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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아저씨 滸山/ 김현길
우리는 종례를 마치자마자 우루루 교문으로 몰려 나갔다. 정량동 공동우물터를 지나 야트막한 고갯마루를 넘어 가다 보면, 제일먼저 같은 반 짝지 한양이가 사는 노랑 대문집이 보였다. 큰길 건너편에 서로 쩍금내기로 사서 갈라먹던 찐빵 가게 빵 냄새가 우리를 유혹했고, 태평탕 두 짝 유리문 중 유독 여탕이라고 쓴 글자에만 관심들을 가졌다. 보초가 서 있던 충무경찰서 유치장 담장 밑에 와서는 잰걸음으로 통과했고, 봉래극장, 명지병원, 위문당 서점의 네온사인 간판불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하는 도회지 밤거리를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만 촌티를 내며 걸었다. 한일은행 지나 침술원이 있던 오행당 골목길을 접어들면서 부터는 우리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어, 둔덕에서 같이 유학 온 친구 정렬이가 하숙하던 서호동 해방다리가 부터는 혼자서 걸어가야만 했다.
두 볼이 유난히 붉은 면도사가 머리를 감겨주던 두룡국민학교 옆 이발관을 지나, 꼬불꼬불한 길을 빠져나오면 통영여고 정문 앞에 이르게 된다. 그 날도 여느날처럼 피아노 소리가 양옥집 창문의 불빛과 함께 새어 나왔고, 무슨 곡인지도 모른 채 그저 황홀한 선율에 멍하니 듣고만 서 있었다. 곡목이 '크시코스의 우편마차' 라는 것은 한 참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에나멜 비닐구두를 예쁘게 신고 2인 삼각 경기를 하듯 딱딱 발맞추어 걸어가던 갈래머리 소녀들, 그들과 등하굣길이 언제나 반대였던 나는, 죄 지은 사람처럼 비켜서서 하얀 교복칼라가 스쳐지나가기를 기다렸었다. 은연중 그 때의 피아노 소리와 갈래머리 소녀들의 모습이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던지 훗날 딸을 통영여고에 보내게 되었고,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에도 대학에서는 굳이 피아노를 전공 시켰다.
복숭아 꽃향기를 맡으며 밭둑길을 부지런히 오르다보면 어느 듯 도릿골 좌측에 암자의 불빛이 보였다. 반갑게 뛰어와 안기던 천진한 어린동생들, 지느러미도 제대로 제거하지 않은 명태 국을 끓여놓고, 목젖이 없는 숙모님은 코맹맹이 소리로 밥부터 먹으라고 재촉을 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포기한 채 집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바랑을 매고 탁발 온 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곡식을 시주받고도 바로 가지 않고 하던 염불을 끝까지 마치고 가더란다. 어머님이 궁금하여 "스님, 그래가지고 하루에 몇 집이나 돌겠수?" 하자, 스님은 "누가 뭐래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탁발을 한다."고 하더란다. 그렇잖아도 불심이 깊었던 어머니는 그 말에 감복하여 스님 절의 신도가 되었고 형제처럼 지내게 되었다. 그래서 내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스님의 배려로 생각지도 않았던 거제 섬에서 통영 도회지 고등학교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고등학교를 절에서 다니게 되었다. 절이라고 해야 도천동 도릿골 골짜기에 가정집을 개조한 슬레이트지붕 밑에 부처님을 모셔놓고, 대처승인 아저씨는 암자의 주인이자 주지스님이었다. 초파일날은 아예 학교를 결석하고 까까머리 그대로 동자승이 되어 스님을 도왔다. 신도 분들이 언제 이렇게 큰 아들이 있었냐며 스님에게 물었고, 그러면 "제 생질 놈입니다." 하고 일일이 변명하듯 설명을 하였다. 절에서 학교까지는 버스를 타고가면 거리가 얼마 아니었지만, 버스를 타러 산에서 내려가고 또 버스에서 내려 학교까지 걸어가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버스 탈 돈이 없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반 정도는 지각을 하게 되었고, 몸도 마음도 피곤하여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급기야 학교 근처에다 방을 옮겨 달라고 집에 가서 떼를 썼고, 방 얻어 줄 형편이 못 되었던 홀어머니의 눈물어린 설득에도 나는 끝끝내 자퇴를 하고 말았다.
중 아저씨(동생들과 그렇게 불렀다.)와의 인연은 사춘기 시절의 내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부처님 모셔놓은 옆방에 자면서 새벽마다 아저씨의 염불소리에 잠이 깨였고, 염불을 반복해 듣다 보니 자연적으로 불경을 외우게 되었다. 천수심경은 저절로 따라 할 정도의 불교가 내 영혼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때 학교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 다녔더라면 아마 지금 쯤 나도 어느 절간에서 스님노릇을 하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학창시절은 통영시 인평동 우룻개 김씨문중묘가 있던 잔디밭등에서의 봄 소풍이 마지막이었다.
군대를 갔다 오고 또 결혼을 하고, 그러고도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도릿골 절로 한 번 찾아 간 적이 있었다. 중 아저씨는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있어야 할 부처님도 어린동생들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장애인이신 숙모님만 홀로 빈집을 지키고 있었다. 흘러간 세월 탓이었을까? 숙모님은 나를 잘 못 알아보았고, 여전한 코맹맹이 말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당시 일곱 살과 다섯 살이었던 기태와 도순이 남매라도 있었더라면 좋았으련만, 서먹서먹한 분위기 탓에 다시 들리겠다는 말만 남겨 놓고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당연히 늙으신 숙모님을 다시 찾아가서 뵙고 보살펴드리는 것이 그동안의 도리일진데, 그러지 못하는 이 무심함이 중 아저씨에 대한 배은망덕은 아닐까?... 세월이 흘러갈수록 늘 마음속의 무거운 짐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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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편의 인생드라마를 보는것 같습니다.
쩍금내기로...
이제 그의 쓰지 않는 말이 되어버린 우리네 방언...
그시절 가난이 죄였지요,
중아저씨, 가슴 찡하게 보고갑니다.
봉래극장, 위문당서점...오행당약국 등
친숙한 단어들이 보이네요..자퇴의 아픔을 격으시고도
고난을 뛰어넘어 휼륭한 분이 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