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으면 분명히 있을 텐데
최광희 목사
며칠 전에 서울에서 회의가 있어서 광역버스를 탔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핸드폰 배터리가 17%밖에 남지 않은 것을 그제야 발견했습니다. 지난밤에 핸드폰을 무선 충전기 위에 올려놓았으나 아마 충전 위치에 바로 올려놓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밤새 충전이 하나도 되지 않은 것을 모르고 어제 쓰고 남은 배터리 분량으로 외출을 했으니 낭패였습니다. 핸드폰 배터리가 없는 것을 인식하자 마치 아침을 굶고 외출한 사람처럼 배가 고프기 시작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때부터 핸드폰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광역버스는 정말 시설이 잘되어 있습니다. 와이파이도 무료로 제공하고 충전용 USB 포트가 좌석마다 붙어 있습니다. 그것도 A 타입과 C 타입 두 가지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머니에 충전 케이블을 넣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자주 버스를 타고 외출을 했다면 가방에 기본적인 필수품을 넣고 다녔을 것입니다. 보조배터리, 충전 케이블, 치약/치솔, 필기도구, 대일밴드, 여분의 마스크, 비상용 약품 등은 언제 필요할지 모르나 무심히 넣어 놓으면 긴급할 때는 요긴하게 쓰일 물건들입니다.
그런데 경기도에서는 주로 승용차를 이용하다가 버스는 가끔만 타는 데다 회의만 잠깐 하고 돌아올 것이었기에 가방도 휴대하지 않고 빈손으로 외출한 터라 집에는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충전 케이블이지만 당장 손에 없는 것이 그렇게 아쉬웠습니다. 전에 한번은 가방 속에 보조배터리와 충전 케이블까지 가지고 다녀도 쓸 일이 없더니 어쩜 그렇게 꼭 필요한 상황에는 놓고 나갔을까요?
버스를 자주 타는 분들 가운데 누군가 한 명쯤 케이블을 가진 분이 있을 것 같아서 좀 빌려달라고 큰 소리로 말해볼까 싶었지만 주책없은 것 같고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꾹 참았습니다. 그리고 그깟 배터리 없는 것이 죽을 만큼 절박하지 않았기에 일단 참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천천히 내려가던 배터리 잔량이 그럴 때는 왜 그렇게 빨리 내려가던지, 서울에 도착하자 13%, 잠시 후에는 11%, 그리고 회의하는 중에 9, 7, 5, 3... 드디어 핸드폰이 죽어 버렸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스마트폰을 쓸 수 없어서 버스 앱을 볼 수도 없고 정류소에 설치된 안내판을 보고서야 버스 도착 시각을 알 수 있었습니다. 버스 시간에 여유가 있어서 근처에 있는 커피전문점에 가서 혹시 충전 케이블이 비치되어 있는지 한 바퀴 돌아보았는데 보이지 않아서 조용히 나왔습니다.
이제 버스만 타면 우리 동네로 돌아올 것이고 집에 와서 충전하면 되겠지만, 그사이에 긴급하게 연락한 사람들은 궁금하게 여기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집에 있는 아내가 서울에는 잘 도착했는지, 회의는 잘 마쳤는지, 언제쯤 귀가하는지 궁금해서 전화했다가 전화기가 꺼져 있으면 불안하게 여기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카오톡 친구들이 개인적으로 혹은 단체로 올려놓은 톡(talk) 내용도 궁금했지만 그냥 참아야 했습니다. 스마트폰 배터리 없는 것이 한 끼 굶은 것보다 더 배고픈 것을 보니 내가 영락없이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귀갓길 버스 안에서도 충전 케이블 가진 분이 있는지 찾으면 누군가는 가지고 있을 것 같았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우리 동네에 도착할 것이기에 “생각”을 좀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생각이란 바로 “찾으면 분명히 있을 텐데”라는 것이었습니다. 충전 케이블 가진 사람을 찾지 않은 이유는 목숨이 달린 절박한 문제가 아닌데 민폐를 끼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탄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절박한 사람은 분명히 많이 있을 텐데 그런 사람을 찾지 않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내 친구 중에, 친척 중에,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 중에, 같은 버스를 탄 사람 가운데, 내 옆을 지나가는 사람 가운데 분명히 예수님의 구원을 간절히 찾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싫어할 것 같고, 말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고, 다른 사람이 원하지 않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 현대인답지 않다는 생각에 예수님을 소개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찾아오셨으나 어두움에 속한 세상 사람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아니, 빛을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빛을 비추셨을 때 택한 사람들은 자기에게 빛이 필요함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빛을 영접했습니다. 2022년 성탄절, 지금도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소개하면 왜 이제야 가르쳐 주느냐고 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텐데 현대인답게(?) 살겠다고 절박한 그 사람을 찾지 않는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충전 케이블 가진 사람은 찾지 않더라도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은 반드시 찾아내야 할 텐데, 찾으면 분명히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