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는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겨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임시 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성공한 후퇴 작전이다.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진행되었다.
본 전투의 이름의 장진(長津)은
영어로는 일본어 독음을 따서 Chosin(ちょうしん)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당시 한국어 지도가 없고 일본어 지도뿐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도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였다.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으며, 생존자가 몇 안 된다 하여 영어로 그들을 가리켜 "The Chosin Few"라 하였는데 그 말은 "The Chosen Few" (선택 받은 소수)를 의미하는 일종의 "pun (펀)", 하나의 동음이의적 익살이다.
1 해병사단 외에 미국 육군 7사단 병력 일부도 함께 하였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공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공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사건을 말한다.
흥남 철수의 작전시작한 날은 바로 대한민국이 평양에서 철수한 날이었다. 또한 흥남 철수 작전이 바로 1.4 후퇴의 시작이었다.
미 해병1사단의 이 퇴각작전으로 중공군을 저지함으로써
한국군과 유엔군, 피란민 등 20만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서부전선의 미 8군이 중공군을 방어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공군의 함흥 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됐고
중공군 7개 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압착포위작전(Massive Compression Envelopment)
평양 수복 후, 맥아더 사령부는 중공군이 개입할 가능성이 없다는 전제하에서 압록강을 향한 대대적인 포위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극동 사령부는 한반도 북부의 험난한 자연과 기후,
그리고 중공군 개입에 대한 철저한 대비없이
이 포위작전의 북쪽 주공을 미국 1 해병사단에게 맡겼다.
미국 1 해병사단은 유엔군의 북진에 맞추어 서부전선부대와 접촉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장진호 방면 진출을 위해 원산에 상륙하였다. 처음에 동부에 있었던 미국 10군단과 미국 1 해병사단은 장진호쪽으로 어렵게 북상하게 된다. 미국 1 해병사단은 북한군의 정부가 도피중인 강계를 점령하기 위해 장진호쪽으로 북진하게 된다(하지만, 미국 10군단은 11월에 중공군의 습격, 강추위로 인해 철수했다).
함흥 북방 수동 일대에서 미국 1 해병사단 7연대 1대대와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부터 후퇴한 인민군 344전차대대 잔존 병력과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중 일부 중공군 포로가 발견되어
중공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고 있다는 첩보가 사실로 확인되었다.
당시 동경의 극동 사령부 (FEC, Far East Command)는 CIA와
기타 정보기관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7] 압록강에서 160km 후방인 수동에서 발견된 중공군은
소수의 지원병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정보참모 윌로비 (Charles A. Willoughby) 소장을 통해
11월 3일 16,500명에서
34,000명 가량의 중공군이 북한 지역에 들어와 있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중공군은 그 시점에서 제 9병단의 12개 사단과 제 13병단의 18개 사단, 대략 30만명이 이미 북한에 들어와 있었다.
제 7연대는 수동 전투 이후 진흥리까지 진출하는데 꼬박 닷새를 보냈고, 3,000 명의 연대 병력 중 전사 50명, 부상 200명의 피해를 입었고 중공군은 1,500명이 전사한 걸로 파악하고 있었다.
7연대 병력은 별다른 전투없이
11월 7일 황초령 문턱에서부터
15일에는 장진호 남단 하갈우리를 거쳐,
25일에 장진호 서편 유담리에 진출하였다.
26일에는 7연대는 장진호를 중심으로 서쪽,
5연대는 하갈우리 북방, 1연대는 후방을 담당하는 형태로 배치되었다. 이 기간 동안 스미스 사단장은 하갈우리에 보급품을 비축과 야전활주로 건설을 지시하였다.
한편,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은 11월 24일에 제 4야전군 예하 13 병단(약 18만명)과 제 3야전군 예하 9병단(12만명)을 미 8군 전면과 미 10군단 1 해병사단 전면에 배치하였고
11월 25일에는 미 8군의 우측을 공격하여 한국군 2군단이 붕괴될 위기에 처하였다.
또한 미 2 보병사단도 공격을 받아 당일에만 4,000 여명의 병력과 사단 포병장비도 대부분 잃었다.
장진호(일본 발음 초신) 중공군 공격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의 명령으로
해병 1사단은 당일부터 5연대를 주공으로 포위기동의 북쪽 날개로써 미 8군을 포위하고 있던 중공군을 격퇴하고
미 8군과 함께 낭림산맥 서쪽으로 공격할 예정이었으나
계획과 달리 포위작전의 방어부대인 미 8군이 중공군의 공격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중공군은 9병단 8개 사단 약 6만여 명의 병력을 장진호에 집결시켰다. 이중 3개 사단은 유담리에 대한 공격을 준비 중이었고
1개 사단(80사단)은 하갈우리 포위를 위해 해병 1사단의 우측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미 7보병사단 31연대전투단에 대한
공격을 준비 중이었다.
당일 연합군 병력은
해병과 해군위생병 13,500명과 육군 4,500명에 불과하였다.
중공군은 27일 밤부터 28일까지 미 해병 16개 소총중대 가운데
3개 중대를 격멸하고 많은 고지를 탈취하였다.
이틀에 걸친 공격으로 중공군은 3개 사단(79, 89, 59사단)이 미국 1 해병사단을 세 개의 조각으로 분산시켜 각 부대를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로 각각을 고립시겼으며 부대 간의 연결도로도
차단하였다.
제5해병연대와 제7연대는 신속히 방어로 전환하여 병력을 절약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해병 5연대 2대대는 오후부터 철수를 개시하여 밤8시에는 서남쪽 산으로 철수를 완료하고,
좌는 제7해병연대 3대대,
우는 제5해병연대 3대대와 연결하여 진지 편성을 마쳤으나
중공군 제58사단이 미 해병 1사단과
보병 7 사단의 사령부가 위치해있고 주요 보급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하갈우리를 포위하고 유담리, 고토리와의 연결을 차단하여
포위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이틀에 걸친 공격으로 중공군 제79, 89사단은 전력을 재편성중이어서 미 해병 5, 7연대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실시할 능력이 없었다.
하갈우리 방어는 제1해병연대 3대대가 맡고 있었다.
하갈우리에는 육군, 해군, 해병대, 한국군 등 58개 부대 3,913명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10명 이하로 구성된 선발대나 파견대였기 때문에 통합 지휘가 필요하여
이날 오후 3시 경에 3대대장이던 리지 중령이 하갈우리지역
방어작전의 통합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하갈우리 방어 전면은 약 2,200m였다.
하갈우리 방어를 위해 제11포병연대의 2대대 D포대가 지원하였다.
포병과 박격포를 동원한 화력 지원으로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었으며 이 전투 와중에도 방어진지 내에서는 활주로 공사가 계속되고 되었다.
하갈우리는 2개 중대 병력의 규모가 방어하고 있었으며 동부고지는 3개 소대가 겨우 진지를 유지하면서 중공군과 대치중이었다.
오전 8시에 미군이 소대와 배속된 공병 2개 소대로써
중공군이 점령한 동부고지를 공격했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밤 0시부터는 중공군이 전날보다 강력한 화력과 인원으로
남쪽의 I중대정면과 동부고지의 G중대 정면을 공격하였다.
I중대는 비행장을 직접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뢰, 철조망, 조밀한 화망 구성으로 가장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동부고지에 위치한 G중대는 중공군의 공격으로 중대장이 부상당하였으나 12월 1일 새벽에 영국 코만도부대를 동부고지에 투입하여 역습을 감행 아침 9시경에는 전날의 진지를 회복하였다.
11월 28일부터 시작된 하갈우리 공격으로 양측은 미군 전사상자 315명, 중공군 전사상자 8,500여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장진호 서쪽의 160km 지점에서는 미 8군단 보병 제2 사단이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후퇴하고 있었다.
미 8군단의 퇴각과 미 해병사단의 위기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가 원자폭탄을 쓸 수 있게 허락할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
새로운 전황보고를 받은 10군단은 이날 오후 7시 30분
군단을 함흥-흥남지역으로 집결하고
제1해병사단은 먼저 하갈우리-수동간의 도로를 확보하면서
하갈우리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사단은 제5해병연대가 유담리 방어를 담당하고 제7 해병연대는 하갈우리까지의 도로를 개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해병 7연대와 5연대는 하갈우리로의 철수를 위해
병력을 재 배치하였다.
이날 아침, 미 해병사단은 제5해병연대 3대대를 전위부대로해서 제 5, 7 해병연대를 유담리-하갈우리 간의 도로를 경유하여 신속하게 하갈우리로 전진하도록 명령하였다.
오전 8시부터 해병 5연대 3대대를 시작으로 철수를 시작하였다.
제7해병연대 1대대는 영하 31도의 혹한과 적설을 뚫고
밤 9시에 1419고지로 출발했다.
이때, 1대대는 미군으로는 드물게 야간 산악행군을 감행하여
중공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제 1대대는 1520고지 동쪽 경사면에서 중공군 약 1개 소대를 격멸하고 12월 2일 새벽 3시 경에 재편성을 완료하였다.
부대를 정지 시키자마자 피로에 지친 병들은 그대로 눈 위에 쓰러져 추위도 적탄도 아랑곳 없이 잠을 자려고 하여 장교와 부사관들은 이들을 깨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갈우리의 야전활주로가 완성되어
부상자에 대한 후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새벽 6시경, 해병 7연대 1대대는 5일동안 고립되어 있던 F중대 구출을 위해 1653고지(덕동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F중대와 합류에 성공하였다.F중대는 5일동안 전사 26명, 실종 3명, 부상 89명의 총 11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대 장교의 7명 중 6명이 부상을 입었고 병전원이 동상과 설사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전선에 눈이 내려 약 13cm의 적설량을 기록하였다.
이날 아침 해병 7연대 1대대는 덕동고개의 동쪽 고지에 위치한
중공군 1개 대대를 공격하여 오전 10시 30분 경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오후1시, 해병 5연대 3대대는 덕동고개에 도착하여 해병 7연대 1대대와 합류했다. 11월 30일부터 시작된 작전으로 전위대대는 약 56%의 병력을 손실했다. 덕동고개에서 하갈우리까지는 항공지원단의 엄호를 받으며 해병 7연대 1대대를 선두로 하여 철수하였다. 저녁 8시 경에 선두부대가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맨 후위인 해병 7연대 3대대가 하갈우리진지에 도착 완료한 것은 이날 오후 2시 경이었다. 해병대가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 약 22km를 돌파하는데 선두는 59시간, 최후미는 77시간이 소요되었다. 한 시간에 약 286m 내지 370m, 즉 1km를 전진하는데 평균 2시간 40분에서 3시간 30분이 걸린 셈이 된다. 부상자는 약 1500명(이중 약 600명은 들것에 실려야하는 중상자였다)이었는데 한명도 남기지 않고 전원 후송했으며
그 중 3분의 1은 비전투 손실로서 주로 동상환자였다.
155mm야포 9문과 골짜기에 굴러 떨어진 지프차 몇 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장비를 철수 시킬 수 있었다.
한편, 같은 날인 12월 4일 대한민국 국군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실제 수도였던 평양에서 철수했다.
장진호에서 흥남으로 향하는 후퇴로
하갈우리에서는 1일부터 이날 밤까지 약 4,000여 명의 부상자가 일본으로 후송되었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평양-원산간의 방어선 형성이 불가능하여 이날 평양에서 철수하였다.
이날 오후 2시 40분 경 하갈우리 통신 중계설비가 해체되었다.
오후 6시에는 야전활주로가 폐쇄되었다.
그때까지 4,312명이 후송되었으며
시신 173구도 함께 후송되었다. 미 수송기를 통해 보급품을 지원받은 미국 1 해병사단은 차량 1,000대를 이용해 중공군 9병단의 포위망을 뚫고 하갈우리에서 고토리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12월 4일에 가장 마지막으로 후퇴함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도 평양을 수복하였다.
자정 무렵에 1만여 명의 병력과 1천대 이상의 차량이 하갈우리를 빠져나와 약 40시간 만에 고토리에 모두 도착하였다.
미 10군단은 모든 유엔군은 흥남지역으로 철수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52]
흥남 부두 폭파(127 BEGAR 호)
오전 6시, 미국 1 해병사단의 행군 행렬이 함흥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12월 11일 저녁까지 최종부대가 함흥에 도착했다.
흥남에서는 14일부터 24일까지
유엔군 12만명과
피난민 10만명이 해상으로 철수하였다.
“ | 한국전 당시 미국 1 해병사단은 북한의 장진호 부근에서 중공군 10개 사단에 포위됐지만 적의 7개사단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둬 해병대의 위대한 전통을 세웠다. (2004년 12월 7일, 진주만 피습 63주년 기념, 미국 부시 대통령의 미국 1 해병사단 방문연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