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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 JUSTICE』 – 마이클 샌델
이 책의 저자 ‘마이클 샌델’교수는 27살 때 미국 하버드 대학 최연소 교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한국에 대해서 잘 몰랐다고 하는데, 그런 그가 『정의란 무엇인가』이 책을 저술하고, 그것이 베스트 셀러가 되면서 한국에도 알려졌으며, 한국에서도 폭발적 인기를 얻으면서 2010년 아산정책연구소 초청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해 경희대학교에서 4,500명을 대상으로 책을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리고 2012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을 출간한 뒤에 다시 한국을 방문했고, 이번에는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15,000명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열고, 토론회도 가졌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서 그는 한국인이 바라는 민주주의와 시민정신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독자들이 내 책에 보여 준 관심과 민주주의 희망을 보여 준 영감 있는 여행에 초대해 준 것에 깊이 감사를 표한다.”라고 책 머리말에 썼다.
정의란? 오래전부터 이야기되어왔고, 옳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정의란 무엇인가? 살아 있기나 한 것인가? 언제나 의문은 있어 왔다. 제1장에서 ‘정의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문제일까?’라고 묻고, 정의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저자는 지적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다 보면 옳고 그름, 정치와 부당함에 관한 이견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낙태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낙태를 살인으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다. 부자에게 세금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력으로 번 돈을 세금으로 빼앗는 것은 공정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 테러 용의자를 고문하는 행위를 자유 사회에 걸맞지 않은 혐오스러운 짓이라고 반대하는 이가 있기도 하지만, 테러를 막을 수 있는 최후의 예방 수단이라며 찬성하는 이도 있다. 선거에서는 어느 견해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을 둘러싸고 소위 문화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공적인 영역에서 도덕의 문제를 놓고, 격하게 열정적으로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지켜보면 도덕적 신념이 이성의 범위를 넘어서 가정교육이나 신앙으로 인해 이미 정해졌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만약에 도덕에 호소해 상대를 설득할 수가 없다면, 정의와 권리에 대해 공적인 토론을 벌이는 것도 독단적인 주장의 공세일 뿐으로 마구잡이 이념의 싸움과 다를 바가 없다. 정의의 부당함,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을 둘러싼 주장들, 경쟁하는 상황들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헤쳐나갈 수 있을까?”이에 답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라고 저자는 말한다.
도덕적 주장을 만드는 방식, 특정한 상황에서 판단과 심사숙고를 통해 확정한 원칙 사이를 오가는 변증법은 역사가 오래되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 철학’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시대마다 해석의 어려움에 봉착해 왔다. 도덕적 사고가 우리의 판단과 원칙 사이에서 접점을 찾는 것이라면, 그런 사고로 정의나 도덕적 진실에 어떻게 다다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하지만 그것은 홀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따라서 친구, 이웃, 전우, 시민 등 여러 대화 상대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그것은 실존 인물이기도 하지만, 상상 속의 존재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과 논쟁할 때가 그렇다.
도덕적 사고를 정치에 적용해 공동체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다스릴지 물을 때는 도시의 시끌벅적한 참여와 대중의 마음을 휘저을 수 있는 주장과 사건이 필요하다. 구제 금융, 폭리, 소득 불평등, 소수 집단 우대정책, 병역, 동성결혼 등을 둘러싼 논쟁은 정치철학의 문제다. 이런 문제들은 가족, 친구들뿐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까다로운 시민들을 상대로 우리의 도덕적·정치적 신념을 분명히 하고 정당화하라고 촉구한다. 정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립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도록 만들어 자신이 무엇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독자)들로 하여금 정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립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도록 해 자신이 무엇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도록 하는 데 있기도 하다.
공동선이기도 한 공리(公利)는 행복의 극대화, 즉 쾌락의 총량이 고통 총량보다 많게 하는 데 있다. 공리를 극대화하는 행위는 무엇이든 옳다. 공리는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고 고통이나 불행을 막는 일체의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고통과 쾌락의 감정에 지배된다. 이 감정은 우리의 ‘통치권자’이다. 이는 우리의 모든 행위를 지배할 뿐아니라 무엇을 해야하는지도 결정한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왕좌에 앉은 그들에게 달렸다.’ 누구나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 공리의 극대화 원칙은 개인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입법적 차원에도 적용된다. 어떤 법, 정책을 결정할 때, 정부는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일은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러면 공동체란 무엇인가?
공동체란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허구의 집단’이다. 우리가 정책에서 얻는 이익을 모두 더하고, 그에 따른 모든 비용을 빼면, 다른 정책을 펼 때보다 더 많은 행복을 얻게 될 수 있다. 모든 도덕적 주장은 행복의 극대화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담배회사인 필립모리스는 체코에서 활발히 사업을 하고 있다. 체코은 여전히 흡연자가 많고 사회적으로 흡연이 용납되고 있다. 최근 체코 정부는 흡연으로 인한 의료비 증가를 우려해 담배 세를 올리는 방안을 검토했다. 이에 모리스는 세금 인상을 막기 위해, 흡연이 국가 예산에 미치는 효과에 대한 비용과 편익의 분석 작업을 진행했다. 조사를 통해 체코 정부가 흡연으로 인해 잃는 돈보다 얻는 돈이 더 많다는 것을 밝혀냈다. 흡연자들이 살아 있을 때는 정부 의료비 지출을 늘리지만, 이들은 일찍 죽기 때문에 노년층을 위한 의료, 연금, 주거 부분 예산 지출을 줄여 주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담배를 통해 거둬들이는 조세 수입, 흡연자의 조기 사망으로 인한 예산 절감 등 흡연의 ‘긍적적 효과’를 모두 계산하면, 정부는 연간 1억 4,700만 달러의 순수익을 거둔다는 것이다.
이런 비용·편익 분석으로 인해 필립 모리스와 대중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결국 필립 모리스 최고 경영자가 연구는 “인간의 기본가치를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무시했다.”며 사과했다. 이는 공리주의 사고방식의 부도덕성을 잘 보여준다. 이것은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가?’하는 물음으로 되돌아가게 되는데, 비용과 편익 분석은 사람의 목숨까지 돈으로 환산하려 한다. 여기서 사람들이 분노한 이유는 인간의 생명 가치를 계산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계산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를 ‘자유지상주의’라고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소유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인가? 미국은 상위 1%가 미국 전체 부의 1/3을 소유한다. 이는 하위 90%에 해당하는 사람들 부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액수다. 또한 상위 10% 가정이 미국 전체 소득의 42%, 전체 부의 71%를 소유한다. 미국의 경제 불평등은 다른 어떤 민주 국가보다 훨씬 심각하다. 어떤 사람은 이런 불평등이 부당하므로, 부자에게 세금을 보다 많이 부과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강요나 사기가 아니라 시장경제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얻은 부라면 전혀 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과연 누가 옳을까?
부자에게 세금을 걷어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면, 그것은 부자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자기 소유물을 마음대로 쓸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내 신장이 나보다 투석 치료를 받는 환자에게 더 절실하다 해서 그에게 건강한 내 신장 중 하나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없다. 환자가 아무리 다급하고 절실하다 해도 국가 역시 나에게 신장 하나를 떼어 투석환자에게 주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절실하다 해서 내 소유를 내가 쓸 수 있는 기본권보다 우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출산결정권, 성도덕, 사생활 보호권 등을 둘러싼 논쟁에서 자기 소유 개념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흔히 정부가 피임이나 낙태를 금지해서 안 되는 이유로 여성에게 자기 몸에 대한 자유로운 결정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간통, 매춘, 동성애를 법으로 처벌하면 안 되는 이유 역시도 성인이 서로 합의하여 상대를 고를 자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이식 수술용 신장 거래에 찬성하면서, 자기 몸의 다른 부분도 자유롭게 팔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논리를 더욱 확대하면 안락사 권리를 옹호하기도 한다.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몸을 이용하거나,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할 때 국가가 이를 막을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을 자신이 소유한다는 생각은 ‘선택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에 자주 등장한다. 내가 내 몸, 내 생명, ‘나’라는 인간을 소유한다면(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그것으로 무엇을 하든 내 자유다. 이것은 설득력 있는 주장이지만, 함축적인 의미까지 모두 수용한다고 할 수는 없다. 자유지상주의에 매료되어 있는 지금, 이 시대 그 원칙은 어디까지 적용할 수 있을까?
臟器는 오로지 생명을 구할 목적으로만 판매되어야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비록 신장 거래에 찬성하더라도 그 이유가 자유지상주의의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 주장은 우리가 우리 몸에 대한 제한 없는 소유권을 갖고 있다는 논리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 안락사 찬성 주장도 자유지상주의 철학을 그대로 적용한 것처럼 보인다. 안락사를 금지한 법이 부당하게 보인다. 내 생명이 내 것이라면 그것을 포기할 자유도 내게 있다는 것이다. 또한 누군가 내 죽음을 돕도록 내가 허락한다면 국가는 이를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 다수가 소유권을 따지기보다는 존엄과 연민 때문에 안락사를 결정한다.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기보다 스스로 죽음을 앞당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판단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간은 자기 목숨을 보전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경우에 따라서는 의무보다 연민에 기운다. 아무리 미국이라 해도 빌 게이츠와 마이클 조던에게 세금을 부과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식인을 조장한 마이베스 역시 처벌할 수 없다.
‘정의’에 대해 논할 때, 흔히 ‘시장경제’가 거론되곤 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혹은 사면 안 되는 재화가 있을까? 있다면 그것을 사고파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 자유시장 체제를 찬성하는 이들은 자유시장이 사회 전체의 복리를 증진시키고, 거래가 이루어지면 거래하는 양측이 이익을 얻는다고 한다. 반면에 시장 회의론자들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이 겉보기처럼 항상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고 하고, 돈으로 거래할 경우 타락하거나 질이 떨어지는 재화와 사회적 행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남북전쟁 당시 징집제를 시행했다. 하지만 징집 대상자 누구도 정부에 300달러를 내면 복무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돈은 미숙한 노동자의 1년치 금액이었지만, 누구라도 돈을 내고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신문들은 ‘300달러냐, 당신의 목숨이냐’를 헤드라인으로 달기도 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1863년 7월 뉴욕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듬해 의회는 ‘병역 면제 비용’조항을 삭제한 새로운 징병제를 제정했다. 그러나 남부와 달리 북부는 전쟁 기간 내내 고용제를 유지해 돈으로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북군에 징집되어 전쟁에 참전한 인원은, 징집된 20만7,000명 가운데, 87,000명이 비용을 지불하고 면제받았고, 74,000명은 대리인을 고용했으며, 직접 복무한 인원은 46,000명에 불과했다.
병역제도는 병역을 분담하는 정당한 제도일까? 제도가 부당하다면, 현재의 모병 제도에 대해서도 똑같은 반대 논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대리인을 고용한 제도가 부당하다면, 지금의 모병제 역시 부당하다. 징병제는 군복무에 적합한 시민을 소집하고,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을 경우라면 제비뽑기로 병사를 모으는 간단한 방법이다. 이 제도는 미국에서 1,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시행되었다. 베트남 전쟁 때도 시행되었는데, 학생과 특정 직업군을 위한 징병 유예 조항이 너무 많아서 많은 사람들이 참전을 피해갔다. 징병제 실시는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리차드 닉슨 대통령은 징병제 폐지를 제안했고, 1973년 미군이 단계적으로 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 징병제가 모병제로 대체되었다.
모병제와 징병제를 둘러싼 문제는 정치철학과 관련된 문제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할 것인가? 시민의 의무를 중시할 것인가? 1) 징병제. 2) 유급 대리인을 허용하는 징병제(남북전쟁 당시 제도). 3) 시장을 통한 모병제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닥쳐올 문제로 보인다. 아무튼 징병제는 현대 사회에서 허용되기 어려운 ‘위험한 노예제’다. 그렇다면 모병제에는 문제가 없을까? 최근 모집한 미국 군인 25% 이상은 정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일반인 46%가 대학 교육을 받는 것에 비하면, 모병된 젊은 군인 중에는 고작 6.5%만이 대학 문턱에 가봤다는 이야기다. 미국 사회 특권층은 군복무를 기피한다. 1956년에는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750명 가운데 450명이 졸업 후 군에 입대했지만, 2006년에는 졸업생 1,108명 중 고작 9명만이 군에 입대했다.(내 생각이지만, 이렇게 보면 미국 군대를 부러워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세계가 미군을 우습게 보는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미국은 징병제를 폐지한 지 두 세대가 흐른 지금, 병역에 시장 논리를 적용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프랑스는 외인부대를 창설해 운영하고 있는데, 법은 이 부대가 프랑스 밖에서 군인을 모집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으나, 실상은 유명무실하다. 13개 언어로 온라인으로 전세계에서 군인을 모집한다. 현재 프랑스 병력의 1/4이 라틴아메리카 출신이고, 중국 등 아시아 국가 출신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미국은 외인부대를 창설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방향으로 바뀌어 가는 중이다. 외국 이민자를 상대로 병사를 모집하고, 이들에게 상당한 급여와 미국 시민권 발급 등 혜택을 제공한다. 현재 미군에 복무하는 외국인은 약 3만 명으로 향후 점점 확대될 전망이다.
의술의 발달로 대리모가 늘어나고 있다. 아기를 못 가진 양부모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자궁을 제공하는 대리모가 있는가 하면 난자만 제공하는 대리모도 있다. 이들은 분명 아기에 대한 집착은 적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 역할이 둘이 아닌 셋(계약 양부모+난자 제공자+자궁 제공자)으로 나누어지므로 아이에 대한 소유권에서 누가 우위를 차지하는가 하는 문제는 남는다. 인도는 대리모 천국이다. 가정부였던 수만 도디아는 한 달에 25달러를 받고 부유한 집에서 일했는데, 그녀가 9개월 동안에 4,500달러를 벌 수 있는 대리 임신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가난한 나라에서 의도적으로 그런 정책을 장려한 대리 출산은 여성의 몸과 출산능력을 도구로 전락시키고, 여성의 가치를 훼손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늘었다. 아마 아기를 출산하거나, 전쟁을 하는 것처럼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도의 대리 출산과 남북전쟁 당시 대신 싸울 군인을 고용했던 앤드류 카네기 같은 사례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사례에서 옳고 그름을 생각하다 보면 정의에 대해 둘로 갈라져 경쟁하는 두 가지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자유시장에서 우리의 선택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세상에는 시장에서 취급하는 것이 영예롭지 못하며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미덕과 고귀한 재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책 제목이 『정의란 무엇인가』이듯이 당연히 ‘정의’를 다룬다. 정의라는 것에는 거기에 ‘의무와 권리’가 깔려 있다. 그 의무와 권리를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요소로 본 철학자는 이마누엘 칸트(1724∼1804)다. 그는 아버지, 어머니도 종교적인 내면의 수행을 강조한 개신교 경건주의자들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자라난 그가 가정교사를 하다 서른한 살 때 강사로 처음 강단에 섰다. 급여는 없고, 학생 수에 따라서 보수를 받았다. 인기가 좋고, 부지런한데다 형이상학, 논리학, 법학, 윤리학, 지리학, 인류학 등을 1주일에 20개씩이나 강의했다. 1871년 57세에 이르러 『순수 이성 비판』을 썼는데, 이 책에서는 공리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도덕이란 행복 극대화나 그 밖의 어떤 목적과도 무관하다고 했다. 도덕은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존중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의 이런 형이상학적 기초는 미국독립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날 ‘보편적 인권’이라고 부르는 개념들은 그의 이런 든든한 토대 위에서 시작되었다.
칸트 철학은 어렵다. 하지만 공들인 만큼 결실이 크기 때문에 노력할 가치가 있다.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라는 그의 저서는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도덕의 최고 원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자유란 무엇인가?’가 그것이다. 자유란 많은 사람들에게 쾌락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지지한다 해도 - 다수가 특정한 법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법을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칸트의 도덕 철학을 이해하려면, 그가 말하는 자유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흔히 자유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칸트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도덕은 행동하는 의무’고 ‘정의란 자유의 존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자율이어야 할까, 타율에 의해서도 의무 이행이 가능할까? 공리주의자들도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긴 했으나, 이때의 이성은 도구로서의 이성이다. 이들에게 이성의 역할은 어떤 목적을 추구할 가치가 있는가를 결정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시점에 우리가 느끼는 욕구를 충족하여 공리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있다. 칸트에게 이성은 열정의 노예가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도덕과 관련된 실천 이성은 도구가 아니라, 어떤 경험적 목적에 상관없이 선험적으로 정해지는 ‘순수 실천 이성’인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의 동생이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고 가정하면, 연로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서 요양원에 머무는 어머니가 동생의 소식을 듣고 싶어한다면, 사실을 말해야 할지, 어머니가 충격과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사실을 숨겨야 할지 고민이 될 것이다. 이때 기독교에서 ‘너희는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황금률〉을 적용해야 할지 모른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매우 유동적이다. 취약한 상태에 있을 때는 고통스런 현실을 차라리 모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고통스러운 현실이라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 어머니도 그래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어머니의 기분을 걱정하여 거짓말을 하는 행위는 어머니를 이성적 존재로 존중하기보다 어머니 자신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의지와 자유는 과학이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도 그렇다. 인간은 자연 영역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물리적 또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손으로 투표할 때, 내 행동은 근육, 신경, 시냅스, 세포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사상과 믿음이라는 관점에서도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 칸트는 우리 자신을 두 가지 관점, 즉 물리와 생물이라는 경험 영역과 자유로운 인간의 행위라는 에너지적 관점을 동시에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과 존재해야 하는 방식 사이에는 잠재적 격차가 있다. 다시 말하면 도덕은 경험적이지 않다. 도덕은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둔다. 도덕은 세상에 대해 어떤 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과학은 아무리 강한 힘과 통찰력을 지녔다 해도, 감각 영역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도덕적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인지신경과학이 아무리 정교하다고 해도 이성으로 자유를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과학은 자연을 연구하고 경험 세계를 탐구할 수 있지만, 도덕 질문에 답을 하거나, 자유의지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다. 도덕과 자유는 경험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으로는 도덕과 자유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전제하지 않고 도덕적 삶을 이해할 수도 없다.
칸트는 공정한 헌법은 각 개인의 자유와 다른 모든 이의 자유가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공리의 극대화와 상관없으며, 공리는 기본권 결정에 ‘결코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사람들은 ‘행복의 경험적 목적과 행복의 구성 요소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을 갖고 있기’때문에 공리는 정치와 권리의 기초가 될 수 없다. 도덕법이 개인의 이익이나 욕구에 기초할 수 없듯이, 정의라는 원칙도 공동체의 이익이나 욕구에 기초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 어느 시점에 어느 사람들이 동의했던 헌법이므로 지금도 정당하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헌법이 비준되었다고 해서 헌법 조항들이 정의롭다고 할 수는 없다. 1787년 제정된 미국 헌법은 장점도 있지만, 노예제를 인정했다는 오점이 있다. 그 오점은 남북전쟁 이후까지도 남아 있었다. 당시의 헌법은 필라델피아 대의원들에 의해 제정되고, 이어 13개 각 주가 동의했지만, 그것만으로 정의롭다고 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제헌의회는 흑인의원이 없었으며 한 세기가 지나서 투표권을 갖게 된 여성 대표 역시 없었다. 제헌의회의 대표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협력의 공정성이란 조건에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 봉건 귀족 계급이나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정의롭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재능 있는 사람에게 일할 기회를 주고, 법 앞에서는 평등을 보장받고 싶어 한다. 시민들은 기본적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받고 소득과 부는 자유 시장을 통해 분배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 기회가 매우 균등하지 않게 배분될 수도 있다. 가족의 지원과 더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확실히 유리하다. 경주에 참가할 기회를 주는 것은 모두에게 다행하지만, 서로 다른 출발선에서 경주를 시작한다면 공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회균등이 보장되는 자유 시장에서도 소득과 부가 공정하게 배분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자유지상주의 체제에서 가장 정의롭지 못한 부분은 ‘분배되는 몫이 도덕적으로 봤을 때 대단히 임의적인 요소에 부적절하게 영향을 받는 상황이 허용된다는 점’일 것이다.
모두 같은 출발선에서 경주를 시작할 수 있을 때 승자는 보상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빠른 주자가 되는 것은 내 노력으로만으로 되지 않는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이 우연이듯이, 빠른 주자가 되는 것 역시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우연이다. 20세기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1921∼2002)는 “사회적 우연의 영향이 완전히 제거된다 해도, 타고난 능력과 재능에 따라 부와 소득의 배분이 결정되는 상황은 여전하다”라고 했다. 이런 결과는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는 임의적이다. 소득과 부의 배분이 역사적·사회적 행운으로 결정되어서는 안 되듯이, 타고난 자질에 따라 결정되어도 좋을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평등주의가 강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육 기회의 불평등을 수정하는 것과 선천적인 재능의 불평등을 수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어떤 주자가 어떤 주자보다 빠르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고, 빠른 주자에게 납덩이를 단 신발이라도 신겨야 할까? 평등주의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능력주의 시장경제 사회의 유일한 대안은 재능 있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어 평등을 이루는 것이 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평등주의 악몽에 빠져 있는 것이다.
「해리슨 버거론」이라는 반유토피아 공상 과학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때는 2081년 모든 사람이 평등해졌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하지 않았다. (…)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잘생기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하거나 빠르지 않았다. (…) 이런 철저한 평등은 미국 평등관리국 요원들이 이뤄낸 성과다. 평균 이상의 지능을 가진 사람은 불이익을 주는 수신기를 귀에 꽂고 다녀야 했고, 두뇌를 써서 불공정한 우위를 점하지 못하도록 정부는 20초마다 날카로운 잡음을 쏘아 보냈다.”
그런데 소설은 어느 날 주인공 해리슨이 평등주의 압제에 과감히 저항하고자 온갖 장비를 벗어던졌다. (…) 여기서 결말을 밝히지는 않겠다고 저자는 말하지만, 여기까지의 이야기만으로도 평등주의 정의에 제기되는 불평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 문제는 없다. 운에 좌우되는 게임과 실력에 좌우되는 게임에는 차이가 있다. 복권을 사 당첨되면 당첨금을 받을 권리가 생긴다. 하지만 내게 당첨될 ‘자격’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복권은 운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당첨되고 안 되고는 내 미덕이나 실력과는 관계가 없다. 운에 좌우되는 게임과 달리, 실력에 좌우되는 게임에서는 승자로서의 권리가 있는 사람과 승자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이는 특정한 미덕을 실천하고 행사한 행위를 포상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분배방식은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다. 인간이 특정한 사회적 위치를 갖고 태어나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자연적인 사실일 뿐이다. 정의냐, 부정의냐는 제도가 그러한 사실들을 다루는 방식으로부터 생겨났다.”롤스가 《정의론》에서 주장한 말이다. 궁극적으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이론은 미국 정치 철학이 지금까지 내놓은, 좀 더 평등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인 것만은 분명하다. 지금까지(대략이지만) 살펴본 칸트와 롤스의 철학은 좋은 삶에 대해 경쟁하는, 서로 다른 시각에서 중립적인 정의와 권리의 기본을 찾으려는 과감한 시도를 보여주었다. 그런 시도는 지금 성공하고 있을까?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을 이해하는 지름길로 정치 철학의 핵심 두 가지를 주장했다. ‘정의는 목적론에 근거하고, 정의는 영예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사회적 행위의 텔로스(telos, 목적, 목표 혹은 핵심 본질)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가 중립적일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정의는 명예, 미덕, 좋은 삶의 본질에 관한 논쟁이라고 생각했다. 정의와 좋은 삶이 서로 연관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것을 분리하려는 시도에서는 무엇이 핵심인지를 봐야 한다. 정의란 자격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주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은 무엇인가? 능력이나 자격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를 분배되는 대상에 달렸다. 정의에는 두 가지가 있다. ‘분배대상과 그것을 분배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평등한 사람들에게는 대상을 평등하게 배분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의 평등을 말하는 것일까? 답은 무엇을 분배하는가 그리고 그와 관련된 미덕은 무엇인가에 달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재화를 공정하게 배분하기 위해서는 해당 재화의 텔로스, 즉 목적을 살펴야 한다고 했다. 정치의 목적이 좋은 삶을 이루는 데 있다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옳다면, 훌륭한 시민의 미덕을 가장 잘 발휘하는 사람이 가장 높은 공직과 영예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정치는 좋은 삶을 구현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옳을까? 좋게 봐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정치를 좋은 삶에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니라, 필요악쯤으로 여긴다. 정치라 하면 협잡, 이해관계, 가식, 부패를 연상한다. 간혹 타협도 있지만…. 그런데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정치 참여를 좋은 삶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했을까? 왜 정치 없이는 훌륭하고 미덕 가득한 삶을 살 수 없다고 한 것일까?
그는 오직 정치 결사체를 통해서만 언어라는 인간 고유의 특성을 발휘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폴리스에 있을 때만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정의와 부정의를 분별하고, 좋은 삶의 본질에 대해 고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폴리스가 선천적으로 존재하며, 그것이 개인에 앞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앞선다’것은 기능이나 목적의 의미를 말하고, 시간적 순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개인, 가족, 친족은 도시보다 먼저 존재했다. 하지만 우리는 폴리스에 있을 때 비로소 본성을 실현한다. 고립되어서는 자족할 수 없다. 언어능력과 도덕적 사유 능력을 개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복은 고상한 것에서 기쁨을, 비도덕적인 것에서 고통을 느낄 때 찾아온다. 행복은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존재 방식이며 ‘미덕에 부합하는 영혼의 활동’이다. 미덕이 가득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왜 폴리스에 살아야 하는지 알게 한다. 미덕은 행동으로 배우게 되는 것이다. 예술이 그러하듯이 미덕은 무엇보다 실천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직접 연습하지 않고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될 수 없다. 도덕적 미덕도 마찬가지다. 공정하게 행동해야 공정한 사람이 되고, 절제된 행동을 해야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행동을 해야 용감한 사람이 된다. 요리도 마찬가지다. 요리책이 아무리 많아도 책만 읽어서는 훌륭한 요리사가 될 수 없다. 요리를 많이 해봐야 한다. 유머 모음집을 읽고 이야기를 모은다해도 코미디언이 될 수 없다. 그래서는 코미디의 기본조차 익힐 수 없다. 속도, 타이밍, 제스처, 목소리를 연습하고, 유명한 코미디언의 연기를 많이 관찰하고 따라 해 보아야 한다. 도덕적 미덕이 행동으로 배우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올바른 습관을 길러야 한다. 정치인이라면 시민들에게 좋은 습관을 심어주어 시민을 선하게 해야 하고, 직장의 상사라면 솔선수범 해서 따라오게 해야 한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라고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다. 그는 여성과 노예는 시민으로 보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글을 쓴 뒤 2천 년이 지난 1865년에야 노예제가 폐지되었고, 여성은 1920년에 비로소 투표권을 얻었다. 그는 노예제를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노예제의 정당성까지 주장했다. 노예제 주장이 정치 이론 전체를 퇴색시킬 오점은 아니라 해도 왜 그가 단호한 주장을 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적합성의 문제였다. 사람들에게 제 몫을 준다는 것은 마땅한 공직과 영예를 주고 본성에 어울리는 사회적 역할을 부여한다는 의미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들이 함께 모여 공동선을 심사숙고하는 동안에 누군가 집안일을 해야 하기 위해, 폴리스의 발달로 분업하기 위해, 노예가 필요하다고 했다. 잡다한 일을 해 줄 기계를 발명하기 전에는 누군가 일상적인 잡무를 해 주어야 나머지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노예는 필요할 뿐 아니라, 노예 역할에 적합한 사람이 있다고도 했다. 그런 본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본 것인데, 그러면서도 자신의 주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지 재빨리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반대 견해를 가진 사람도 어느 면에서는 옳다”라고 했다. 당시에는 천성으로 노예인 사람보다 전쟁에서 패한 적들을 노예로 삼은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 일을 어느 정도 부당하다고 인정한 셈이다.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하물며 한 나라를 대표해서 공개적으로 사과의 말을 하기는 특히 어렵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나치만행에 대해 독일 대통령은 이스라엘 국회에 가서 ‘독일인이 한 일에 용서를 구한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일본은 전쟁 때 저지른 만행에 대한 사과에 미온적이다. 1990년 이후 ‘위안부 여성에게 공식 사과와 배상을 하라’는 각국의 압력이 점증되자, 민간 기금으로 희생자에게 일부 배상금을 지불하기도 했으나, 지도자들은 제한적인 사과를 하는 데 그쳤다. 2007년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일본은 여성들을 성노예로 동원한 책임이 없다’는 망발을 하기도 했다. 이에 미국 정부는 일본군의 역할을 인정하고 사과할 것을 일본 정부에 촉구하는 결의문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호주 정부는 원주민 학살 책임에 대해 미온적이고, 미국은 1989년 이후 매년 흑인에 대한 배상을 검토하는 위원회를 만들자는 법안이 제출되고 있으나, 이 법안이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 내지는 못하고 있다. 흑인은 다수가 찬성하지만, 백인은 4%에 그치고 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할 때 국가는 과거의 역사적 잘못에 사과해야 할까? 사과나 배상이 정치공동체에 치유가 될지, 오히려 해가 될지 복잡한 정치적 판단의 문제가 있다. 원칙적 논리로서는 앞선 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현 세대가 사과할 필요는 없으며, 사과할 수도 없다. 사과한다는 것은 부당행위에 책임을 떠맡는다는 것이다. 내가 하지 않은 행위를 내가 사과할 수는 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을 내가 어떻게 사과할 수 있단 말인가? 존 하워드 호주 총리는 이런 논리로 원주민에 대한 공식 사과를 거부했다. 노예제 배상 문제에 대한 미국 내 논쟁에서도 같은 주장이다. 부모나 조부모 또는 중요하게도 같은 동포의 죄에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책임은 내가 스스로 떠맡은 의무만으로 제한된다는 생각은 자유주의적 사고다. 도덕적 행위자인 우리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이며, 기존 도덕에 속박받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만이 우리를 강제하는 도덕적 의무의 원천이다.
별도의 약속을 하지 않는 한, 도덕적 개인주의자들은 앞선 세대가 저지른 죄를 보상할 책임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죄는 죄더라도 내 죄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것이 맞는다면 조상의 잘못에 대한 공식 사과에 대한 비판은 일리가 있다. 칸트와 롤스는 ‘좋은 삶’에 대하여 종교적으로든 세속적으로든 특정 개념을 강조하는 정의 이론을 제시하는 것은 자유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론은 타인의 가치를 강요함으로써, 인간을 목표를 선택할 능력이 있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 존중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선택이 자유로운 자아를 위해서는 중립적인 국가가 유리하다. 중립적인 상태에서 시민들은 도덕적·종교적 논쟁에서 어느 쪽의 강요도 없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선택할 자유를 누린다. 자기 목적은 자기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강력한 도덕적 사고다.
그러나 중립적인 정의의 원칙을 찾으려는 시도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 쉽다. 본질적인 도덕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것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그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다. 우리의 삶은 서사적 탐구와도 같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려면, 그 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허구의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는 미래로 투사되는 특정한 형식이 있다. 도덕적 행위자를 서사로 설명하는 방식에는 이런 가능성을 허용하는 미덕이 존재한다. 도덕적 사유의 서사적, 또는 목적론적 측면은 우리가 전체에 속하는 구성원이라는 점과 소속하고 있다는 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내 나라가 저지른 일의 책임을 떠맡기로 직간접적으로 선택하지 않는 이상 내게 책임은 없다. 나는 1945년 이후에 태어났으니, 나치가 유대인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든 현재의 나와는 도덕적으로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느 독일 젊은이가 있을 수 있듯이,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인간과 과거의 부담을 감수하는 자발적 존재라고 보는 시각과는 확실히 대비된다.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대답하기는 쉽지가 않다. 이것은 어느 쪽이 도덕적·정치적 의무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지 묻는 문제인 것이다.
자부심과 수치심이라는 윤리와 책임이 집단적 윤리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개인주의를 근거로 집단적 사죄를 거부하는 보수 정치인들의 모습은 조금 당황스럽다. 개인은 단지 자신의 선택과 행동만 책임지면 그만이라고 고집한다. 그렇게 해서는 어떤 나라에서도 역사적 전통과 자부심을 느끼기는 어렵다. 미국 아닌 다른 곳에 사는 미국 사람들은 미국의 독립선언서, 미국의 헌법, 링컨의 케티즈버그 연설, 알링턴 국립묘지에 잠든 영웅들을 존경하거나 칭송할 수 없다. 애국적 자부심을 느끼려면 세월을 뛰어넘어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소속감에는 책임감도 동반한다. 내 나라의 과거를 현재로 가져와 도덕적 부채를 해결할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 나라의 역사에 진정한 자부심을 느낄 수 없다.
위급 상황에서라면 부모가 다른 아이보다 자기 아이를 먼저 구조하는 행위는 그 과정에 다른 아이를 밟고 지나가지 않는다면, 문제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부자 나라가 자국 시민을 대상으로 후한 복지정책을 시행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나라 사람의 인권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연대 의무가 지탄받을 때는 자연적 의무를 위반할 때뿐이다. 하지만 인간을 이야기하는 존재로 보는 시각이 옳다면, 연대 의무는 자유주의자들이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엄격할 수 있다. 연대의식은 도덕 및 정치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연대의식 없이 살아가거나, 삶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도덕적 개인주의로도 설명하기 힘들다. 합의의 윤리로도 설명할 수 없다. 연대에는 도덕적 힘이 부여되어 있기도 하다. 연대는 우리에게 부담을 지게 만든다. 연대의식은 우리의 본성을 이야기하는 존재, 소속된 존재이다.
정의를 토론하는데 어쩔 수 없이 본질적인 도덕 문제로 빠지게 되는 것이라면, 그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공개적인 선의의 논의가 종교적 논쟁으로 흐르지 않을까? 도덕적 측면을 보다 많이 다루는 공개 토론은 어떤 모습이며, 우리가 익히 보아온 정치토론과는 어떻게 다를까? 이것들은 단순히 철학적 질문에 그치지 않는다. 정치 담론에 그치지 않고, 시민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필요한 핵심 질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모든 의무와 책임이 의지나 선택의 행동에서 나왔는지 알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연대의무나 구성원 의무는 선택과 관련이 없는 이유다. 그것은 우리 삶과 우리가 소속된 공동체를 해석하는 서사와 관련된 이유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도덕적 행위자에 대한 서사적 설명, 그리고 의지의 합의를 강조하는 설명, 사이 논쟁에서 정확한 쟁점은 무엇일까?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도덕에 얽매인다는 생각을 좋아하지 않거나, 신뢰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애국, 연대, 집단적 책임 등이 요구될 때 거부감이 들거나, 그러한 요구를 거부하거나, 재해석하고 싶은 마음도 드는 까닭은 그래야 자유라는 익숙한 개념과의 일관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칸트와 롤스는 권리가 선보다 앞선다고 보았다. 의무와 권리를 규정하는 정의의 원칙은 좋은 삶을 규정하는 여러 관념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관련하여 낙태와 줄기세포 등 여러 가지 논쟁에 직면하고 있지만, 전 세계적 갈등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동성결혼에 대해서 보자. 동성애의 논쟁은 근본적으로 게이와 레즈비안의 결합이 국가가 공인한 결혼에 부합하는 영예와 인정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에 관한 논쟁이다. 결혼의 바탕이 되는 도덕적 문제는 피할 수 없다. 여기에는 국가가 ‘1) 남자와 여자의 결혼만 인정한다. 2) 동성결혼과 이성 결혼을 인정한다. 3) 어떤 결혼도 공인하지 않고, 결혼을 사적인 영역으로 돌려버린다.’는 정책적 문제로 귀착되는데, 동성결혼의 쟁점은 선택의 자유 문제가 아니다. 동성 결합이 공동체로부터 인정받을 가치가 있는가, 즉 결혼이라는 사회제도의 목적을 수행하는가의 여부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말하면, 문제는 공직과 명예의 공정한 배분이며, 이는 또한 사회적 승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결혼의 1차 목적이 출산이라고 주장한다. 동성 부부는 ‘출산’할 수 없으므로, 결혼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혼의 본질은 출산이 아니라, 이성이든 동성이든 두 사람 사이의 독점적인 ‘사랑의 약속’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결혼처럼 도덕적으로 사회제도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합리적인 주장이 가능할까? 아니면 노골적인 주장들(출산:사랑)이 서로 충돌해도 양쪽 모두 상대보다 타당성 있는 주장을 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까? 출산능력은 결혼의 조건도 이혼의 조건도 아니다. 결혼해도 한 번도 성관계를 갖지 않은 사람도, 출산하지 않는 사람도 결혼을 유지할 수 있고, 임종이 가까운 사람도 결혼할 수 있다. 누가 결혼할 자격이 있는지 살펴보려면, 결혼의 목적과 결혼이 칭송하는 미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논란이 되는 도덕적 영역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우리는 좋은 삶에 대해 대립하는 개념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책은 대미에 가깝다. 독후감도 20장 이상 썼다. 정의를 이해하는 접근방식으로 첫째가 정의란 공리나 복지의 극대화,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 둘째가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 셋째는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각자의 몫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저자는 셋째 방식을 선호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여기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이견을 기꺼이 수용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일단 하나의 원칙이나 절차를 만들어 놓고 나서 그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소득·권력·기회 등 모든 것을 정당하게 배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의 문제일 뿐 아니라,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도덕적 정치 참여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들에게 더 많은 이상을 불어넣을 수 있다. 그것은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더 유망한 기반을 제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