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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8:1) 예수님이 제자를 열두 명만 뽑은 까닭
누가복음 강해 (41)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눅8:1)
갈릴리 2차 선교 사역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 성경 66권은 인간의 언어로 저작된 문학 작품이기도 합니다. 책별로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진리가 잘 짜인 구도에 맞추어 제시되어 있기에,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죽 연결해서 읽어야만 합니다. 눈앞의 나무 몇 그루만 봄으로써 전체 숲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그런 오류를 범해선 안 됩니다. 한 절뿐인 본문도 복음서 전체와, 특별히 본문과 관련되는 전후 기록에, 비추어보면 누가가 강조하려는 의미를 정확하고도 풍부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의 동네에서 한 죄 많은 여인을 따뜻한 사랑으로 품어준 후에, 인근의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말하자면 2차 갈릴리 선교 여행을 시작한 셈인데, 누가는 두 가지 사항을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이미 살펴본 대로 주님께 치유받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다수의 여인이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주로 재정적인 후원을 담당했지만, 당시 인간 취급을 못 받던 여인들과 함께 사역한다는 것은 아주 혁신적인 조치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성별 직업 재산 신분 인종 등으로 절대 차별하지 않는다는 뜻을 보여준 것입니다.
둘째는 순서가 뒤바뀌었지만, 열두 명의 남자 제자들이 선교 여행에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남성을 여성보다 더 우월하게 대우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남녀의 신분, 위치, 특권은 단 한치의 우열이 없이 동등합니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이 여성의 대외적 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고 장기 여행에 여성이 함께 가기는 부적절했을 뿐입니다.
결국 누가는 남성과 여성이 그 맡은 역할만 다를 뿐 주님의 선교 사역에 같이 동참했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문제는 당시에 주님을 추종하는 남성 제자의 무리가 많았을 텐데, 왜 열두 명만 조수로 택하였고, 또 왜 그들과만 함께 선교 여행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스승이 사역할 장소를 미리 준비하고, 환자들을 질서 있게 관리하는 등, 단순히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라고 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도 누가가 의도적으로 구성한 문학적인 플롯(plot)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를 세우심
우선 이 열두 명은 단순한 제자가 아니라 사도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6:12-13) 주님이 밤새워 기도해서 열두 명을 뽑았는데, 네 복음서 중 누가만 주님이 그들을 사도(使徒)라고 칭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를 세우는 일이, 그것도 열두 명으로 제한한 것이 주님에게 아주 중요했다는 뜻입니다.
숫자를 열두 명으로 제한한 것은 구약시대 열두 지파와 짝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숫자 열둘이 상징하는 의미부터 알아야 하는데, 시간과 공간의 두 가지 측면에서 따져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시간적으로 일 년이 열두 달이듯이 충만하고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신구약 시대를 관통해서, 아니 태초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중단된 순간이 단 일 초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신 분으로 시간과 초월해서 존재하시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당신의 권능과 은총을 단 한 치도 부족하지 않게 당신의 피조 세계 전체에 부어주십니다.
둘째, 공간적으로 열둘은 가로 세로 높이의 3차원과 동서남북 네 방향을 곱한 숫자이므로, 마찬가지로 그분의 거룩한 통치가 이 세상과 온 우주 공간에 온전하게 미친다는 것입니다. 전 우주를 아우르는 전체 공간 또한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그 공간 안에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생존 번영하기에 합당하도록 당신께서 각각 위치시켜서 질서 있게 운행하고 계십니다. 숫자 열둘의 의미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완벽한 통치가 미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나, 신약의 열두 사도나 하나님이 따로 선별한 사람이므로, 당신의 통치를 당신이 택한 종들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한 통치 자체는 당연히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께서 전적으로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통치를 모든 사람이 체험할 수 있으나, 그 의미를 온전히 알 수 있는 자는 당신이 택한 종들뿐입니다. 그것도 그들 자신의 지적, 영적 능력으로는 알지 못하고, 하나님 쪽에서 먼저 성령의 영감을 불어넣어 주어서 당신의 뜻을 깨닫도록 계시해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먼저 깨닫게 해준 종들로 하여금 주변 사람들에게 당신과 당신의 통치에 대해서 온전히 전하고 가르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밤새워 기도하여 열두 사도를 세운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죄에 찌든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당신의 사역과 특별히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온전히 드러낼 것입니다. 제자들로 당신의 사역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게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깨달아서 다른 이들에게 전파하고 가르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도의 헬라어 ‘아포스톨로스’는 “위임을 받은 전령”, 즉 특별한 임무를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위임한 사람을 대신해서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보낸 사람과 똑같은 권능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당시 유대 랍비의 교육 방법도, 오늘날 의대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그러듯이, 스승이 하는 말과 행동을 제자들이 그대로 따라서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갈릴리 이차 선교 여행에 동참한 열두 사도는 주님이 어떻게 병자와 죄에 찌든 인간을 치유하는지 세밀히 지켜볼 것입니다. 그렇게 배운 대로 장차 예수님을 대신해서 주님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주님과 같은 권능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철야 기도하신 뜻
주님이 사도를 세우기 위해서 밤새도록 기도하셨다는 것이 놀라운데, 누구를 택할지 어려웠다는 뜻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는 주님이 십자가에 오르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했던 일과 일맥상통합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완전한 인간이기도 하셨기에 십자가 처형의 극심한 고통을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 얼마 전에 죽은 나사로를 되살릴 때처럼, 죄와 죽음과 사탄의 지배 아래에 묶여 있는 인간의 상태가 너무나도 불쌍하고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당신이 택한 사도들마저 주님이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켜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해 주기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새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지금 주님이 인류의 역사를 율법의 시대에서 은혜의 시대로 완전히 전환하려는 너무나도 중차대한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이 땅에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자고 했는데도, 제자들은 금방 잠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런 판국이라 주님의 기도는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너무나도 절실하고 처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열두 사도를 세우는 날 밤에도, 그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단순히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을 것임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사도들은 당신을 대신해서 당신께서 이 땅에서 수행하셨던 사역을 그대로 위임받아서 똑같이 행해야 하고, 그러면 당신처럼 순교를 당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의 제자 중에 죽음으로 내몰아야 할 자들을 뽑아야 하는데 어떻게 소홀히 기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제자들 한 명, 한 명을 생각하면서 사도로 세우려니, 특별히 가룟 유다를 포함시켜야만 하니까 너무 안타깝고 고통스러워 밤을 꼬박 지세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죄에 찌든 인간을 그 처참한 처지에서 건져 주려면 열두 사도를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만 특별했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도들을 택할 때부터 공사역 내내 십자가의 구원을 위해서 계속 기도하셨으며, 막상 그날이 닥치자, 더 뜨겁게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사도들을 세울 때는 그들이 온갖 박해를 받으며 결국 죽음으로 내몰릴 것이므로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맡은바 복음 전파의 소명을 잘 감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 전파 외에 사도들만 맡을 수 있고 맡아야만 하는 특별한 임무, 두 가지를 위해서도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교회를 세우게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자, 주님은 천국 열쇠를 그에게 주신다고 하면서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교회를 세우라고 명했습니다. (마16:16-19)
둘째는 교회가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도록 성경을 저작하는 책임을 맡겼습니다. 주님이 성경을 저작하라고 직접 명하지는 않았으나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당신이 분부한 모든 것을 모든 족속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했습니다. (마28:20) 부활 후에도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과 구운 고기를 나눠 먹으며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8)라고 선포했습니다.
주님은 그 말씀을 하기 전에 당신의 십자가 대속 죽음과 부활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이뤄진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도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눅24:47) 그런 후에 너희가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구약의 계시와 연결해서 성경을 저작하라고 간접적으로 명령한 셈입니다.
고대에는 전하고 가르치는 일은 암기해서 구전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도 처음에는 그렇게 이어지다가 차츰 누락과 망각을 방지하려고 문자로 기록했을 것입니다. 신약 성경 또한 올바른 복음 전파를 위해서 반드시 문자로 기록되었어야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에서, 특별히 십자가 주음과 부활에서 큰 영적인 각성을 받고선 반드시 그 모든 것을 후대에 전해야겠다고 절감했을 것입니다. 또 당시의 유대교와 이단의 훼방을 막으며 교인들을 올바르게 교육시키기 위해서라도 성경을 기록해야 했던 것입니다.
사도의 첫째 소명
그런데 이 열두 명 외에도 사도로 뽑힌 자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을 들 수 있는데,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주었습니다. 그리고 스승을 배신하여 팔아넘긴 후에 자살한 가룟 유다를 대신한 사도 ‘맛디아’입니다. 나머지 열한 명의 사도들이 간절히 기도한 후에 그를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으로서 제비 뽑아서 선택했습니다. (행1:22) 따라서 맛디아도 당신의 사역과 특별히 부활을 증언하도록 주님이 세운 사도였습니다. 또 초대교회에서 주님을 증언하는 성경을 저작할 자격이 있다고, 즉 사도로 인정해 준 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베드로의 제자 마가와, 바울의 동역자 누가가 그들입니다.
요컨대 사도는 예수님이 직접 세웠거나 초대교회가 인정한 성경의 저자들이므로 이들 외에 더 이상 나올 수 없습니다. 일 세기 이후로 예수님에 관한 책이 많이 집필되었으나, 주 후 397년 3차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27권만 신약의 정경으로 채택했습니다. 그때 가장 먼저 따진 기준도 저자가 사도였는지 또 초대교회에서 그 책을 하나님의 진리로 인정했는지 여부였습니다.
교회 설립과 성경 제작이라는 사도의 두 소명 중에 더 중요한 것은 성경 저작입니다. 교회 설립은 당신의 종들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수행될 수 있지만, 성경 저작은 그러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을 저작한 요한은 계시록 이후로는 더 이상 정경으로 채택될 수 없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따라서 신구약 성경 66권 외에 다른 책을 성경 즉, 하나님의 진리라고 가르치면 이단입니다.
물론 열두 사도가 다 성경을 저작한 것이 아니며, 또 주님의 갈릴리 이차 선교팀에 가룟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어쨌든 앞으로 성경을 저작시키려면 당신과 당신의 사역에 관해 정확히 알아야만 합니다. 그런 직접 증인들만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또 주님의 선교 공동체에서 배운 대로 나중에 주님의 백성들과 함께 교회를 설립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한마디로 주님이 열두 명의 사도로 당신을 그대로 따라 하게 하려는 제자 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누구나 가장 시급하고도 진지하게 들어야만 하는 소식입니다. 죄에 찌든 인간이 영원히 사느냐 죽느냐는 절체절명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천국 복음을 다른 동네에 전하는 일이 더 급하다고 새벽 기도하는 곳까지 찾아온 환자들을 물리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주님이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셨다는 것이 단순히 여러 곳을 여행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방문하지 않아 천국 복음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새로운 곳을 샅샅이 훑어 나가신 것입니다. 나중에 주님이 하신 대로 따라서 행한 사도 바울도 이미 복음이 전해져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남의 터에선 선교하지 않았습니다. (롬15:20)
모든 신자의 소명
주님의 제자 훈련은 단계별로 진행되었습니다. 처음 얼마 간은 전통적 랍비 방식대로 곁에서 지켜보게 했다가, 얼마 후에는 제자끼리만 당신처럼 직접 선교해 보라고 파송했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눅9:1,2) 당신께서 승천하여 이 땅에 계시지 않을 때를 대비하여, 일차 시험 삼아 당신을 대신하도록 세상으로 내보내신 것입니다.
얼마 후에 예수님은 또 다른 제자들을 선교팀에 합류시켰습니다.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내보내셨습니다. (눅 10: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웠다”라는 것은 열두 사도가 아닌 일반 신자들을 뜻합니다.
성경을 장과 절로 구분한 것은 훨씬 후대에 이뤄졌지만, 신기하게도 8장과 9장과 10장의 첫 절이 모두 열두 제자들과 그와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먼저 8:1은 열두 제자들을 주님의 증인으로 세우려고 사역에 동행시켰다고 하고, 9:1은 열두 제자더러 직접 사역해 보라고 파송했고, 10:1은 일반 신자들 70명도 열두 제자들을 본받아서 그대로 행하라고 보내졌습니다. 누가가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의미가 잘 드러나도록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입니다. 그 의미는 모든 제자는 주님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 하나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예수님이 실제로 행한 대로 기록했으므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목할 사항은 칠십 명의 일반 신자들이 선교 여행을 다녀온 후의 보고입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10:17)라고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문맥상 열두 제자로 짐작되는 제자들은 오히려 귀신을 제대로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막 9:17-29) 누가는 이 당시에 열두 제자들이 여전히 자기들 소명에 충성하지 않고서 서로 누가 큰지 변론했다고 기록합니다. (눅9:46-48) 그 구체적인 사정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일반 신자 70명이 귀신을 쫓아내었기에 사도와 비교해서 그들이 주님께 받은 권능에 전혀 차이가 없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열두 제자나, 칠십 명의 일반 제자나 성령을 받아야만 온전히 복음을 깨닫고 또 복음 전파 사역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칠십 명의 일반 신자들은 주님을 직접 대면하는 일이 아무래도 적었을 테니까 주님이 가르치신 말씀에 집중하고서 더 순전하게 믿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도 제자끼리 서로 누가 높은지 다툴 때,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당신을 영접함이요, 너희 중에 가장 작은 자가 큰 자니라”라고 가르쳤습니다. (눅9:48)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 전부를 당신의 제사장 나라가 되라고 세웠습니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엘리야, 이사야 같은 특별한 자들만 제사장 나라로 따로 세운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은 여호와를 열방에 알리는 복의 근원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는 일에서 사도인 열두 제자와 일반 신자의 구분은 더더욱 없습니다. 신자란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에서 불려 나온 자인데, 주님의 복음을 들고 다시 세상을 향해 나가라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유언도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서 당신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서 지켜 행하게 하라는 것이지 않았습니까?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는 성경을 저작하는 사도는 될 수 없으나, 예수님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전문 사역자와 일반 신자와의 유일한 차이는 전적으로 증인의 소명을 전문적으로 행하느냐, 아니면 자기 직업을 통해서 하느냐 뿐입니다. 전임 사역자는 먼저 훈련받은 열두 제자인 셈이므로, 교회 안에서 주님의 말과 행동을 가장 먼저 그대로 따라 행하는 본을 보이는 자일 뿐입니다. 바울도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선포했습니다. (고전11:1)
모든 목회자들은 신자들에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 비난 받을 부끄러운 짓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적 원칙으로는 일반 신자들도 랍비 식 교육처럼 사역자가 행하는 말과 행동을 잘 지켜보고서 그대로 따라 해야 합니다. 그 전에 사역자나 일반 신자나 가장 먼저 자기를 어린아이처럼 낮추면서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어야 하고, 그러면 주님의 이름 앞에 귀신이 항복하는 모습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바치고 있는가?
다시 강조하지만,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는 사도는 될 수 없으나 주님이 선교하라고 파송하신 70명의 제자여야만 합니다. 성경 저작을 빼고는 열두 제자와 똑같은 직분을 맡은 것입니다. 주님 부활의 증인이어야 하고, 복음을 가르치며 병을 고쳐야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어야 합니다. 이 중에 신유와 축사는 따로 성령의 은사를 받아야겠지만, 주님의 증인이 되는 일은 모든 신자와 모든 교회가 주님께 받은 첫째 소명입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라고 명하신 사건을 누가는 전체적인 내용은 같으나 세부적으로 마태와 조금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눅9:20)라고 간단히 대답한 것까지는 같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천국 열쇠를 맡긴다는 주님의 말씀을 건너뛰고서 곧바로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사흘만의 부활을 예언했다고 기록합니다. (눅9:22) 주님은 바로 이어서 당신의 증인이 되는 일, 즉 교회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3, 24절)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복음을 간단히 제시하고 교회로 초대하는 전도로 그쳐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모든 신자에게 자기 생명을 걸고 당신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라고 합니다.
실제로 사도들을 비롯해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거의 다 순교했습니다. 결국 증인과 순교자가 동의어가 되다시피 했는데, 그래서 헬라어로 증인인 ‘마르투스’에서 영어의 ‘순교’라는 단어 ‘martyr’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밤새워 기도해서 열두 제자를 사도로 세우고,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로 변할 정도로 간절히 기도했던 이유와 그 뜻이 역사적 사실로 실현된 셈입니다. 당신 대신에 당신의 사역을 계속할 제자들이 당신께서 걸었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결국 십자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으로선 제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릴 줄 알았기에 처절하게 기도한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의도적으로 순교에 빠트린 것은 전혀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습니다. (행5:41)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담대히 고백했습니다. (고전9:16)사도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엄연한 진리와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절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온 세상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영원히 통치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므로, 당시 세상의 주인인 로마 황제에겐 도무지 고개를 숙일 수 없었기에 순교 당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금 신상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할 수 없어서 극렬한 풀무 불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된 것입니다.
신자란 예수님을 믿어서 이 땅에서 육신적으로 살았던 자기 옛사람은 이미 한 번 죽은 자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영원히 살아갈 성령의 새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이미 한 번 죽은 자신인지라 다시 죽는 것에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비롯해 모든 사도가 성령의 사람으로 바뀌어졌던 것입니다. 시몬 동네의 죄 많은 여인과 자기 소유를 팔아서 주님을 섬겼던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 같은 여인들도 자기 인생 전부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평안을 가졌는가?
그렇다고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 주님과 열두 제자가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셨듯이, 모든 신자가 당장 미전도 지역으로 들어가서 온갖 방해를 이겨내고 순교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의 증인으로 평생 살아갈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을 가진 신자가 되면 됩니다. 신자란 시몬 동네의 죄 많은 여인처럼 주님께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자입니다. 그녀처럼 주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는 말씀을 이미 들은 자입니다.
평안히 가라는 말씀의 원문의 뜻은 평안을 이미 확고하게 소유했기에 그 평안을 흔들 존재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평안은 죄 사함을 이미 확실히 받았기에 정죄함이 다시는 절대 없다는 데에서 옵니다. 하나님이 사해주셨으므로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죄인이라는 낙인은 완전히 벗겨졌습니다. 설령 계속 죄인 취급을 받아도 하나님 그분은 절대로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만 대우해 주십니다. 온 우주의 시간적, 공간적 주인이자 통치자이신 하나님이 그러하신데,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는 미약한 다른 피조물이 신자를 훼방하고 핍박해 본들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신자가 참된 믿음을 가졌는지 여부는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평안을 누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평생토록 요동치지 않을 내면의 참된 안식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되었다고 실감하십니까? 현실 삶의 어려움에 실망하고 고달파서 미약해지는 일마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연약한 육신을 지녔기에 괴롭긴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분은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도 절대 줄어들지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어린아이처럼 순전히 믿으면 어떤 환난에도 천국을 향한 소망으로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신자 본인만은 자신이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몰랐던 이전의 삶이 완전 실패요 절망이며 죽음으로 가는 중이었다고 절감했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기쁨과 만족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인격적으로 대면한 후로는 현실이 아무리 궁핍해도 성경을 통해서 만나는 주님과 또 삶에서 실제로 받아 누리는 그분의 궁휼이 너무나도 좋아집니다. 매일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 동행하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 되었습니다. 나아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서 주님의 심정을 품고서 서로를 섬기는 것이 아주 즐겁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 바뀐 삶에서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조금이라도 변경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그래서 자신과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에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일 년 열두 달이 백 번이 반복되어도 단 일 초도 빠짐없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발을 내딛는 가로 세로 높이 삼차원과 동서남북 네 방향 어디에도 주님히 함께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과 겉으로는 같은 시공간 안에 사는 것 같아도 이미 천국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전하고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이제는 이전의 삶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으며, 영원히 함께하시는 성령님이 그렇게 되도록 버려두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예수 믿어서 천국행 보험 증서를 받은 것으로 만족하고 현실 삶의 형통만을 간구하는 신자가 많습니다. 종교적으로 헌신하면 하나님이 회복시켜 줄 다윗 왕국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다가, 결국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과 똑같은 믿음입니다. 인생에서 평안을 얻는 길은 예수님께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아서 자기 전부를 바쳐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분을 따르지 않으면, 주님께 복을 받으려고 아부하는 립 서비스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막달라 마리아처럼 자기 소유로 주님을 섬기든지, 열두 제자들처럼 그분의 선교팀에 동참하든지 둘 중 하나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저를 비롯해 우리 모두 주님이 세상으로 내보낸 주님의 증인으로, 바꿔 말해 열세 번째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지 정말로 진지하게 되돌아보길 원합니다.
(7/5/2026) 박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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