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길과 어윤중
최근 병자호란과 동학관련 책을 보며 지식인의 모범으로 최명길과 어윤중 두 사람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최명길은 영화 <남한산성>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병자호란 때의 주화파로 많이 알려졌다. 어윤중은 구한말 온건개화파 알려져 있다. 이들과 정반대로 대비되는 인물이 송시열과 최익현이다.
송시열은 병자호란의 패배로 백성이 환란을 겪었음에도 숭명배청의 북벌론을 주장하고 소중화주의를 확립하였다. 당연히 최명길을 간신이라 비난하고 치욕의 낙인을 찍었다. 최익현은 위정척사파를 이끌며 동학을 동비라 비난하고, 어윤중 등 개화세력은 왜적의 앞잡이라 비난하였다.
하지만 병자호란기 최명길처럼 백성의 희생을 지키기 위해 고뇌하며 대안을 찾은 사대부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대의명분을 위해 목숨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다. 50만의 백성이 포로로 되어 노비로 팔려가도 재조지은이라며 명나라에 대한 의리만을 내세운 사대부를 지식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조선 말기에도 그랬다. 거의 모든 사대부들이 동학을 사교로 보고, 동학혁명군을 동비로 매도했다. 척양척왜를 외쳐도 동학혁명군과 함께 하지 않고 오히려 일본군, 관군과 협력해 동학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섰다.
하지만 1893년 보은집회 때 양호선무사로 파견되었던 어윤중은 동학의 집회를 보고 서구의 민회와 같다고 고종에게 보고했으며, 백성의 소리를 경청해 탐관오리의 부패와 민생고를 파악해 보고했다. 그가 갑오개혁에 참여해 조세개혁에 앞장 선 것도 이때문이었다.
조선의 거의 모든 사대부들이 성리학의 도그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 최명길은 양명학을 받아들이고 명분이 아닌 실제를 응시하려 노력하였다. 그에게 전쟁을 방지하고 해결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다. 어윤중이 일본의 조사시찰단으로 참여하고 청나라를 방문하며 세계의 흐름을 읽고, 조선을 세계의 흐름에 적응시키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관료로서 그는 온건한 개화와 개혁을 추구했다.
그런데 역사는 성리학 원리주의자인 송시열이나 최익현의 강직함에 지나치게 신비화하고 그 병폐를 제대로 비판하지 않았다. 사대주의와 소중화주의의 명분론자들을 지나치게 찬양해, 오히려 참된 지식인이자 현실적 정치인이었던 최명길과 어윤중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이런 역사가 제대로 된 역사일 리 없다. 과거의 전쟁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잘못을 반복했던 사대부들을 제대로 된 지식인이라 부를 수 없다. 성리학 도그마를 지나치게 숭배했기 때문이다.
비극은 반복되었다. 무능한 왕이 권력만을 지키고 국가를 배반해도 왕을 섬겼다. 임진왜란 때 작전지휘권을 명나라 군대에 맡긴 선조, 동학혁명 때는 일본군에 맡긴 고종. 사대부는 그들을 따랐다. 그것이 충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의 최대 단점은 스스로를 객관화시킬 능력이 없었던 점이다. 6.25 이후 지금까지 한국군 전시작전통제권이 미군에 있는 것은 이런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행인지 인조의 삼배구고두례가 나는 굴욕도 치욕도 아니다. 고종의 승하도 그렇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백성을 방기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에 백성의 민회를 받아들이자는 건의 대신 이토히로부미의 조언을 받아들여 민회 건의를 물리치고 왕권 수호에만 관심이 있었다. 백성을 못 믿고 탁구공처럼 강대국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가 나라를 빼앗겨 버렸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에 유림이 없는 것은 손병희의 제안을 동학과 기독교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빼앗기고도 독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대를 읽지 못한다면 참된 지식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최명길과 어윤중 그리고 일제시대 안창호, 여운형 같이 인민의 입장에서 고민한 현실적 지식인들은 누구보다 시대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래서 오히려 시대를 초월하는 지식인이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