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에 나도는 『장자』 번역 판본은 일백은 너끈히 넘으리라 생각된다. 아마도 동양 고전 중에서 노자 『도덕경』과 더불어 가장 널리 읽히는 책이기 때문에 판본이 당연히 많으리라. 노자와 장자 두 사람을 ‘노장’으로 묶는 것은 그 바탕에 ‘도’라는 개념이 있고, 여기서 무위자연 사상이 나왔기 때문이다. 장자는 초(楚)나라 위왕(기원전 339 ~ 329) 시대의 사람이다. 대략 기원전 355년 경에 태어나 기원전 275녀 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한다. 장자가 지혜롭다는 소문을 듣고 위왕은 그를 재상에 앉히고 싶어 했다. 장자는 차라리 진흙 속에서 물고기로 자유롭게 살지 나랏일에 매여 속박당하고 싶지는 않다고 위왕의 제안을 거절한다. 장자는 칠원리(漆園吏)라는 말단 관직에 만족하며 초야에 은둔하며 가난을 낙으로 삼고 살았던 철학자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장자』는 내·외·잡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장자에 따르면 하늘과 땅은 형체 가운데 가장 큰 것이며, 온전하고 무궁한 것이다. 이 하늘과 땅을 있게 한 근거이며, 이것을 움직이는 근본 원리는 바로 도다. 도는 천지가 있기 이전 예부터 이미 존재하였고, 천지를 생겨나게 만들었다. 그런 까닭에 도는 천지만물의 본체이므로 그 속성 역시 천변만변하는 성질을 가졌다. 도를 한 마디로 딱히 규정하기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노자는 『도덕경』 들머리에서 “말로 말할 수 있는 도는 이미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고 했거니와, 장자 역시 “도는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이니, 들을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 도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니, 불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 형체 있는 것들로 하여금 형체가 있도록 하는 것은 형체가 없는 것임을 알겠는가 ? 도는 이름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장자』, 「知北遊」) 장자에 따르면 도는 무(無)이고 유무(有無)다. 만물과 그것들이 작용해서 생겨나는 현상은 유고, 이 일체의 유는 무에서 나온다. 만물이 생겨나기 전 태초에는 무밖에 없었다. 이 무는 무무(無無)이며 무무무(無無無)이고 항상적인 무(無)다. 바로 그런 까닭에 장자는 도는 무위하며 무형하다고 했다.(無爲無形, 『장자』,「大宗師」)
장자는 천지만물과 사람의 근본이라고 할 도의 본질과 그 이치에 대한 숙고에 평생을 바친 철학자다. 우리가 읽는 『장자』는 그 숙고의 총체를 담은 책이다. 실로 우리 삶을 두루 비춰보고 성찰하게 만드는 동양의 지혜를 모은 보석과 같은 고전이다. 그동안 많이 읽힌 판본은 김동성, 김학주, 김달진, 안동림 등이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판본과 판본 사이의 ‘차이’가 커서 독자들은 혼란스럽고 곤혹스러웠다. 어느 대목에서는 그 뜻을 정반대로 해석한 것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그만큼 왜곡과 오역으로 덧칠된 판본들이 많이 나돈다는 얘기니, 독자들은 그것들 속에서 헤매기 쉽다. 칠순 노인은 “기왕의 『장자』판본은 다 불사르라 !”고 일갈한다. 과연 기세춘의 『장자』자 그 기개와 당돌함에 걸맞는 번역인지는 독자 제위께서 직접 읽고 판단해보시라.
경기도의 문학지리학
책의 개요
지리적 공간이란 단순히 실재와 인지의 대상인 장소, 혹은 지도상의 공간만을 뜻하지 않는다. 장소는 모든 삶의 발현의 자리며, 자아가 이 세계와 관계를 맺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실체다. 누구나 다양하게 분화된 의미의 공간을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장소는 경험의 자리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각과 인식의 기초적인 환경이다. 장소는 사람에게 본질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삶의 의미를 만들고, 아울러 장소는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의미로 가득 차게 된다.
경기도는 서울을 중심에 두고 그 주변에 포진해 있다. 경기도의 도시들은 대개는 서울의 衛星都市고, 서울의 변두리다. 서울의 막강한 원심력은 경기도에 그대로 전달되니, 경기도의 명운이 서울의 명운과 함께 한다는 사실은 피할 수가 없다. 서울의 직접적인 영향권역에 속하니 서울의 나쁜 풍속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그 風塵을 고스란히 뒤집어 쓸 뿐만 아니라, 독자적으로 서지 못한 채 서울에 기댄- 기생경제를 꾸릴 수밖에 없는 경기도인들의 살림살이는 서울의 경기에 따라 부침을 달리 한다.
경기도가 처한 서울의 위성 지역이라는 지정학적인 운명은 불가피한 바가 있다는 사실은 경기도의 정체성이 노른자위를 꿰차고 들어앉은 서울의 원심력과 방외를 넓게 둘러싼 바깥 지역들, 이를테면 강원도와 황해도, 그리고 충청남북도의 구심력 사이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들어졌음을 뜻한다. 서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강 이남의 성남, 분당, 광명, 부천, 안양, 군포, 과천, 수원, 용인이나 한강 이북의 고양, 일산, 파주, 의정부, 서울의 동쪽에 위치한 구리, 남양주 등은 서울의 원심력에 의한 영향을 더 받을 것이고, 경기도 남부의 여주, 이천, 안성, 평택 등은 저 중앙의 원심력보다는 변방에서 뻗어 나오는 구심력에 의한 영향이 더 크다. 이 책은 특히 경기도가 배출한 문학인들의 삶을 더듬으며 이땅의 문학·지리·역사들을 탐구하고자 한다.
차례
1. 들어가며 : 왜 문학지리학인가 ?
2. 1번국도와 옛길, 그리고 물길
3. 경기도의 인문지리 : 역사와 민속
4. 천년 역사를 가진 경기도 말
5. 경기도를 토대삼아 꽃핀 문화와 예술
5-1, 수원과 나혜석
5-2, 안성과 남사당과 이봉구
6. 산수화 속의 경기도
7. 나오며 : 경기도는 경기도다
* 이 책에서 다룰 작가들과 그 작품들
나혜석, 안국선, 안막, 홍사용, 박두진, 조병화, 이봉구, 고은, 김명인, 박석수.....
경기도 태생 시인들의 작품 다수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한 뒤 시인 겸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임. 월간 신동아, 출판저널 등에 북리뷰를 연재했으며, 지금은 주간 뉴스메이커에 북리뷰를 기고하고 있음.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학교 등에서 문예창작 강의를 하는 한편, MBC, KBS, 기독교방송, 불교방송 등의 문화교양프로그램에 고정출연하고 있음. 지금까지 50여권 저서를 펴냄. 2000년부터 현재까지 경기도 안성군 금광면에 거주하고 있음.
북해에 한 물고기가 있는 이름을 곤이라 한다. 곤은 그 크기가
몇 천리인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이 변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도 몇 천리인지 알 수가 없다.
한번 노하여 날면 그 날개가 하늘에 구름을 드리운 것 같았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명으로 이사를 간다. 남명이란 ‘천지(天池)’다.
재해(齋諧)는 뜻이 괴이한 사람이다. 재해의 말에 의하면
대붕이 남명으로 날아갈 때는 물결이 삼천리이며 폭풍을 타고 구만리 상공에 올라
여섯 달이 되어야 쉰다. 안개와 먼지는 생물이 생기를 서로 불어주는 것이다.
천지가 푸른 것은 바로 생기의 색이며, 그것은 원대하고 끝이 없는
지극한 것이다. 대붕이 내려다보는 것은 역시 아마 안개, 먼지 등
생기였던 것이다. 또한 물이 쌓여 두껍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다. 마당 웅덩이에 술잔의 술을 부으면 겨자씨로 배를 만들어야
한다. 술잔을 띄우면 붙어버릴 것이니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대기가 쌓여 두껍지 않으면 대붕도 큰 날개를 띄울 힘이
없다. 그러므로 구만리의 바람이 발아래에 있어야만 바람을 탈 수
있다.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막힘이 없어야만 장차 남쪽으로 날아갈 수 있다.
산은 평지돌출이다. 높이 솟아 평지에서 이루어지는 덧없는 일상범백사를 압도하며 속세와는 멀어진다. 수평의 대지가 정주(定住)와 농경에의 욕망과 관련된다면 수직으로 솟은 산은 은거와 가파른 고행을 자발적으로 수납한 종교적 수행의 결기와 관련된다.
산의 존재론적 표상은 높이의 숭고성에서 극적으로 발현된다. 따라서 평지보다 높지 않은 것은 결코 산이 될 수가 없다. 산은 높이 솟아있기 때문에 산이다. 높은 것이라고 다 산이 되는 것은 아니다. 높이 솟은 봉우리들과 낮은 골짜기들을 거느리고, 하늘을 이고 그 아래 물과 나무와 숲이 한데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산이다.
예로부터 깊고 높은 산은 피세(避世)의 소망, 청정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와 통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생존 싸움에 진절머리를 치고 명리를 쫓는 것에 무상함을 느낀 사람이 들어와 살기에는 산보다 적합한 곳은 없다. 높은 산은 그 자체로 숭고의 표상이다. 우리가 산에 올라 얻는 심미적 충만감과 상쾌감은 평지에 길들여진 눈이 시원해지는 시각적 넓은 트임의 물리적 경험이 주는 효과다. 높은 곳에 서면 세상은 한 눈에 들어오는 전체로써 관망되는 것이다. 그래서 옛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속된 사람이 오지 않는 곳, 올라와 바라보면 마음 트인다. 俗客不到處 登臨意思淸"(김부식, 1075 ~ 1151)
숱한 바위들과 기암(奇巖), 절벽, 폭포, 물줄기, 나무, 하늘과 땅, 구름, 운무, 골짜기, 무수한 봉우리들이 어우러진 금강산은 그 자체로 피안이다. 서리고 두른 산세가 예사롭지 않으며 도처에 비경을 품은 금강산은 천하의 절경이자 동방에서 으뜸으로 꼽을 만큼 승경지로 명성이 높은 산이다. 봉우리가 많아 1만2천봉이라고도 했다. 조선 말기의 학자 이상수는 "하늘의 기이한 기운이 동쪽으로 달려서 1만 2천봉에 크게 쏟아 붓고는 바다에 임해서 다하였다."고 쓴다. 이렇듯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흠모한 무수한 시인묵객들이 금강산을 찾아 유산을 한 뒤 많은 시와 그림들을 남겼다. 저 유명한 중국 송대의 시인 소동파(蘇東坡)도 "원컨대 고려에서 태어나 금강산이나 직접 보았으면 ! 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이라는 시를 남겼다. 이광수도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에서 "오직 가 보아야 그 사람의 천품(天稟)에 따라 볼 만큼 보고, 알 만큼 알 것이외다."라고 썼다.
이 높은 산에 들면 홍진에 찌든 세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청정감과 함께 형이상학적 전율을 느낀다. 큰산은 품이 넓고, 그 안에 모든 것을 품는다. 이 안에는 우리가 물리적 세계에서 겪는 높은 것과 낮은 것, 넓은 것과 좁은 것, 맑음과 탁함, 밝음과 어둠이 전부 한 데 있다. 속세를 피하여 큰산에 든 사람이 느끼는 한 차원 더 높은 도덕적 엑스타시는 산이 풍류의 즐거움을 향유하는 자리기보다는 인식론적 깨달음의 장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명산에 오르면서 사람들은 홀연히 도덕적 개안(開眼)을 한다. 그리하여 명산은 세속의 분주함 속에 놓쳤던 삶에 대한 균형과 조화, 내적 평화를 되돌려준다.
금강산은 행락과 유람의 장소가 아니라 장소 너머의 장소, 즉 피안이요, 너절한 것들을 너끈히 제압하는 고고한 세상이다. 맑고 초연한 산기(山氣)는 우리 마음의 표피를 덮고 있는 쩨쩨함을 벗겨내고 저 깊은 어느 곳에 은닉되어 있던 우주심을 일깨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람이 몇 푼 돈에 마음을 상하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상처를 받으며, 주색잡기의 유혹에도 쉽게 흔들리고, 타락과 부패에 무감각하게 젖어 사는 천하고 좁은 인격에 매인 자가 아니라 높고 너그러운 우주심을 지닌 도덕적 가능성의 인간이라는 계시를 받는다.
매미와 텃새가 대붕을 비웃으며 말했다.
“내가 결심하고 한번 날면 느릅나무와 빗살나무까지 갈 수 있다.
어쩌다가 가끔 이르지 못하여 땅에 곤두박질할 때가 있지만
무엇 때문에 구만리 창공을 날아 남쪽으로 간단 말인가 ?
들판에 나가는 자는 두 끼니면 돌아올 때까지 배가 부를 것이다.
그러나 백 리를 가는 자는 하루 묵고 올 양식을 찧어야 하고
천 리를 가는 자는 석 달 먹을 양식을 준비해야 한다.
이들 두 벌레가 무엇을 알겠는가 ? 작은 지혜는 큰 지혜를 미치지 못하고
어린아이는 어른의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 아침에 돋아나는 버섯은
그믐과 초하루를 모르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 이것들은
사는 기간이 짧기 때문이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란 나무가 있는데
오백 년을 봄으로 삼고 오백 년을 가을로 삼는다고 한다.
먼 옛날에는 큰 참죽나무가 있었다는데
이것은 팔천 년을 봄으로 삼고 팔천 년을 가을로 삼는다고 한다.
그런데 팔백 년을 산 팽조(彭祖)는 지금껏 최장수라고 소문나서
사람마다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니 슬픈 일이 아닌가 ?
문학지리학(literary geography)은 문학 작품 속에서 지리적 공간에 대한 경험과 의식이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를 살피는 일이다. 1907년 영국의 샤프란 사람이 단행본으로 출판된 개인 저서제목에 이 용어를 붙임으로써 처음 세상에 나타났다. 1970년대에 들어 지리에 대한 인간주의적 접근을 시도한 일단의 지리학자들이 나타남으로써 “지리학적 현상으로서의 문학 작품을 연구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땅과 더불어 산다. 땅은 장소와 지각공간의 인지와 경험이 이루어지는 바탕이다. 삶은 그것을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그것과의 연관성 안에서 인성이 형성되고 감정이 영향을 받는 일을 배제하고는 성립될 수 없다. 몸이 공간에 속해 있으며, 경험의 인지와 대상에 대한 지각은 공간의 지각에 의해 또렷해진다는 사실은 이미 메를로 퐁티가 지적한 바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지리적 공간의 인지는 장소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아키타스는 “모든 육체는 장소를 점유하며, 장소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고 썼다. 이렇듯 장소는 몸과 그 실존을 품고 그것이 피어나게 하는 자리며, 모든 원초적 경험의 토대이다. 장소의 의미화는 장소와 상호 연관을 맺고 거기 사는 사람의 태도․경험․의도의 연속성이라는 구조 안에서 만들어진다.
한 장소에 오래 살다보면 그 장소와 연관된 실존의 질서와 맥락이 길러지고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의 안정감이 생겨난다. 장소는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서서히 되어지는 것이다. 의미 있는 경험이 발생하는 장소에 대한 애착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실존의 안정적 토대로서의 장소에 대한 애착은 장소애(topophilia)로 이어지고, 장소와 자아의 능동적 융합의 바탕 위에서 사람의 지적․도덕적․정신적 가능성은 길러진다. 그래서 폴 쉐퍼드는 사람의 “사고, 지각, 의미의 조직화가 특정 장소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의 지리와 경관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데, 그 익숙함에 대한 의식과 감정이 한결같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익숙함이 끔찍한 구속으로 여겨져 “여기”를 벗어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거기”를 꿈꾼다. 그것은 현대인들이 반복되는 ‘일상’에 대해 품는 끔찍함과 유사하다. 이처럼 여행이란 장소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무의식의 욕구와, 실존의 의미 있는 사건들을 경험하는 초점으로서의 새로운 장소를 경험하고 싶다는 욕구가 겹쳐질 때 일어난다.
실존 공간에서 집이 있는 장소는 의미 속에서 경험되는 정체성의 토대 공간이며, 의미의 심원한 중심이다. 그러므로 장소는 “인간의 모든 의식과 경험으로 구성된 의도의 구조에 통합”된다. 장소에 대한 욕망의 본질은 의미를 향해 열린 욕망이며, 이것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겪는 근원적 현상이다. 백석의 ‘통영’, 고은의 ‘문의’, 신경림의 ‘목계’, 황동규의 ‘몰운대’와 ‘미시령’, 이성복의 ‘남해금산’ 등은 바로 그런 장소에 대한 욕망이 빚은 시들이다. 장소에 대한 욕망 중에서 사람의 내면에 가장 끈질기고 깊이 고착된 것은 고향을 향한 것이다. 고향은 심미적 희열, 그리고 의미와 본래성의 심연이다. 20세기의 위대한 문학작품 중에 나타나는 실존의 기획에서 가장 감동적이며 극적인 것이 고향으로의 회귀라는 기획이란 사실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2. 문학지리학의 범주
세월이 흐르면 땅이 바뀌고 그에 따라 거시 사는 이들의 의식과 살림 형편도 변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람과 땅은 상호 조응하는 가운데 생리와 지리가 서로 닮는 까닭이다. 산과 들의 형세, 흙의 빛깔, 초목의 우거짐, 물의 들고 나감, 취락의 모양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진 풍경을 음미하고 거기서 생기는 생기와 감응을 제 것으로 삼을 때 풍경은 주체의 내면을 규정하는 하나의 외연으로 작동한다. 지형지세가 순하고 풍광이 수려한 곳에서 인재가 난다는 옛사람들의 믿음은 자연이 사람의 심성을 어질게 하고, 참 사람을 만든다는 山水人物養育論에 그 배경을 두고 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지리적 공간, 즉 장소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의미화된 장소들의 세상에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사람은 몸과 정신, 그리고 감정과 기운이 땅에서 오는 磁力과 진동, 땅과 그 위에 있는 사물의 변화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장소는 인간 실존이 외부와 맺는 유대를 드러내는 동시에 인간의 자유와 실재성의 깊이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위치시킨다.” 거처를 삼고 삶을 일구는 자신만의 장소[땅]를 확보하고 사람은 사람다워질 수 있다.
현대인들은 점점 더 뜻있는 장소들을 잃어버리고 공허한 무장소로 밀려나가고 있다. 고향 상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장소 상실은 심오한 인격이나 정체성이 길러지는 근본 바탕의 상실이고, 필연적으로 실존의 밀도가 희박해지며 삶은 들뜨고 그 뜻은 빈곤해진다. 필자가 문학지리학에 뜻을 둔 것은 시인들이 시 속에 새긴 의미 깊은 그 ‘장소들’에 대한 뜻을 짚어보며, 땅과 사람이 어떻게 상호소통하며 심원한 존재로 나아가는가를 살펴보고자 하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것은 장소 상실로 인해 맞는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해보려는 작은 시도이며, 아울러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국토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려는 뜻도 함축한다. 자연 경관이란 장소의 물리적 외관이며, 그것은 자아와 교감하며 자아를 저 깊은 곳으로 데려간다. 사람은 저를 둘러싸고 있는 지형적 세계 공간을 이해하고 그것을 넘어가고자 한다. 초월의 계기를 구하며 의미를 지향하는 것은 모든 진지한 예술의 발생론적 욕망의 중요한 부분이다. 문학지리학은 사람은 풍경[땅과 자연]을 낳고, 풍경은 사람을 낳아 기른다는 믿음이 그 바탕이다.
문학지리학이란 무엇인가 ? 문학지리학은 문학과 지리가 경계를 넘어 만나는 개념이다. 모든 문학작품들에는 그것의 배태지로서의 장소를 머금고 있다. 문학지리학은 특정 지역에서 꽃핀 문학적 자산을 자연지리에 대한 관심과 연결해 그 지리의 위치, 지형, 인심, 풍속, 인물, 기후, 생태, 역사, 지역의 방언분화, 공동체의 체험 등을 전체로 아우르며 그것이 문학 상상력에 어떤 자양분을 공급하고, 미학적 숨결을 불어넣었는가를 따지고 캐는 것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행위와 의도의 중심점으로서 장소들을 겪어낸다는 것이다. 장소들은 행위와 의도들의 맥락이자 배경이다. 장소는 사회경험의 구조와 궤적을 제약하며 그것의 테두리로써 작용한다. 장소라는 맥락이 없다면 실존의 사건과 행위들 역시 그 자취와 의미가 흐릿할 터다. 시인이 “모란꽃 이우는 하얀 해으름 / 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 / 天桃山 / 수정그늘 / 어려보라빛 / 모란꽃 해으름 청모시 옷고름”(박목월, 「모란여정」) 라고 노래할 때 두드러지는 것은 모란꽃이 이우는 늦은 봄 해진 뒤 보랏빛 산그늘이 내리는 어느 고장의 그윽한 풍경이다. 향토의 한 때를 섬세하게 묘사한 이 시에서 알 수 없는 안정감과 더불어 근원적 질서감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그것은 이것이 우리가 겪은 고향의 모습과 닮은 데서 오는 친밀감 때문이다. 고향은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고향은 ‘나’의 정체성의 본질이요, 근원이다. 아울러 고향은 세계를 향해 나가는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외부로 지향하는 ‘나’라는 존재의 始原이다. 이렇듯 문학들은 그 장소들에 뿌리를 내리고 피어나는 꽃이요, 열매다. 『세종실록지리지』·『동국여지승람』·『택리지』와 같은 뛰어난 인문지리지들은 문학지리학의 선구적 업적으로 우리 자연지리에 깃든 인문적 정체성을 밝혀내는데 길잡이가 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조선시대의 지리지들은 대개는 지리, 인심, 생리, 산수 등을 두루 살피고 사람이 살 만한 땅을 고르는 기준을 제시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땅은 저마다 타고나는 바가 다르고 그에 따라 福地, 德地, 吉地, 避兵地, 避世地, 景勝地 등과 같이 쓰임도 달리 할 수밖에 없다.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 중 「복거총론」에서는 그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을 고를 대는 첫째로 地理가 좋아야 하고 다음 그곳에서 얻을 경제적 이익, 즉 生利가 있어야 하며, 다음 그 고장의 인심이 좋아야 하고 또 다음은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에서 하나라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 지리는 비록 좋아도 그곳에서 생산되는 이익이 모자란다면 오래 살 곳이 못 되고, 생산되는 이익이 비록 좋을지라도 지리가 좋지 않으면 이 또한 오래 살 곳이 못된다. 지리도 좋고 생산되는 이익이 풍부할지라도 그 지방의 인심이 후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있게 되고, 가까운 곳에 소풍할 만한 산천이 없으면 정서를 화창하게 하지 못한다.
땅의 생긴 모양과 기운, 생사되는 물자, 그리고 거기 살아갈 사람과의 조화를 따지며 발전한 조선시대의 인문지리학은 이미 우리 삶에 지리적 감각이 중요한 부분이며, 지리학이 실존을 실현하기 위한 현상학적 토대라는 각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근대 인문지리학의 맹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이르러 문학지리학이 크게 개화하지 못함은 안타까운 일이다.
문학지리학의 영역은 크게 둘로 나눌 수가 있다. 고향문학과 순례문학이 그것이다. 고향문학이란 나고 자란 탯자리에 바탕을 두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경우이다. 누구에게나 고향 체험은 피상적인 것일 수가 없다. 고향은 장소와 시간, 의미와 활동들이 하나의 통일체로 개별자의 내면에 沈着하며 저마다 고유한 정체성의 질료적 요소를 이룬다. 고향 체험은 심신 상관체에 각인된 실존의 알리바이요, 인성의 전체는 아니지만 형성적 요소요, 심오한 근원 체험이다.
김소월이나 백석의 경우 고향 정주를 노래한 시편들, 신경림의 『농무』에 나오는 소외된 농경공동체의 체험을 다룬 여러 시편들, 정지용의 「향수」나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연작들과 같이 유년기 고향의 지리적 풍토적 체험을 소재로 한 작품 들이 고향 문학의 대표적 범주에 들 것이다. 예를 들면 평생을 향토에 머물며 향토 체험에서 시적 상상력의 자양을 길어낸 박용래의 여러 시편들은 고향을 원체험으로 삼고 있다. “落葉 진 오동나무 밑에서 / 우러러보는 비늘구름 / 한 卷 冊도 없이 / 저무는 / 黃土길”(「黃土길」)이나, “木瓜나무, 구름 / 소금항아리 / 삽살개 / 개비름 / 主人은 不在 / 손만이 기다리는 時間 / 흐르는 그늘 / 그들은 서로 말을 할 수는 없다 / 다만 한 家族과 같이 어울려 있다.”(「뜨락」), “눌더러 물어볼까 나는 슬프냐 장닭 꼬리 날리는 하얀 바람 봄길 여기사 夫餘, 故鄕이란다 나는 정말 슬프냐.”(「故鄕」) 등과 같은 시에 나오는 여러 사물과 공간이 지어내는 정취에는 고향의 지리적 풍물들에서 비롯된 애틋함이 짙게 배어 있다.
꾀꼴 소리 넘치는 눈먼 石佛, 물고 보러 가듯 가고 없더라. 질경이 씹으며 동저고릿 바람으로.
노을 잠긴 국말이집 상머리 너머 歲月, 앉은뱅이꽃.
언덕 하나 사이 두고 언덕, 징검다리뿐이더라.
박용래, 「夫餘」
석불, 질경이, 앉은뱅이꽃, 언덕, 징검다리 들이 있는 조촐하고 심상한 풍경은 어느덧 우리의 심상풍경으로 轉化한다. 그 고향은 “그 안존하고 잔잔한 영혼의 나라”(박목월, 「思鄕歌」)다. 고향은 각자의 내면에서 특권화된 지리적 공간이다. 이 세상은 온갖 장소들로 가득 차 있지만 고향을 대체할 수 있는 장소란 없다. 고향은 함께 살았던 사람들과의 유대, 토속 언어, 관습, 풍습 등에 의해 인격과 상징적 장소적 결속을 이루고 인격적 연대로 인해 특별한 의미를 얻는다. 어린 시절 부모나 친족들과의 따뜻한 유대, 그리고 잠, 음식물 섭취, 배설, 놀이, 거주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원초적 정서와 인격의 토대가 형성되는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향은 문학지리학의 중심적 장소가 되는 것이다.
3. 장소의 의미와 본질
지리적 공간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실재와 인지의 대상인 장소, 혹은 지도상의 공간만을 뜻하지 않는다. 장소는 모든 삶의 발현의 자리며, 이 세계와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실체다. 사람은 심오하고 다양하게 분화된 의미의 공간을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장소는 경험의 자리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각과 인식의 기초적인 환경이다. 장소는 사람에게 본질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삶의 의미를 만들고, 아울러 장소는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의미로 가득 차게 된다. 문학지리학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의 현상학적 기초가 되는 시인과 작가의 작품에 나타난 자연의 지형지세와 풍토적 특성에 대한 경험에서 빚어진 감정, 관점, 태도, 가치판단에 대한 자료들을 살피고 그 뜻을 밝혀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풍토적인 것은 거기서 낳고 자란 사람의 인성과 정서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는데, 그것들은 자연스럽게 정서적 근린성으로 스며들며, 그 속에서 오랜 관습과 도덕, 방언, 토속음식들은 속속들이 이해되고 포괄되는 것이다.
장소라고 할 때 대개는 국소적 지리공간을 가리킨다. 개별적 신체를 핵으로 감싼 채 원근으로 펼쳐지며 생활환경 전반을 떠받치는 물적 토대다. 그것은 땅·자연·입지·경관을 아우르는 동시에 사람의 활동과 사물들이 얼크러지며 만드는 의미의 중심 영역이다. 장소는 너른 품으로 삶을 끌어안는 어머니-대지며, 존재의 둥지다. 아울러 장소는 “일상 사회의 생활공간의 맥락 속에서 의미 있는 경험의 중심”으로 실존의 의미를 빚는 중요한 질료적 요소다. 일찍이 조선 시대의 이중환은 장소가 존재의 양태를 규정하는 테두리로서 한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택리지」에서 “우리나라 지세는 동·남·서는 모두 바다이고, 북쪽 한 길만이 여진과 요동으로 통한다. 산이 많고 평야가 적어 백성은 유순하고 공손하나 기개가 옹졸하다.”고 쓰고 있는데, 자연과 지리가 정치, 경제, 교통의 조건적 기반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품성과 기질을 결정하는 한 원소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장소와 분리되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그것은 ‘나’의 외부이면서 동시에 ‘나’의 신체에 복속되는 중력의 장 안에 수렴되는 내부다. 지방·환경·자연을 포괄하는 한 장소가 문학지리학의 발생론적 대상이 되는 것은 개별자의 사사로운 장소애가 개별화의 수준을 넘어서서 사회적 의미장 안에서 그 심리적·문화적 상징성이 공공적 기림이 될 만하다는 공증을 얻는다는 뜻이다.
장소애라는 것은 말 그대로 장소에 대한 사랑이다. 쉽게 말하자면 장소와 살 부비며 사는 동안 정분이 나는 것이다. 사회철학자 마틴 부버의 말을 빌리자면, ‘나’와 장소가 ‘나-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당신’의 관계가 되는 것, 무의식과 실존 안에서 주체와 장소가 하나 되는 것이다. ‘나-그것’의 관계가 되는 장소는 진정한 장소감을 주지 못하는 장소다. 우리는 점점 이런 무장소에 포위되고 있다. 이를테면 무장소란 폐가와 같은 곳이다. 장소들은 사람과의 유대를 만들면서 의미화되는 것이다. 폐가는 더는 사람이 살지 않고, 그래서 어떤 의미 있는 실존의 활동도 깃들 여지가 없는 곳이다. 한 젊은 시인은 사람이 살다가 떠난 빈 집이 어떻게 무의미로 가득 찬 장소가 되는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부서진 지붕 위로 눈이
기러기 무늬를 찍고 있다
한때는 집주인의 마음처럼
세상을 향해 수없이 열렸다
닫혔을 문짝
날마다 자글자글 볕이 끓어
몸이 말간 무를 썰어 내말리기도
하던 그곳 식구들의 장독대
깨진 사금파리 위로
조바심치며 눈이 내린다
서두러 궁색한 삶을 시래기처럼
묶어 싣고 떠나간 흔적들을
가만가만 쓸어 내린다
권현영, 「폐가」
같은 길이라도 옛길은 장소의 확장이지만, 고속도로는 새로운 무장소의 지리들을 뱉어놓는다. 나날이 사람 숨결이 서리는 집은 심오한 실존의 중심영역이지만, 사람이 떠나간 자리는 의미가 없는 공간으로 전락한다. 하이데거는 “집을 상실하는 것이 세계의 운명이 되어가고 있다.”고 했지만,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김종삼, 「漁夫」)을 만들어내는 집·사람·활동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진정한 장소들은 사라지고 있다. 장소들은 획일화되거나 유사화되면서 우리는 점점 더 장소를 잃고 무장소들을 떠도는 운명을 피할 수가 없다.
장소는 실존과 정체성의 중심으로 경험되며, 감각의 밧줄에 묶인 기억에 의해 그 장소는 외롭고 힘들고 지칠 때 기댈 수 있는 존재의 심리적 지지대가 된다. 문학지리학은 그 애닯은 정분의 심리적·문화적 맥락을 찾아내고 그것에 합당한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뛰어난 시인들은 제 몸의 기억 저 안쪽에 새겨진 장소를 불러내 눈부신 상상력으로 지은 옷을 입혀 그것을 불멸화한다. 시인들의 상상 속에서 불멸화한 장소들은 원체험의 자리, 지울 수 없는 의미의 영역이다.
물로 사흘 배 사흘
먼 삼천리
더더구나 걸어 넘는 먼 삼천 리
삭주 구성은 산을 넘은 육천 리요
물 맞아 함빡히 젖은 제비도
가다가 비에 걸려 오노랍니다
저녁에는 높은 산
밤에 높은 산
삭주 구성은 산 넘어
먼 육천 리
가끔가끔 꿈에는 사오천 리
가다오다 돌아오는 길이겠지요
서로 떠난 몸이길래 몸이 그리워
님을 둔 곳이길래 곳이 그리워
못 보았소 새들도 집이 그리워
남북으로 오며가며 아니 합디까
들 끝에 날아가는 나는 구름은
밤쯤은 어디 바로 가 있을 텐고
삭주 구성은 산 너머
먼 육천리
김소월, 「삭주 구성」
심신 상관체의 기억에 새겨진 장소들은 더러는 심상공간이며 신체에 새겨져 정체성으로 몸과 분리가 불가능한 그 무엇이다. 삭주 구성은 시인의 외가가 있던 평북 구성군 서산면을 가리킨다. 연보에 따르자면 소월은 여기서 태어나 백일을 지낸 뒤 비로소 평북 정주군 곽산면 본가로 돌아와 성장한다. 화자와 삭주 구성은 서로 떨어져 있다. 화자와는 육천 리 거리 저 바깥에 떨어져 있는 삭주 구성은 결핍태로서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리움이 욕망의 대상이 빈자리에 생겨나는 마음의 한 형상이라면, 그리움은 결핍의 理想態라 할 수 있다. 이 시를 주목하는 것은 먼 탯자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려서가 아니라 탯자리-몸을 하나로 수렴해 鄕愁에 육감적 실감을 부여하는 그 상상력을 높이 사기 때문이다. 탯자리에 포개지는 몸은 그곳에 살다가 멀리 떨어져 이방을 떠도는 화자의 몸이자 동시에 아직 그곳에 살고 있는, 언젠가 돌아가 하나로 포개져야 하는 님의 몸이다. 이렇듯 한 장소에 두 몸이 포개지니 그 장소는 더욱 간절한 향수의 배태지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장소”들은 감각의 깊이를 얻어 정지용의 절창인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구절에서처럼 꿈속에서조차 잊을 수 없는 장소로 불멸화한다.
김소월과 동향인 백석의 토속적 음식의 정취에서 그 존재감을 오롯하게 드러내는 고향 정주, 오장환의 해방 전후의 서울, 정지용의 백록담, 서정주의 토속지리학에 의해 영원성을 얻은 질마재마을, 김영랑이 서남 방언의 뛰어난 음악성으로 살려낸 전라도, 유치환이 육지와 멀리 떨어진 絶島의 섬을 망국민의 표랑하는 자아 표상으로 포획한 울릉도, 김광섭의 문명과 자연의 불협화를 돌 깨는 소음으로 묘파한 성북동, 박목월은 근대 경주의 문학지리학에 『청록집』시대의 향토적 서정성을 비벼 놓음으로써 도시 전체가 하나로 박물관화된 천년 고도 경주와는 또 다른 경주를 보여준다. 한하운의 팍팍한 삶의 제유로서의 끝이 없는 전라도 황톳길, 고은이 문득 깨달은 삶과 죽음이 만나고 헤어지는 실존의 자리로서의 문의마을, 신경림의 목계나루, 박용래의 소슬한 서정 속에 오롯하게 살아난 강경, 황동규의 周遊하는 시선이 잠시 스쳤던 몰운대나 미시령, 김지하의 좌절된 반역의 꿈이 冤魂으로 떠도는 남도의 목포, 이성부의 차별과 따돌림의 기표적 장소로 호출한 전라도, 김준태가 영원한 청춘과 저항의 도시로 명명한 광주, 김명인이 저의 암담한 비관주의로 덧칠함으로써 더 어두워진 동두천은 기지촌이라는 오명 대신에 저 바다 건너 아메리카의 極地라는 우리 역사가 떠안고 있는 상처를 공공화한다. 이성복이 신화적 상상력으로 빚어 밝은 슬픔으로 투명해진 남해금산, 황지우의 극사실적 드로잉으로 그린 ‘화엄’ 광주, 고형렬의 웅혼한 장자적 상상세계가 낳은 설악산 대청봉, 김혜순의 우파니샤드와 겹쳐서 펼쳐낸 즐거운 지옥 서울, 고정희의 이념적 지표로 우뚝 솟은 지리산, 임동확의 ‘埋葬’ 무덤 광주, 이문재가 마음의 奧地로 찾은 저 소슬한 지명 등명, 유하가 시적 은유를 입힌 비급 대중문화의 온상인 청계천 세운상가, 함민복의 심상한 시선에 의해 말랑말랑한 생명을 얻은 뻘을 품은 강화도, 장석남의 탯자리인 덕적도, 이홍섭의 낭만적 상상력이 프라하와 함흥을 호명할 때 그 도시들은 카프카와 백석과 하나된 그 무엇이며, 그 도시와 더불어 불러낸 강릉은 카프카와 백석에 대한 존경과 이끌림을 감추지 못하는 한 문학청년의 자아와 분리할 수 없는 장소의 기표가 된다.
시인들은 장소와 유대와 연고를 맺으며 그 곳을 살 뿐만 아니라 그 장소에 새로운 정체성을 만드는 자다. 위에 여러 시인들과 연고를 맺은 장소들은 위치와 영역을 표시하는 지리학상의 기표적 기호이며, 더 나아가 우리 시문학사에서 불멸화에로 현재진행형의 가속운동을 하고 있는 의미의 水源池들이다. 시인들은 땅의 높고 낮음과 물의 들고 낢, 그 땅에 작용하는 기운의 영검함과 그 위에 일군 풍속과 역사의 곡절과 인재의 흥하고 쇠함의 연혁을 꼼꼼하게 살핀다. 제 삶의 기원이 되고 정체감을 부여한 장소들을 상상력 속에서 발효시켜 아득하고 현묘한 언어로 그것들을 새롭게 빚어낸다. 우리는 시인들의 聰明博學한 선행 작업에 힘입어 사는 지역과 경관들을 더 의미롭게 바라볼 때 삶은 풍요로워지고 깊어진다.
4. 경기도의 문학지리
경기도는 서울을 핵으로 품고 있다. 서울을 중심에 두고 그 주변에 포진해 있는 경기도의 도시들은 서울의 衛星都市고, 서울의 변두리다. 서울의 막강한 원심력은 그 주변에 위치한 경기도에 그대로 전달되니, 경기도의 명운이 서울의 명운과 더불어 한다는 사실은 피할 도리가 없다. 서울의 직접적인 영향권역에 속하니 서울의 나쁜 풍속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그 風塵을 고스란히 뒤집어 쓸뿐만 아니라, 독자적으로 서지 못한 채 서울에 기댄- 기생경제를 꾸릴 수밖에 없는 경기도인들의 살림살이는 서울의 경기에 따라 부침을 달리 한다. 달걀이 노른자위와 그것을 감싸는 흰자위로 뚜렷하게 구별되듯 서울과 경기도는 표나게 드러나는 억누름과 따돌림은 없다 해도, 그 행정적인 지위와 세력, 여러 면에서의 특혜는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 실속은 서울이 독점하고 남은 이삭을 차지하는 게 경기도다.
2003년도에 이르러 인구 1천만이 넘어선 경기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울에서 받는 것보다 내주는 것이 더 크다. 이렇듯 크고 작은 이권과 자본을 분배하는 서열의 위계에서 서울보다 한 걸음 떨어지는 경기도가 처한 이 지정학적 운명을 피할 수가 없다. 이를테면 경기도에 속하는 신도시인 서울 북쪽의 일산이나 남쪽의 분당은 서울 인구와 주택의 과포화 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기획도시다. 서울에 사람이 넘쳐나기 때문에 그 잉여의 인구와 주거공간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다. 땅과 자원이 한정된 서울이 필요한 땅과 자원을 경기도에서 빌려 쓰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경기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현존 9년인 1018년이다. 개성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가 경기라는 행정 명칭을 얻은 것이다. 조선 왕조 때 수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겨지면서 한양을 중심으로 한 한강 하류 지역 일대를 포괄하는 지역 전체를 경기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예로부터 경기도는 한반도의 중심으로 이 땅을 차지한 나라가 곧 중심국가가 되었다. 백제가 건국되면서 이 지역은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 고구려의 세력을 키우고 평양으로 천도하며 남진 정책을 장수왕은 마침내 기원 475년에 백제를 침공해 오백여년 간 백제의 영토이던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이 뒤로 백제와 고구려는 한강 유역 일대를 두고 잦은 전쟁을 벌였는데, 기원 551년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쳐서 이곳을 되찾는다. 신라는 한강 상류 10개 군을 차지하고, 백제는 한강 하류 6개 군을 차지하였다. 이렇듯 삼국시대에는 경기도가 들어앉은 한강 유역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백제, 고구려, 신라가 벌갈아가며 차지하고, 조선이 세워진 뒤 권력의 중심이 고려의 수도이던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겨지긴 했지만, 고려에서 조선 왕조로 이어지는 천년 세월 동안에는 왕도를 품은 땅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삼팔선과 휴전선이 그어지며 남북 땅들은 경기도 안에서도 이북과 남북으로 갈려 분단의 벽에 가로막혀 서로 오갈 수 없는 땅이 되기도 했다. 연천군과 포천군의 일부가 휴전선 남쪽에 들어오고, 개성시와 개풍군, 장단군 등은 북쪽으로 넘어갔다. 본디 한강을 끼고 있어 물이 풍부하고 땅이 기름져 농사짓기에 알맞은 곳이었으나,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땅들이 상업지역과 공업지역으로 변하였다. 서울과 인접한 안양, 시흥, 부천, 성남, 광명, 안산, 과천 등은 도시나 공단으로 개발되면서 농경지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경기도를 “함경도 안변부의 철령에서 나온 한 맥이 남쪽으로 500 ~ 600리를 달리다가 양주에 이르러 자잘한 산이 되고, 다시 동쪽으로 비스듬하게 돌아들면서 갑자기 솟아나 도봉산 만장봉이 되었다. 여기에서 동남방을 향해 가면서 조금 끊어진 듯 하다가 또 우뚝 솟아, 삼각산 백운대가 되었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서 만경대가 되었는데, 여기서 한 가지는 서남쪽으로 가고, 또 한 가지는 남쪽으로 백악산이 되었다. 형가는 ‘하늘을 꿰뚫는 木星의 형국이며 궁성의 주산이다’고 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世宗實錄地理志』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경기도의 동쪽은 강원도 춘천과 원주에 이르고, 서쪽은 황해도 강음과 배천에 이르며, 남쪽은 충청도 죽산과 직산에 이르고, 북쪽은 황해도의 토산과 강원도 이천에 이르러서, 동서가 264리요, 남북이 364리가 된다. 牧이 1이요, 군이 6이요, 현이 26이다. 명산으로 말하자면 삼각산은 도성의 鎭山이며, 白岳 북쪽에 있고, 성거산은 옛 서울의 松岳 동북쪽에 있으며, 花岳은 가평현 북쪽에 있고, 鉗岳은 적성현 동북쪽에 있으며, 용호산은 임강현 남쪽에 있고, 오관산은 임강현의 任內인 송림 북쪽에 있으며, 마니산은 강화부 남쪽에 있다.”
한반도의 동쪽에 치우쳐서 북-남으로 길게 가로질러 척추의 형국을 한 태백산맥이 경기도의 동쪽을 병풍처럼 둘러서고 서쪽으로는 그 산맥의 잔가지들이 뻗는다. 위로는 황해도, 아래로는 충청도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황해와 접한 해안선이고 동쪽으로는 강원도와 접해 있다. 지세가 동쪽은 높고 서쪽으로 나가면서 낮아진다. 경기도의 산세는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광주산맥을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평쪽으로 명지산, 중봉산, 국망봉, 화악산, 광덕산이 이어지고, 양평쪽으로는 용문산, 백운봉, 봉미산 들이 뻗어나간다. 광주산맥은 서울 부근에 이르러 북한산, 도봉산, 인왕산, 관악산 들을 일으켜 세워 산맥의 형세를 이어간다. 경기도를 거쳐나가는 수세는 대개는 동쪽의 산악지대의 계곡에서 발원한 물길들이 저마다 지류를 이루고 땅이 낮은 서쪽으로 흘러가면서 합수하여 폭과 양을 확장하고 마침내는 큰 강을 이룬다. 경기도의 북부인 파주 문산 지방을 거쳐 한강과 합수하는 임진강은 마식령 부근에서 발원한 강이다. 금강산에서 발원해 강원도와 경기도의 도계를 넘어 들어오는 물길은 홍천강 물과 합수하여 북한강을 이루고, 강원도 삼척에서 발원한 물길은 양평에 이르러 지류의 물길을 합수하여 남한강을 이룬다. 이 두 강은 양수리에서 한 물로 합수되어 덕소를 지나고 서울 동쪽에 해당하는 왕숙천, 한천, 탄천, 양재천 등에서 흘러나온 물들을 합하여 큰물을 이루고 늠름하게 황해로 흘러나간다.
경기도는 이 지역의 오랜 역사와 더불어 풍부한 물자와 사람만큼이나 문학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한다. 따라서 경기도의 문학지리는 살필 것도 많고 거둘 것도 많다. 우선 이 책에 실린 인물만 보더라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신소설의 주요한 작가로 활동한 이해조(포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근대이행기의 여성 자의식의 그 복잡한 상처를, 현실에서의 자기희생을 통한 과격한 실천으로 온몸으로 밀고 나”간 나혜석(수원), “1922년 나빈 현진건, 월탄 박종화 등과 함께 문예동인지 백조를 창간하여 이념과 양식에 있어 새로운 근대시 운동을 주도”한 시인 홍사용(화성), 해방기에 ‘조선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에 가입해 주로 “빈궁한 현실과 프로계급의 참상, 계급대립과 계급투쟁”을 그려낸 시인 박세영(고양), 한국 창작동화의 선구자로 “동심천사주의의 상대적인 입장에서 시대의 특수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현실 밀착적인 작품으로 아동문학의 기틀을 다진 마해송(개성), 해방기 좌파 문예운동 조직인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에 적극 참여하며 소설과 비평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한 박승극(수원), 이른바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으로 문학사 안에 제 이름을 새긴 시인 박두진(안성), 대중에게 위안을 주는 시들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 조병화(안성), 역사소설에서 큰 성과를 거둔 소설가 유주현(여주), 특히 미군 기지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약소국 민중이 겪는 불평등한 현실과 그 상처를 통해 “비정한 현대도시의 물신성과 인간 소외 현상”을 비판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박석수(송탄) 등이 있다. 이들 문학지리에 대한 성찰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의 역사와 문화, 그 속사정과 내력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나아가 고장에 대한 자긍심을 키워 지역정 정체성을 강화하는데 기여한다.
『지도의 상상력』, 와카바야시 미키오, 정선태 옮김, 산처럼, 2006
자동차 운전자라면 자기 차 안에 지도 한 권씩은 갖고 있다. 지도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의 방위(方位)와 거리, 즉 지리적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는 언제나 지리적 정보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지도는 지표면의 정보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일어나는 인문현상, 더 포괄적으로 역사를 기호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상징화의 한 형식이다. 지도는 우리가 육안으로 수용할 수 없는 저 너른 불가시의 영역을 축척(縮尺)하여 보여준다. 사람이 보고 촉지할 수 있는 공간이란 신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국소적(局所的) 공간이다. 이 국소적 공간을 감싸고 그것을 하나의 부분으로 정위(定位)하며 전체로서 열린 공간을 전역적(全域的) 공간이라고 한다. 지도의 이면에 숨은 욕망은 직접 체험할 수 없는 이 전역적 공간 안에서 자기가 서 있는 국소적 공간을 바라보고자 하는 전체 조망의 욕망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좁은 공간 저 너머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없었다면 지도도 없었을 것이다. 지도가 기호로 도상화되어 드러내는 이 공간은 바로 의미로서의 세계 그 자체다. 지도를 만든 이들의 깊은 욕망은 다름아닌 의미로서 경험되는 세계에 대한 욕망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도는 의미로서의 세계라는 텍스트를 보여주는 미디어다.
와카바야시 미키오는 『지도의 상상력』에서 지도의 상상력에 함축된 사회, 더 나아가 세계의 의미를 짚어낸다. 근대 지도는 근대 세계에 대한 “해독(解讀)과 실천의 격자”다. 근대 지도에 내재하는 시선의 원칙은 볼 수 있는 것만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 지도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 지형물뿐만 아니라 국가가 지자체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사실도 표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근대적 사회를 지탱하는 사회적 사실들, 즉 지(知), 생산과 유통, 통치권력, 이와 관련된 신체기술, 그리고 시스템을 보여준다. 미키오는 근대 지도가 근대 세계를 살아가는 세계로서 현실화하고 사회적으로 재생산하는 매개물임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근대적 지도는 ‘근대’라는 사회에 고유한 에피스테메 ― 인식의 사회적 받침대 ―에 속하며, 근대 세계의 사회적 실천을 연결하여 근대적 세계가 하나의 실정성을 가진 세계로서 제작되고 다양한 실천을 통하여 그것이 재생산되는 것을 지탱하고 있다. 그것은 국가와 국가 시스템, 그리고 또 국가 내부의 자치체 등을 비롯한 공간 시스템과 같은, 세계적인 규모에서부터 친근한 장소에 이르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인 관계들의 공간과 상관하는 표현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들 공간에서 관계나 행위와 지리적 공간을 매개하고 또 세계에 관한 사람들의 의식을 매개하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우연히 고지도(古地圖)의 아름다움에 홀려 삶의 의미가 발현되는 장소들과 세계상을 하나의 평면에서 보고자 하는 인간의 오래된 욕망을 깨닫고 자연스럽게 인문지리학 공부에 빠져들게 되었다. 내 전공이 문학인지라 인문지리학 중에서도 ‘문학지리학’을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축쇄본을 옆에 두고, 이중환의 『택리지』를 읽은 게 벌써 두 해가 넘어간다. 그 과정에서 만난 『지도의 상상력』은 지도를 통해 사회와 세계의 존재방식에 대한 의미 있는 성찰을 보여주는 보석과 같은 책이다.
경기도의 문학지리
충주 서쪽이 경기도 죽산·여주의 경계이다. 죽산 칠장산이 경기도와 호남의 경계에 우뚝 솟았고, 그 산에서 나온 맥이 서남쪽으로 가다가 水喩 고개에서 크게 끊어져 평지가 된 다음, 다시 솟아나 용인의 부아산·석성산·광교산이 되었다. 광교산의 서북쪽이 관악산이고, 바로 서쪽은 수리산인데 맥이 서해에서 끝났다.
― 이중환, 『擇里志』
1. 경기도, 서울의 울타리
경기도는 서울을 핵으로 품고 있다. 서울을 중심에 두고 그 주변에 포진해 있는 경기도의 도시들은 서울의 衛星都市고, 서울의 변두리다. 서울의 막강한 원심력은 그 주변에 위이한 경기도에 그대로 전달되니, 경기도의 명운이 서울의 명운과 더불어 한다는 사실은 피할 도리가 없다. 서울의 직접적인 영향권역에 속하니 서울의 나쁜 풍속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그 風塵을 고스란히 뒤집어 쓸 뿐만 아니라, 독자적으로 서지 못한 채 서울에 기댄- 기생경제를 꾸릴 수밖에 없는 경기도인들의 살림살이는 서울의 경기에 따라 부침을 달리 한다. 달걀이 노른자위와 그것을 감싸는 흰자위로 뚜렷하게 구별되듯 서울과 경기도는 표나게 드러나는 억누름과 따돌림은 없다 해도, 그 행정적인 지위와 세력, 여러 면에서의 특혜는 확연하게 차이진다. 실속은 서울이 독점하고 남은 이삭을 차지하는 게 경기도다.
2003년도에 이르러 인구 1천만이 넘어선 경기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울에서 받는 것보다 내주는 것이 더 크다. 이렇듯 크고 작은 이권과 자본을 분배하는 서열의 위계에서 서울보다 한 걸음 떨어지는 경기도가 처한 이 지정학적 운명을 피할 수가 없다. 이를테면 경기도에 속하는 신도시인 서울 북쪽의 일산이나 남쪽의 분당은 서울 인구와 주택의 과포화 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기획도시다. 서울에 사람이 넘쳐나기 때문에 그 잉여의 인구와 주거공간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다. 땅과 자원이 한정된 서울이 필요한 땅과 자원을 경기도에서 빌려 쓰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삼국시대에는 경기도가 들어앉은 한강 유역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백제, 고구려, 신라가 벌갈아가며 차지하고, 조선이 세워진 뒤 권력의 중심이 고려의 수도이던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겨지긴 했지만, 고려에서 조선 왕조로 이어지는 천년 세월 동안에는 왕도를 품은 땅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삼팔선과 휴전선이 그어지며 남북 땅들은 경기도 안에서도 이북과 남북으로 갈려 분단의 벽에 가로막혀 서로 오갈 수 없는 땅이 되기도 했다. 연천군과 포천군의 일부가 휴전선 남쪽에 들어오고, 개성시와 개풍군, 장단군 등은 북쪽으로 넘어갔다. 본디 한강을 끼고 있어 물이 풍부하고 땅이 기름져 농사짓기에 알맞은 곳이었으나,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땅들이 상업지역과 공업지역으로 변하였다.
서울과 인접한 안양, 시흥, 부천, 성남, 광명, 안산, 과천 등은 도시나 공단으로 개발되면서 농경지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경기도를 “함경도 안변부의 철령에서 나온 한 맥이 남쪽으로 500 ~ 600리를 달리다가 양주에 이르러 자잘한 산이 되고, 다시 동쪽으로 비스듬하게 돌아들면서 갑자기 솟아나 도봉산 만장봉이 되었다. 여기에서 동남방을 향해 가면서 조금 끊어진 듯 하다가 또 우뚝 솟아, 삼각산 백운대가 되었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서 만경대가 되었는데, 여기서 한 가지는 서남쪽으로 가고, 또 한 가지는 남쪽으로 백악산이 되었다. 형가는 ‘하늘을 꿰뚫는 木星의 형국이며 궁성의 주산이다’고 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世宗實錄地理志』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경기도의 동쪽은 강원도 춘천과 원주에 이르고, 서쪽은 황해도 강음과 배천에 이르며, 남쪽은 충청도 죽산과 직산에 이르고, 북쪽은 황해도의 토산과 강원도 이천에 이르러서, 동서가 264리요, 남북이 364리가 된다. 牧이 1이요, 군이 6이요, 현이 26이다. 명산으로 말하자면 삼각산은 도성의 鎭山이며, 白岳 북쪽에 있고, 성거산은 옛 서울의 松岳 동북쪽에 있으며, 花岳은 가평현 북쪽에 있고, 鉗岳은 적성현 동북쪽에 있으며, 용호산은 임강현 남쪽에 있고, 오관산은 임강현의 任內인 송림 북쪽에 있으며, 마니산은 강화부 남쪽에 있다.”
한반도의 동쪽에 치우쳐서 북-남으로 길게 가로질러 척추의 형국을 한 태백산맥이 경기도의 동쪽을 병풍처럼 둘러서고 서쪽으로는 그 산맥의 잔가지들이 뻗는다. 위로는 황해도, 아래로는 충청도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황해와 접한 해안선이고 동쪽으로는 강원도와 접해 있다. 지세가 동쪽은 높고 서쪽으로 나가면서 낮아진다. 경기도의 산세는 태백산맥에서 갈라져나온 광주산맥을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평쪽으로 명지산, 중봉산, 국망봉, 화악산, 광덕산이 이어지고, 양평쪽으로는 용문산, 백운봉, 봉미산 들이 뻗어나간다. 광주산맥은 서울 부근에 이르러 북한산, 도봉산, 인왕산, 관악산 들을 일으켜 세워 산맥의 형세를 이어간다.
경기도를 거쳐나가는 물길들은 대개는 동쪽의 산악지대의 계곡에서 발원한 물길들이 저마다 지류를 이루고 땅이 낮은 서쪽으로 흘러가면서 합수하여 폭과 양을 확장하고 마침내는 큰 강을 이룬다. 경기도의 북부인 파주 문산 지방을 거쳐 한강과 합수하는 임진강은 마식령 부근에서 발원한 강이다. 금강산에서 발원해 강원도와 경기도의 도계를 넘어 들어오는 물길은 홍천강 물과 합수하여 북한강을 이루고, 강원도 삼척에서 발원한 물길은 양평에 이르러 지류의 물길을 합수하여 남한강을 이룬다. 이 두 강은 양수리에서 한 물로 합수되어 덕소를 지나고 서울 동쪽에 해당하는 왕숙천, 한천, 탄천, 양재천 등에서 흘러나온 물들을 합하여 큰물을 이루고 늠름하게 황해로 흘러나간다.
2. 1번국도가 관통하는 곳
길들은 근현대의 시간들을 관통하며, 지역과 지역 사이의 시간적 거리를 단축한다. 길은 지역과 지역 사이를 잇고 물자와 사람의 왕래를 활발하게 한다. 근대 초입에 일제의 설계와 시공으로 완성된 한국의 간선철도는 섬나라인 일본과 대륙을 잇는 병참과 상품수송의 경로였다. 결과적으로 근대와 제국주의를 유입하는 통로이자 더 원활한 물자와 사람의 이동 경로로써 식민지 지배와 수탈을 극대화하는데 이용되었다. 이 간선철도들과 더불어 경기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1번 국도는 서북단의 신의주에서 서남단의 목포에 이르기까지 498.7킬로미터에 이르는 한반도 서쪽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긴 도로다. 이 1번 국도는 경기도의 개성, 문산, 파주, 고양을 거쳐 서울의 서쪽을 가로지르고, 다시 경기도의 안양, 의왕, 수원, 오산, 평택을 거쳐 천안 쪽으로 빠져나간다.
산업도로라고도 불리는 1번 국도는 물자의 이동 통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는 시간이 곧 돈이니까, 모든 물자를 실어 나르는 자동차의 운전자들은 과속 운행을 상습화한다. 그래서 이 길은 “기계의 비명과 사람들의 삐걱임이 건너간 / 저 속도의 박물관”(이용한, 「1번 국도, 세월」)이다. 자동차들이 과속하는 밤들은 잠 못 드는 자들에게 시름의 사나움에 젖게 하기도 한다. “경기도 의왕 살 때 아파트 단지 바로 아래 / 1번국도, / 화물트럭들의 질주가 사나웠다. / 그게 내 운명의 사나움 같아 시름이 잦았다.”(장석주,「此居」) 낮밤을 가리지 않고 물자가 이동하는 산업도로는 “각자의 산업을 위해 쌩쌩거리는 것들”로 붐비며 그것들이 내는 소음들로 시끄럽다. 그 소리의 힘은 너무 세다. “밤 두세 시의 머리맡에는 / 소리 너무 세다 / 소리의 뒤도 너무 힘세다 // 이 밤중 / 그 어디로 가는 것들이여 / 거칠 것 없는 산업도로를 달리는 것들이여 / 각자의 산업을 위해 쌩쌩거리는 것들이여 / 공중에 날린 접시같이 날아가기도 하는 것들이여”(이진명, 「깃발」) 국도는 지역과 지역을 이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물자와 물자의 오고 감을 활발하게 함으로써 생활양식을 바꾸고 사회변화를 일구는 동인이 되기도 한다. 아울러 지역의 벽에 가로막혀 단절되어 있던 상호접촉과 상호의존의 영역을 확대하며 풍속과 문화의 상호교류가 활발해진다.
인류학적으로 보자면 지표면 위에 뚫린 모든 길들은 사람과 상품과 문화의 이동통로일 뿐만 아니라 문명에 혁신의 기운을 불어넣는 모든 변화의 물결이 유입되는 경로다. 한반도의 남과 북을 잇는 1번국도는 경제성장과 개발시대를 지배한 경제지상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표상이다. 1번국도는 경제지상주의를 떠받치는 상품과 자본의 무한경쟁, 시장의 확장, 소비주의의 유포를 이끄는 첨병이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질주하는 것들로 인해 1번국도는 “속도의 박물관”이 되어버린 것이다. 근대문명의 부산물인 소음과 굉음은 늘 너무 세서 청신경이 여리고 예민한 것들을 압박한다.
서울에서 뻗어나간 길들은 서울을 동심원으로 감싼 경기도를 거쳐나간다. 경기도가 처한 서울의 위성 지역이라는 지정학적인 운명은 불가피한 바가 있다. 이 말은 경기도의 정체성이 노른자위를 꿰차고 들어앉은 서울의 원심력과 방외를 넓게 둘러싼 바깥 지역들, 이를테면 강원도와 황해도, 그리고 충청남북도의 구심력 사이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들어졌음을 뜻한다. 서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강 이남의 성남, 분당, 광명, 부천, 안양, 군포, 과천, 수원, 용인이나 한강 이북의 고양, 일산, 파주, 의정부, 서울의 동쪽에 위치한 구리, 남양주 등은 서울의 원심력에 의한 영향을 더 받을 것이고, 경기도 남부의 오산, 여주, 이천, 안성, 평택 등은 저 중앙의 원심력보다는 변방에서 뻗어 나오는 구심력에 의한 영향이 더 크다. 서울 근교에 사는 경기도 사람들 중에는 서울에 직장을 두고 출퇴근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 중에는 마음의 현주소를 잠만 자는 경기도보다는 일상생활의 중요한 시간들을 더 많이 보내는 서울에 두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3. 경기말의 언어지리학
중세 국어가 형성되는 고려 왕조 시대의 표준말은 개성말이다. 왕조 권력이 서 있는 곳이 개성이고, 그곳이 정치와 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했기에 개성과 그 인근의 경기도 지역에서 통용되는 말들이 중심언어로써 여러 지방 말들에 표준적 권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조선 왕조가 들어서며 권력의 중심이 개성에서 서울로 이동하며, 자연스럽게 표준말의 거점 공간도 개성에서 서울로 바뀌지만 서울과 개성은 방언차가 그리 크지 않으며 다 함께 중부 방언권에 속한다. 방언은 지역과 사회계층, 세대에 따라 특화된 언어 현상, 즉 주류 언어에서 갈라져 나온 변이체이자 分化體다. 방언학에서는 이들 방언들은 어휘, 발음, 음성, 음운, 형태, 통사, 의미 등과 같이 일곱 개로 범주화해서 方言差를 측정하고 구획을 나눈다. 언어지도는 이 언어구조상의 차이에 근거해 방언형의 분포를 지리적 경계로 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等語線이다. 등어선은 어휘등어선lexical, 발음등어선pronunciation, 음성등어선phonetic isogloss, 음운등어선phonemic isogloss, 형태등어선morphological isogloss, 통사등어선syntactic isogloss, 의미등어선semantic isogloss 등으로 나눈다. 이 등어선에 의해 방언구획은 보다 또렷해진다. 사회방언학에서는 방언을 둘로 나누는데 古形과 改新形이 두로 쓰이는 병존 방언과 고형도 아니요 개신형도 아닌 두 방언이 결합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제 3의 융합 방언이 그것이다. 경기도와 인접한 황해도와 충청도, 그리고 강원도의 말과 어조의 영향력은 크지만, 지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는 함경도나 평안도 방언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미미한 편이다.
한반도 방언의 분화상은 네 개의 축으로 이루어지는데, 개성말이 중심 언어로 자리잡은 중부 방언권과 더불어 동쪽의 동부 방언권, 서남부의 서남 방언권, 동남부의 동남 방언권이 바로 그것이다. 방언 분화에 미치는 영향은 지형적 조건이나 지역의 접근성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의 왕래가 쉬운 평야지대라면 언어들이 쉽게 오가며 뒤섞일 것이고, 사람의 왕래를 가로막는 산악지대는 방언전파의 장애물이 될 것이다. 언어지리학의 측면에서 경기말과 서울말은 겹쳐지는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은 두 지역이 사람들의 왕래가 쉬운 인접지역이라는 것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서울과 경기도는 사람과 물자가 집중되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치와 경제와 문화, 그리고 교통의 중심지가 된 곳이다. 이런 탓에 각 지역의 말씨가 서울과 경기도로 빠르게 유입되고 유입된 말들은 이 지역에서 두루 통용되는 표준 방언의 용광로 속에서 섞이고 녹아들며 새 입말로 태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근대를 거쳐 현대로 들어서자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 타지 사람들의 들고 남이 활발해지고 중앙의 표준어들에 지방의 방언들이 상호영향권역에서 말의 음운론적·형태론적·어휘론적 변이들이 뒤섞이면서 새로운 입말들이 나타난다. 특히 6·25전쟁으로 인한 북쪽 피난민의 대거 이동과 산업화가 본격화되는 1960년대 이후 남쪽 농민들의 서울과 수도권 지역으로의 유입은 이 지역의 표준방언과 각 지역의 토박이 방언들이 전파되어 두루 섞이는 현상이 가속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말이나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의 유동과 변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표준말에서 문장 연결 어미로 쓰이는 ‘고’, ‘거든’, ‘(으)니까’ 등을 서울말에서는 한 문장이 끝나는 나리에 ‘구’, ‘거등’, ‘(으)니깐’으로 쓴다. 1960년대 중반에만 해도 서울사람들이 이런 서울말을 두루 널리 써서 충청도 방언권에 살다가 서울에 갓 온 내 귀에는 무척이나 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즈막에는 이런 서울말씨를 고스란히 간직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 매우 드물다. 경기말과 서울말에 “구개음화, 움라우트, 낱말 첫 자음의 된소리 내기” 등이 나타나는 것은 십칠 세기에서 십팔 세기에 걸쳐 호남과 영남 방언에서 보이던 현상들이 북상하여 현대의 경기말과 서울말에 영향을 끼친 예다. 경기말과 서울말은 본디 그것이 갖고 있던 원형을 상당 부분 잃고 지방 방언들에 영향을 받은 개신형의 말들에 그 자리를 내어준다. 대체적으로 서울말과 경기말에 서남과 영남 방언이 끼친 영향에 비해 관동 지역, 함경도, 평안도의 말은 그 영향력이 미미하다.
경기도는 이 지역의 오랜 역사와 더불어 풍부한 물자와 사람만큼이나 문학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한다. 따라서 경기도의 문학지리는 거두고 살필 것도 많다. 우선 이 책에 실린 인물만 보더라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신소설의 주요한 작가로 활동한 이해조(포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근대이행기의 여성 자의식의 그 복잡한 상처를, 현실에서의 자기희생을 통한 과격한 실천으로 온몸으로 밀고 나”간 나혜석(수원), “1922년 나빈 현진건, 월탄 박종화 등과 함께 문예동인지 백조를 창간하여 이념과 양식에 있어 새로운 근대시 운동을 주도”한 시인 홍사용(화성), 해방기에 ‘조선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에 가입해 주로 “빈궁한 현실과 프로계급의 참상, 계급대립과 계급투쟁”을 그려낸 시인 박세영(고양), 한국 창작동화의 선구자로 “동심천사주의의 상대적인 입장에서 시대의 특수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현실 밀착적인 작품으로 아동문학의 기틀을 다진 마해송(개성), 해방기 좌파 문예운동 조직인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에 적극 참여하며 소설과 비평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한 박승극(수원), 이른바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으로 문학사 안에 제 이름을 새긴 시인 박두진(안성), 대중에게 위안을 주는 시들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 조병화(안성), 역사소설에서 큰 성과를 거둔 소설가 유주현(여주), 특히 미군 기지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약소국 민중이 겪는 불평등한 현실과 그 상처를 통해 “비정한 현대도시의 물신성과 인간 소외 현상”을 비판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박석수(송탄) 등이 있다. 이들 문학지리에 대한 성찰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의 역사와 문화, 그 속사정과 내력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나아가 고장에 대한 자긍심을 키워 지역정 정체성을 강화하는데 기여한다.
4. 장소와 비장소
모든 되새겨 볼 만한 가치 있는 시들은 그 안에 의미를 머금은 지도를 품는다. 그 시의 모태가 되는 상상력을 낳고 키운 실존의 자리, 즉 지리적 장소가 숨어 있다는 뜻이다. 실존의 자리는 피동적 영역이 아니라 사람의 의도와 계획, 의미 있는 활동들로 채워지며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장소다. 에드워드 렐프는 “인간은 도시, 마을, 집을 건축하고 경관을 만들어냄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의미의 패턴과 구조를 창조한다.”고 말한다. 어떤 시들은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어떤 시들은 그것을 속으로 숨긴다. 장소들은 사회적 소통과 관계가 이루어지는 경험의 받침대이자 거점이다. 사람은 장소와의 깊은 관련을 통해서 개인의 정체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얻고 독립된 인격체로 성장하는 존재다. 그런 점에서 사람은 저마다 제가 낳고 자란 장소들을 증언하는 물적 증거들이다. 예를들어 김명인의 「동두천」 연작을 읽어보자.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혀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김명인, 「동두천 1」
경기도 북부 지역에 위치한 동두천은 6·25전쟁 전에는 그저 하나의 땅덩어리에 지나지 않은 곳이었다. 1952년에 미군 제 7사단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들어앉으면서 동두천은 미군 주둔 도시로 급조되었다. 미군을 상대로 하는 관광홀과 기지촌 같은 특수 유흥업소들이 들어서며 그 전에는 보잘것없던 시골 마을들이 겉으로는 번화한 도시로 빠르게 변모한 것이다. 동두천은 전후 特需와 함께 미군들이 뿌리는 달러가 밑불이 되어 일으킨 경제활동으로 돌아가는 도시지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양색시와 건달들이 꾀고, 덩달아 마약과 범죄가 극성을 부리는 미국의 변방도시의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동두천에 붙은 ‘리틀 시카고’라는 이름은 그런 속사정을 대변한다.
청년교사가 되어 동두천에 부임한 시인 김명인은 「동두천」연작을 통해 동두천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들의 어두운 미래를 짚고, 이곳에서 몸부비며 살아가는 이들의 막막한 심정을 몇 개의 표상적 이미지에 담아낸다. 삶을 찾아 이곳에 흘러온 사람들은 대개는 뜨내기들일 터인데, 저의 고단한 삶이 부려진, 그래서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지는 낯선 동두천은 “캄캄한 어둠 속”이거나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이고, “배고픈 고향”과 동일시되는 장소다. 아울러 동두천은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바닥이다. 미군을 따라간 아이들은 문맥으로 미루어 보건대 혼혈아일 가능성이 높다. 동두천에서 드물지 않은 혼혈은 가난과 차별의 표식이다. 가난과 차별의 표식을 갖고 태어난 그들이 미국이라는 저 낯선 곳으로 등 떠밀려 간다고 해서 행복해질 거라는 보장은 없다. 청년화자는 “......무엇이 /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고 묻고 있지만, 그 물음은 대답이 필요없는 물음이다. 그것은 물음이기보다는 제 운명의 결정권이 자기 아닌 그 무엇의 손에 쥐여 있다는데 대한 깊은 탄식이다. 그 물음의 주체는 동두천에 부임해 와서 조국이 처한 비참한 처지를 새롭게 인식한 청년시인이지만, 아울러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등 떠밀려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야 하는 “우리”라는 복수의 주체다. 누군가에 의해 등 떠밀려 동두천에 부임한 청년교사와, 뜨내기 동두천 주민과, 가난과 차별의 표식을 갖고 태어난 혼혈아들이 “우리”라는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연대에 있다. 그들은 “월급 만 삼천 원을 받”는 스물 세살의 초임 교사, “태어나서 죄가 된 고아들”, “우리들이 악쓰며 매질했던 보산리 포주집 아들들”이다(「동두천 2」). 형편과 처지가 제각각인 이들을 “우리”라는 연대로 묶는 것은 동두천이라는 척박한 현실에 기대 삶을 꾸린다는 공통점과 그리고 이 척박한 삶의 자리가 빚어내는 “더러운 그리움”이다.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 혼혈아인
엄마를 닮아 얼굴만 희었던
그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연애를 하고
퇴학을 맞아 고아원을 뛰쳐나가더니
지금도 기억할까 그 대 교내 웅변 대회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 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
일곱 살 때 원장의 姓을 받아 비로소 李가든가 金가든가
朴가면 어떻고 브라운이면 또 어떻고 그 말이
아직도 늦은 밤 내 귀가 길을 때린다
기교도 없이 새소리도 없이 가라고
내 詩를 때린다 우리 모두 태어나 욕된 세상을
이 强辯의 세상 헛된 강변만이
오로지 진실이고 너의 진실은
우리들이 매길 수도 없는 어느 채점표 밖에서
얼마만큼의 거짓으로나 매겨지는지
몸을 던져 세상 끝끝까지 웅크리고 가며
외롭기야 우리 모두 마찬가지고
그래서 더욱 괴로운 너의 모습 너의 말
그래 너는 아메리카로 갔어야 했다
국어로는 아름다운 나라 미국 네 모습이 주눅들 리 없는 合衆國이고
우리들은 제 상처에도 아플 줄 모르는 단일 민족
이 피가름 억센 단군의 한 핏줄 바보같이
가시같이 어째서 너는 남아 우리들의 상처를
함부로 쑤시느냐 몸을 팔면서
침을 뱉느냐 더러운 그리움으로
배고픔 많다던 동두천 그런 둘레나 아직도 맴도느냐
혼혈아야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아이야
김명인, 「동두천 4」
이 도시의 경제활동이 미군의 달러경제에 예속되어 있고, 더불어 이 도시의 외관이 속화된 아메리카의 변방을 모방하고 있기 때문에 동두천이라는 지명은 넓은 의미에서 아메리카의 屬地에 대한 환유이다. “떠돌아와서 먼저 자리잡아도 / 뿌리 없긴 마찬가지인 사람들처럼 그곳에서도 우리들은 / 뜨내기였다”(「동두천 3」) 고향이 “영혼적 구성물의 총체”(빌헬름 딜타이)에 수렴되는 뜻있음의 장소라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이익 군집체를 이루고 뜨내기로 들고 나는 타향이란 실존과 유리되어 겉도는 뜻없음의 장소다. 동두천은 삶의 뿌리를 着根할 수 있는 혈연과 지연으로 얽힌 향촌이나 향토와는 거리가 멀다. 동두천은 토박이들이 삶을 일구고 사는 고향의 표상이 될 수 없는 곳이다. 그 말은 동두천이 뜨내기로 흘러왔다가 다시 뜨내기로 어디론가 흘러나가는 삶의 임시 경유지라는 뜻이다. 우연과 비합리의 복합체로 탄생한 뜨내기는 그 내면적 본질에서 실향인이다. 타향이라는 공간의 정치문화적 유동성과 가변성을 신체에 새기고 사는 존재들인 실향인은 언제라도 떠날 준비를 하고 산다. 고향 바깥을 떠돈다는 점에서 실향인은 유태인이나 아르메니아인이나 팔레스타인인, 그리고 재일조선인과 마찬가지로 디아스포라이다. 시인은 이 디아스포라의 세계 속에 방치된 또 다른 디아스포라들에 주목한다. 그들은 바로 “배고픔 많다던 동두천 그런 둘레나 아직도 맴도”는 고아와 혼혈아들이다. 그들은 어쩌다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 합중국, 그 식민지 모국인의 유전자를 받고 태어났지만, 이 디아스포라의 세계 속에서도 한 번 더 내쳐진 존재들이다. 아메리카라는 울타리 저 바깥으로 내팽개쳐지고, 다시 그 울타리의 변방의, 순수혈통에 의해 그 순수성이 보증되는 “단일 민족”의 신화가 만든 울타리 바깥으로 내침을 당한다. “단일 민족”의 신화 속에서 단일 민족 구성원과 다른 혼혈인들의 피부색은 인종주의적 열등의 표식이다. 그 열등의 표식 때문에 이들은 이중의 유배, 이중의 내침을 당한 것이다. 시인의 명명법에 따르자면 동두천은 “태어나 욕된 세상”의 이름이다. 태어나 욕된 동두천을 실존의 자리로 삼은 자들의 주된 정서는 “무력감과 부끄러움”(김치수)이다. 그것을 다시 시인의 용어로 바꾸자면 “더러운 그리움”이다. 그것의 출처는 강대국의 주둔군에 빌붙어 삶을 꾸려야 하는 동두천 사람들의 처지에 깃든 비루함과 한심스러움이 아니라 제 운명의 결정권이 스스로의 실존적 판단과 선택에 있지 않다는 인식이다.
우리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어디에 사는가를 따져 묻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지역이라는 지표 공간이 장소 정체성이 형성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역은 한 사람에게 인성, 취향과 관습, 정치적 성향과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우리가 소비하는 무수히 많은 장소들, 그리고 삶의 거점으로서 경험하는 지역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규정하고 제약하는 핵심적 요소 중의 하나다. “장소가 허락하는 행위만을 했을 때, 우리는 정상적인 인간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장소가 인간의 삶을, 나아가 자아 정체성까지도 형성할 수 있는 요소인 것이다.” 산다는 것은 장소를 겪는다는 뜻을 함축한다. 우리는 장소 속에서 타인과 더불어 사는데, 그 핵심은 그 안에서 일과 소통을 통해 하나의 공동체로 연대하며 의미의 상호주관적 관계로 묶여 있다는 뜻이다. “개인은 자신의 공간의 중심에 있는 자신의 장소에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개인도 그들의 지각 공간과 장소를 가진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은 이런 자신과 타인들의 공간과 장소들이 전체 사회 및 문화 집단의 지속적이고 어느 정도 합의된 생활공간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장소의 정체성은 그 장소에 사는 사람들의 의도·계획·선택들이 축적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명인의 「동두천」연작시편들은 장소의 정체성이 실존의 핵심적인 외부성으로 개인의 자아 정체성 형성에 개입하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장소들은 사람의 내면에서 경험의 심원한 중심으로 작용하며, 역사와 시대정신이 발현하고 순환하는 토대 공간이다. 최남선은 이미 한 세기 전에 그의 저술에서 “조선의 국토는 산하 그대로 조선의 역사이며 철학이며 시대 정신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지도는 지구 표면의 지리적 형상과 자연, 그리고 인문현상을 기호로 평면에 도상화한 것이다. 지도는 현실의 공간적 범역성, 혹은 의미로서의 장소를 드러내는 상징화의 한 형식이지만, 장소가 그것 위에서 이루어진 사회의 역사와 더불어 뜻을 갖는다는 점에서 존재의 지리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시의 지리학은 이제 수원이나 강화, 인천, 양주와 같이 유서 깊은 내력을 지닌 실재의 장소들을 넘어서서 비장소, 무장소들로 무한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징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이 황병승이다. 황병승의 시적 주체들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들이다. 이 분열된 주체들, “여성과 남성, 죽은 것과 산 것, 이미 떠난 자와 아직 떠나지 않은 자, 아버지와 아이, 말과 밥, 친구와 누나, 심지어 엄마와 나의 경계를 넘어 트랜스”(김혜순) 하는 존재들인데, 이들이 사는 곳은 지도상에는 표기되지 않는 가상공간, 디스토피아, 무장소다. “여장남자 시코쿠”가 손에 들고 있는 지도는 현실 저 너머의 부조리한 세계의 지도, 잡종성의 혼재가 낳은 상상력으로 그려낸 “시코쿠의 맵”, 혹은 “앨리스의 맵”이다.
어둠이 내리는 호수에 발을 담그고
우리는 읊조린다, 조지아.....비의 조지아......
기우는 나무 곁에서 흩어지는 바람 속에서
덫에 걸린 고양이처럼 서서히 오그라드는 귓바퀴처럼
조지아...... 오우 조지아, 라고.
서른 살, 우리는 비 내리는 조지아에 살고 있었다
마을 주변에는 나무 숲 호수가 있었고
우리는 그것들을 그냥 나무 숲 호수라고 불렀다 이름을 지우고
뻔뻔스럽게 우리는 서로에게 안녕 자네 이 사람, 인사를 건넸다
오우 조지아, 꼬집고 때리고 발가벗겨 모욕을 주고 싶었으나
다정한 입술을 내밀어(독사에게나 물려 뒈져버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손등에 입 맞추었다 쯔으읏 쯔으으읏........ 풀숲에 얼굴을 감추고
밤새도록 귀뚜라미들이 혀를 차는 비의 조지아,
앙금들, 우리의 첫 인사는 시작되었고
좋았다, 마을 주변을 건들거리며 보내는 날들
우리는 조금 늦게 철이 들었고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분명하다는 것은
의심할 게 없다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게 싫었다, 아버지
조지아를 더욱 조지아답게 ! 아버지의 아버지가
아버지에게 그것을 보여주었고 죽을 때까지 물고 늘어졌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의심했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게 좋았다.
때때로 빗줄기가 사라지는 조지아의 밤, 그런 날이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숲에 들어가 불을 놓았다
불길이 구름의 모양을 천천히 변화시키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무도 서로를 추궁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저지른 일이므로. 제발 조지아, 젖은 머리칼이 약간
얼굴을 가렸을 뿐
좋았다, 숲의 나무들은 때가 되면 다시 자랄 것이고
지나가는 구름은 빗방울은 언제나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미지근한 맛으로 우리는 우리의 꾸물거리는 혀가
맛대가리 없는 빵처럼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듯한 착각에 빠졌고
어린애들처럼 진창에 착착 발을 구르며 기분을 표현했다.
........비의 조지아, 빗줄기는 또다시 퍼붓고
우리는 동시에 젖은 외투를 머리 위로 끌어올리며
어서 들어가 머리나 좀 말리게 이 사람아, 동시에 돌아섰다
(산 채로 내던져져서 독수리 밥이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숨기고)
목소리.......심장의 힘찬 박동과.......다정히 건네는 악수......
경건함이 배인 발걸음...... 조용히 미소,
그것들이 마치 끝없는 길과 같아서
어딘가에 있을 당신에게로 이끌어줄 수 있다면
극서들이 마치 눈앞에 펼쳐진 지도와 같아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있는 곳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다면
서른 살, 우리는 비 내리는 조지아에 살았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조금씩 서로를 닮아가며 이도 저도 아닌 첫 인사의 추억을 나눠 가진 채
(이빨을 죄다 펜치로 뽑아버릴 걸 그랬지, 역시 그런 속마음을 감추고)
거무죽죽한 빛깔의 혀를 내밀어 처음 느꼈던 그 비의 맛, 그저
좋았다, 밤에도 낮에도 언덕을 오를 때에도 숲길을 지날 때에도
우리는 읊조린다, 덫에 걸린 고양이처럼
서서히 오그라드는 콧잔등처럼
조지아..... 오우 조지아, 라고. 기억할 수 없는 순간까지
우리는 비 내리는 조지아를 떠돌았다.
황병승, 「비의 조지아」
황병승 시의 지리학에 나오는 지명들은 조지아, 대야미,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 요코하마와 같은 곳들인데, 이곳들은 실제 장소가 아니라 실재계와 상징계의 중간 어디쯤 모호한 곳에 있는 가상 공간들이다. 황병승의 상상세계는 주체들의 성 정체성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뒤틀려 있는, “게이, 드랙퀸, 트랜스젠더, 크로스드레서들로 넘쳐나는 이 ‘퀴어’의 세계”며, 여장남자와 사성장군과 성전환자와 쥐와 도마뱀과 검은 염소 등등이 모호하게 뒤엉켜 있는 한마디로 “이질 혼재”의 세계다(이장욱). 아마도 매일 살인 잔혹극이 벌어지는 이 “이질 혼재”의 상상세계에서 가장 정상적이고 온건한 서정성을 보여주는 시가 「비의 조지아」일 것이다. 이 서정시의 주체는 “서른 살, 우리는 비 내리는 조지아에 살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조지아는 상상세계에나 존재하는 “앨리스 맵”에 표기된 지명이다. 조지아에도 비가 내리고 나무들이 자라지만 이곳은 현실에는 없는, 다시말해 장소정체성을 갖지 않은 비장소, 무장소다. 이 무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실존은 타자에 대한 증오와 무관심으로 특징지워진다. 조지아는 “덫에 걸린 고양이”의 실존이 내던져져 있는 디스토피아다. 이 음습한 도시의 거리를 떠도는 황병승의 시적 주체들은 타자에 대한 거부를 “산 채로 내던져져서 독수리 밥이나 되었으면” 하거나 “이빨을 죄다 펜치롤 뽑아버릴 걸 그랬지” 하는 속마음으로 드러낸다.
우리시에 새겨진 무수히 많은 한국인의 심상 공간들, 서울, 부산, 대구, 수원, 인천, 광주, 대전과 같은 대도시는 물론이고, 전주, 강진, 해남, 목포, 장흥, 마산, 구미, 김천, 울산, 안동, 영주, 통영, 진주, 경주, 춘천, 강릉, 정선, 공주, 논산, 강화, 여주, 이천, 안성, 홍성, 서산..... 등과 같은 중소도시들은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의 연속성 안에서 살아 있는 장소들이다. 이런 장소들은 정서적 안정과 평화, 그리고 평온함의 근거다. “우리가 뿌리내린 장소와, 그리고 사물이 제자리에 제대로 있을 때 느껴지는 빛·소리·느낌의 향기는 평온함의 근원이다.” 그러나 황병승의 시에 등장하는 무장소들은 경험과 기억의 연속성을 갖지 못한 곳, 다시말해 장소의 지속성에 대한 감성이 부재하는 개념적 지리들이다. 아마도 현대세계는 사람들을 더 많은 무장소들로 내몰 것이다. 무장소들로 가득한 황병승의 상상세계가 뜻 있는 것은 그것이 장소들로부터 소외되는, 혹은 장소의 진정성을 갖지 못한 채 떠도는 탈현대적 삶의 비극적 징후들을 선취하고 있는 까닭이다. 실존이 무장소의 지리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진정한 장소와 자아가 결합하여 만드는 장소의 정체성이 부재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장소의 정체성을 갖지 못한 삶은 곧 자아의 정체성이 고갈된 공허하고 메마른 삶이다. 미래사회는 점점 더 많은 무장소의 지리 속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지리학자의 우려 섞인 경고의 목소리를 의미심장하게 새기며 경청해야 할 것이다.
의미 있는 장소와 관련 맺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뿌리 깊은 욕구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욕구를 무시하면서 무장소의 힘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환경이 되고 말 것이다. 이와 달리, 우리가 장소 욕구에 반응하기를 원하고 무장소를 초월하고자 한다면, 인간 경험의 다양성을 반영하고 강화하는, 인간을 위한 장소가 있는 환경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개연성이 있을지, 아니면 아예 다른 가능성이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무장소의 지리가 될 것인지, 의미 있는 장소들의 지리가 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도 온전히 우리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