀...
편집기사
알았으니까 얼른 가요.
말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움켜쥐고 달려나가는 민주. 미소 짓는 후배와 편집기사.
그때 치킨과 맥주를 한 봉다리 사 들고 들어오는 황선배.
황선배
(능글맞게 웃으며) 어이, 서PD 님. 오늘 승진 빵 해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선배 앞을 지나쳐 버리는 민주.
황선배
(민주의 뒷모습을 보며) 제 어디가? 야, 서민주, 너 임마 어디가!
003 도로 변 [오후]
막 달려온 민주가 약속 장소인 듯, 어느 편의점 앞에 멈춰 선다.
헐떡이며 주위를 둘러보는 민주, 아무도 없고 ... 삐삐를 꺼내 확인하는데,
모퉁이에 주차해 있는 소형차로 문득 시선이 간다.
천천히 다가가서는 고개를 쭉 내밀고 차창 안을 확인하더니…
민주
(문을 벌컥 열며) 야, 백창호!
차창에 기대어 졸고 있다가 무너지는 창호.
창호
... 왔냐? ... (시계를 보더니) 뭐야? 지금이 몇 시야?
민주
(웃으며) 일이 좀...
근데 너 여기서 뭐해? 현우는?
창호
일단 타라.
004 도로 - 차 안 [오후]
민주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민주의 물음에 아랑곳 않고 운전을 하며 마냥 궁시렁대고만 있는 창호.
창호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울 아버지가 알면 난리 난다. 난리 나...
그리고 시간 약속은 뭐 뻘로 하냐? 응.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사람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고시 사수생은 뭐, 일요일도 없는 건가? 엉?
이렇게 화창한 일요일 날, 이런 식으로 사람 나들이 시키나?
내가 니들 결혼만 아니면, 정말... 그래, 그리구 니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그 결혼...
계속되는 창호의 궁시렁 궁시렁... 그런 창호를 가만히 바라보는 민주.
005 아파트 단지 [오후]
단지 안으로 들어오는 차.
창호는 계속 궁시렁대고 있고 민주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한 아파트 입구에서 멈추는 차.
창호
(계속해서) 내가 니들 땜에 지금까지 한 짓들 생각하면, 어휴...
너네 앞으로 진짜 나한테 잘해야 된다.
민주
창호야, 너 무슨 일 있니? 현우가 뭐라 그래?
말을 탁 멈추고 민주를 보는 창호. 할 말을 잃은 듯.
창호
야, 내려, 다 왔어.
(아파트 열쇠를 건네며) 이거 갖고 올라가 봐.
민주
현우 여기 있어?
창호
몰라… 나 현우가 시키는 대로 다 했다
(손을 흔들고는) 나 간다.
민주
어디가? 밥이라도 같이 먹자.
창호
바빠 ... 그리구 밥 같은 거 말구, 민주 너 방송국에 예쁜 후배들 좀 ...
그때 우렁차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 품 안에서 커다란 핸드폰을 꺼내 드는 창호.
창호
여보세요. 아, 아버지. 네 ... 아니요, 지금 잠깐 밥 먹으러... 예 도서관이요.
손을 흔들어 인사하며 차에 다시 올라타는 창호.
민주는 아파트 키홀더에 표시된 번호를 본다. 202-903
006 복도식 아파트 [오후]
903호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민주.
복도로 난 창으로 염탐하듯 들여다 보기도 하고... 인기척이 있는 듯 없는 듯.
벨을 눌러 보지만 아무 대답이 없다... 손에 쥐고있던 열쇠를 꽂고 문을 여는 민주.
아파트 안으로 들어온 민주. 여기저기를 살피고 방문을 하나씩 열어보며 ...
민주
(조심스럽게) 저기요? 계세요? ...
어느 한 구석에 작은 파티를 준비한 듯 와인과 잔이 놓여 있는 게 보인다.
민주
최현우… 현우야… 야, 최현우.
현우를 부르면서 인기척을 쫓아 어느 문을 여는데…
현우
(목소리) 잠깐, 안돼!
활짝 열린 문 앞에 서있는 민주.
변기에 앉아서 힘을 주고있는 채로 민주를 바라보는 현우.
민망한 시선의 교환.
* * * * *
현우에게 핀잔을 주며 천천히 집을 둘러보는 민주.
그 뒤에서 말없이 민주를 따르는 현우.
민주
계약하기 전에 먼저 말하지 그랬어… 집 구할 때 신경 쓸게 어디 한 두군 덴가…
계약은 문제없이 한 건지, 이웃엔 누가 사는지, 물은 잘 나오는지…
현우
물, 물 기가 막혀, 여기가 9층인데…
(frame out하며 - 소리만) 봐라, 수압 죽이지. 여기, 이런데 수납장도 있고…
니가 임마, 바빠서 못 본 거지 너도 봤으면…
"어련하시겠어" 하는 표정으로 살짝 미소를 짓는 민주.
그때 민주의 얼굴을 비추는 오후의 따스한 햇살.
그 햇살에 이끌리듯 천천히 베란다 쪽을 향한다.
베란다 앞 쪽으로 나지막하게 펼쳐져 있는 산과 숲의 풍경.
민주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
현우
(목소리) 그리고… 여기는 베란다야.
어느새 민주의 옆으로 와 같은 곳을 바라보는 현우.
현우를 바라보는 민주. 현우는 뿌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있다.
바람에 어깨를 들썩이는 나무들.
바람 한 줄기가 민주의 얼굴을 스치며 머리칼을 흩날린다.
민주
계절 따라 바람 냄새가 바뀌는 거 알아?
올해는 여름이 빨리 오려나 봐. 냄새 속에서 습기가 느껴지지?
깊은 숨을 들이쉬며 살며시 눈을 감는 민주.
현우가 그녀의 아름다운 옆 모습을 바라본다.
마치 새로운 연인을 바라보는 듯한… 그 낯섦과 설레임.
* * * * *
[저녁] 아무것도 없이 훤한 아파트.
벽에 기대어 앉아있는 현우와 민주. 와인 병과 와인 잔이 그 앞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민주
근데, 새 집에서 아내 될 사람 처음 맞는데… 어떻게 화장실에서 볼 일 보면서 맞을 생각을
다 했냐?
현우
(쪽 팔린 듯) 몰라, 니가 일찍 왔으면 안 그랬지, 분위기 딱 잡고…
민주
왜? 아까 분위기 죽였는데… 으~(화장실에서의 현우의 표정을 흉내내는 민주)
* * * * *
민주의 다리를 배고 누워있는 현우.
현우
우린 ...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됐을까?
이렇게 같이 있어서 ... 정말 좋다.
현우를 내려다보며 웃는 민주. 현우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는데...
007 버스 정류장 앞 [밤]
버스를 기다리는 두 사람.
버스가 도착하면 버스에 올라타는 민주.
민주
끝나면 전화 할게… 미안, 인상 펴라.
부-웅, 버스는 떠나고 … 아쉬움에 심술이 난 듯 한 현우의 얼굴.
F.O.
008 민주의 고향집 [낮]
F.I. 소읍에 있는 마당 넓은 집.
민주와 민주 어머니가 대청 마루에 앉아 청첩장을 보고 있다.
어머니
(청첩장을 보며) 기냥 소포로 보내지 모 할라꼬 이까지 내려오고...
하... 이쁘게도 맨들었네.
민주
(사투리) 내 와서 좋으면서 뭐.
어머니
(웃으며) 좋긴. 음식 준비하고 귀찮기만 하제.
근데, 니 일 하는 거 현우 자가 뭐라 안하나?
민주
그게 뭐 하루 이틀이가.
어머니
그래도, 결혼 할 때 되면 안 그랄텐데...
니 일이 뭐 보통 일이가, 맨 날 돌아댕기면서 집에도 잘 몬 들어오고...
(목소리를 낮추며) 현우 자도 그렇게 속이 넓어 보인진 않던데...
민주
(웃으며) 엄마도 눈치 챘나?
어머니
그럼, (웃으며) 그래도 어디 니 아버지 만큼 속이 좁을라꼬. 남자가 만날 방구석에
쳐 박혀서 나무 쪼가리나 부둥켜 안고 있으니까 ...
그때 방 안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
뻘쭘한 어머니의 표정. 그런 어머니를 보며 미소 짓는 민주.
009 민주 아버지의 작업실
밖에서 민주 어머니와 민주의 담소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전통 공예품인 나침반을 제작하는 작업실.
민주 아버지가 손바닥 만한 나침반을 정교하게 세공하고 계신다.
그 옆에 어색하게 앉아있는 현우.
아버지
니, 사법 연수원 졸업하고는 어느 쪽으로 갈 건지 정했나?
현우
변호사가 되려고 합니다.
아버지
와?
현우
저는 아버님 어머님 같은 평범한 서민들도 아무 부담 없이 언제나 편하게 찾아올 수 있는
... 그런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아버지
(현우를 한 번 보고는) 이제 그런 말 안 외워 와도 된다.
머쓱해지는 현우.
아버지
니 이게 무슨 나문 줄 아나?
현우
소나무...
아버지
대추나무다.
화양목이나 은행나무를 쓰기도 하는데, 대추나무가 최고다. 재질이 단단하고
말려놓아도 잘 트이지 않거든.
현우
예.
아버지
내가 지금 이 놈은 와 대추나무로 맨드는 줄 아나?
현우
...
아버지
니 줄라고.
현우
예?
아버지
니 결혼 선물로 하나 해 줄라고.
현우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하며) 예, 감사합니다.
손을 내밀어 나침반을 받으려고 하는데…
아버지, 현우의 손을 탁 치며…
아버지
차라. 임마. 아즉 다 안 만들었다.
현우
(무안해서) 아, 네.
나침반 위로 계속되는 아버지의 정교한 손놀림.
아버지
현우야,
현우
예.
아버지
축구선수가 밥묵고 축구만 하는데… 축구 잘 몬하면 지도 서운하겠제?
현우
... 네.
아버지
내가 이 무형 문화잰데… 하다가 실수해가 아까운 나무 버리고 그라믄 서운하겠제?
현우
… 네
아버지
니도 민주 남편 되가, 남편 노릇 잘 몬하면...
(현우를 탁 보며) 내가 엄청 서운해 할 줄 알아라.
현우
... 예.
밖에서 민주와 민주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010 고향 집 민주의 방 [밤]
민주의 옛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방.
바닥에 앉아서 민주의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현우.
앨범 속에는 민주의 한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발가벗은 아기 때 사진부터,
꼬마였을 때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까지... 아이가 소녀가 되고 한 여인으로 커가는...
현우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때, 조용히 방문이 열리고 츄리닝 차림으로 들어오는 민주.
민주의 복장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 웃는 현우.
민주
이거? 나 학교 다닐 때 체육복.
현우
(웃으며) 어울린다.
민주
(앨범을 보고는) 뭐해? 챙피하게 ... (살짝 뺏으려는데...)
현우
어때... (계속 본다)
현우의 어깨 뒤로 오는 민주. 앨범을 보는 현우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본다.
현우의 볼에 살짝 얼굴을 맞대면... 서로를 쳐다보는 두 사람.
민주, 장난스럽게 스웨터 어깨를 살짝 내려보기도 하고...
현우
어허...
현우의 무릎에 앉는 민주... 입을 맞추는 두 사람.
민주의 손이 천천히 내려가 현우의 벨트를 풀면...
현우
(놀라서) 깨시면 어쩌려고 그래?
민주
청첩장까지 돌렸는데 무르라고야 하시겠어?
소리 내지 않게 조용히, 그러나 정열적으로 키스하며 ... 서로를 보듬는 두 사람.
* * * * *
한 이불 속에서 누워있는 두 사람의 행복한 모습.
현우
우리 결혼하면 자주 이렇게 할 수 있겠지?
민주
거의 매일!
다시 서로를 끌어 앉는 두 사람.
011 사법 연수원 정문 앞 [오후]
뜨거운 초여름의 태양. 연수원 정문을 오가는 사람들의 정장 차림이 더욱 더워 보인다.
작은 그늘에서 와이셔츠 차림으로 서있는 현우.
숄더백을 멘 민주가 달려온다.
민주
늦지 않았지?
(현우의 차림을 보고) ... 아직 끝난 거 아니야?
현우
아까 삐삐 쳤었는데, 또 확인 안 했구나?
민주
(삐삐를 꺼내보며) 엉? 그렇네...
현우
방송국 호출은 기가 막히게 받으면서 ...
민주
(웃는다)
현우
갑자기 연수생들끼리 회의 한데.
민주
그래?
현우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얼굴만 내밀었다가 기회 봐서 빠져 나올게.
민주
오래 걸리는 거야? 아니면 그냥 여기서 기다리구.
현우
더운데 괜히 뭐하게. 5층 커피 숖에 가서 좀 쉬고 있어, 맨 날 피곤해 가지구...
늦어도 6시까지는 갈 수 있으니까 가 있어.
민주
혼자서 뭐해?
현우
그럼 미리 가구부터 좀 보던지...
너 여기 있으면 내가 신경 쓰인단 말야.
민주
...
현우
가, 가는 거 보고 들어갈게.
민주
(싫지만) ... 알았어.
돌아서서 걸어가는 민주.
현우가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아니다 싶었는지 몇 걸음 가다 휙 돌아보는 민주.
민주
(밝게) 빨리 와야 돼!
현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많이 피곤하지?
민주
(힘있게) 아니!
다시 휙 돌아서서 걸어가는 민주.
현우가 그 뒷모습을 계속 보고 있으면... 민주가 돌아보지는 않으면서 뒷춤으로 손을
쭉 빼서 흔들어 준다.
멀어지는 민주를 보며 미소 짓는 현우.
012 쇼핑 몰 매장 안 - 몽타쥬 [오후]
에스컬레이터 옆쪽에 있는 의자에 민주가 앉아 있다.
무심히 광고 전단들을 넘겨보다 ... 시계를 본다.
따분한 표정으로 아이쇼핑을 하는 민주.
스포츠 매장. 등산화들을 구경하는 민주.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하나를 고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민주.
악기 매장 앞에서 박스를 쌓아 들고 곡예 하듯 가는 여직원이 보인다.
커다란 박스에 얼굴은 가려 보이지 않고 ... 들려오는 목소리.
목소리
잠깐만요! 잠깐만 ... 조심, 조심 ... 지나갑니다.
순간 중심을 잃고 와르르 무너지는 박스.
주변을 향해 무안한 듯, 앳되게 땋은 갈래 머리를 숙여가며 박스를 다시 쌓는 여직원.
주변 사람들이 여직원을 돕는다.
여직원
(씩씩하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013 쇼핑 몰 1층의 선물 포장 코너.
등산화를 내미는 민주.
여점원이 포장을 시작할 때... 생각난 듯, 숄더백을 연다.
민주
저기... 이것도 좀 같이 포장해 주시겠어요?
등산화 위로 올려지는 노트 한 권.
포장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민주의 얼굴에 강한 빛이 반사된다.
민주, 고개를 돌려 유리 회전문 밖의 대로를 보면...
늦은 오후의 태양으로부터 발산된 강한 빛이, 신호를 받고 서 있던 차들의 유리와
몸체에 쏟아지고 있다.
마치 빛으로 뒤덮인 듯 과다 노출된 거리.
그 아름답고 비 현실적인 풍경을 보는 민주의 눈이 엷게 흔들린다.
014 사법 연수원 앞 [오후]
빠른 걸음으로 정문을 빠져 나오는 현우.
시계를 한 번 본다.
015 쇼핑 몰 매장 안 [오후]
층 중앙에 있는 전자시계... 5시 54분에서 55분으로 숫자가 넘어간다.
음악소리가 조용히 들리는 악기매장.
손님들과 점원들의 모습이 평화로워 보인다.
간혹 땀을 닦는 점원들의 모습.
민주가 탄 에스컬레이터가 악기매장 층으로 천천히 올라온다.
016 쇼핑 몰 건너편 길 [오후]
대로를 사이에 두고… 현우가 횡단보도 앞에 와서 선다.
017 매장 안 [오후]
천천히 걸으며 피아노 매장 앞으로 오는 민주.
한쪽에선 피아노를 고르는 젊은 엄마와 어린 여자 아이를 여직원이 봐주고 있다.
무심히 피아노들을 구경하다가 그 중 어느 피아노 앞에 서는 민주.
건반을 살짝 눌러본다.
도...
하나씩 건반을 눌러보는 민주. 도... 도... 미... 미...
피아노를 고르던 어린 여자 아이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도... 도... 미... 미...
소리가 나는 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는 시선. 등을 돌리고 서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민주에게로 천천히, 천천히...
건반 하나 하나를 조심스럽게 누르는 민주의 여린 손가락.
도... 도... 미... 미...
그리고...
쿵--.
건반을 누른 채 멈춘 민주의 손가락. F.O.
018 쇼핑 몰 건너편 길 [오후]
F.I. (묵음에서 그림만 나타났다 사라진다)
넋이 나간 채, 정면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는 현우.
그 뒤로 빌딩의 유리에 반사되어 보여지는 무너지는 건물.
엄청난 먼지 폭풍이 현우의 얼굴을 감싸면서 .... F.O.
긴 어둠 ...
019 이미지들 - 몽타쥬
긴 어둠이 걷히면서…
- 비오는 거리. 점멸하고 있는 붉은 신호등.
- 뿌연 하늘에 흔들리 듯 떠 있는 헬리콥터.
- 구급차, 소방차 등의 경광등. 빠르게 움직이는 구조대들의 발.
- 애타게 사람을 찾는 내용이 쓰여있는 벽보들.
- 그리고 뭔가 비어있는 듯한 그림. 그 안에 누군가 한 명이 있다면 꽉 채워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
(위의 이미지들이 짧은 F.I, F.O.으로 점멸하듯 보여진다.)
020 붕괴현장 근처 공중전화 부스 [밤]
F.I. 되면서 뒤쪽으로 붕괴현장이 보인다.
수화기를 들고 있는 현우.
민주의 목소리.
"안녕하세요, 서민주입니다. 제가 바로 연락 못 드렸다고 서운해 하지 마시구요, 급한 일이 아니면 가급적 음성 녹음을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어지는 기계음. 삐 - "호츨은 1번 음성 녹음은 2번을 눌러 주십시오."
"용량이 초과되어, 더 이상 녹음하실 수 없습니다."
전화기의 재발신 버튼을 누르는 현우.
신호가 가고 … 다시 민주의 목소리가 흐른다.
"안녕하세요, 서민주입니다. 제가 바로 연락 못 드렸다고 서운해 하지 마시구요…"
민주의 목소리 흐르면서
F.O.
다시 긴 어둠이 흐른다.
(목소리)
전 모릅니다.
알아도 ...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021 호텔 스카이 라운지 [밤]
F.I.
무거운 긴장 속에 앉아있는 세 사람.
현우 반대편의 50대의 남자와 그 가운데에 앉은 박수사관.
현우는 무관심한 얼굴로 창밖에 펼쳐진 야경에만 시선을 주고 있다.
박수사관
자료들을 훝어보니 ...
지점장님 친척 중에는 나이 어린 제력가들이 참 많더군요. 초등학생도 있고 ...
지점장
(시선을 피한다)
박수사관
다시 권해드립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백지 한 장과 펜을 밀어 놓으며)
여기 ... 그 돈의 주인들을 적으십시오.
지점장
(꿈쩍하지 않는다)
박수사관
저희도 다 이해합니다. 지점장님은 이명호 사장의 지시대로만 일한 거 아닙니까.
저의 검사님께서 왜 검사실로 안 부르고 이런 데서 만나자고 하신 줄 모르시겠습니까?
지점장님께 기회를 ...
현우
(말을 끊으며) 지점장님.
지점장
(긴장한다)
현우
만약 지점장님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제가 증거를 확보하게 된다면 ...
그 땐 정상참작이란 건 없습니다.
지금부터 ... 마지막으로 생각할 시간을 들이겠습니다.
지점장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는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
현우
시간이 다 됐군요.
테이블 위의 백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현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 박수사관도 말없이 뒤를 따른다.
지점장
저기... 검사님!
멈춰서는 현우.
022 현우의 검사실 [낮]
서류들을 훑어보는 현우.
박수사관과 여자 사무원이 같은 방에 있고, 박수사관은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박수사관
(조용히) 그래, 금방 알아봐 줄게.
야, 주소가 문제냐? 이름만 말하면 걔네 와이프 바람피우는 여관까지도
알아와 줄 수 있어... 그래, 이름 얘기해봐. (받아 적으면서) 어, 그래...
(현우 쪽을 한 번 보고는) 야, 나 지금 바쁘거든... 내 알아보고 다음에 전화 줄게.
전화를 끊고는 옷을 챙겨 들고 현우의 자리로 오는 박수사관.
박수사관
권인수 의원 사무실에 다녀오겠습니다.
현우
예.
박수사관
근데, 최 검사님.
이번 사건 ... 정말 건드려도 되는 건가요?
현우
그냥 원칙대로만 해주세요.
알았다는 듯 박수사관이 인사하고 돌아서려 할 때 ....
현우
박계장님?
박수사관
네?
현우
이제 흥신소 일 그만 하세요… 박계장님 가우가 있지…
뜨끔 하는 박수사관. 머쓱하게 인사하고는 방을 나선다.
023 (S# 6의) 현우의 아파트 [밤]
불이 켜지고 ... 현우가 들어온다.
별다른 가구나 장식품이 없는 건조한 집.
넥타이를 풀며 거실의 메트리스 위에 앉는 현우.
TV를 켠다. 심야 뉴스가 나오고 ...
벽에 등을 기댄 채 양말 한 쪽을 벗고는 ... 다른 한 쪽은 마저 벗지 않은 채 TV로
시선을 준다.
TV뉴스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었을 당시, 아이콘 캐피털의 이명호 사장 측 변호사가 일부
여당 실세 의원들과 접촉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
채널을 돌리는 현우. 스포츠 채널의 프로야구 하이라이트.
현우의 시선이 천장으로 올라간다.
반쯤 누운 자세로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는 현우. TV속의 함성들 들리고...
양말을 벗은 현우의 한 쪽 발이 차가워 보인다. F.O.
024 세진의 연립주택 옥상 [아침]
언덕을 따라 서민 주택들이 줄지어 있는 동네.
갓 떠오른 태양이 붉은 벽돌과 노란 물탱크들을 비출 때...
4층 짜리 연립 주택의 옥상.
세진이 줄넘기를 한다.
025 세진의 집 [오후]
전기 후라이팬에 전을 붙이고 있는 세진과 그 옆에서 TV를 보고있는 동생 세훈.
세진의 엄마 유씨는 가스 렌지에서 탕을 끓이고 있다.
세진
오늘 작은 엄마도 온데?
유씨
작은 아빠만 온데.
세진
요번엔 왜 또 안 온데?
유씨
세영이 고3이라 못 온데.
세진
에유, 그런다고 세영이 걔가 대학 갈 수 있데?
유씨
그러게 ... 그러고 보면 너나 세훈이는 참 대견해.
세진
이제 알았어. 작은 아빠가 늘 그러잖아. 아빠 없이도 이렇게 잘 자라줘서 대견하다구.
세훈
(한마디) 맑고 명랑하게!
세진
맞아, 맑고 명랑하게… (웃으며) 작은 아빠만 오면 완전 우린 소설책 주인공이라니까.
026 세진의 집 [밤]
제삿상 앞에서 절을 하는 작은 아빠와 세훈.
그 뒤에서 세진과 유씨는 수다를 떨고 있다.
* * * * *
작은아빠
(세진과 세훈을 앉혀놓고) 정말 잘 자라 주었구나. 맑고 명랑하게…
작은아빠의 말에 착한 아이의 표정을 짓는 세훈과 세진.
027 세진의 방 [새벽]
아직 어둔 새벽, 환하게 불을 켜놓은 채 잠들어 있는 세진.
노크 소리 들리고 ... 껄렁한 교복 차림의 세훈이 방으로 들어온다.
세훈
누나... 자?
(자는 모습을 보고는) 나 이거 가지고 간다.
세진의 mp3를 가방에 넣는 세훈.
그냥 나가려다가 ... 생각난 듯 불을 꺼 주고 나간다.
<현관 앞>
세훈이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려고 하는데... 막 핸드폰 벨이 울린다.
가방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받으면 ...
세훈
여보세요.
세진(F)
(졸린 목소리) 윤세훈, 불 켜라.
<세진의 방>
문소리가 들리고 다시 불이 켜지는 방.
세진은 환한 방에 움직임 없이 그대로 누워있다.
028 현우의 검사실 [낮]
우두커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현우.
건물 뒤쪽으로 키가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잎들이 실바람을 맞아 미세하게 떨릴 때 ... 생각에 잠긴 현우가 그 풍경을 바라본다.
부장
자네도 계절 타나?
현우, 뒤를 돌아보면 ... 부장검사가 옆으로 다가와 선다. 인사하는 현우.
부장
(창밖을 바라보며 뜸을 들이더니) 아이콘 캐피탈 사건 ...
그 동안 고생 많았네. 수사 종결이야. 상부 지시일세.
살짝 인상이 찌푸려지는 현우.
현우
어느 정도 상부입니까?
부장
그걸 꼭 물어봐야 되겠나?
현우
(냉소적으로) 안 물어보면 의욕 없는 놈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부장
(언짢지만) 그렇게는 안 보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결과 발표할 준비나 해.
029 민주의 고향집
TV에서 흐르는 뉴스 화면. 부장검사와 현우의 수사결과 발표 장면을 담은 리포트.
" ... 이로써 아이콘 캐피털의 자금 유용 사건과, 뒤이어 불거진 정.관계 로비 의혹과
관련된 검찰의 수사는 일단락되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언론을 통해 여러 가지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 "
TV 앞에 민주의 부모님이 앉아계신다.
등을 구부린 채 마늘을 빻는 아버지와 그 옆에서 마늘을 까주는 어머니.
7년 전 보다 확연히 늙으신 모습이다.
뉴스리포터 ... "한 편 오늘 오후 자신들을 <아이콘 캐피탈 소액 투자자 모임>이라고 밝힌
이십 여명의 시위대가 서울지검 본청 건물 앞에서 기습적인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
서 사건의 일선 수사를 담당했던 서울지검 특수3부 '최현우' 검사가 시위대로부터 ... "
천천히 고개를 들어 TV화면을 보는 아버지.
어머니도 하던 일을 멈추신다.
화면 속에는 시위대에게 멱살을 잡히며 봉변을 당하는 현우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
화면 속, 현우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다.
마치 냉소를 품은 듯한 묘한 얼굴... 차가운 무표정.
민주의 아버지, 두꺼운 안경너머로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030 지검 주차장 [밤]
인적이 뜸한 주차장의 구석진 곳.
현우의 차 유리에 커다란 금이 가있다.
그 앞에 서 있는 현우.
031 세진의 집 근처 골목 [아침]
정장차림으로 골목을 뛰어 내려오는 세진.
길가에 세워진 차 유리에 슬쩍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다.
032 세진의 기억
햇살로 노출 과잉이 된 창문. 카메라 이동하면 세진의 얼굴이 나타난다.
웃는 듯 무표정하게 앉아있는 세진의 옆 얼굴.
세진
오랫동안 도움 주셔서 ... 정말 감사합니다.
목소리
이제 ... 정말 그만 오려고 그래요?
세진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과잉 노출인 창 밖에 초록의 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목소리
151번, 164번, 180번 들어오세요.
033 면접실 앞 복도 [낮]
세진, 고개를 돌리면…
좁은 복도에 일렬로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여남은 명의 사람들.
세진의 바로 옆 자리까지 일어나 면접실로 들어간다.
꽉 막힌 듯한 좁은 복도, 복도 끝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복도 바닥에 아른거린다.
무거운 정적, 그 속에 ...
간혹 들려오는 기침 소리, 종이 넘기는 소리, 그리고 구두 또각 거리는 소리...
혼자 뭔가를 중얼거리는 사람, 단단히 매어진 넥타이, 천천히 움직이는 관리 직원들...
긴장된 얼굴의 세진, 익숙하지 않은 정장의 매무시를 자꾸 만지작거리는데...
어느 순간,
세진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세진에게 조여 오는 듯한 카메라, 그녀의 얼굴이 점점 불안해지며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사방의 벽이 좁혀지는 듯한 느낌... 부피가 줄어드는 듯한 공간감 ...
얼굴이 굳어지며 호흡이 짧아지는 세진, 눈을 질끈 감으면 ...
환청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뭔가가 강하게 벽을 때리는 듯한 ... 쿵- 쿵 -!
가녀린 신음소리 ...
세진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 세진을 부르는 소리 어렴풋이 들린다.
(목소리)
세진아... 세진아...
…
윤세진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세진.
자신을 부른 관리직원…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를 지나쳐 복도를 빠져나간다.
034 도심 중심가 [낮]
대리석으로 된 벤치에 정장 차림의 세진이 앉아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의미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
어느 순간 ...
그녀의 귀에 상쾌한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세진.
푸른 하늘빛을 배경 삼아... 도심의 공해 속에서도 맑은 빛을 잃지 않고 있는
가로수 잎들이 시원하게 흔들린다.
그것을 올려다보는 세진의 얼굴 위로...
해를 가렸던 구름이 걷히는 듯, 서서히 햇살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스르르 눈을 감는 세진.
035 유씨의 미장원 [저녁]
눈을 뜨는 세진...
유씨
눈 감아 얘, 머리카락 들어가.
세진은 거울 앞에 앉아있고, 유씨가 세진의 머리를 자르고 있다.
세진
(살짝 눈을 감으며) 엄마.
유씨
응?
세진
나... 돈 좀 필요한데...
가위질을 멈추고 세진을 쳐다보는 유씨.
세진은 천천히 눈을 떠서 유씨의 표정을 본다.
알겠다는 듯 미소를 보이는 유씨.
036 부장검사 집무실 [낮]
방에 들어온 현우가 부장 검사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는다.
크게 숨을 내쉬는 부장 검사.
부장
아이콘 캐피탈 사건 ... 특수1부로 옮겨서 재수사 들어가게 됐네.
불쾌한 듯 미간이 찌푸려지는 현우.
부장
여론이 너무 안 좋아.
그리고... 자네를 문책하는 듯한 모양새는 내야 된다고 하는데....
현우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부장
자네 ... 조금만 쉬어야겠어.
037 현우의 검사실 [낮]
작은 박스에 짐을 챙겨넣는 현우.
책상 위에 쌓여있던 서류더미 들이 책상 밑으로 우르르 떨어진다.
가만히 서류더미를 주워 올리던 현우, 갑자기 서류더미로 책상을 쿵 내려친다.
현우의 눈치를 보는 박수사관과 여사무원.
038 도심 속 현우의 차 [저녁]
담배를 피며 운전을 하고 있는 현우. 꽉 막힌 도로...
인도 위에서는 어느 교회에서 나왔는지 젊은이들이 기타를 치며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039 포장마차 [밤]
나란히 앉은 현우와 창호.
창호는 예전의 모습과는 다른 말쑥한 정장차림에 목에는 초소형 핸드폰을 걸고 있다.
각자의 잔에 소주를 따르는 창호. 그리고 곧 옆에 놓여 있던 맥주잔에 소주잔을 담근다.
창호
너 혹시 짤려도 우리 회사는 올 생각 마라. 좀 좆같고 그래도 그냥 눌러 붙어있어. 아무리 뭐래도 여기선 아직 공무원이 이거거든 ... 나 요즘 어떤지 아냐? 일거리가 없어서 내가 직접 뛰어 댕겨, 이게 무슨 변호사냐, 영업이지.
아이~ 생긴 거만 놓고 보면 내가 딱 검산데? (인상을 탁 구기며) 불어 이 새끼야.
현우
검사는 아무나 하냐? 넌 지금 그게 딱이야, 임마.
창호
그러냐?
(웃는다)... 참, 너 그때 만난 여잔 어떻게 됐어?
현우
안 맞드라구.
창호
뭐가 안 맞아? 성격이? 아니면 속궁합이?
현우
뭘 꼬치꼬치 묻고 그래. 그냥 내 타입이 아니라구...
창호
어지간하면 그냥 해라, 임마. 이번엔 정말 착하다구 하더만...
현우
너무 착해서... 미안하드라.
창호
웃기고 있네...
(술잔을 내밀며) 마셔, 새꺄.
술을 한 잔 들이키고 술이 쓴 지 인상을 쓰는 현우.
* * * * *
말없이 앉아있는 두 사람.
창호
... 현우야.
현우
왜?
창호
(무슨 말을 하려다가는)... 아니다.
현우
자식, 싱겁긴... 괜찮아, 임마. 말해.
창호
저기... (머뭇거리다가) 민주 아버님한테서 전화 왔었다.
순간, 정지되는 현우.
현우
… 아직도 연락 하는구나.
잘 지내시지?
창호
두 분이야 뭐 건강하시지...
니 안부 물으시더라.
현우
...
창호
그리고... 너희 집 주소도.
040 현우의 아파트 입구 [밤]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 경비실 안으로 졸고있는 경비 아저씨가 보인다.
경비실 창문 턱으로 내리치는 비가 튀어 오르면...
그 창문 턱에 놓여있는 소포 하나가 튀어 오르는 비를 맞고 있다.
정성 들여 쓴 붓글씨 체로 민주의 고향집 주소가 겉봉에 적혀있다.
041 현우의 아파트 [밤]
뜯지 않은 채 그대로인 소포가 서류 뭉치들이 담긴 박스 안에 담겨있다.
소파에 길게 앉아서 TV를 보고, 일어나 물을 마시고... 그렇게 시간의 경과를 보여준다.
* * * * *
소포 봉투를 앞에 놓고 가만히 보고만 있는 현우.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기 시작한다.
안에 들어있는 것은 한 권의 노트.
현우 천천히 두꺼운 표지를 열면... 첫 장에 적힌...
"여행- 현우와 함께 하는…"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는 현우.
손으로 직접 그린 지도 위에 여행 코스가 그려져 있고, 그 밑에 설명들이 적혀있는...
예쁘고 정성스럽게 장식해 놓은 글씨와 그림들.
민주의 글씨 위로 ...
현우의 손끝이 살며시 와 닿는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현우.
뒤 쪽 표지에 ... 베어있는 커다란 얼룩.
현우, 두 눈을 꾹 감는다.
042 현우의 아파트 [아침]
image cut 여행지에서 햇살을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민주의 모습.
햇살이 들어오는 현우의 아파트.
자는 듯... 깨어있는 듯... 매트리스에 누워있는 현우.
가만히 몸을 일으킨다.
043 톨게이트와 고속도로 [낮]
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고속도로로 들어서는 현우의 차.
아무 표정 없이 정면만 응시하며 운전을 하는 현우.
그 위로... 민주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민주v.o.
바다를 향해서 이 여행은 시작되는 거야.
044 여객선 [낮]
바다를 가르는 여객선 갑판 위의 세진.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하는 시원한 바람.
민주 v.o.
바다 가운데에 ... 사막을 가진 섬이 하나 있어.
멀리 섬이 보인다.
045 우이도의 모래 언덕 [낮]
아름다운 모래언덕의 풍경.
경치를 앵글에 담는 사진작가들도 눈에 띈다.
언덕 아래의 세진. 쪼그려 앉아 언덕을 올려다보고 ... 모래 주위를 거닐어 보고...
신발을 벗고 모래 속에 잠겨 보기도 하고 ...
민주 v.o.
사실은 ... 작은 모래언덕일 뿐이야.
그래도, 그냥 '귀여운 사막'이라고 불러주면 재미있을 거 같애.
모래언덕 위의 세진, 맨손체조를 하듯이 기지개를 켜보는데 ...
뭔가를 느끼는 듯 움직임을 멈추면 ...
모래언덕을 앞에 두고, 뒤쪽으로 광활한 바다가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
그 속으로 카메라가 빨려 드는 듯한데 ...
민주 v.o.
사막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하는 게 이상하다구?
그럼 ... 이런 주문을 한 번 외워보는 건 어떨까.
'지금 우리 마음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하지만 이 여행이 끝날 때는 ...
마음 속에 나무숲이 가득할 것이다."
카메라가 다시 세진이 있던 자리로 돌아오면 ...
그 곳에 민주가 있다.
(flashback) 자신의 자동카메라로 모래 언덕을 찍는 민주.
곧바로 모래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간다.
황선배와 리포터, 카메라 보조 등이 저 앞에서 가고 있다.
민주
(뒤쫓아 뛰어가며 큰소리로) 선배님! 그거 아세요?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이 모래언덕도
갈수록 줄어들 거래요... 너무 아쉽죠?
046 우이도 선착장 [오후]
민주 v.o.
섬에서 나가려면 뱃시간을 잘 맞춰야 된다는 거 알지?
하루에 두 번밖에 배가 안 다니거든.
텅 빈 선착장에 민주 일행만이 멍하게 서 있다.
민주
세시 사십 분이라고 들었는데 .... (머쓱하다)
황선배
(이를 갈듯이) 세시 이십 분이었다잖아.
민주
... 죄송합니다.
힐끗 힐끗 일행의 눈치를 보며 미안해 하는 민주. 그 모습이 어린 아이 같다.
(현재) 바로 그 자리. 그 선착장 ...
시계를 보고 있는 세진. 3시 20분이다.
선착장 직원
죄송합니다. 오려던 배가 기관 고장으로 운항이 취소 됐습니다.
세진과 열 명 남짓한 섬사람들, 사진작가들이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다.
"어떻게 하란 말야?" "민박 잡아야 겠네?"하며 투덜거리는 사진작가들.
그 옆에 서서 한숨을 푹 쉬는 세진. 그 모습이 귀엽다.
047 우이도 바닷가의 민박집 [밤]
'민박'이라는 간판 ...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집 마당.
세진의 신발이 놓인 방에만 불이 환하다.
꾸부정한 주인 할머니가 방 앞을 지나가며 혼잣말을 한다.
할머니
잠 안 자고 뭐하는겨...
048 우이도 선착장 [아침]
정박해 있는 여객선.
몇 사람이 배에서 내리고, 세진과 전 날 기다리던 사람들이 배에 오르고 있다.
사람들을 태우고 떠나가는 배.
선착장에 서 있는 현우의 뒤로 멀어지고 있다.
049 모래언덕 [낮]
모래언덕 위의 현우.
풍경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세심하게 주위를 둘러보는데...
손에는 민주의 노트가 들려 있다.
"첫째 날" 페이지 ... 모래언덕을 찍은 사진이 붙어있다.
(S# 45에서) 민주가 찍었던 사진.
사진과 비교하며, 민주가 서 있었을 법한 자리를 찾는 현우.
그 자리에 서서는 언덕을 내려다본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는... 현우의 얼굴에 쓸쓸함이 배어 있다.
노트에 적혀있는 글을 보는 현우.
현우 v.o.
지금 우리 마음은 ... 사막처럼 황량하다.
하지만... 이 여행이 끝날 때는 ...
마음 속에 ... 나무 숲이 가득 할 것이다.
모래언덕의 곡선 위로 천천히 dissolve되면 ...
050 경주 계림 가는 길 [낮]
잔디로 덮인 고분들의 곡선.
가로수가 잘 정리된 도로를 지나가는 현우의 차.
첨성대가 뒤로 보이는 계림 입구에 메타세퀴아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솟아 있다.
051 계림 안 [낮]
나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활엽 고목들의 숲.
그 속을 현우가 천천히 거닐고 있다.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거대한 나무들의 다양한 모습들... 무거운 듯 가지를 땅에 내린 나무. 그 가지가 또 하나의
나무가 되고... 연륜 만큼이나 억센 주름이 잡혀있는 나무들.
벤치에 앉는 현우. 계림을 관통하는 작은 수로가 앞에 있다.
민주 v.o.
천 년도 더 됐을 것 같은 이 나무들 속에 앉아 있으면...
마치 나 자신도 천 년 전의 어느 시간 속을 떠다니는 것 같애.
수로 앞으로 와 몸을 숙이는 현우. 나뭇잎 하나를 물 위에 띄어 본다.
민주 v.o.
만약 내가 천 년 전에 이 숲을 걷고 있었더라도...
난 저 앞에서 걸어오고 있는 널 알아봤겠지?
수로를 따라 흘러가는 나뭇잎.
계림 반대쪽, 누군가 수로 밑으로 몸을 낮춰 흐르는 물에 손을 담가 보는데...
세진의 손에 와 닿아 멈추는 나뭇잎.
052 바닷가 식당 [저녁]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는 항구의 작은 식당.
한 무리의 회식 팀이 술과 회를 먹으며 시끌 벅쩍...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현우. 바닥에 있던 신문을 집어서 본다.
헤드라인에 실린 기사들 ... 아이콘 캐피탈 수사 난항 - 정치권으로의 수사 확대 가능한가?
음모론 제기하는 여당 실세들 -.
053 바닷가 민박집 풍경 [새벽]
파도 소리를 배경 삼아 나란히 서 있는 두 채의 방갈로.
한 쪽은 불이 꺼져 있고 한 쪽은 켜져 있다.
off screen에서 들려오는 삐삐 소리.
054 도서관 [낮]
(flashback) 삐삐 소리 이어지며 카메라 앞으로 벌떡 일어나는 창호의 커다란
얼굴. 반쯤 감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면...
조용한 도서관, 다른 고시생들의 살의로 가득한 눈빛이 창호을 향하고 있다.
창호, 자기가 아니라는 듯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옆을 보면...
그 옆에서 편한 얼굴로 곤히 자고 있는 현우.
(도서관 로비) 공중전화 부스 안의 현우. 삐삐를 만지작거리며 전화를 하고 있다.
"한 개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메시지, 오후 세시 십육 분."
민주(F)
나야, 공부 잘돼? 난 지금 포항 위에 있는 내연산이란 데 와 있거든.
근데 ...
055 내연산 입구 [낮]
(flashback) 공중전화 부스의 민주. 땀방울 맺힌 얼굴이 건강해 보인다.
황선배 등 촬영 팀은 차 옆에 앉아 쉬고 있고 ...
민주
산이 되게 좋아. 폭포가 열두 개나 있는데 다 예쁘고 ...
올라가는 데 별로 힘이 안 들어서 너도 좋아할 거 같고 ...
그래서 그냥 메시지 남겨보는 거야.
다음에 꼭, 같이 한 번 와 볼까 해서...
밝은 얼굴로, 그러나 아쉬운 듯 말을 맺고는 ... 어느 한 곳을 응시하는 민주.
(현재) 그 곳에 현우가 서 있다. 텅 빈 공중전화 부스를 보며 ...
걸음을 옮기는 현우. 300년 생 느티나무와 일주문이 서 있는 절 입구로
056 내연산 등산로 [낮]
숲을 관통하는 깊은 계곡을 따라 땀에 젖은 얼굴로 한 걸음 한 걸음 산을 오르는 현우.
먼발치로 ... 앞서 가는 여자 등산객의 뒷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
세진이다.
거리가 벌어지며, 무리져 내려오는 다른 등산객들의 틈 사이로 홀연히 사라지는 세진.
산의 적막 속에 ... 들리는 것은 계곡 물소리와 현우의 거친 숨소리 뿐.
그 숨소리 너머로 ...
등산객들마저 사라진 길 위에 산을 오르는 민주의 뒷모습이 보인다.
057 관악산 등산로 [낮]
(flashback) 민주가 뒤돌아보면 ... 현우는 땀에 절어 기진맥진이다.
멈춰 서서 기다리는 민주.
민주
좀 쉬었다 갈까?
현우
(헐떡거리면서도) 아니, 됐어.
민주
힘들지 않아?
현우
이 정도 가지고 뭐 ...
오기가 생기는 듯 민주를 앞질러 가는 현우.
몇 걸음 못 가 ...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현우
(기다렸다는 듯) 쉬었다 가자.
바위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두 사람. 배낭을 내려놓고, 땀을 식힌다.
그사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현우.
민주
또~! 산에서 누가 담배를…
현우
(헉헉거리며) 괜찮아... (능청스럽게 웃으며) 비도 오는데 ...
비 내리는 산과 도시의 풍경을 바라다 보며…
시원하게 들려오는 빗소리.
민주
하늘 위에서 들으면 ... 비는 아무 소리도 없이 내릴 거야, 그치?
우리가 듣는 빗소리란 건, 비가 땅에 부딪히고, 지붕에 부딪히고, 우산에 부딪히고 ...
그러면서 내는 소리잖아.
그래서 우린 비가 와야지 우리 주위에 잠자고 있던 사물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구...
... 재밌지 않아?
현우
(꺼진 장초를 들고 아쉬운 듯) 별로.
민주
... 그럼, 내가 진짜 재미있는 거 가르쳐 줘?
현우
(무심하게 바라만 본다)
민주
(팔꿈치에서 손목까지를 가리키며) 사람은 누구나 이 길이랑 발 크기가 똑같데... 몰랐지?
현우
진짜?
민주
(고개를 끄덕이며) 진짜야. 못 믿겠으면 한 번 재봐.
현우
(주저앉아 팔에 발바닥을 대 보고는) 오! 진짜네!
민주
인체의 신비지... 하나 더 가르쳐 줄까?
일루 와봐.
민주의 옆으로 바싹 다가와 앉는 현우.
민주
(손바닥을 쫙 펴며) 이 길이랑 얼굴 길이랑도 똑같애.
자신의 손바닥을 쫙 펴서 얼굴로 갖다 대는 현우 ... 그 순간 손등을 퍽 치는 민주.
현우
(코를 움켜쥐며) 아-! 뭐야?
민주를 빗속으로 밀어내는 현우. 민주가 들어오려고 하면 다시 밀어내고... 이번엔 민주가
현우를 끌어당기고... 그렇게 비에 젖으며 장난을 치는 두 사람.
058 12 폭포 [낮]
(현재) 비를 맞은 듯 땀방울이 맺혀있는 현우의 얼굴.
관음폭 앞에 서서 가쁜 숨을 몰아 쉰다.
숨을 고르면서 담배를 꺼내는 현우... 그러나 곧 집어넣는다.
관음폭 위로 난 구름다리.
어떤 노부부가 세진에게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을 한다.
카메라 프래임 안으로 다정하게 포즈를 잡는 노부부.
좋은 사진을 위해 무척 애쓰는 듯 신중하게 움직이는 프래임 위로...
세진
(목소리) 네, 좋구요... 자, 그럼...
그때 구름 다리 저 쪽에 서 있는 현우의 모습이 보인다.
카메라를 내리는 세진.
세진
(현우를 향해) 저기요, 아저씨.
듣지 못한 채 다리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 현우.
세진, 노부부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싸인을 보내고 현우를 향한다.
세진
저기 죄송한데요 ...
현우
(세진이 들고 있는 카메라를 잡으며) 주세요.
세진
?… 아니, 그게 아니구요, 자리 좀 잠깐만...
세진의 뒤로 현우를 바라보고 있는 노부부가 보인다.
세진과 노부부를 지나 말없이 다리를 건너 가는 현우.
연산폭 옆 바위 벽에 앉아 쉬는 현우.
폭포수가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다.
059 바닷가 모텔 앞 [새벽]
동이 트지 않은 어둠 속에 가로등만 빛나고...
배낭을 메고 모텔을 나온 세진, 히치하이킹을 하려는 듯, 길가에 선다.
그러나 지나가는 차는 한 대도 없고... 난감해지는데...
그때 막 모텔 주차장 한쪽에서 차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향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세진.
기대에 찬 표정으로 차를 향해 달려간다.
세진
저기요! 저기요!
차를 향해 다가오는 세진을 발견한 현우.
조수석 쪽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면...
세진
저기, 죄송한데... 요 언덕 넘어 까지만...
(하다가 현우임을 알아보고는) ...!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060 해안도로를 달리는 현우의 차 안 [새벽]
어두운 차 안. 말이 없는 현우와 세진.
차가 '해맞이 공원' 표지판을 슥 지나쳐 간다.
깜짝 놀라는 세진, 현우의 팔을 탁 잡으며...
세진
아저씨! 어디 가세요!?
현우 역시 깜짝 놀라 차를 끼익 세운다.
놀란 채로 세진을 보면 ...
세진
... 지나왔잖아요.
현우도 숨을 한 번 고르고는 뒤를 한 번 쓱 돌아본다.
현우
몰랐어요.
차를 돌리는 현우.
세진 괜히 머쓱해진다.
061 해맞이 공원 [새벽]
야생화와 전망대의 풍경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공원 너머로...
태양이 떠오르는 장관이 펼쳐진다.
등대 전망대에서 해를 맞는 현우.
세진은 바다와 맞닿은 계단 아래쪽에서 일출을 보는데...
태양을 마주 본 세진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그런 세진을 바라보고 있는 현우.
계단을 올라오는 세진. 역시 등대 전망대 위의 현우를 바라본다.
멀리 일출을 보며 생각에 잠긴 듯한 현우의 모습.
어긋나는 두 사람의 시선.
차 안에서 민주의 노트를 보는 현우.
밖으로 바다를 보는 젊은 부부와 꼬마 여자아이가 보인다.
아빠한테 안겨서 자꾸 꾸벅꾸벅 조는 아이와, 딸을 깨우려고 애쓰는 엄마.
그 모습을 보는 현우의 얼굴.
그때 세진이 막 계단을 올라 현우를 향해 온다.
민주의 노트를 가방에 집어넣는 현우.
세진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우
네.
형식적으로 인사를 하고 시동을 거는 현우.
밖을 보면... 세진이 차 옆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현우
(천천히 창문을 내린다) 어느 쪽으로 가세요?
세진
네? … 울진 쪽으로요.
현우
(잠시 사이를 두고) ... 불영계곡 있는 데가 울진 맞나요?
세진
(순간 얼굴이 환해지며) 네.
062 7번 국도를 달리는 현우의 차 [낮]
어촌을 끼고 나있는 해안도로를 달리는 현우의 차.
차 안, 현우와 세진이 아무 말 없이 어색하게 앉아있다.
난처한 표정으로 정면을 보고 있는 현우와 세진.
앞을 보면 좁은 다리 위로 잔뜩 멋을 부린 마을 할아버지가 시동이 걸리지 않는
낡은 오토바이에서 끙끙대고 계신다.
클락션을 울릴 수도 없고 ... 그냥 바라만 보는 현우와 세진. 둘의 어색함은 더해 가는데...
이제야 뒤를 의식하고는 마치 오토바이의 시동이 걸린 양, 슬그머니 발로 밀고 나가는
... 넘어질 듯 뒤뚱거리며 가는 할아버지와 오토바이.
그 모습을 보는 현우와 세진의 얼굴, 동시에 살짝 웃음이 보인다.
아름다운 해안도로.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현우와 세진.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독자들의 편지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흐르는데...
어느 대목에서 진행자들도 폭소가 터질 만큼 우스운 부분이 나온다.
웃음이 터지는 세진.
딴 생각을 하던 현우가 고개를 돌린다.
세진, 멋쩍은 듯 웃음을 감추는데...
현우가 무심코 라디오 볼륨을 올려주자... 더 머쓱해지는 세진.
그 머쓱함을 만회하려는 듯...
세진
이 길... 7번 국도 좋아하세요?
현우
난 길 잘 몰라요.
세진
네...
할 말을 잃은 세진.
뒤늦게 썰렁함을 눈치 챈 현우, 조금 미안했는지, 라디오 볼륨을 줄이며...
현우
이 길 좋아하세요?
세진
네...
사실 동해 바다랑 소나무들이 있어서 7번 국도가 아름답다고들 하지만요...
(지나치는 마을을 가리키며) 저런 어촌 마을이 있고... 그 안에 저렇게 사람 사는
모습들이 있어서 이 길이 더 좋은 것 같애요.
그물을 고르는 중년의 부부... 털털거리는 오토바이를 모는 할아버지...
검게 탄 아이들의 웃음... 평화로운 어촌 마을의 풍경이다.
세진
그래서 그런지...
이 길을 가다가 만나는 마을들은 꼭 이름을 한 번씩 불러줘야 된데요.
안 그러면 서운해 한다구... 병곡, 후포, 평해, 월송, 덕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현우를 느끼는 세진.
현우
그걸 다 외워요?
현우를 살짝 보고는 고개만 끄덕 끄덕...
현우
... 서울에서 왔어요?
세진
네... 서울이시죠?
현우
예.
차는 계속 7번 국도를 달린다.
063 터널 안 [낮]
빵- 빵-, 여기저기서 클락션이 울리고... 차들로 꽉 막힌 터널 안.
터널 안에서 충돌사고 있었던 것.
충돌차량에는 부상당한 사람들이 부축을 받아 터널 밖으로 빠져나가고 ...
사고가 수습되길 기다리며 의자에 몸을 묻는 현우. 그러나 ...
세진은 불안하다.
터널의 둥근 벽면이 좁아지는 느낌, 호흡이 빨라지고, 손이 미세하게 떨리며 ...
클락션 소리 아득히 멀어진다. 그리고 ... 막 환청이 들리려 할 때 ...
세진
(당황해서) 저 내릴게요. 죄송합니다. 아니... 감사합니다.
당황한 듯 말을 던지고, 황급히 차에서 내리는 세진. 터널 밖을 향해 빠르게 걸어간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놀라는 현우.
영문을 모르고... 그저 차에서 내려 세진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064 국도 변 [낮]
배낭을 메고 천천히 걸어가는 세진.
사고차량을 끌고 가는 견인차가 그녀 옆을 지나가고... 터널 안에 있던 차들도
천천히 그 뒤를 따르는데 …
현우의 차가 갓 길에 와서 멈춘다.
차에서 내리는 현우. 멈춰서는 세진.
현우
... 괜찮아요?
세진
(끄덕이며) ... 죄송해요. 자꾸 놀라게 해 드려서... (멋쩍게 웃는다)
현우
(터널 쪽을 한 번 가리키고는) ... 힘들었나봐요.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세진.
현우
(세진을 보며) 타세요. 난 사고 나게는 운전 안하니까...
자신을 바라보는 현우의 편안한 얼굴.
세진 고마운 듯 미소 짓는다.
065 불영사 [낮]
커다란 연못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절의 앞마당.
연못 앞에 현우와 세진이 있다.
세진
이 절 이름이 왜 불영사인지 아세요.
현우
?
(fiashback) 연못 앞에서 스님을 인터뷰하는 촬영 팀.
스님을 촬영하는 카메라 뒤로 스크립트 북을 든 민주가 서있다.
스님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면... (옆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떠들자) 거기 좀 조용히 해 주세요.
(그래도 계속 떠들면, 안타깝게) 거기 좀 조용히 해주셔야 한다니까요...
자, 다시 ...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면 … (그래도 시끌시끌하자, 땅이 꺼질 듯 한숨을 푹
쉬고는) 허 참, 방송을 모르시네. 조용히 하셔야 되는데 ...
웃음을 참는 민주와 스텝들.
스님
자, 진짜로 가겠습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면, 저기 저 서쪽 산 위에 있는 바위 보이시죠?
(일제히 고개를 돌리는 스탭들) 저기 저거...
저 바위가 가만히 보면 부처님 형상을 하고 있거든요. 저 바위가... 이 연못에 비치게 되죠.
(촬영팀의 분위기를 보며) 다 됐죠? 편집해서 쓰세요.
황선배 몰래 부처님 바위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민주.
(현재)
민주처럼 바위를 향해 서있는 세진.
세진
그래서, 부처님 '불'자에 비칠 '영'자 해서 불영사에요.
현우
잘 아시네요.
세진
(현우 바로 뒤의 표지판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현우, 돌아보고는 ... 피식 웃는다.
066 불영계곡 아래
깊고 거대한 계곡 돌밭을 따라 계곡 옆을 거니는 현우와 세진.
세진과 현우 바로 옆에서 나란히 걷게 된다.
세진
사실은 세 번째 오는 거예요.
현우
같은 장소를 자주 찾는 사람들이 정말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던데?
세진
글쎄요? 그냥 제겐 특별한 곳 들이라서요.
근데, 초행이신 거 같은데 어떻게 이 쪽으로…?
세진을 바라보는 현우. 잠시 말 문이 막힌 듯...
현우
친구가... 한 번 가보라고 해서요.
세진
그 친구가 뭘 좀 아는 분이구나... 어때요, 와보니까 좋죠?
현우
네... 좋네요.
067 불영계곡 위 선유정 옆 절벽 [오후]
시멘트 턱에 나란히 앉아있는 현우와 세진.
위에서 보는 계곡의 깊이와 크기는 웅장하다 못해 경외롭다.
가만히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던 현우. 뜬금없이...
현우
참 작아요.
세진
네?
현우
사람이 참 작다구요.
이렇게 손가락으로 꼭 누르면 눌릴 것 처럼...
손가락으로 계곡 아래의 사람을 꾹 눌러보는 현우.
세진은 그런 현우의 행동이 의외라는 듯이 현우를 쳐다보다가 ...
세진
어렸을 때 개미 같고 장난치던 생각 나네요. 요렇게 길을 막고, 요렇게 잡아 올리고...
근런데 난 그렇게 눌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역시 손가락을 움직이며 얘기하는 세진.
현우
혼자 다니는 거... 무섭지 않아요?
세진
(잠시 사이를 두고) 좋은 여행을 하려면 마음을 열어야 한다구 그랬어요, 새로운 장소랑,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일들에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구요...
가만히 세진을 바라보던 현우. 세진과 시선이 마주치자 계곡아래로 시선을 돌린다. .
세진도 시선을 돌리면, 세진의 얼굴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온다.
세진
올해는 여름이 빨리 오는 것 같죠?
벌써부터 바람에서 여름 냄새가 나요.
순간, 세진을 보는 현우.
깊은 숨을 들이쉬며 살며시 눈을 감는 세진.
현우의 눈에 세진의 아름다운 옆 모습이 들어온다.
바람에 머리칼이 날리는 세진의 옆 모습… 그 때의 민주처럼…
068 불영사 입구 주차장 [오후]
창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면...
캔 커피 하나를 들고 서있는 세진.
세진
(웃으며) 차비를 이 걸로 때워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현우
잘 마실게요.
... 이제 어디로 가요?
세진
오늘은 이 근처에서 잘 거거든요. 통고산이라고...
지금 떠나시죠?
현우
네...
어떻게 ... 차편은 있어요?
세진
(버스가 서있는 곳을 가리킨다) 저기...
(웃으며) 오늘 하루 너무 고마웠습니다.
현우
... 남은 여행 잘하세요.
세진
네, 조심해서 가세요... 좋은 여행되시구요.
인사를 하는 세진. 차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출발하는 현우.
세진이 돌아서서 버스를 향해 갈 때 ... 멈추는 현우의 차.
백미러로 세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현우.
돌아보는 세진.
현우가 다시 차를 출발시킨다.
069 울진 소광리 춘양목 숲 입구 [오후]
철문이 닫혀 있고, "자연 휴식 년제 적용 / 출입금지" 푯말이 붙어 있다.
험한 길을 달려오느라 엉망이 된 차 앞에 현우가 서 있다.
민주의 노트를 꺼내 읽어보는 현우. 무심코 앞 페이지들까지 뒤적이는데...
어느 대목에서 현우의 시선이 정지된다.
민주 v.o.
7번 국도를 따라 달릴 때 스쳐 지나가는 마을들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그 마을들이 왠지 서운해 할 것 같아.
멍한 얼굴로 허공을 보는 현우.
뒤쪽 페이지를 쭉 넘겨보면 '넷째 날' 페이지에 "울진 →정선 →구절리"라고 그려진
지도가 있다
070 정선역 앞 [아침]
산자락 바로 밑의 작은 역사. 장날이라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역 앞 광장에서 서성이는 현우.
커다란 짐들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속에서 ... 누군가를 찾는 듯.
073 플랫폼, 한 량짜리 객차 안
뒤편으로 작은 시골집들이 하얀 연기를 피우고 있는 플랫폼.
구절리 행이라 적혀있는 한 량 짜리 꼬마열차가 서 있다.
객차 안.
객차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현우.
창 밖으로 객차 입구와 개찰구를 번갈아 가며... 객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
사람들과 커다란 짐으로 가득 채워진 기차. 기적 소리를 내며 막 출발하려 한다.
이윽고 체념하는 듯 창에서 눈을 거두는 현우.
기차, 조금씩 속도가 오르면...
그때, 누군가의 뒷모습이 허겁지겁 열차를 따라 뛰어와 가까스로 열차에 오른다.
난간을 붙잡고 가쁜 숨을 고르는 세진.
잠시 후, 입구의 작은 창으로 객실 안을 흘끗 보는 세진의 얼굴 나타난다.
많은 사람들 속에 가려 서로를 보지 못하는 현우와 세진.
땀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세진과 망연히 창 밖을 바라보는 현우.
꼬마열차는 산마을을 지나고 ... 개울을 가로지른 철교를 지나... 터널 속으로 들어간다.
072 구절리 역
구절리 마을 풍경...
비가 내리는 구절리 역 플랫폼에 서 있는 한 량 짜리 기차.
비를 피해 서둘러 빠져나가는 마을 사람들.
마을 사람들 빠져나가자 작은 플랫폼에 현우만이 남아있다.
역을 지나서도 계속 이어져있는 철길.
현우가 비를 맞으면서 그 철길 위를 걷고 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을 것만 같던 철길이 ... 어느새,
무릎 높이의 X자 표지판 앞에서 툭 끊겨있다.
현우 가만히 서서 그 곳을 바라본다.
민주 v.o.
길의 시작과 끝이 어딘지 궁금해 질 때가 있지?
그곳에 가면 길의 시작과 끝을 볼 수 있어.
천천히 허리를 낮추는 현우.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듯...
그런데...
세진
기찻길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난다는 거 모르셨죠?
세진의 목소리와 함께... 현우의 머리 위로 씌워지는 우산.
세진
근데 여기가 또 시작이에요. 이렇게 방향만 바꾸면.
말과 동시에 현우를 향해 몸을 돌리는 세진.
세진, 현우에게 우산을 건네고... 현우, 말없이 우산을 받아 든다.
세진
(농담조로) 이렇게 자꾸 만나는 게 우연치고는 좀...
혹시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웃는 얼굴로 현우를 바라보는 세진
그러나, 어제와는 다른 현우의 표정... 너무나 낯설다.
한 우산 속에 마주 선 두 사람.
세진의 숨결이 현우에게로 와 닿는다.
그 숨결을 느끼면서...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현우.
세진, 무안함과 어색함에서 피하려는 듯,
우산을 빠져 나와 기찻길의 끝으로 천천히 발을 옮긴다.
... 현우는 그런 세진의 모습을 힘겹게 보고 있다.
세진
(애써 밝은 목소리로) 빗소리가 참 시원하죠?
아세요? 비가 와야지 우리 주위에 잠자고 있던 것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거…
우산이랑, 집 지붕들이랑, 저 나무들... 그리고 이 철길도...
심장이 멈추는 듯한...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는 현우.
그리고...
현우는 세진의 뒷모습에서 드디어 민주의 목소리를 듣는다.(S# 55의 목소리)
민주 v.o.
다음에 꼭, 한 번 같이 와볼까 해서.
꼭, 한 번 같이 ...
넋을 잃은 듯 세진을 바라보는 현우.
현우의 눈이 천천히 젖어 들어간다.
그리고... 나지막이 속삭이는...
현우
민주야
빠-앙- 기차의 기적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 현우의 목소리.
현우
민주야.
뭔가 느낌을 받고 돌아서는 세진.
자신을 바라보는 현우의 젖은 눈... 그 눈이 심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본다.
놀라서 빤히 쳐다보는 세진.
현우는 뭔가를 말하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대지에 부딪히는 빗소리만이 두 사람을 감쌀 때...
세진, 현우에게 부담을 느끼는 듯... 황급히 걸음을 옮긴다.
세진
기..기차가 출발하려나 봐요... 먼저 갈게요.
현우를 지나쳐... 다시 철길 위를 되돌아 걷고 있는 세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는 현우. F.O.
073 해안선을 달리는 현우의 차. [낮]
F.I.
너무나 혼란스러운 마음 ... 운전하는 얼굴이 어둡다.
빠-앙, 맞은편에서 커다란 클락션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덤프트럭.
074 전나무 숲 길
길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높게 솟은 전나무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숲길을 만들고 있다.
무거운 얼굴로 천천히 숲길을 걸어 내려오는 현우.
전나무 숲길 사이의 쉼터.
나무로 된 피크닉 의자들이 놓여 있는 머물목.
그 곳에 현우가 앉아 있다. 민주의 책을 읽고 있는 ...
민주 v.o.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전나무 숲이야.
수백 년 세월을 지켜온 이 전나무들이... 왠지, 그 동안 바람이 들려주고 간 수많은
비밀들 중에 한 가지쯤은 지금 우리에게 얘기해 줄 거 같지 않니?
고개를 드는 현우, 무거운 얼굴로, 전방에 초점 없이 시선을 주고 있을 때...
쉼터 앞 전나무 사이로 노트를 들고 걸어오는 민주의 모습이 보인다.
나무에 가리웠다 드러났다... 점점 다가오는 민주의 모습이 커다란 나무에 감추어지면
그 나무 뒤에서 한 발짝 걸어 나오는 세진.
민주가 겄던 그 길로 걸어오고 있다.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현우.
걸어오던 세진도 현우를 보고 멈춘다. 놀란 눈빛...
세진, 그냥 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가는... 마음이 바뀌었는지 현우에게 천천히 다가온다.
다가오는 세진을 보는 현우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려오는데 ....
아무 말 없이 마주 선 두 사람.
현우
(초점 없이)... 우린 왜 자꾸 만나는 거죠?
괴로움으로 번진 현우의 얼굴.
그런 현우를 보고 당혹스러운 세진.
현우
난... 난 그냥 민주의 여행을 따라가는 것뿐인데...
우린... 왜 자꾸 만나는 건가요?
민주라는 말에 놀라는 세진. 그런 세진의 눈에 들어오는 민주의 노트.
세진의 떨리는 손이 민주의 노트를 향한다.
그녀의 흔들림을 느끼는 현우.
순간...
그 곳에서 벗어나려는 듯, 급히 돌아서서 멀어지는 세진.
현우, 잠시 머뭇거리다가는... 세진에게로 달려간다.
세진을 잡아 세우는 현우.
현우
뭐죠? 우리 민주... 민주하고 당신은 도대체 뭐죠?
우리 민주하고 당신...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마는 세진.
괴로운 듯 두 눈을 꾹 감는다.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들. 뭔가가 빠르게 추락하는 듯한...
하얀 붕대를 눈에 감고 있는 여인... 어둠이 걷힌 환함 속에 아른거리는 사람들.
그리고... 눈부시도록 푸르른 나무 한 그루.
이 모든 이미지들이 혼재 된 속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도... 도... 미... 미...
075 (s# 17의 상황) 쇼핑 몰 매장 안
앞 씬의 피아노 소리 이어지면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민주의 뒷모습을 향해 다가오는 누군가의 시선.
도... 도... 미... 미...
쿵--.
깜짝 놀라 멈추는 민주, 그 뒤로... 머리를 땋은 여직원 세진.
곧바로...
민주와 세진을 안은 채 너무나도 허망하게 밑으로 꺼져버리는 바닥... F.O.
076 매몰된 공간
어둠...
작은 신음소리... 아주 천천히 그 어둠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곳은 콘크리트 더미 속에 생긴 작은 공간이었다.
정신이 드는 세진... 다급하게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더듬는다.
자신의 얼굴과 몸을 만져보는 세진. 다친 곳은 없다. 그러나 공포를 느낀다. 숨소리가 거칠다.
세진
(누구를 부르는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현이 언니! 과장님! 어디 있어요!
규영아, 현미 언니!
절규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리는 세진. 혼잣말처럼 "살려주세요."를 되뇌이며... F.O.
F.I.
민주
울지 말아요.
아주 가까운 곳... 무너진 콘크리트 벽을 사이에 둔 옆 공간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깜짝 놀라는 세진, 공포에 떠는 목소리로
세진
누구... 누구세요.? 누구세요?
민주
너무 소리지르지 마세요. 금방 탈진할 지도 몰라요.
계속 불안한 눈동자지만... 세진의 목소리가 낮춰진다.
세진
어떻게 된거죠? 전쟁이 난 건가요?
민주
글쎄요... 건물이 무너진 거 같은데...
세진
무너져요? (울먹이듯)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민주
큰 사고라면 그만큼 구조대도 빨리 올 거예요.
... 다친 데는 없으세요?
세진
네... 없는 것 같아요.
민주
다행이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세진
...
벽을 사이에 두고 잠시 정적이 흐른다.
민주
우리 인사할까요. 저는 서민주라고 해요.
세진
(멍하니 말이 없다)
민주
이름이 ... 뭐예요?
세진
... 윤세진이요.
민주
뭐 사러 왔었나 보죠?
세진
… 여기 아르바이트 생이에요.
민주
아... 어느 매장에서 일하는데요?
세진
피아노 매장.
민주
그럼 아까 저 봤어요?
피아노 앞에서 피아노 통통거리고 있었는데...
세진
... 뒷 모습만 봤어요.
민주
그래요? ... 나 되게 예쁜데.
세진
...
민주
세진씨도 예쁘죠?
세진은 말이 없지만 ... 그 사이 점점 안정되어 간다.
세진
안 다치셨어요?
민주
... 좀 다친 거 같아요.
다리에 ...감각이 없네요.
놀라는 세진.
처음으로 보여지는 민주의 공간.
세진의 공간보다 더 어두워 거의 형체가 보이지 않는 곳.
벽에 기대어 있는 민주. 그 만큼의 넓이가 전부 인 듯...
식은 땀에 젖은 그녀의 얼굴. 힘겹게 고통을 이겨내고 있다.
077 전나무 쉼터
나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현우와 세진.
현우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세진의 얼굴에 괴로움이 묻어 있다.
세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언니는... 언니는 많이 아팠어요.
아주 많이...
세진의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몸을 돌려 앉으며 고개를 숙이는 세진.
환청을 듣기 시작했던 것이다. 쿵, 쿵... 강하게 벽을 때리는...
괴로워하는 세진.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세진
(힘들게) 죄송해요...
비틀거리듯 뒤 돌아 걸어가는 세진.
현우는 아직 충격이 안 가신 듯, 그 자리에 그냥 앉아있다.
후두두둑... 전나무 숲 위로 한 마리 새가 날아간다. .
078 산 중턱의 귀틀집 민박 [해질 무렵]
체에서 내리는 현우와 세진. 둘 사이의 거리감...
079 귀틀집 세진의 방 [밤]
진흙으로 바른 정감있는 방.
세진이 자신의 한 쪽 손을 펴 보고... 그 손끝을 살며시 만져 보기도 하고...
080 정신과 진료실 (S# 32 세진의 기억과 연결) - 몽타쥬
과잉 노출 된 창. 그 앞에 앉아있는 세진과 주치의.
주치의
이젠 정말 그만 오려고 그래요?
* * * * *
주치의
물론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어떤 갑작스런 변화의 상황이 오면 느닷없이 그때의 충격이
되 살아날 지도 몰라요.
* * * * *
주치의
세진씨는 ... 아직 그때 일 한 번도 얘기하지 않았어요.
F.O. 하면서 세진의 목소리
세진
(목소리) 괜찮을 거예요. 이젠... 괜찮을 거예요.
081 귀틀집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 [밤]
모닥불이 피워져 있는 곳.
현우가 모닥불을 등지고 앉아 산의 밤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어둠과 정적 속에 혼자인 현우.
주위를 에워싼 밤벌레 소리만이 점점 커져 갈 때...
현우의 옆으로 세진이 다가와 앉는다.
고개를 돌리는 현우.
세진, 멀리 밤공기 속에 시선을 준 채...
세진
한 번도 그 때 일... 얘기해 본 적이 없어요.
현우
(말없이 세진을 바라본다)
두 사람을 둘러싼 어둠이... 매몰 공간의 어둠으로 서서히 변해 간다.
082 매몰 공간
세진
(떨리는 목소리) 아무도 우릴 발견 못하면 어떡하죠?
민주
조금만 참고 기다려 보죠, 마음 편하게 먹고...
세진
난 그런 거 잘 못해요.
민주
그럼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려봐요.
세진
어디로요?
민주
글쎄...
그냥 ... 큰 나무 한 그루를 상상해 볼까요?
세진
어떻게...?
민주
음... 눈을 감고...
머리 속에 나무 한 그루를 그리는 거예요. 엄청나게 크고 녹색이 짙은 나무를...
눈을 감는 세진.
민주
그 나무 맨 꼭대기에 있는 나뭇잎들 있죠? 그걸 봐요.
뒤로는 하늘이 파랗게 보이고, 그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고, 나뭇잎들은 시원하게 흔들리고...
(image cut - opening 씬의 나무)
세진의 vision으로 녹색 잎으로 뒤 덮인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보이기 시작한다.
세진
(목소리) 언니는 그렇게 날 안정시켜 줬어요.
083 언덕 위
눈을 뜨는 세진.
현우는 아무 말이 없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세진
구조되길 기다리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야기하는 것 밖에 없었어요.
언니하고 난 말도 놓고... 얘길 아주 많이 했어요. 일 얘기, 가족 얘기, 친구들 얘기...
그리고 ... 현우 오빠 이야기.
'오빠'라는 말에 ... 물끄러미 세진을 보는 현우.
084 매몰 공간
민주
우리 ... 한 달 있으면 결혼이야.
세진
진짜? 언니 축하해!
언니 더 힘내야 되겠다. 여기서 건강하게 나가야지.
민주
그래야지.
세진
오빠랑은 어떻게 처음 만났어?
민주
음... 대학교 2학년 때, 학교 방송 반이었는데, 그때 신입생들 상대로 인터뷰를 하고
있었거든…
세진
그럼 그때 현우 오빠 인터뷰했던 거야?
085 대학 교정
(flashback) 앳띤 얼굴의 민주가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교내 인터뷰를 하고 있다.
민주
그럼 마지막으로 총학생회에 바라는 것 한 가지만 말 해 주실래요?
꼿꼿하게 서서 인터뷰를 하는 학생.
그 인터뷰 대상 하생 뒤로 천천히 들어와 카메라에 잡히는 한 학생이 있는데
… 현우이다. 어딘가를 보고 환하게 웃고있는 현우의 얼굴.
그 웃음에 끌려 … 인터뷰 대상자를 넘어 현우를 향해 줌 인해 들어가는 민주의 카메라.
너무나도 선하게 웃는 현우의 웃음이 민주의 화면 가득 잡히면서…
민주
(목소리) 그 웃음이 너무 좋았어.
086 매몰 공간
민주
나... 힘들 때마다 현우가 웃는 모습을 떠 올려.
사실... (쑥스러운 듯) 난 아직도 현우 웃는 얼굴을 보면 ... 가슴이 떨리거든...
세진
나도 그 웃음... 보고 싶다.
민주
(미소지으며) 내가 나중에 꼭 소개시켜 줄게.
F.O.
암흑과 정적 속을 울리는 삐삐 소리.
F.I. 민주의 공간 어디선가 삐삐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민주에게는 몸을 움직일 만한 공간이 없다.
결국 소리가 끊기고...
세진
언니 거야?
민주
그런 거 같은데.
세진
현우 오빠겠지?
민주
....
* * * * *
밖에서 비가 내리고 있는 듯... 콘크리트 틈 사이로 가는 물방울들이 떨어진다.
물을 받아 마시는 두 사람. 그 초췌한 얼굴...
* * * * *
잠시 말이 없는 두 사람, 그 침묵이 두 사람의 공간을 더욱 무겁게 짓누른다.
그때, 무언가를 찾은 듯, 벽을 더듬거리는 세진.
세진
언니, 우리 사이에 있는 이 콘크리트 더미 밑에 작은 틈이 나 있는 것 같은데...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까?
세진의 말에 힘을 내어 벽으로 몸을 붙이는 민주.
세진도 민주를 향해 힘껏 손을 뻗는다.
작은 틈 사이로... 민주와 세진의 손끝이 닿는다.
서로의 존재를,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두 사람.
세진
언니?
민주
응?
세진
우린 ... 어떤 인연일까?
이렇게 같이 있어서 ... 정말 다행이야.
세진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민주.
(현재 - 언덕 위) 세진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현우.
민주와 현우의 얼굴이 세진을 사이에 두고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
087 현우의 아파트 (S# 6의 상황)
(flashback) 현우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민주.
현우
(목소리) 우린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된 걸까?
이렇게 같이 있어서 … 정말 좋다.
민주가 자신의 무릎을 배고 누워있는 현우를 내려다 보고 있다.
현우도 그런 민주를 올려다보면서 씩 웃으면…
천천히 내려오는 민주의 얼굴.
현우의 눈에… 볼에… 코에… 그리고 입에 키스를 한다.
현우의 위로 스르르 무너지는 민주.
얼굴을 마주 대고 장난스럽게 서로를 바라보는데…
삐삐삐 - 울리는 호출기 소리.
* * * * *
현우
오늘 일요일이잖아.
* * * * *
현우
꼭 그래야 되는 거야?
* * * * *
엘리베이 터 안에 나란히 서 있는 현우와 민주.
현우
거긴 너 아니면 일이 안 돌아간 대냐?
* * * * *
버스를 올라타는 민주
민주
끝나면 전화 할게… 미안, 인상 펴라.
* * * * *
버스 안. 삐삐를 보다가 문 앞으로 나가는 민주.
민주가 아까의 버스 정류장 앞으로 달려오면…
길 건너에서 택시를 타고 가는 현우.
아쉬운 듯, 미안한 듯… 현우가 탄 택시를 쫓는 민주의 시선.
삐삐삐- 울리는 호출기 소리.
088 매몰 공간
삐삐 소리 이어서 울리기 시작하지만...
배터리 경고음과 함께 곧 꺼져 버린다.
민주가 말이 없다.
그리고...
민주의 눈이 자꾸 감기려 한다.
세진
언니?
민주
... 응?
세진
자는 거 아니지? 자면 안돼.
민주
(힘겹게 눈을 뜨며) 알아.
(잠시 사이를 두고) 세진아... 여행 좋아하니?
세진
거의 다니지 못했어. 같이 갈 친구도 없고... 아는 데도 없고...
맞아. 언닌 좋은데 많이 알겠다. 그치?
민주
그래...
(가만히 미소가 생기며) 좋은데 ... 많이 알지.
힘없고... 새로 시작하고 싶고... 그래서 멀리 떠나고 싶을때...
내가 얘기해 주는 대로 쭉 돌아봐.
세진
그럼 힘나는 거야?
민주
그럼.
먼저... 바다를 향해서 이 여행은 시작되는 거야.
바다 가운데에... 사막을 가진 섬이 하나 있어.
089 언덕 위
세진
언니는... 오랫동안 여행 얘기를 했어요.
눈물을 담은 채 세진의 눈이 웃고 있다.
세진
너무 좋았어요. 그 풍경들이 눈에 다 보이는 거 같았거든요.
한 군데도 빠지지 않고 다 가보고 싶었어요.
현우
...
세진
그리고... 얘기가 끝났을 때...
언니가 뭔가를 줬어요.
090 매몰 공간
꼭 쥐어진 두 사람의 손. 그러나...
힘이 부치는 듯 민주의 손가락이 하나씩 풀어지곤 하는데...
민주
현우한테... 오늘 이걸 주려고 했어.
세진
뭔데?
민주
지금까지 얘기한 걸 기록해 놓은 거야.
꼭... 현우랑... 둘이서 다시 가보고 싶은 곳들이었거든...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기억하고 싶었어.
... 세진아.
세진
응, 언니.
민주
나중에... 빛 들어오고 밝아지면... 한 번 볼래?
사력을 다해 뭔가를 틈 사이로 밀어 넣는 민주.
그녀의 노트다.
노트를 잡는 세진의 손, 그 위로 민주의 손이 포개어진다.
민주
세진아.
세진
응?
민주
니 얼굴 ... 한 번 ... 봐야 되는데...
세진
그럼.
나 언니랑 입원실도 같은 데 달라 그럴 건데...
민주
... 그래...
민주, 숨소리가 바람 새듯이 가늘어진다.
당황하여 민주의 손을 꾹 움켜쥐는 세진.
세진
언니? 괜찮아?
민주
...
세진
내,내가 재밌는 얘기 해줄까? 언니... 내 동생 세훈이 있잖아. 언니.
세훈이가 있잖아...
계속 말을 하면서 민주의 손을 꽉 쥐어보지만 민주의 손은 점점 차가와 진다.
세진
언니? 지금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지?
민주
(정신이 혼미해져) 엄마... 아빠... 보고 싶어.
세진
(큰소리로) 언니? 언니! 정신 차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하자... 민주의 손을 쥔 세진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데...
세진
언니! 자면 안돼! 일어나!
민주
(힘겹게 눈을 뜨며) 현우...야
세진
언니?
민주
... 어떡하지...
... 나 또... 늦는다고... 현우... 화나 있을 텐데...
나... 지금 가봐야 되는데.
갑자기...
세진의 손끝에 닿아 있던 민주의 손이 스르르 떨어진다.
세진
언니? 언니?
(절규) 언니! 언니!
울부짖으며 미친 듯이 손으로 콘크리트 벽을 때리기 시작하는 세진. 쿵- 쿵-.
세진
손 놓지 마... 손 놓지 마...
... 언니... 제발 ...
공포에 젖어 콘크리트 벽을 계속 때리는 세진. 쿵- 쿵-.
그것은... 세진의 귀에 들렸던, 환청 속의 소리였다.
쿵- 쿵-.
비명과 울부짖음이 섞여 몸부림치는 세진.
결국... 혼절해버리고 만다.
밀폐된 공간 속에서 계속 떠도는 소리들...
사운드 dissolve되면서...
091 언덕 위
괴로움을 이기려는 듯 얼굴을 감싸고 있는 세진.
한동안 현우도 아무런 말이 없다.
밤벌레 소리만이 두 사람 주위에 가득하다.
세진
병원에 있을 때 … 그 노트를 계속해서 읽었어요.
나중엔 다 외울 만큼 돼 버렸죠.
그리고 나선… 그 책을 보내드리려고 했는데…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언니 집에 보내드린 거예요.
Image cut
- 눈에 감고 있던 하얀 붕대를 푸는 세진...
- 환하게 햇살이 들어오는 병실, 침대에 앉아 민주의 노트를 읽고 있는 세진.
- 책의 뒤에 얼룩진 핏자국을 닦으려고 있는 힘껏 수건을 문지르는 세진.
* * * * *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는 세진.
현우가 힘겹게 말을 꺼낸다.
현우
민주의 마지막 말...
마지막에 민주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다시 한 번 들려 주세요?
생각에 잠기는 세진.
그 위로 민주의 마지막 말이 들린다.
민주
(목소리) 현우야…
어떡하지… 나 또 늦는다고… 화나 있을 텐데…
나… 지금 가봐야 되는데…
세진이 입을 연다.
세진
현우 오빠를…
너무 사랑했다고...
사랑해서... 행복했다고...
… 그게 전부였어요.
마치 멈춰진 풍경처럼 움직임이 없던 현우.
회한이 밀려오는 듯... 현우의 눈이 젖어오기 시작한다.
현우
(혼잣말처럼) 그때... 틀림없이 민주는 거길 가길 싫어했는데...
분명... 나한테... 가기 싫다고...
오랜 시간 참아왔던 감정이 터지는 듯...
현우의 뺨으로 제어되지 않은 눈물이 흘러 내린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세진.
밤벌레 소리 위로 현우의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번진다.
092 귀틀집 마당 [아침]
가방을 들고 방에서 나오는 현우.
세진이 묵는 방을 한 번 쳐다보고는... 쓸쓸히 걸음을 돌린다.
현우가 건물을 돌아 나올 때...
그 곳에 세진이 서 있다.
멈칫하는 현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세진.
세진
남은 여행... 제가 안내해 드리고 싶어요.
현우
...
세진
그때... 민주 언니 아니었으면 전 견뎌 내지 못했을 거예요.
... 밤새 생각했어요.
언니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 제가 아는 만큼 알려드리고 싶어요.
현우는 세진의 담담한 미소를 본다.
093 영월 - 몽타쥬
영월 동강과 서강의 아름다운 풍경들.
그 아름다운 풍경들 속의 현우와 세진의 모습이 자연의 소리와 함께 보여진다.
094 마을 이장집
평화로운 마을 안, 강가에 자리잡은 집이 보인다.
현우와 세진이 마당의 수돗가에서 손을 씻는다.
다가오는 이장 아저씨.
현우
감사합니다. 물이 진짜 시원하네요.
이장
(사람 좋게 웃으며) 촌이라 그렇죠. 뭐.
근데, 이 동넨 어떻게 알고 오셨대요?
현우
친구 소개로요... 마을이 참 아늑하고 좋습니다.
이장
(웃으며) 더운데 들어와서 시원한 거라도 한 잔 하고 가요.
현우
아뇨, 괜찮습니다.
이장
에이, 들어와요. 어렵게 찾아왔는데 그냥 가면 서운해요. 시원한 거 한 잔 하고 가요.
머뭇거리는 현우와 세진을 '괜찮아요, 들어와요"하면서 권한다.
095 이장집 거실 [낮]
안으로 들어오는 현우와 세진.
거실 벽에 할아버지부터 손주까지의 가족 사진들이 쭉 붙어 있고... 마을 풍경과 기념
사진들도 함께 있다.
이장이 물을 뜨러 간 사이... 집 안을 둘러보고, 사진들도 무심히 보는 현우와 세진.
그런데...
어느 액자 앞에서 현우의 움직임이 멈춰 버린다.
굳은 현우의 몸.
세진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 현우와 사진을 번갈아 보는데...
액자 속에...
민주와 촬영팀, 이장 등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 있다.
사진을 올려다보는 세진.
사진 속의 민주가 환하게 웃고 있다.
현우
민주 얼굴... 처음 보는 거죠?
세진
...
자신도 모르게 사진 앞으로 다가서는 세진.
그녀의 눈이 젖어온다.
세진
언니... 미안해.
물 컵을 들고 거실로 나온 이장,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현우는 말없이 그런 세진을 지켜보고 있다.
민주의 사진 앞에서 멈춰버린 듯한… 세진의 시간.
조용한 마을 모습 보여주며 ... F.O.
096 읍내 고속 버스 터미널 [오후]
F.I. 사람들로 붐비는 고속버스 터미널.
배낭을 멘 세진이 현우와 마주 서 있다.
왠지 어색한 두 사람.
현우
어떻게 ... 인사해야 되는 거죠?
세진
(잠시 있다가)... 다음 여행 때 또 뵈요.
현우
(미소) 그래요.
세진
조심해서 올라오세요.
현우
(미소)
인사하고 돌아서는 세진.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현우.
출발하는 버스 안.
세진이 차창 밖을 보면...
현우는 계속 그 자리에 서 있다.
097 민주의 고향집 [낮]
열려 있는 문으로 현우가 들어온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조용히 뒷마당으로 돌아가는데...
그 곳에 민주의 부모님이 있다.
재료로 쓰는 나무를 조심스럽게 자르는 아버지와, 손으로 나뭇결을 다듬는 어머니.
두 분이 문득 현우를 본다.
098 아버지의 방 [낮]
오래전에 만든 듯한 나침반 하나를 정성스럽게 손질하시는 아버지.
바닥에 차려진 조촐한 막걸리 상 앞에는 현우와 어머니가 앉아 있다.
어머니
얼굴 마이 좋아졌네... 지도책 보내기 참 잘했구마.
현우
...
아버지
다 됐다.
나침반을 조심스럽게 현우에게 건네주는 아버지.
아버지
주기로 한지 너무 오래 됐지?
현우
... 고맙습니다.
아버지
한 잔 따라봐라.
술을 따르는 현우.
마주 앉은 세 사람의 모습이 평화로워 보인다. F.O.
099 건물 복도 [낮]
어두운 복도 끝으로부터... 정장 차림에 그을린 얼굴의 현우가 걸어온다.
멀고 긴 터널을 빠져 나오듯...
100 부장 검사 집무실 [낮]
소파에 앉아 있는 현우.
부장
(소파로 오며) 얼굴이 좋아보이는데...
현우
네.
부장
아직 며칠 남았을 텐데 ... 오늘 무슨 일로 나왔나?
현우
(결연한 표정으로) 부탁 드릴게 있습니다.
101 현우의 검사실 [낮]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현우.
초여름의 짙푸른 나무들이 바람에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현우의 뒤로 다가오는 박수사관.
박수사관
검사님.
현우
(돌아보면)
박수사관
(머뭇거리다가는) 힘내세요.
뭐 가진 건 없어도 … 검사님 뒤에는 항상 제가 있지 않습니까.
미소짓는 현우.
박수사관이 돌아설 때...
현우
참, 박계장님.
박수사관
예.
현우
저... 제가 지난번에... 여행 중에 누굴 만났는데요,
(멋쩍게 웃으며) 주소나 전화번호 같은 것도 안 물어보고 헤어졌거든요.
박수사관
(감 잡았다는 듯 씩 웃으며) 이름만 말씀하십시오.
102 빌딩 옥상 [낮]
사원들의 휴게 공간으로 공원처럼 만들어 놓은 곳.
평상복 차림의 현우가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정장 차림에 ID카드를 목에 건 세진이 다가온다.
세진
안녕하세요?
돌아보는 현우.
현우
아-, 안녕하세요.
세진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시고...
현우
(멋쩍은 듯 웃는다)
그렇게 입으니까... 예쁘네요.
쑥스럽게 웃는 세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는 현우와 세진.
세진
지금쯤 주문이 걸리셨어요?
현우
?
세진
이 여행이 끝날 때는...
마음속에 나무숲이 가득할 것이다.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 쪽을 한 번 보는 현우.
그리고는... 활짝 웃는다.
얼굴 가득 환한 웃음... 그 웃음은...
(S#85에서 보았던) 현우의 그 웃음이다.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세진도 이제 그 웃음을 본다.
살짝 수줍음을 느끼는 세진.
현우
나 요즘 또 휴가예요.
세진
또요?
현우
(미소 짓고는) 그래서... 어딜 좀 다녀올까 하는데...
세진
?
103 에필로그 - 아름다운 길의 풍경 [낮]
가을로 막 접어든 계절.
가로수가 양편에 끊임없이 서 있는 소탈하고 시원한 길.
멀리서 달려온 촬영 팀의 차가 길가에 멈춰 선다.
소변이 마려운 황선배와 촬영팀들이 "금방 올게" 하면서 차에서 내리고...
차 안에서 가로수 길을 바라보는 민주.
무엇에 이끌리듯 차에서 내린다. 자동카메라를 들고…
찰칵, 찰칵.
길의 모습을 찍는 민주.
그렇게… 민주의 카메라가 시선을 돌릴 때...
길가 가로수 옆에 나란히 서서 소변을 보고있는 촬영팀들이 들어온다.
민주
(큰소리로) 어이! 거기!
이렇게 예쁜 새 길에서 무슨 짓들이야.
황선배
예쁘게 잘 크라고 ... 옛 추억들 꼭 안고 좋은 길 되라고 그러는 거다.
환하게 웃는 민주.
갑자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바뀌더니 차에 올라탄다.
그리고, 혼자 차를 몰고 달리는 민주.
막 볼일을 끝낸 촬영팀의 앞을 지나치면...
촬영팀들, "야, 서민주" 하며 차를 뒤쫓아 뛰어간다.
그렇게 환하게 웃는 민주의 차와 그 뒤를 쫓는 촬영팀이 카메라를 스쳐 지나가면...
길의 저 끝에 서있는 두 사람.
현우와 세진이다.
미소 띤 얼굴로 멀리 사라지는 촬영 팀의 차를 보고 있는 현우와 세진.
어느 순간... 마치 먼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민주의 차가 스르르 사라지면
마지막 배웅을 하 듯, 차가 사라진 길의 끝을 바라본다.
천천히 그 길을 걷기 시작하는 두 사람.
길 위로 햇빛이 쏟아진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