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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평온 속의 갈증
바람이 잔잔히 불던 오후였다.
정연은 거실 창가에 앉아
햇살이 레이스 커튼을 통과해
마룻바닥에 그리는 무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은 고요했다.
남편 종수는 옆방에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있었고,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복도를 타고
희미하게 흘러왔다.
갈등도 없었고, 소란도 없었으며,
마음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정연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것은 배고픔 같기도 했고,
목마름 같기도 했으며,
추위 같기도 했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허기.
"내 마음은 평온한데…
왜 이렇게 따뜻함은 부족할까?"
그녀는 이유를 몰랐다.
40년을 함께 산 남편과
더 가까워지는 것이
점점 어렵다는 사실이
마음 한켠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뭔가가 닿지 않았다.
1장. 병렬의 발견
1-1. 벤치 위의 대화
어느 봄날 오후,
정연은 산책길의 벤치에서
오랜 친구 미향을 만났다.
둘은 나란히 앉아 지는 햇빛을
바라보며 말없이 시간을 보냈다.
침묵이 불편하지 않은 사이였다.
"부부인데…
왜 점점 서로 멀어지는 것 같을까?"
정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목소리엔 비난도, 원망도 없었다.
단지 궁금증이었다.
미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연아, 우리 나이가 되면
부부는 하나가 되려 할수록
더 멀어지는 시기가 온대.
이제는 붙어 걷는 게 아니라,
나란히 걷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병렬로 말이야."
정연은 그 말을 처음 듣는 순간,
마치 오래된 의문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병렬.
평행선처럼 나란히,
하지만 서로 교차하지 않는.
1-2. 성격의 화석화
미향이 덧붙였다.
"네가 잘못된 게 아니라…
나이 들면 누구나 그래.
심리학에선 이걸
**성격의 결정화
(Personality Crystallization)**
라고 부르더라고.
우리 얼굴에 주름이 생기듯이,
성격도 점점 굳어지는 거래.
바꾸려 들수록
더 힘들어지는 거지."
정연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괜히 애썼던 걸까?'
미향이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애쓰지 말라는 게 아니야.
다만 방향을 바꾸라는 거지.
더 가까워지려고 하지 말고,
잘 나란히 걷는 법을 배우는 거야."
2장. 정서적 배고픔의 정체
2-1. 밤의 성찰
밤이 되어 정연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종수는 이미 잠들어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녀는 미향의 말을 떠올리며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평온은 있는데…
따뜻함이 부족한 거구나.'
살면서 처음으로,
이름조차 몰랐던 감정의 정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2-2. 과학이 말하는 허기
며칠 뒤, 정연은 도서관에서
심리학 책을 한 권 빌렸다.
그 책에서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는 용어를 발견했다.
정서적 배고픔(Emotional Hunger).
책은 이렇게 설명했다:
"정서적 배고픔은 갈등이나
고통이 없는 상태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평온하지만 마음이 건조하고,
기쁨이 줄어들며,
조용한 허기가 찾아오는 상태.
이는 우울증의 초기
신호일 수 있으며,
특히 노년기에
흔하게 나타난다."
정연은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계속 읽었다.
"노년기의 정서적 배고픔은
관계의 고착화,
새로운 자극의 감소,
그리고 정서적 표현 욕구의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이는 병리적 상태라기보다,
인생의 자연스러운 전환기에
나타나는 적응의 신호다."
"아…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그녀는 깊은 숨을 쉬었다.
안도감이었다.
2-3. 철학자들의 통찰
정연은 더 깊이 탐구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그녀는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 딜레마'에 대해
읽게 되었다.
"추운 겨울,
고슴도치들은 서로의 체온을
나누기 위해 가까이 다가간다.
하지만 너무 가까우면
서로의 가시에 찔린다.
적절한 거리를 찾기까지 그들은
계속 시행착오를 반복한다."
정연은 미소 지었다.
40년이라는 시간도
결국 그 '적절한 거리'를 찾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3장. 정서영양의 분산 투자
3-1. 다섯 가지 공급원
며칠 후,
정연은 다시 미향을 만났다.
공원 벤치에 앉아 둘은 따뜻한
햇빛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정연아, 따뜻함을 너무
남편 한 사람에게만 기대지 마.
노년에는 말이야…
정서는 분산 투자하는 게
훨씬 안전하대."
"분산… 투자?"
정연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마치 재테크처럼.
한 곳에 모든 걸 넣으면 위험하잖아.
따뜻함도 마찬가지야."
미향은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정서영양 5대 공급원이 있대.
첫째, 사람—
가족만이 아니라 친구, 이웃,
동호회 사람들.
둘째, 자연—
햇빛, 바람, 나무, 물소리.
셋째, 감각—
음악, 향기, 맛, 촉감.
넷째, 창조—
글, 그림, 요리, 취미.
다섯째, 동식물—
화초, 물고기, 반려동물,
길고양이까지."
정연은 그 말을 들으며
마음속 깊이 희미하게
빛이 켜지는 것을 느꼈다.
3-2. 신경과학의 뒷받침
정연은 집에 돌아와
더 찾아보았다.
신경과학 논문들은
미향의 말을 뒷받침했다.
"다양한 긍정적인 자극은
전두엽의 보상회로를 활성화하고,
세로토닌과 도파민의 분비를
촉진한다.
특히 자연에 노출(biophilia),
음악 청취, 창작 활동 등은
노년기 뇌의 신경가소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녀는 메모장을 꺼내 적었다.
"따뜻함은 다양한
여러 곳에서 조금씩."
4장. 하루 15분의 실험
4-1. 작은 루틴의 설계
정연은 작은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과학자처럼 가설을 세우고,
실천하고, 관찰하기로 했다.
아침 5분: 햇빛 아래서
천천히 걷기
점심 5분: 좋아하는
음악 세 곡 듣기
저녁 5분: 따뜻한 차 한 잔과
짧은 글쓰기
단지 15분 남짓 짧은 일상의 루틴.
4-2. 변화의 관찰
며칠 후,
정연은 마음속 허기가
훨씬 줄어든 것을 느꼈다.
평온은 계속 유지되면서,
따뜻함이 잔잔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이것은 마법 같은 변화가 아니었다.
극적인 행복도 아니었다.
단지…
마음이 덜 건조했다.
그녀는 일기장에 적었다.
"오늘로 일주일째.
큰 변화는 없지만,
아침에 눈 뜰 때
마음이 조금 가볍다.
차를 마실 때 향기가
더 깊게 느껴진다.
남편의 목소리도
덜 멀게 들린다."
4-3. 심리학의 확인
정연은 이 변화가 우연이
아님을 확인했다.
심리학에선 이를 *미세조정이론
(Fine-tuning Theory)* 이라
불렀다.
"인간의 정서는 큰 사건이 아니라
작은 일상의 누적으로 형성된다.
하루 15분의 의도적인 긍정 경험은
전반적인 노년기의 웰빙 점수를
유의미하게 상승시킨다."
5장. 병렬로 걷는 법
5-1. 새로운 관계의 형태
정연과 종수는 여전히 나란히
다른 일을 하며 지냈다.
그는 라디오를 듣고,
그녀는 책을 읽었다.
그는 정원을 가꾸고,
그녀는 차를 마셨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관계는 더 평온해지고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이제 안다.
함께 있어도 서로에게 과하게
기대지 않아도 된다는 걸.
사랑은 꼭 함께 같이 하는
융합이 아니어도 된다는 걸.
때로는 각자 독립적으로 나란히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5-2. 철학적 성찰
정연은
칼릴 지브란의 시를 떠올렸다.
"함께 서되 너무 가까이 서지 말라.
신전의 기둥들도 떨어져 서 있고,
참나무와 사이프러스는
서로의 그늘에서 자라지
못하느니라."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두 그루의 나무구나.
나란히 서 있지만,
각자의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5-3. 저녁의 초대
"저녁 산책 갈래?"
종수의 목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다.
정연은 놀라며 미소 지었다.
그는 평소엔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둘은 말없이 나란히 걸었다.
손을 잡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유난히 따뜻한
기운이 있었다.
정연은 생각했다.
'이게 병렬의 따뜻함이구나.'
에필로그 – 나란히 걷는 사람들
계절이 바뀌고,
정연의 루틴은 계속되었다.
때로는 빠뜨리기도 했지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미향과 주 2회
산책을 했고,
동네 도서관 모임에도
나가기 시작했다.
종수는 여전히 라디오를
들었지만,
가끔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들어주곤 했다.
어느 날 저녁,
정연은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
적었다.
노년의 사랑은 젊은 시절의
열정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병렬의 온기다.
나란히 걸으며 느끼는
고요한 동행이다.
우리는 서로를 바꾸려 하지 않고,
각자의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같은 길 위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서로의 그늘이 되지 않으면서,
같은 햇살 아래 함께 나란히 걷는
사람들이다.
창밖에선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정연은 창문을 열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따뜻했다.
*참고*
1. 정서적 배고픔(Emotional Hunger)
갈등 없는 평온 속에서 느끼는 정서적 공허감. 우울증의 초기 신호일 수 있음.
2. 성격의 결정화(Personality Crystallization)
나이가 들수록 성격이 고착화되는 현상. Costa & McCrae의 5요인 성격이론 참고.
3.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s Dilemma)
쇼펜하우어의 비유. 친밀함과 독립성 사이의 적절한 거리 찾기.
4. 정서영양 5대 공급원
사람, 자연, 감각, 창조, 동식물을 통한 정서적 자원 확보.
5. 미세조정이론(Fine-tuning Theory)
작은 일상적 긍정 경험의 누적이 전반적 웰빙에 미치는 영향.
6. 병렬적 친밀감(Parallel Intimacy)
노년기 부부관계의 새로운 형태. 융합보다 동행을 강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