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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대한민국 탄생에 관한 실화
《하나님의 역사 섭리: ‘기독교입국론’ .. 》
우리암(禹利岩, Franklin Earl Cranston Williams, 1883~1962) 선교사
1883년 미국 콜로라도주 태생으로 1906년 덴버대학을 졸업한 후
그해 여름 갓 결혼한 부인(우애리시, 禹愛理施, Alice Barton Williams)과
함께 1907년 공주제일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 교인들에게 기독교 믿음과
함께 민족 자긍심을 심어 주었으며, 선임자 샤프 선교사의 순직으로 인해
문을 닫았던, ‘명선학당’을 ‘영명학교’(현, 영명고등학교)로 개명해 정식으로
개교시켰다.
우리암 선교사는 34년간 교장으로 재직하며 학교를 운영하면서, 민족교육
말살 정책을 펴는 일제 치하에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몸 바치는 애국자를
기른다’는 교훈 아래 민족교육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40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일제에 의해 본국으로 추방될 때까지 수많은
인재들을 키워냈다.
(* ‘영원한 광명’: Eternal brightness 이라는 뜻을 가진 영명(永明)은
영생’의 가치와 세상의 빛이 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데,
그 이름처럼 ‘기독교 민족학교’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영명학교는 남학교로서, 1908년 사애리시 선교사가 내한해 다시 문을 연
영명 여학교와 마치 남매처럼 공존하며 공주 지방의 아이들에게 복음을
심겨주면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1932년에는 두 학교를 통합해 실업학교로 개편하였는데, 이는 농촌 실정에
적합한 실업교육의 필요성 뿐만 아니라, 선교부 지원이 점차 줄어들 것을
대비하여 자립의 기반을 다지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영명학교는 우리암 선교사가 추방된 이후, 1942년 제33회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일제의 강제 폐교로 문을 닫게 되었고 1949년 다시 문을 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명학교 출신자 중에는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조병옥 박사를 필두로 동경 2.8 독립선언 사건의 주역인 윤창석,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오익표, 정환범 그리고 충남도지사와 문교부 차관을
지내며 조국 재건에 앞장섰던 박종만 등이 있다.
우리암은 1940년 11월 한국에서 추방된 후에는, 인도로 가 선교사역을 하면서
1943년에는 버마 전선의 영국군에 배속된 광복군 대원 9명에게 영어를 가르쳐
이들이 ‘일본군 포로 심문, 심리전, 암호 해독, 통신감청 업무에 종사하는 것을
도왔으며 1945년 한국이 해방되자 다시 한국에 들어와 미군정청장 하지 중장의
농업정책 고문으로 활약했다.
이후 우리암 선교사는 미국으로 되돌아가 지내다, 1962년 샌디아고에서 79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 후일 우리암의 막내아들인 로버트 윌리엄스(한국 이름, 우귀복)가 미국에 보낸
서신에 의하면, “1937년 공주영명학교 출신들이 우리암 선교사를 기리기 위해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을 상징하는 33개 돌을 깎아 받침대를 만들고, 그 위에
우리암 선생님의 흉상을 세웠는데, 태평양전쟁 때 일제가 포탄을 만들기 위해
이 흉상까지 공출해갔다”고 증언했다.
우리암 선교사의 장남인 우광복(禹光福, George Zur Williams, 1907~1994)
우리암(Williams) 선교사 부부의 한국 복음전파에 대한 소명감은 깊었다.
부부의 딸인 올리브(1908~1919)가 공주에서 풍토병으로 11세에 숨졌지만
조금도 흔들림 없이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였으며, 아들들의 이름도 ‘광복’,
‘흥복’, ‘귀복’ 이란 한국 이름을 지어 주었다.
* 지금도 공주 영명고등학교 뒤편 선교사 묘원 영명동산에는 5기의 묘가 있다.
그중 하나가 샤프 선교사의 무덤이고, 다른 두개 묘는 샤프 선교사의 후임으로
공주에 부임하여 영명학교를 설립한, 우리암 선교사의 두 자녀로 11세 때 숨진
여동생 올리브 곁에 묻히기를 원한 우광복의 묘이다.
우광복은 1994년 87세 일기로 소천했는데, “11살에 죽은 내 동생 올리브가 묻혀
있는 공주 영면동산에 나를 묻어 달라"고 유언해, 그는 동생 옆에 나란히 있다.
그리고 나머지 두개는 선교사들의 어린 자녀인 1세의 로저 아멘드
(Roser Amend)와 5세의 에스터 마리안(Ester Marian)의 묘이다.
이렇게 아이들이 무덤이 많은 이유는 선교 초기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면역력이 낮은 아이들의 희생이 컸기 때문이었다.
우광복은 공주 영명학교에 다니다 14살 때 미국 콜로라도로 돌아가 의사가 되었고,
1945년 광복이 되자 미 해군 군의관에 자원해 다시 한국에 왔다.
우광복은 하지 사령관의 통역 등 사실상 비서실장 역할을 하며, 한국을 잘 모르는
하지 사령관의 요청으로 미군정과 함께 일할 한국인 50명을 추천했는데, 이 가운데
기독교인 많았고, 특별히 중요 직책인 행정관 11명 중 6명이 기독교인이 발탁되어
정일형 목사는 인사행정처장에, 영명학교 출신인 조병옥은 경무부장에 임명되었고,
류형기 목사는 조선인쇄주식회사 관리인이 되었다.
그리고 미군정청의 자문기관으로서 1946년 2월 14일에 발족한 민주의원 의장에는
이승만 박사가 선정되었다.
그렇게 준비된 기독인들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우광복은 미군정 시절 소수파였던 기독교가 남한에서 실권을 얻는 데 지대한
기여를 한 인물로 손꼽힌다.
기독교인 문교부 장관은 미신 타파를 시작했으며, 국방부 장관은 이승만 의장의
지시로 군대 안에 군목제도를 마련해 한국군의 하나님의 군대化에 기여했다.
* 1919년 3.1운동 당시 기독교인구는 전인구의 1%도 채 안되었지만,
민족대표 33인중 16명이 기독교 대표였고 1945년 해방당시 남한
2천만명 인구 중 기독교인은 35만명 정도로 2%도 채 되지 못했지만
준비된 많은 지식 기독인들이 미군정과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했고
대한민국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런연고로 제헌국회의 국회의원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기에 제헌국회는
기도로 국정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1948년 5월 30일, 이승만 의장은 제헌국회의 개회시 종로구 의원으로 당선된
이윤영 목사에게 기도로 국회를 열 것을 주문한다.
"대한민국 국회 제1차 회의를 이렇게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문 전문 〉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셔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성시
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伸寃)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우광복은 비록 정식 선교사로 파송 받지는 않았지만, 선교사의 자녀로서,
또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평신도 선교사로서 특히 해방 후 한국 건국기에,
기둥과 같은 역할을 했던 한국 정부와 한국 교회의 산 증인인 것이다.
* 6.25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 당시 정치 사회의 불안정에 대해...
50년 5월 30일에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선거는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선거였다.
국회의원 210명중 무소속이 126명이고, 이승만 지지세력은 30여명에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 개원 1주일 만에 6.25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승만정권은 이런 취약한 지지기반과 심각한 경제위기를 만나면서 실제로
전쟁발발 1년 전부터 38선에서는 남북간의 소규모 무력충돌이 계속 발생하였고
미국은 한반도를 태평양 지역의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이른바 <에치슨 라인(Acheson Line)>을 발표하는가 하는 등
한반도 정책의 불확실성을 드러냈다.
어느모로 보나, 대한민국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같은 신세였다.
실로 대한민국은 하나님께서 이 나라의 역사를 시작하신 ‘기독교 立國’인 것이다.
《공주지방 초기 선교사들과 지금의 대한민국》
https://blog.naver.com/pm10956/221005662447
19세기 말, 이 땅 조선은 신문명의 개화와 함께 급속히
변화하는 세계 각국의 흐름에 동참하지 못한 채 낙오되다
결국 주변 강대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거의 40년간 이 땅은 지배국
일본의 수탈의 대상이 되고, 1931년 만주사변에서부터
1932년 상해사변, 1938년 중일전쟁 그리고 1941~1945년
태평양전쟁까지의 15년 전쟁의 병참기지로 사용되다가
일본의 패망으로 기적같이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우리의 자력으로 이루지 못한 해방이라서, 남북이
나누어지고 연이어 6.25 전쟁이 일어나 이 땅은 남북한
400만 가까운 인구가 사망하고 1000만 이산가족이 생기며
그나마 있던 적은 산업마저 초토화되어, 외국 원조가 아니면
도저히 자력 생존이 어려운 지구촌의 최빈국이 되었다.
그랬던 이 나라는 이후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기 드문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되고
경제적으로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다.
이런 저변에는 이를 가능케 한 앞장선 사람들이 있었고 또한
그 사람들을 길러낸 기독교가 있었다.
특히 이 땅이 외국들에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서구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이 땅을 찾아와 복음을 전하면서
병원과 학교를 세워 병든 자를 치료하고,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여기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지식인들로 성장하여 작게는
주변을 계몽시키는 지도자가 되고 크게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선각자요, 든든한 기둥들이 되었다.
이렇게 축적된 인적 자산은 후에 이 땅을 괄목할 만하게
성장하게 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1884년 북감리교 선교사인 알렌이 처음으로 내한한 이래 해방
이전까지 이 땅을 방문한 기독교 선교사는 1500여명에 이른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열악한 환경과 풍토병으로 인해 가족들이
질병으로 고생하거나 목숨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이런 슬픔에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놓지
않고 죽기까지 이 땅에 헌신하였다. 그러한 선교사들의 헌신이
밀알이 되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하였다.
이들 중 공주지방에서 학교를 세워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으며
대한민국의 ‘기독교 입국’ 기초를 세워, 많은 지도자들을 키워낸
한국 선교 초기, ‘공주지방 선교사’들이 있었다.
샤프 (Robert Arthur Sharp, 1872~1906) 선교사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교역자로 일하다가 1903년 3월 미국 감리교선교사로 내한,
서울에서 황성기독쳥년회(YMCA) 초대이사로 기독교 청년운동을 펼치면서
‘정동제일교회’와 ‘배제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다, 1900년에 한국에 먼저와 사역
하고 있던 (Alice Hammond, 1871~1972) 사애리시(한국명) 선교사와 1903년
결혼하였다. 그리고 1904년 감리교 공주 선교부 책임자로 임명되어 공주로 왔다.
당시 공주지역은 맥길 선교사가 공주 제일감리교회 및 자혜병원을 설립해
샤프와 함께 사역하다가 1905년 귀국하였고, 샤프 선교사가 이어 받았다.
샤프 선교사는 남학생을 위한 명설학당을 개설하고 부인인 사애리시는
여학생을 위한 명선학당을 개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이들 선교사 부부가 공주 땅에 신교육의 첫 횃불을 높이 들게 되었다.
공주 선교부로 온 이듬해인 1905년 11월엔 그곳 언덕에 2층짜리 붉은
벽돌집을 지어 이주하였다. 이 건물은 공주 최초의 서양식 벽돌 양옥집이어서
많은 구경꾼들이 방문하는 명물이 되었고, 선교사 부부도 흔쾌히 그들을
받아들여 집을 구경시키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방편으로 삼았다.
샤프 선교사는 순회전도도 자주 하였는데, 공주를 거점으로 천안과 조치원뿐 아니라
멀리 청주까지 나가 전도를 하며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쉬지 않고 헌신하였습니다.
그러다 1906년 2월 말경 논산 지방 순회전도 활동 중에 앓게 된 장티프스로 인해
갑작스럽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순회전도 도중 진눈깨비를 피해 들어간 집이 하필이면 상여가 보관된 곳이었는데
전날 장티프스로 죽은 시체를 운구했던 상여를 만진 것이 화근이 되어
1906년 3월 5일 34세의 젊은 나이로 소천하였는데..
한국에 온 지 3년, 공주에 정착한지 1년 남짓 밖에 안된 안타까운 순직이었다.
그의 무덤은 그의 양옥집 뒤편 언덕에 마련되었는데, 지금도 영명동산으로 불리며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충청지역 근대 여성교육의 어머니
사애리시(史愛理施: Alice Hammond Sharp, 1871~1972) 선교사
1871년 캐나다에서 출생해, 1900년에 내한하여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1903년 10월, 미국 감리교 소속 샤프 선교사를 만나 결혼하였다.
1904년, 남편이 공주 선교부 책임자로 임명되자 함께 공주에 내려와 정착하였다.
1905년 가을, 초등교육을 받지 못했던 부녀자들과 소녀들을 위한 야학을 열었고,
(* 충청지방의 첫 여성 교육기관인 명선 여학당 - 현재의 ‘永明 학교’)
여러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등 충청지역 근대 여성교육의 어머니로 불리며
많은 여성 지도자들을 길러냈으며, 특히 유관순을 교육하여 민족의식을
심어준 스승으로도 알려진 분이다.
1906년 3월, 자녀도 없던 신혼의 사애리시에게는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이
큰 충격이었고, 모든 소망이 멀어져가는 느낌이었다.
이에 사애리시는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는, 운영하던 명선학당을 스웨어러
(Swearer) 부인에게 맡기고는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사애리시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땅인 조선을 잊을 수 없었고,
더구나 순직한 남편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수 없다는 소명감을 깨닫고는
오랜 기도 끝에 1908년 8월 다시 공주로 돌아왔다.
그후 그녀는 더욱더 헌신적으로 사역을 감당하였다. 먼저, 명선(明善)학당을
영명(永明: Eternal brightness) 여학교로 새롭게 이름을 바꾸어 운영을 계속
하였으며, 1909년엔 강경 만동(萬東) 여학교와 논산에 영화(永化) 여학교도 세웠다.
그 외 충청도 여러 교회에 유치원도 설립, 아동교육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1940년 일제에 의해 선교사 강제추방 때까지 이땅의 복음화 뿐 아니라
특히 여성들을 개화시키기 위한 여성 교육에 헌신하여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그녀는 남편인 샤프 선교사의 무덤이 있는 곳을 향해
“오늘은 부여 갑니다.”, “오늘은 논산과 강경 갔다 옵니다.”하며
매일 얘기 하듯 보고하면서 일생을 홀로 보냈으며,
수시로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연주해 주던 오르간 위에는
항상 아들같이 젊은 남편의 사진을 놓여있었다고 한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행방불명된 독립군 아버지를 둔 오애리시를 입양하여 키워
세브란스 간호학교에 수학토록 하는 등 가난한 집 아이들을 입양하거나
후원자가 되어 소외된 여성들에게 특히 많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녀가 길러낸 인재들을 살펴보면..
그녀가 길러낸 인재들을 살펴보면..
3.1 운동의 상징인 유관순을 비롯하여 중앙대학 설립자 임영신,
한국인 최초의 여자 목사 전밀라, 여성 교육자 박화숙 그리고
한국인 최초 여성 경찰서장인 노마리아 등이 있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1940년 태평양 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후, 미국 캘리포니아 파세데나의 은퇴선교사 요양원에서 지내다가
1972년 9월 8일 101세의 나이로 소천하여 파세데나 납골묘원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