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이중성과 성령의 법(롬8:1-2)
2021.1.10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지난 주중에 우리 사회에 메가톤급 충격을 준 아동학대 사건이 있었다. 바로 정인이 사건이다. 정인이 사건은 지난 1월 2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방송됨으로서 세상에 알려졌다. 정인이는 생후 16개월 된 아기였다. 이 아기가 생후 7개월이 되었을 때, 어느 가정에 입양이 되었는데, 입양된 지 271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부검 결과 정인이 몸의 여러 곳의 뼈들과 장기들이 파열 또는 절단되어 있었고, 복부에는 피가 많이 고여 있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상태가 장기간에 걸쳐 구타를 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분석한다. 특히 장기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췌장까지 절단된 것은 복부에 엄청난 힘을 가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한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이렇게 할 거면 뭐 하러 입양했을까? 물론 경찰조사에서 본인들은 억울하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고, 세간에서는 부동산 청약점수를 높이기 위해서 입양한 것이 아닌가라는 등의 온갖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이번 일로 인해서 서울양천경찰서 경찰관 여러 명이 징계를 받았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입양아 관리에 대한 보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법이 보완된다고 해서 이와 유사한 일들이 없어질까? 아마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사건 이전에도 그래왔듯이 어떤 완벽해 보이는 법을 만든다 해도 결국 사람의 근본이 변하지 않는 이상은 더 흉악한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예전에 어떤 여자가 뒤에 무섭게 생긴 가면을 숨기고 있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이 사진 한 장이 사람의 이중적인 본성을 단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항상 끝은 시작과 늘 붙어 있듯이 사람의 마음에는 누구나 극단적인 두 마음이 서로 접하고 있다(선과 악, 빛과 어둠, 사랑과 증오 등). 사람들은 이 둘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마치 외줄을 타는 광대처럼 불안한 균형을 이루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그 균형이 깨지면 정반대의 모습으로 돌변한다(천사가 악마로, 살인마가 봉사자로, 앞에선 칭찬 뒤에서는 배신). 이런 개연성은 누구나 간직하고 있다.
지난 해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던 N번방 사건의 주범인 조주빈도 겉으로는 이웃을 위해서 봉사활동도 하던 사람이었는데, 알고 보니까 뒤로는 N번방과 같은 흉악한 짓을 했다. 고위 공직자 인사청문회 때 다른 사람을 향해서 목소리 높이며 비리를 까발리던 사람들도 정작 그 사람이 청문회의 대상이 되었을 때 보면, 숨겨 놓은 비리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드러난다. 이것이 사람의 이중적인 본성이다.
가끔 “양심껏 살라!”라고 목소리 높이면서 자신은 꾀나 의로운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상대적으로 좀 더 괜찮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양심이라는 것도 백퍼센트 온전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깊은 밀림 속에 사는 식인종들은 사람을 잡아먹으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조선시대 양반들 중에는 겉으로 예의바른 척하지만 한편으로는 종들을 학대하면서도 법적으로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이방종교에 심취한 사람들 중에는 심지어 우상에게 자식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양심에 가책은커녕 오히려 자신이 잘했다고 생각한다. 회교도들 중에는 배교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자식도 죽이고, 자살 폭탄 테러를 저지르면서도 조금도 죄의식이 없다.
그렇기에 사람이 스스로의 힘이나 노력이나 어떤 공덕을 쌓음으로 범죄가 없는 사회가 된다거나 어떤 신적인 경지에 이르거나 깨달은 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언뜻 보면 굉장히 고상해 보이고 뭐 좀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착각일 뿐이다. 불완전한 것에서는 절대 완전한 것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롬3:23), 이 세상에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한다(롬3:10-12).
이것은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이전에 있던 이중적인 두 마음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하루아침에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있어서 영적싸움의 최전선은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라는 영역이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 바울도 두 마음의 문제로 인해서 고민했던 흔적이 있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15-23)
어떤 사람은 자신 앞에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최소한의 양심의 소리도 거부하고, 심지어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주시는 마음도 무시하고, 죄의 본성을 따라서 함부로 폭언하고 못된 행동을 한다. 이처럼 최소한의 양심과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충격적인 범죄의 행동들이 나오는 것이다. 충격적인 것은 이번에 발생한 정인이의 양부모들이 명문대학을 나온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모습들 때문에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탄식하신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신앙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깊이 생각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신앙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을 선택해 가는 여정이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죄를 못 짓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평생 동안 계속해서 죄를 선택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이렇게 살아가고 싶은 바람은 있지만 이렇게 살 수 있는 온전한 능력이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나 자신이 아닌, 위로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강력하고 온전한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처럼 성령께서 나를 온전 다스리시는 것을 성령충만이라고 한다. 이러한 성령충만은 세상의 학문이나 고행을 통해서 스스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나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지속적으로 묵상하고, 그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받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로마서 7장에서 두 마음으로 인해서 괴로워했지만, 결국 그는 오늘 본문인 로마서 8장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자신을 해방했다고 고백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또한 그는 이런 영적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죽는다고 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이 말씀들은 역으로 말하면, 우리 안에 말씀묵상과 기도의 불이 약해지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성령의 불이 약해지는 것으로 귀결되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내면에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숨어있는 죄악의 본성과 못된 옛사람의 성품들이 다시 고개를 쳐든다. 이 틈을 마귀 사단이 놓치지 않고 파고든다. 이러한 전형적인 실례가 다윗왕이 밧세바라는 여인을 범했던 사건이다(삼하11장). 지금도 여전히 신실해 보이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 믿는 악질로 돌변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전에 충서지방회 평신도 교육 수료식을 할 때, 대천교회 송천웅목사님께서 “일꾼이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고 강조하셨던 적이 있다. 그렇다! 우리들은 최소한의 도덕적인 양심의 소리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말씀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결(聖潔)이다. 성결은 단순히 깨끗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한 상태를 의미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그러므로 우리들이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 나의 구주와 왕으로 영접하고, 영접한 이후에는 천국에 가는 그 날까지 날마다 계속해서 말씀과 기도의 불을 끄지 말자. 생명의 성령의 법에 나를 복종시키자. 주님이 함께 하신다.