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충렬사는 전북 정읍시 수성동 615-1 정읍시청 옆에 자리하고 있다. 충렬사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령을 봉안하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이 있다. 이곳은 정읍시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구미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을 제대로 알려주기에는 자료가 너무 빈약하다는 지적이다.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오히려 크다.
현재 이곳 충렬사에는 사당, 광의당, 선양루, 효충문 그리고 관리사가 있다. 충무공 일대기를 비롯 관련 자료는 전무한 상태다. 충무공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공원 산책코스로는 조금 가치가 있다. 실제로 충렬사는 산 중턱에 있는 오륜정에서 앞을 바라보면 가슴이 시원할 정도로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문제는 충무공에 대한 산 교육장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점이다.
이곳에 이순신의 사당을 세운 이유는 그가 선조 22년(1589) 12월부터 24년(1591)까지 1년4개월 동안 정읍현감을 지냈기 때문이다. 충무공은 그 뒤 곧바로 전라좌수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가 이곳 현감으로 있을 때의 덕을 추모하고 그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정읍 충렬사를 세운 것이다.
충렬사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광복 후에 창건기성회를 만든 것이 시작이다. 이어 전라북도 도내 초, 중, 고 및 각계의 성금을 모아 1949년 8월에 공사를 벌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공사를 재개하여 1963년 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에 영정을 봉안하여 충렬사라 이름 짓고 공원을 조성했다. 그 뒤 지금까지 주민들의 충효정신을 새기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1985년 요천(樂泉) 장연풍(張然豊) 선생이 효충문과 선양루를 세워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충렬사에서는 매년 충무공의 탄신일인 양력 4월 28일에 충렬사보존회 주관으로 탄신제를 지내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국가와 민족이 위태로울 때, 거북선을 만들어 수많은 해전에서 왜군을 무찔러 나라를 구했다. 한국의 가장 위대한 해군 영웅이다.
충무공은 무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시문에도 능하여‘난중일기’와 시조 그리고 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장군과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정읍 충렬사에도 충무공 관련 자료를 얼마든지 다양하게 구비할 수 있다. 사당건물 정도나 지나쳐 보고 가는 산책코스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보여줄 곳이 전혀 없다는 점은 문제가 크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조선조 인종 원년 1545년 4월 28일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아버지 이정(李貞)과 어머니 초계 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장군의 집안은 대대로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인물이 많은 덕수이씨(德水李氏) 가문이다. 장군은 문인 가문 출신이었음에도 어려서부터 무예를 즐겼으며 시재에도 밝았다.
한편 충무공 이순신과 율곡 이이 는 남이 아니다. 이들은 덕수이씨 집안의 아저씨와 조카 사이다. 항렬은 이순신이 아저씨뻘로 높지만 나이는 율곡이 아홉 살이 많다.
이순신은 31살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40이 넘도록 요즘으로 치면 위관급 말직으로만 돌았다. 공의 인품을 전해들은 율곡이 한번 찾아오라는 연락을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일가인데 찾아다니면 공연히 말만 듣는다’고 거절한다.
그만큼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처신 때문에 변방으로만 돌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율곡은 정계의 중진으로 활약하던 때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이순신은 벼슬에 나선지 25년만이자 임진왜란 한 해 전인 1591년에 친구인 유성룡의 추천으로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임명된다. 처음으로 벼슬다운 벼슬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전열을 정비한 이순신은 옥포 전투를 시작으로 연전연승하며 가는 곳마다 왜적을 무찌른다. 그러나 영웅의 길은 고난과 형극의 길이기도 했다. 1597년 이순신은 모함을 당해 서울로 압송된다. 그러나 전공이 참작돼 형을 면하고 백의종군토록 명령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