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창 14장 12-20절
설교제목 : 뜻밖의 축복
고마움을 아는 자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제가 이 질문을 2주간 못했습디다. 30년 가까이 이렇게 몸 때문에 예배를 직접 드리지 못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몸을 더 소중하게 다루며, 내 자신에게 집중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가지의 생각은 긴 시간을 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약한 몸임에도 충실하게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셨음에 감사했습니다. 인생이 내가 잘 관리하고 잘 나서 된 것이 아님을 새삼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100년 만에 열린 파리 올림픽에 여러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그 중 제 가슴을 두드린 사진 한 장이 있었습니다. 태국 역사상 첫 올림픽 2연패를 한, 파니팍 웅파타나키트가 여자 49kg급 결승전에서 승리한 뒤, 자신을 오랜 시간 지도해준 최영석 감독을 향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큰 절을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자신을 어린시절부터 지도해준 한국인 감독을 위해 진심어린 감사를 표한 것입니다. 감독 또한 그를 향하여 엎드려 같이 절하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하기까지 했습니다. 파니팍이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지를 잘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아는 자인 듯 합니다. 그 몸짓과 표정에서 자신의 성취를 자신의 것으로 돌리지 않고 감독과 나눈 것입니다. 또한 감독 또한 그녀가 절을 하자 본인도 같이 무릎을 꿇고 맞절을 하면서, 겸손함으로 응대하였습니다. 참 훈훈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오늘은 광복절 기념주일입니다.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기리며 예배하는 주일입니다. 선조들의 피흘린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의 삶이 가능함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고마움을 아는 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투쟁하기 – 대비책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그들의 목자들이 가축을 키우는 일도 다툼이 벌어지자 갈라서기로 결정합니다. 아브람이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롯에 우선권을 줍니다. 롯은 물과 목초지가 풍부하고, 인프라가 잘 구성된 도시 쪽을 선택하여 소돔에 체류합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부족의 체제에서 서로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세력다툼이 많았습니다. 시날왕과 엘람왕, 엘라살왕, 고임왕의 동맹군이 소돔왕, 고모라왕, 아드마왕, 그보임왕, 소알왕의 다섯왕의 연합군과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에람왕 그돌라오멜을 13년을 섬기다가 이 다섯 왕들이 반란을 일으키어 독립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싯딤 벌판에서 반란을 일으킨 다섯 왕들은 처참히 패배합니다. 특히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은 온통 역청 수렁인 싯딤 벌판으로 도망가다 수렁에 빠지고, 산간지방을 달아났습니다. 그 결과 소돔과 고모라는 모든 재물과 먹거리를 약탈당했고, 거주민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포로들은 대부분 노예로 전락해버립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전쟁 속에 있는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틴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최소한의 생존을 버티며 살아갑니다. 전쟁은 어느 누구도 예외를 두지 않고, 어떤 정도 결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파괴합니다. 고대의 전쟁도 아이밴 여자들까지도 모두 학살하며 훗날 불씨가 될 모든 생명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여전히 전쟁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이 전쟁이 종식되어 아주 작은 일상이라도 회복하길 빕니다.
그런데 소돔이 약탈당할 때 롯의 일가도 사로잡혀 가고 재산까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전쟁에서 도망쳐나 온 한 사람이 그 소식을 아브람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아브람은 집에서 낳아 훈련시킨 318명의 군사를 이끌고, 롯을 구하기 위해 단까지 쫓아갑니다. 밤에 사병들을 패로 나누어 공격하여 적들을 쳐부었습니다. 아브람은 비록 적들의 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318명의 군사들이었지만, 아브람은 주저하지 않고 롯을 구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여러분, 전쟁은 숫자의 싸움이 아닙니다. 인생도 숫자의 싸움이 결코 아닙니다. 전쟁과 인생의 싸움은 신뢰와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연결 속에서 생성되는 에너지가 있는 사람은 믿음과 신뢰로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당당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인생은 투쟁의 연속입니다. 싸우지 않고서는 결코 쟁취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그때 믿음과 신뢰가 있는 사람은 당당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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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하나님과 연결되는 믿음과 신뢰가 없다면,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시간 앞에서 주저하고 뒷걸음치며 결코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바로 숫자의 싸움을 하지 않고 믿음의 싸움으로 앞으로 나아갔음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롯을 구하러 무턱대고 간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이집트의 부끄러운 교훈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집에서 훈련시킨 군사들, 318명이 있었습니다. 유목민으로서 자신을 최소한 지키기 위한 방책을 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순진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하실거라는 것은 어쩌면 순진하고 왜곡된 믿음입니다. 자신을 최소한 보호할 수 있고 유사시 공격할 수 있는 사병들을 양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신을 보호하고 싸울 수 있는 실력과 자아의 힘을 나름대로 비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목동이나 여자들과 아이들만 가지고 어떻게 적들과 싸울 수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결코 싸울 수 없습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 속에서 일어나지만, 하나님의 행하심의 촉발은 인간의 행위에서 시작됨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정신의 법칙에도 동일합니다. 무의식과 의식은 서로가 핑퐁게임을 하듯, 어떤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 기적적인 돌파구가 일어납니다. 우리에는 318명의 군인들은 아니지만, 유사시 어떤 대비책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인생의 전투에서 맞설 실력과 대비책들이 쌓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뜻밖의 축복
야간 기습을 통해 적들을 쳐부수고, 적들을 뒤쫓아서 모든 재물을 되찾고, 롯과 롯의 재산, 잡혀간 자들까지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소돔왕이 아브람을 맞이했습니다. 그 때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람에게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천지의 주재, 가장 높으신 하나님,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주십시오. 아브람은 들으시오, 그대는 원수들을 그대의 손에 넘겨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오(19-20).”
우리는 여기에서 이방의 제사장이자 왕인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주로 아브람에게 나와서 복을 빌어주는 장면을 인상깊게 보아야 합니다. 아브람이 여기에서 뜻밖의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대변되는 영원한 생명력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으로부터 영원한 생명력을 제공받고, 영적인 축복까지 받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룬 어떤 일들은 주변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벌어지게 합니다. 나의 삶이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일종의 하나님의 거울입니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의식이 일종의 무의식의 반영이며, 무의식은 의식의 반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하는 말은 “천지의 주재”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관자라는 선언입니다. 천지의 주재라는 호명 속에는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고, 인간과 우주의 역사를 조정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인생이 내가 잘나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으로, 역사하심으로 움직여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힘이며, 희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늘과 땅의 주관자라고 고백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그분이 움직여가실 것입니다.
바른 반응
그런데 아브람은 멜기세덱의 축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멜기세덱은 축복만 한 것이 아니라, 아브람이 전쟁에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선포합니다. 너의 승리가 너가 똑똑하고 잘나고 유능하고 지략을 잘 써서 된 것이 아님을 똑똑히 일러주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그런 멜기세덱의 선포 앞에 자신의 전리품 중에 열의 하나를 떼어서, 멜기세덱에게 바칩니다. 여기에서 십일조는 내가 얻은 성공과 성취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아브람은 놀랍게 바르게 반응합니다. 그리고 소돔왕을 만납니다. 소돔왕은 아브람을 승리한 자로서 대우합니다. 되찾은 소돔 백성들은 자신에게 돌려주고 전리품은 아브람이 차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단호하게 맹세합니다.
“그대의 것은 실오라기 하나나, 신발 끈 하나라도 가지지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 덕분에 아브람이 부자가 되었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23).”
아브람에게 욕심이 없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도 전쟁에서 얻은 재화를 통하여 더 큰 부를 갖고 싶은 욕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것을 포기한 이유를 두 가지로 숙고하게 됩니다. 첫째는 그 전리품이 누구의 몫이냐는 것입니다. 적들이 빼앗은 전리품은 모두 백성의 것이기에 아브람은 필요한 경비를 빼고 모두 돌려주었을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누군가를 배려하면 내가 챙길 수 있음에도 너와 나의 여백 속에서 이웃에게 돌아갈 몫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아브람에게는 전리품이나 돈보다도 더 큰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값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밭을 삽니다. 이미 아브람에게는 그 값진 보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전리품에 쓸데없이 욕심을 투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부모의 재산 문제로 법정 싸움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렇게 싸워서 얻는 재산으로 부자가 되어 살아간다면, 그 재산이 그의 올무가 되어 그를 사로잡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그런 부자를 거절한 것입니다.
인생의 값진 성취 뒤에 뜻밖의 선물이 주어질 때 잘 응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를 배려하는 마음 속에서 탐욕적인 투사가 거두어짐을 알아차렸으면 합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값진 보물, 하나님의 약속을 진정으로 붙들었기에,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자의 타이틀을 거절할 수 있었음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아브람의 이런 삶이 본보기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