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주일 2006년 4월 9일
마르 14, 1 - 15, 47.
오늘 우리는 마르코복음서가 전하는 수난사에서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길게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이 무위로 끝나는 것으로 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실패였고 그분에게 희망을 두었던 제자들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어 두 번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유대인 최고 회의의 심문과 로마 총독 빌라도의 재판입니다. 유대인 최고 회의는 로마 제국이 식민지 백성에게 허락하는 자치 기구였습니다. 지방 유지들인 원로들과, 대사제외 중견 사제들, 그리고 율사 대표들로 구성된, 전체 인원 71명의 의결 기관입니다. 이 회의에서 예수님은 거짓 예언자라는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그 최고 회의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이야기가 그분이 거짓 예언자로 단죄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그분의 얼굴을 가리고 때리면서 누가 했는지 알아맞히라고 놀렸습니다. 유대인 최고 회의는 사람을 사형에 처할 권한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해야 했습니다.
최고 회의가 붙인 거짓 예언자라는 죄명은 총독의 관심을 끌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최고회의는 정치범으로 둔갑시켜 예수를 빌라도에게 고발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행세하였다는 고발입니다. 이 사실은 총독 관저에서 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장면이 입증합니다. 그들은 자주색 옷을 예수님에게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운 다음, 그 앞에 경례하며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외쳤습니다. 식민지에서 왕이라고 자처한 인물이 점령군 군사들로부터 받는 조롱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유대교 지도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견을 가지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엄하게 벌하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면 당연히 겪을 수밖에 없는 병고, 가난, 실패 등을 모두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들의 하느님은 자비하지도 용서하지도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들의 하느님이 무자비한 그만큼, 그들 자신도 무자비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단죄하면 하느님도 당연히 단죄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유대교 당국이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과 가르침이 불온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인으로 낙인찍고 소외시킨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아버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이 과연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살리시는 아버지라면, 유대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은 잘못 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여 지도자로서 그들의 입지를 보장하고자 하였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종교 집단이거나 비 종교 집단이거나를 막론하고, 한 집단 안에서 기득권을 누리며 군림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반성하지 않습니다. 기득권을 보존하고 누리는 데만 혈안이 되어 독선적인 자세를 보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이를 무자비하게 제거합니다.
그 시대 유대교 실세들의 눈에 예수님은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시골 목수의 아들입니다. 종교적 신분은 평신도이며, 재산과 지위도 갖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안식일을 잘 지키지 않을 뿐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기지 않았다.”(마르 2,27)고 공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을 크게 존경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당신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3,31)고 폭언까지 하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회가 누리는 질서를 혼란에 빠트리는 인물이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대사제 가야파의 말을 전합니다. “한 사람이 이 백성을 위해 죽고 온 겨레가 멸망하지 않는 것이 더 이롭다.”(요한 11,50). 자기들이 만든 질서와 기득권을 보존하기 위해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 이롭다는 대사제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회에서 그렇게 제거되셨습니다. 유대인 최고회의는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이 평소에 거부하던 로마 총독의 협조마저 얻었습니다. 그들은 동족인 예수님을 로마제국을 거슬려 음모하는 정치범으로 만들어 고발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흔히 쓰는 편법입니다. 가까이 있는 친구를 제거하기 위해 멀리 있는 원수의 협조를 받은 것입니다. 미움은 이렇게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진리에 대해 관심이 없고, 식민지 유대아를 무사히 통치하기를 원할 뿐이었습니다. 통치자인 그에게 식민지 청년 한 사람의 생명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빌라도가 군중의 비위를 맞추기로 작정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말합니다. 빌라도에게는 식민지 군중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모처럼의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유대 최고회의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독선적 권위주의와 옹졸함이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처형한 배경에는 진리에 대한 무관심과 인간 생명을 소홀히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죄는 우리 인류 역사 안에 항상 있어 왔고, 우리는 누구도 그런 죄와 무관하다고 주장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신’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라고도 고백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대의(大義)를 위해 투신(投身)하면, 그 생존은 순탄하지 못합니다. 그 대의가 신앙이면 순교, 그것이 나라라면 순국, 그것이 직장이면 순직입니다. 자기 일신의 안일을 생각하지 않고 온 몸을 바쳐 대의를 추구하다 목숨을 잃은 생명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이 자기 한 사람을 위해 살기보다 하느님의 일을 추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역사 안에 남겼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은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교훈을 남긴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최후를 지켜본 백인대장의 입을 빌려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하느님의 생명을 사신 예수님이었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생명이 발생시키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예수님 안에서 읽어내어 그것을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빌고 바쳐서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 소인(小人)의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사랑하십니다. 그 자비와 사랑이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대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